[佛敎]/唯識講義

『唯識』- 허망한 분별의 근본 (강의)

경호... 2012. 1. 6. 05:25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허망한 분별의 근본 (강의)

    : 허망한 분별은 무엇으로서 근본을 삼는 것입니까?
    : 반연을 근본으로 삼는다.

    : 어떤 곳을 반연하는 것입니까?
    : 색성향미촉법을 반연한다.


    분별하는 것은 대상을 인식해야 되고,
    반연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한다는 얘깁니다.
    인식하는 대상은 색[모양과 색깔], 성[소리], 향[냄새],
    미[맛], 촉[촉감], 법[개념]이죠.

    어떠한 분별이든 그 근본은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과 대상인 객관이
    딱 접촉이 되어야 분별이 일어나는데,
    분별을 하면서 분별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고,
    분별을 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분별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별은 다 나쁜 것은 아니에요.
    선가에서는 분별망상 하지마라고 세뇌를 시키는 경우가 있죠.
    수행자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게 무념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 곤란해요.
    그런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돌덩어리입니다.
    『육조단경』에 보면,
    대상을 분별하는 것은 염(念)인데,
    분별의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두 가지 모습이 없다 이거죠.
    겉으로는 분별하지만
    속 내용은 텅 비어있는 상태가 유지가 된다는 거죠.

    그런데 분별은 두 종류라고 했는데,
    하나는 망상이고, 하나는 지혜입니다.
    망상은, 대상을 반연해서 일어나는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 등등
    이런 게 분별망상입니다.

    반면에, 찻잔은 4대 원소로 만들어 졌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실제로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을 해보는 겁니다.
    이런 분별은 망상이 아니에요.
    시간적으로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분석하고,
    공간적으로는 상호 관계성을 분석해서 진실을 아는 거죠.
    상호관계가 시간을 통해서
    그것은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다고 분석하는 겁니다.
    이런 분석은 분석하는 매 순간마다 번뇌가 없어지기 때문에
    지혜라 그럽니다.

    그런데 그런 분석 없이,
    이것은 찻잔이고, 이것은 책상이라고 분석하고,
    이 자체가 변하지 않는 무엇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 어떤 것이 반연하지 않는 것입니까?
    : 애욕으로 취하는 것을 벗어난다면 반연하는 것이 없다.
    이런 뜻으로서 여래는 항상 모든 법이 평등하다고 설한다.
    이런 이유로 법이 평등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설법하면 시방의 국토가 모두 설법하는 것이다.
    곧 한 곳에서 일체처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중생과 함께 증득하고 함께 설하면서,
    서로 주(主)가 되기도 하며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반연하지 않는 것입니까?’
    반연하지 않으려면, 대상 인식을 안 하려면 어떤 조건이라야 될까요?
    대상을 반연하지 않는 것, 반연할 수 없는 상태가 있어요.
    대상 인식이 멈춰지는 것인데,
    대상이 공의 모습이 드러날 때는 인식이 멈춰져요.
    그래서 반연하지 않는 것이 되죠.

    ‘애욕으로 취하는 것을 벗어난다면 반연하는 것이 없다.’
    그냥 반연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예를 들어, 풀이 많이 우거져 있는 들판을 걸어가다 보면
    혹시 뱀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기죠?
    그런데 한참을 가다보니까 진짜로 뱀이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깜짝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나서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고 새끼줄이더라 이거죠.
    여기에서 착각하게 된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뱀이 나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이런 게 착각하게 하는 거죠.
    언어로 인한 착각은 아까 얘기 했지만,
    언어로 지시된 대상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고,
    거기에 하나를 더 붙이면 뒤에 ‘두렵다’는 배경이 있는 거죠.

    그러면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뭐냐 하면,
    뒤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뒤에 저장되지 않게 하려면
    모든 삼라만상이 매순간 바뀌어 간다는 것을 알아야 되요.
    변화를 보게 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속에
    일어난 곳도 없고 사라지는 곳도 없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게 불생불멸의 자리고 평등일성의 자리고 비어 있는 자리에요.
    그 비어 있는 자리에서 거꾸로 바깥세상을 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대상을 반연하지 않게 되죠.
    내 마음이 텅 비어서 거울 같이 맑은 상태가 우리 본연의 마음이라면
    이것이 계발되어 있는 사람은
    사물을 볼 때도 늘 텅 비게 거울 같이 보는 거예요.
    뒤에 무엇인가 걸림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착각을 많이 합니다.

