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원종(圓宗)은 정식(情識)으로 알지 못한다 (강의)

경호... 2012. 1. 6. 05:21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원종(圓宗)은 정식(情識)으로 알지 못한다 (강의)

    원종(圓宗)은 원만한 종지, 바른 종지라는 뜻인데, 다른 말로 하면 진리에요.
    정식(情識)은 뜻 정(情)에 알[알음알이] 식(識)자, 번뇌를 일으키는 마음이죠.
    번뇌를 일으키는 이 마음으로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이런 얘기입니다.

    묻습니다.
    : 단지 방편에서 설한다면 무방하나
    바른 종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종지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앞에서 얘기하는 것으로 봐서는
    ‘성스러운 설법과 침묵’에 대한 얘기죠.
    진리 자체의 입장에서 얘기한다면
    부처님께서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말이 맞는 거고,
    수행해서 진리를 깨쳤다면 그 또한 맞는 얘긴데,
    방편적으로 설하는 것은 맞지만
    진리의 입장, 이 자체를 직설교화를 할 수 없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하는 거 같아요.

    여기서 ‘종지’라는 얘기는,
    유식에서 종지는 오직 마음뿐이고 다른 경계는 없다는 것이죠.
    오직 마음뿐인 이 마음도 원성실성을 얘기 하죠.

    답을 합니다.
    : 나의 원종은 알음알이로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어찌 방편에 집착하여 가르치는 사람과 같겠는가.
    공(空)과 유(有)가 융통하지 못하면
    체(體)와 용(用)이 양분되어 이(理)와 사(事)가 간격이 생긴다.


    ‘나의 원종은 알음알이로 알 수가 없다.’
    원문에는 ‘정해불급(情解不及)’이라 해서,
    ‘정으로 아는 것은 미칠 수 없다’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그런데 어찌 방편에 집착하여 가르치는 사람과 같겠는가.’
    방편은 방법이기 때문에 여기에 집착해서 되겠느냐, 그런 얘기를 합니다.
    종지는 방편으로 설한다면 무방하지만
    종지의 입장에서는 종지를 손상시키는 거 아니냐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거죠.

    ‘공(空)과 유(有)가 융통하지 못하면
    체(體)와 용(用)이 양분되어 이(理)와 사(事)가 간격이 생긴다.’
    여기서 공(空)은 무(無)를 생각할 수 있죠.
    ‘무(無)와 유(有)가 융통하지 못하면’, 이렇게 봐도 됩니다.
    이 유무는 양극단에 치우쳤을 때 유무라는 말을 쓰는데,
    공유(空有)라고 얘기를 하는 것은,
    공(空)을 얘기할 때는 반야공(般若空)을 생각하시면 되고,
    유(有)는 오직 마음뿐인 이 마음은 있다는 입장에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개가 서로 융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죠.

    융통하지 못하면 ‘체(體)와 용(用)이 양분된다’ 이런 얘기죠.
    ‘체(體)’는 공(空), 용(用)은 유(有)하고 배대가 되겠죠.
    그 다음에 체(體)와 용(用)이 양분되면,
    체(體)는 이(理)하고, 용(用)은 사(事)하고 연결 되겠습니다.
    그래서 체(體)와 용(用)이 양분되니까
    이(理)와 사(事)가 간격이 생긴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죠.
    이(理)는 이치니까 체(體)나 공(空)하고 같은 거고,
    사(事)는 현상이기 때문에
    쓰임새[用]라든지 나타나는 유(有)하고 같이 연결되어 있죠.

    상주를 설하면서 상견이 생기고, 무상을 설하면서 단멸에 돌아가는 것이다.
    한쪽에 치우치는 견해를 배척하면서 한쪽에 치우치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 생기고,
    중도를 인정하면서 중도의 이치에 집착하는 것이다.


    ‘상주를 설하면서 상견이 생기고, 무상을 설하면서 단멸에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설하면서’에서 ‘서’를 빼고
    ‘상주를 설하면 상견이 생기고, 무상을 설하면 단멸에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상주(常住)는 항상 머문다는 뜻인데,
    항상 머문다는 것을 설하게 되면 항상하다는 견해가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골치 아파집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사람이 권위주의로 바뀌고 다른 사람과 소통이 안돼요.
    그래서 항상하다, 영원하다는 입장에 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명령 하달식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는 우월하고 남은 별 볼일 없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차별이 생기면서 문제가 생기죠.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권위주의적인 겁니다.

    그래서 ‘상주를 설하면 상견이 생기고’
    항상하다는 것을 설하면 항상하다는 견해, 절대주의가 생기고,
    ‘무상을 설하면 단멸에 돌아가는 것이다.’
    무상은 항상함이 없다는 말이고,
    단멸이라는 것은 허무주의를 얘기 합니다.
    ‘이 세상이 항상하는 게 없는데 허무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이러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허무주의에 들어가게 되면
    의욕이 떨어지게 되고 아무것도 안하게 됩니다.
    그러면 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기 때문에
    절대주의도 안 맞고 허무주의도 안 맞는 거예요.