    다음에,
    ‘이런 뜻으로서 여래는 항상 모든 법이 평등하다고 설한다.
    이런 이유로 법이 평등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설법하면 시방의 국토가 모두 설법하는 것이다.
    곧 한 곳에서 일체처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중생과 함께 증득하고 함께 설하면서,
    서로 주(主)가 되기도 하며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한 곳에서 일체처에 두루하는 게 뭘까.
    평등이죠.
    평등의 내용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평등을 알게 되면 한 곳에서 일체에 두루하게 되요.
    한 곳에 있어도 텅 빈 마음으로 보면 다 똑같은 겁니다.

    지극한 이치에서 논한다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것인데,
    어찌 감응을 말하겠는가.
    중생을 교화하는 입장에서 중생의 근기에 감응한다면
    감응의 종류는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다양한 근기가 없다면
    모든 부처님의 감응은 중생에게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자기의 주장이나 남의 주장에 집착하여
    안이나 밖을 논하면서 잘못된 견해를 낼 수 있겠는가.


    ‘지극한 이치에서 논한다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것인데,
    어찌 감응을 말하겠는가.’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그 자리는
    잘 아시다시피 진리 그 자체의 자리죠.
    그것을 수승할 승(勝), 평평할 의(義)자를 써서 승의(勝義)라 그럽니다.
    다른 말로하면 불성(佛性), 진여(眞如), 일심(一心), 이렇게도 얘기 합니다.
    여기서 감응은 부처님과 중생의 감응,
    기도하는 자와 기도 받는 자의 감응이죠.
    그래서 본연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데
    어떻게 감응을 말하겠는가 하는 겁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입장에서 중생의 근기에 감응한다면
    감응의 종류는 하나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이 중생을 교화하는 입장에서의 감응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러나 중생의 다양한 근기가 없다면
    모든 부처님의 감응은 중생에게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죠.
    중생의 근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부처님이 감응을 하는 건데,
    중생에게 다양한 근기가 없다면 응할 것이 없잖아요.
    예를 들어 근기가 일률적으로 하나라면 딱 하나로 응할 것인데,
    중생의 근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응하는 게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어찌 자기의 주장이나 남의 주장에 집착하여
    안이나 밖을 논하면서 잘못된 견해를 낼 수 있겠는가.’
    감응이 있어서 서로가 응하면 참 좋겠는데,
    자기주장도 있고 남의 주장도 있고,
    안과 밖을 자꾸 논하면 서로 안 통하는 거예요.
    자기 말만 내세우고 내 견해가 옳다고 하면
    들어줄 사람이 누가 있느냐 이거죠.
    그래서 대화할 때 설사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긍정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 말은 공감을 합니다만, 제 생각은 이러이러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래도 괜찮은데,
    일언지하에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런 식으로 딱 끊어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원수 됩니다.
    상대의 말에 긍정을 해가면서 대화를 이어나가야 되는데
    감정이 격해지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긍정할 것은 긍정하면서 아닌 것은 조리 있게 얘기해줄 필요가 있는 거죠.
    그렇게 되면 설사 서로 안 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통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서로가 감정 상하지 않는다 이거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주장만 내세우고 남의 주장은 깔아뭉개면
    그것은 아주 못 쓰는 겁니다.
    여기 감응에 대한 것도 그런 것이다 이겁니다.

    이것은 『법화현의』에서 질의 응답하는 다음 내용과 같다.
    : 중생의 근기에 성인이 감응하는 것은
    그 내용이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같은 것이라면 다양한 중생의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르다면 어떤 모습으로 서로의 관계를 가져서
    중생의 근기에 감응하는 것을 논하겠습니까?


    이 『법화현의』는, 제 기억 상으로는
    『법화경』을 주석하신 분 중에서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가 계시는데,
    이 선사의 저술인거 같아요.

    ‘중생의 근기에 성인이 감응하는 것은
    그 내용이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초지이상은 전부 성인이에요.
    근기에 따라서 성인이 감응을 하는데
    그 내용이 같으냐, 다르냐 이걸 묻습니다.

    ‘같은 것이라면 다양한 중생의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열 명의 중생이 원하는 게 각각 다른데,
    성인이 감응하는 내용이 똑같다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감응하는 내용이 같은 것이라면
    다양한 중생의 근기에는 맞지 않는다 이거죠.

    ‘다르다면 어떤 모습으로 서로의 관계를 가져서
    중생의 근기에 감응하는 것을 논하겠습니까?’
    다르다면 어떤 모습으로 서로의 관계를 가져서
    중생의 근기에 감응을 하겠느냐.
    그러면 열 명의 중생에 감응을 하려면
    성인이 적어도 열 명은 되어야 되지 않느냐.
    여기서 하는 얘기가 이런 논리에요.

    답을 합니다.
    :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치로 논하면 똑같이 여여하니, 이런 까닭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현상으로 논하면 중생의 다양한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 있어,
    이런 까닭에 같지 않은 것이다.


    ‘이치로 논하면 똑같이 여여하니’
    여여는 같은 여(如)자를 두 번 반복했는데.
    ‘같다’고 하는 것은 내용이 똑같고 바뀌지 않는 다는 거죠.
    예를 들면, 열 명의 중생에게 감응을 한다면
    열 명의 중생하고 성인은 여여한 관계이기 때문에
    똑같은 것이다 이런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서로 감응을 할 때 그 자리는 똑같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성인이 열 명에게 감응하더라도 
    여여한 입장에서는 바탕이 똑같은 내용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이것은 체용(體用)할 때 체(體)의 입장입니다.

    ‘현상으로 논하면 중생의 다양한 근기에 감응하는 것이 있어,
    이런 까닭에 같지 않은 것이다.’
    현상으로 논하자면,
    A라는 중생에게 감응하고,
    B라는 중생에게 감응한 내용이 다르다는 겁니다.
    바탕은 같아도 내용은 다르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말하면,
    여기 찻잔과 시계가 있다.
    감응할 중생이 수천수만이 되겠지만,
    두 명으로 줄여서 감응한다면,
    한 사람에게는 찻잔으로 감응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시계로 감응을 하면,
    여기 시계와 찻잔의 공통분모가 뭡니까?
    형상으로 보면 달라요.
    그래서 A라는 중생과 B라는 중생의 감응이
    내용으로 보면 다를 수 있어요.
    그렇지만 공통분모가 있잖아요.
    “지수화풍 4대로 화합되어 있는 것이요.”
    네, 그렇죠.
    이렇게 화합되어 있는 것은
    부서지고 실체가 없는 것이 똑같은 거예요.
    그 자리가 여여한 겁니다.
    그래서 바탕은 시계나 찻잔이나 감응하고 여여한 것은 동일한데
    모양은 다르다 이 말이에요.

    만일에 이런 입장에서 얘기 한다면,
    꼭 부처님과 중생과의 감응만을 얘기할 게 아니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얘기해 볼 수 있죠.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다면 각각의 개성도 각기 다르죠.
    어머니가 각기 다른 자식들에게 감응을 한다면
    똑같이 사랑을 베푸는 그 감응 바탕은 똑같지만
    내용은 조금씩 다를 수가 있다는 거죠.
    어떤 자식에게는 사탕으로 감응하고,
    조금 큰 자식에게는 책을 사주면서 감응하고, 이렇게 다른 거예요.
    그래서 감응의 바탕은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는 것을 얘기 하는 겁니다.

    이것은 비유하여 하늘의 성품으로 서로 관련이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뼈와 살로 몸을 물려주는 것과 같다.
    이러니 아버지와 아들이 다르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같다면 아버지 자체가 아들이 되고, 아들 자체가 아버지가 된다.
    이러니 같다고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을 논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하여 하늘의 성품으로 서로 관련이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뼈와 살로 몸을 물려주는 것과 같다.’
    뼈와 살로 몸을 물려준다는 것은
    요즘말로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DNA를 물려준다 이거죠.

    ‘이러니 아버지와 아들이 다르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같은 거죠.
    똑같은 DNA가 전달됩니다.

    ‘만약 같다면 아버지 자체가 아들이 되고, 아들 자체가 아버지가 된다.
    이러니 같다고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바탕은 같은데, 쉽게 말해서 DNA는 물려주지만 그 모습은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다만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을 논하는 것이다.’ 이러는 겁니다.
    바탕으로 보면 다르지 않고 그 모습을 보면 같지 않다 이거죠.
    그래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러는 겁니다.