    ‘한쪽에 치우치는 견해를 배척하면서
    한쪽에 치우치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 생기고’
    한쪽에 치우친 견해를 배척하면 다른 한쪽에 견해에 집착하는 거예요.
    이게 세상사는 거예요.

    ‘중도를 인정하면서 중도의 이치에 집착하는 것이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그러면,
    또 그것에 집착을 해 버리는 거예요.
    이리되면 골치 아픈 거예요.
    이런 일이 왜 생기느냐 하면,
    견해를 내세우면 반드시 반대 견해가 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게 언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에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상은 항상 대립이 나옵니다.
    우리가 언어로서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유식삼성 중에 어디라 했습니까?
    언어에 의해서 얘기되는 것은 전부다 변계소집성입니다.
    언어에 해당되는 그 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 같이 얘기했을 때는 항상 대립이 일어납니다.
    유를 얘기하면 무가 나오는 것처럼,
    이것은 언어상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 원융한 종지는 걸림이 없는 최고의 것으로
    상주를 설하면 무상 속의 상주를 설하고,
    무상을 설하면 상주 속의 무상을 설한다.


    ‘상주를 설하면 무상 속의 상주를 설하고’
    이 말은, 항상하지 않는 변화 속에서 마치 변하지 않는 무엇을 설한다는 거죠.
    그 다음에 ‘무상을 설하면 상주 속의 무상을 설한다.’
    항상 머무름 속에 변하지 않는 무상을 설한다는 거죠.
    이렇게 되면 말이 안 맞지요.
    항상 머무는 속에 변하는 것을 얘기하고,
    변하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을 얘기하고,
    이게 이치에 안 맞는 거죠.
    그런데 원융한 종지는 걸림이 없다, 이랬는데 왜 그랬을까요.
    다음 봅시다.

    공(空)을 설하면 불공(不空)의 공을 설하고,
    유(有)를 설하면 환유(幻有)의 유를 설한다.
    변견을 말하면 중도 자체의 변견을 말하고,
    중도를 말하면 치우침이 없는 중도를 말한다.
    이치를 세우면 일을 성사시키는 이치며,
    일을 세우면 이치가 드러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서 일체법을 펼치고 거두는 것이 나에게 있으면서
    숨고 드러나는 것이 동시인 것이다.
    설하면서 설하지 않는 것과 어긋나지 않으며,
    설하지 않으면서 설하는 것과 괴리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상주 속에 무상을 설하는 이치가 안 맞고,
    무상 속에 상주를 설하는 이치가 안 맞는데,
    원종(圓宗)에서는 걸림 없이 선다 이거죠.
    여기 얘기는 원종이라는 전제하에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원종이라는 진리 속에서 얘기 할 때는
    상주 속에서 무상을 설할 수 있고,
    무상 속에서 상주를 설할 수가 있는 거죠.

    육조스님께서 “생각을 완전히 끊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무념이라 그러면 안 된다.”이렇게 얘기 합니다.
    그럼 뭐가 무념이냐 하면,
    대상을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데 거기에는 이분법적인 상은 벗어났다 이거죠.
    두 가지 모습이 없는 것을 무(無)라 하고
    대상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을 념(念)이라 그런다,
    합치면 무념(無念)이 되죠.
    무념은 아무생각 없는 게 아니잖아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하듯이
    대상에 머물지 않고 내 마음을 내는 것이 무념이에요.
    여기에는 생각이 대상에 머물지 않을 뿐이지
    생각이 완전히 없는 상태를 얘기하는 게 아니죠.
    그러면 생각을 완전히 억누르고
    생각을 일어나지 않게 하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
    그런 사람을 무기공에 빠졌다고 하는 겁니다.
    아무 생각 없고 고요하지만 멍~ 한 거예요.
    그것은 무념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원종(圓宗)이라는 것은 진리를 얘기하고,
    뜻을 얘기하라면 종지가 되는데 이 종지가 무념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에 보면 ‘펼치고 거두는 것이 나에게 있으면서’ 이랬어요.
    설하고 설하지 않는 것도 자기한테 있는 거예요.
    자기한테 있다면, 자기라는 것은 결국 마음일거고,
    이 마음은 원성실성을 얘기하겠죠.
    그렇게 되면 원종(圓宗)이죠.

    원종은 원만한 종지라는 뜻인데, 이 말이 뭘까요?
    다음시간에 배우게 되는 ‘얻을 것이 없어 수기 한다’,
    이게 해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