    중생은 이치로서의 성품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중생에게 이 성품은 숨고 여래에게만 나타난다.
    이 때문에 같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으로서
    중생의 근기에 감응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다.
    또 같다는 것은 현상도 아니고 이치도 아니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중생에게 현상으로 나타나고 성인이 이치를 얻거나,
    또 성인에게 현상으로 나타나고 범부에게 이치가 있다.
    그러므로 다르다는 것을 논하는 것이다.


    ‘중생은 이치로서의 성품이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앞에는 다 비유를 얘기 한 것이고,
    성품을 보면 똑같다 이거죠.
    그래서 보조스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능례소례(能禮所禮)가 진성연기(眞性緣起)한다.’
    ‘능히 예를 드리는 중생과 예를 받는 부처님의 관계는 참성품이 연기한다’ 그러셨는데
    참성품의 입장에서 보면 중생 부처가 똑같은 거예요.
    성품 바탕은 같은데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이고
    중생은 못 깨달은 거죠.
    그래서 중생은 고통이 있고 부처님은 고통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바탕이 같기 때문에 못 깨친 입장에서
    깨치신 성인이나 부처님에게 기도를 드림으로서 감응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감응 되는 것은 바탕이 같아서 감응 되는 것이고,
    감응이 오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부처님의 그 힘이 중생에게 미쳐서 그 덕을 중생이 입는다는 겁니다.

    기도를 해서 감응이 오더라도
    감응이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는 경우가 참 많은데
    부처님은 늘 중생들하고 함께 하고 있는 겁니다.
    「대승기신론」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은 늘 함께 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부처님을 모르고 왜 감응이 없느냐.’
    그러니까 마명보살이
    ‘부처님은 늘 함께 있는데
    중생의 업장이 두터워서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그러면 그 두터운 업장, 까만 때를 베껴내야 되겠죠.
    그래서 본래 본성과 비스므리하게 해야 감응이 빨리 오는 겁니다.

    우리는 늘 감응을 하고 있지만
    중생과 부처가 같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기도만 해서는 안 되고 참회 같은 것이 필요한 거죠.
    참회를 해서 업장이 조금 녹으면
    부처와 중생이 본래 본성이 같은 불성하고 비슷해지기 때문에
    빨리 감응이 올 수가 있는 거죠.
    참회하고 경전을 읽고 염불하고 절하는 것들이
    업장 소멸 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됩니다.
    『화엄경』에 그 이치가 명확하게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가 잘 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참회를 하든 무엇을 하든 기도를 끝 마쳤을 때는 분별심이 없어져야 된다.
    두 번째는 기도를 하면 알아지는 게 있어야 된다.
    ‘부처님과 나는 바탕이 같다, 무자성공이구나.’하는 앎이 있어야 되요.
    그리고 또 부처님과 나는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런 것을 알아야 되요.
    그래서 분별심이 없어야 됩니다.
    ‘기도하면 감응이 올까?’ 이렇게 의심을 하면 그건 기도가 아니죠.
    그래서 기도한 결과가 늘 마음이 편안하고 분별심이 없어야 됩니다.
    분별심이 없어야 된다는 것은 아무생각이 없다는 소리 아니고
    허망한 생각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중생에게 이 성품은 숨고 여래에게만 나타난다.
    이 때문에 같은 것도 아니다.’
    중생하고 부처님은 평등일성(平等一性), 같은 성품이지만
    중생에게는 이 성품이 번뇌망상 때문에 안 나타나고 숨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숨어버린 성품을 드러내려면,
    아까 얘기 했듯이 기도를 할 때,
    참회를 곁들이고 절을 해가면서 경전 독송하고 이래야 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으로서
    중생의 근기에 감응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다.
    또 같다는 것은 현상도 아니고 이치도 아니기 때문에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같다고 하는 텅 빈 자리, 본질은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어요.
    평등하기 때문에 가고 옴이 없고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이죠.
    현상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이치도 그 안에서 찾을 수도 없습니다.
    번뇌망상, 온갖 견해는 전부 이분법적인 것인데
    그 안에 들어가면 싹 녹아서 평등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중생에게 현상으로 나타나고 성인이 이치를 얻거나,
    또 성인에게 현상으로 나타나고 범부에게 이치가 있다.
    그러므로 다르다는 것을 논하는 것이다.’
    본질은 같지만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이치나 현상이
    성인에게도 나타나고 범부에게도 나타난다는 거죠.

    그다음에 묻습니다.
    : 중생의 근기에 감응할 때는 법신으로 감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응신으로 감응하는 것입니까?
    만약 응신으로 감응한다면
    근본이 없는 것인데 무엇으로 감응할 수 있겠습니까?
    법신으로 감응한다면 이 감응은 곧 어떤 법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중생의 근기에 감응할 때는 법신으로 감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응신으로 감응하는 것입니까?’
    이 말도 질문자의 의도를 잘 알아야 되요.
    법신으로 감응한다면, 법신은 형상이 없는데 어떻게 감응할 것이며,
    응신으로 감응한다면, 응신은 법신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감응하는 것이 참다운 게 맞는 것이냐,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이런 것을 양두논법(兩頭論法)이라 그럽니다.
    이 말은 그전에 한 번 얘기 했는데,
    양두논법이라는 것은,
    몸은 하나이고 머리가 두 개인 뱀이 있는데,
    한 쪽 머리를 치면 다른 쪽 머리가 물어버린다 거죠.
    이런 뱀을 대할 때는 동시에 머리 두 개를 제압해야 되겠죠.
    하나만 제압하면 다른 머리에 물린다는 말이죠.
    이게 양두논법이에요.
    법신으로 감응한다면 모양과 색깔이 없는데 어떻게 감응한다 할 것이며,
    응신으로 감응한다면 응신은 본질이 아닌데 어떻게 감응한다고 할 것이냐,
    이런 얘기에요.

    참, 난제(難題)입니다.
    초기경전에 이 양두논법에 대한 얘기가 있어요.
    한 번 더 얘기를 하죠.

    어떤 촌장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당신은 굉장히 자비스러운 분이시고 만인에게 다 평등한 분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네 제자들은 심오한 법문을 해주시고,
    우리 같은 촌부들은 왜 낮은 법문을 하십니까?”

    이 촌장이 하는 논법은 양두논법(兩頭論法)입니다.
    자비롭고 평등하다는 데에도 충족시켜줘야 되고
    차별된 법문에 대해서도 충족을 시켜줘야 되죠.
    상근기는 한 마디로서 깨닫지만
    근기가 낮은 사람은 비유를 들어서 얘기해 줘야지만 이해가 된다,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십니다.
    “촌장이여, 밭이 세 개가 있는데,
    옥답이 있고 중간 답이 있고 자갈밭이 있다면,
    당신은 어떤 밭부터 갈겠습니까?”
    그 촌장은 농부니까 당연히
    “그야 옥답을 먼저 갈지요.”라 대답을 합니다.
    “그럼 옥답이 없으면요.”
    “중간 답을 갈지요.”
    “중간 답마저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자갈밭을 갈 수 밖에 없지요.”
    이 말은 차별에 대한 얘기죠.
    그러니까 부처님 하시는 말씀이
    “나도 그와 같다.
    나의 제자들은 옥답과 같은 거니까 먼저 갈아야 되는 게 당연한 것이고
    재가신자들은 중간 답이고, 외도는 자갈밭과 같다.
    그러니 당연히 옥답인 내 제자들에게
    심도 있는 법문을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촌장이 할 말이 없는 거죠.

    여러분은 중간 답 정도는 됩니다.
    저기 혜선 스님은 옥답이고.ㅎㅎㅎ
    그런데 겉모습은 속인이지만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스님과 똑같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죠.
    이게 여러분들이 공부한 효과가 나타나는 거예요.
    스님은 아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속은 바로 스님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옥답이 되는 겁니다.

    ‘만약 응신으로 감응한다면
    근본이 없는 것인데 무엇으로 감응할 수 있겠습니까?
    법신으로 감응한다면 이 감응은 곧 어떤 법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떤 법도 아니죠.
    그 세계는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는 거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없기 때문에 인과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어떤 법도 아니라 이거죠.
    법이라는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성소멸하는 것이 법인데,
    법신은 생성소멸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무슨 감응이 있느냐 이거죠.

    답을 합니다.
    : 모든 법을 지극하게 논한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아니다.
    감응하는 것도 아니고 감응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으로서 감응할 수 있다.
    또한 법신으로 감응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한 응신으로 감응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법신으로 감응한다는 것은 은밀하게 이익을 주는 것이요,
    응신으로 감응한다는 것은 이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법을 지극하게 논한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라는 것은 시간을 초월했다 이 말이에요.
    『화엄경』에 보면,
    모든 것은 상호 관계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기 때문에
    그 본질은 비어 있다, 이랬습니다.
    반대로 법의 성품은 인연 따라서 일어난다, 이렇게도 얘기 합니다.

    ‘감응하는 것도 아니고 감응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으로서 감응할 수 있다.
    또한 법신으로 감응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한 응신으로 감응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법신으로 감응한다는 것은 은밀하게 이익을 주는 것이요,
    응신으로 감응한다는 것은 이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은밀하게 이익을 주는 것은 법신도 감응을 한다,
    은밀하다는 것은 안 드러난다는 거죠.
    법신은 드러나는 게 아니죠.
    텅 빈 자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오직 지혜로서만 알 수 있는 곳이 법신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형상으로서 감응하는 게 아니죠.
    그렇다면 은밀하게 감응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법신과 비슷한 마음 상태가 되면 은밀한 감응이 온다고 볼 수 있죠.
    그렇지만 응신은 응하는 모양과 색깔이 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고 즉각적으로 그 이익이 드러나는 겁니다.

    여기 제목이 ‘허망한 분별의 근본’ 이렇게 했지만,
    가피에 대한 얘기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 이렇게 해야 될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것이 유식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유식’은 오직 마음뿐 다른 경계가 없다 했죠.
    그러면 유식삼성에 대입을 한 번 시켜보죠.
    변계소집성은 헤아려서 집착하기 때문에
    모양 상(相)으로 나타나지만, 없는 거죠.
    의타기성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데,
    상호 관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연기라고 하고
    이것은 우리 마음[識]을 얘기 합니다.
    원성실성, 원만한 실성을 이룬 것은 진여를 얘기합니다.

    그러면 서로 응하기는 하는데,
    형상으로 드러나면서 응하는 것은 의타기성하고 관련이 있고
    응신에 비유됩니다.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은 모양과 색깔이 있거든요.
    그렇지만 진여는 모양과 색깔이 없으니까 법신에 비유되죠.

    만일에 응신이든 법신이든 감응을 하는데,
    변계소집성이 감응을 방해합니다.
    변계소집성에 상이라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고정되어 보이고, 분리되어 보이고,
    마치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거죠.

    예를 들어볼게요.
    어떤 분이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를 제대로 하려면 법문도 좀 듣고 이치도 알고 하면 훨씬 좋다,
    그러니 기도만 하지 말고 법문도 좀 들으시오, 이랬더니
    내 법문을 들으라는 식으로 이해 됐는지 법문 들으러 안 와요.
    마음속에는 ‘당신 법문 안 듣는다’ 이런 게 있었겠죠.
    그러고 얼마 후에 만났는데 하는 소리가
    기도를 하니까 좋은 감응이 있어서 이익을 많이 봤다면서
    한 번 찾아 뵙겠습니다 하고는 한 번도 안 왔습니다.
    그래서 그때 생각한 것이
    내가 여기서 법문을 하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법문 듣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가보다,
    이렇게 생각 했을 거 같아요.
    좋은 의도로 했지만 아마 부담감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공연히 지가 법문 잘하니까 들으러 오라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할 까 싶어서
    그때부터 누구한테든 법문 들으러 오라는 얘기를 안 합니다.
    인연 따라서 오면 오고 안 와도 할 수 없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제가 우려하는 것은 뭐냐 하면,
    기도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부처님 가르침의 이치를 모르고 기도를 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하는 기도나 똑같거든요.
    불교의 기도는 다른 종교나, 무속인이 기도하는 것하고 달라요.
    이런 이치를 모르고 무조건 기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기도는 신앙의 형태지 수행은 분명히 아닙니다.
    내 안에 부처의 성품을 믿고 수행하는 것은 신심이라고 하고,
    내 밖에 불보살을 의지하는 것은 ‘믿고 우러러본다’ 해서
    믿을 신, 우러러볼 앙, 신앙(信仰)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에서의 기도는 기도 끝나고 나면 반드시 해야 될 게 뭔지 아시죠?
    회양입니다.
    회향하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기도가 아니에요.
    그래서 회향할 때 ‘기도한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들과 불보살과 깨달음에 회향합니다.’ 이래야 됩니다.
    그러면 회향의 결과는 두 가지에요.
    분별심이 없어야 되고,
    알아지는 것,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