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성스런 설법과 침묵 (강의)

경호... 2012. 1. 6. 05:19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성스런 설법과 침묵 (강의)

    『천왕반야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스러운 총지에는 문자 없으나
       문자로써 바른 총지 드러낸다네.
       대자비의 크나크신 방편의 힘은
       언어 문자 벗어나서 설해진다네.


    본문에는 ‘總持無文字(총지무문자) 文字顯總持(문자현총지)’ 이랬거든요.
    총지라는 말은 작은 문구 안에 심오한 수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얘기합니다.
    이 총지가 문자가 있으면 한정되어지니까 없다는 것은 맞는 얘기죠.
    총지의 본래의 뜻이 한정되지 않은 무한인데, 문자로 쓰면 한정되죠.
    그렇지만 이 총지를 드러내려면 문자를 통해서만 드러나죠.

    이 말은
    「중론(中論)」에 보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얘기하는데,
    속제는 말과 생각의 세계, 진제는 말과 생각을 떠난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면 전혀 별개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진제와 속제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말과 생각을 떠난 진제의 입장에서는 언설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이 진제를 표현하려면 문자를 의지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속제(俗諦)는 세속의 진리라는 말인데, 언어로 이루어진 거죠.
    그래서 『화엄경』에서도 똑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세계고, 언어로 건립된 세계다,
    그리고 세간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언설을 의지해서 머물고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언어를 의지해서 삽니다.
    만약에 언어가 없다면 의사소통도 안 되고, 못살아갑니다.
    이것은 시계고, 저것은 찻잔이고, 책상이고,
    이렇게 언어를 붙여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 얘기죠.
    이게 세간이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실은 말과 생각이 떠난 세계지만
    우린 여기다가 모양과 색깔을 설정하고 이름을 붙여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수행을 해보면 우리가 생각 했던 것하고 전혀 다릅니다.
    언어 속에서 지시된 대상이나 나타난 영상들은 대부분 고정되어 있는 반면에
    수행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지켜보기 시작하면
    몸도 매 순간 바뀌고 마음도 순간순간 바뀌기 때문에
    거기에서 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어요.
    개념을 못 잡습니다.
    또 이것이 마음이다 할 만한 걸 못 잡습니다.
    잡을 수 없다는 것은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게 진실인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양과 색깔이 고정되어 있고,
    고정되어 있게 보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서 본다는 거죠.
    언어에 매여서 사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이지
    진실하고는 거리가 좀 멉니다.

    ‘대자비의 크나크신 방편의 힘은’
    ‘대자비(大慈悲)’라 했는데,
    본문에는 ‘대비방편력(大悲方便力)’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자비’가 아니고 ‘대비(大悲)’에요.
    이것은 성격이 조금 달라요.
    자(慈)는 기쁨을 일으킨다고 하고,
    비(悲)는 연민이고 보호 감정인데, 상대의 고통을 나누고, 없애주고
    그러면서 싫어하지 않는 것을 비라 그럽니다.

    방편은 왜 구사하느냐,
    방편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핵심은 대자(大慈)가 아니고 대비(大悲)입니다.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있어서 연민심이 없으면 구제하지 못합니다.
    『화엄경』에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자기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중생이 청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청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중생을 구제할 마음을 내야 된다는 거죠.
    마음을 먼저 깨닫게 하고
    내가 힘써서 깨닫는 것은 이치에 맞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그것은 연민이 바탕이 된 대비심이죠.
    그래서 대승불교 수행의 핵심은 연민으로 봅니다.
    연민심이 일어나야만 상대를 구제할 수 있으니까 이게 방편이에요.

    그래서 ‘대자비의 크나크신 방편의 힘은’
    ‘큰 연민의 크나크신 방편의 힘은’이렇게 되겠죠.

    ‘언어 문자 벗어나서 설해진다네.’
    언어로 표현하는 것 하고 실제로 있는 것하고는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말로서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그것은 진실감이 없죠.
    가령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데 있어서
    말로만 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안 되죠.
    ‘연민’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어렵다면 바로 쌀을 퍼다 주던지,
    이렇게 행동으로 보이는 것을 얘기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말로만 하는 것과는 다른 거죠.

    이 연민을 일으키려면 훈련이 필요한데,
    적어도 세 가지는 늘 생각해야 실천력이 나옵니다.
    이것은 제가 얘기하는 게 아니고
    달라이라마 저술을 보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상대를 이해하는 겁니다.
    두 번째, 상대편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세 번째, 상대편을 전생에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겁니다.
    이것을 자주, 날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순간 어려운 사람 만났을 때,
    말로서 하는 게 아니고 바로 실천을 해 보일 수가 있는 거죠.

    여기 보면, 대비심의 방편의 힘은 언어 문자를 떠났다 했는데,
    총지는 문자도 없다 이랬어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총지를 그대로 실현하는 것은
    대비심에 의해서 실천에 옮겼을 때 이 총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총지는 진리의 현현입니다.
    문자를 벗어나서 설해진다는 말도 그런 뜻이에요.
    실질적으로 대비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는 자체가
    바로 법을 설하는 것이 된다, 그런 뜻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뒤에 가면 나오겠죠.

    『사익경』에서는 “너희 비구들이여, 마땅히 두 가지 일을 행하여야 한다.
    하나는 성(聖)스런 설법이며 또 하나는 성스런 침묵이다.
    단지 바르게 설할 때에 알아들을 수 없다면 묵연히 침묵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입을 막아서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 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허깨비가 법 설하고 법을 들으나
       본래부터 양쪽 모두 무정이라네.
       설할 것이 없으나 인연 따르고
       들을 것이 없으나 들음과 하나.


    성스러운 침묵이라든지 설법에 대한 얘긴데,
    초기경전에는, 아침에 부처님께서 외출을 하실 때
    광장에 비구들이 모여서 떠들고 있었는데,
    저녁에 부처님께서 돌아오실 때도 떠들고 있는 거예요.
    수행은 하지 않고 떠들기만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무슨 얘기냐고 물으니까
    소나 코끼리를 잘 다룬다든지 농사를 잘 진다든지
    이런 출가하기 전 속가에 있을 때 잘했던 장기 얘기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면서 놀아버린 거예요.
    나 같으면 쥐박어 버릴 텐데, ㅎㅎㅎ
    그런데 부처님은 굉장히 자비스러운 분이라 하시는 말씀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하지 마라.
    그때는 침묵을 지켜라.”
    그래서 성스러운 설법과 성스러운 침묵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바르게 설할 때에 알아들을 수 없다면 묵연히 침묵해야 한다.’
    알아들을 수 없다면 침묵을 지켜라는 말을 한 겁니다.
    저는 조금 다릅니다.
    법에 대한 것은 되나 안 되나 말을 하라고 합니다.
    우리 학인스님들에게도 제가 그렇게 주문을 해요.
    신도들 하고 얘기할 때도 불법에 관한 것이라면 되나 안 되나 하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다 공부가 되고 내 것이 된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옛 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허깨비가 법 설하고 법을 들으나
       본래부터 양쪽 모두 무정이라네.
       설할 것이 없으나 인연 따르고
       들을 것이 없으나 들음과 하나.’
    여기 세 번째 줄에 ‘설할 것이 없으나 인연 따르고’ 이 말은
    원문대로 하면[說時無說從君說],
    ‘설할 것이 없으나 그대 따라서 설하고’
    설할 것이 없는데 그대, 당신 때문에 내가 설한다, 이런 얘기고,
    밑에 줄[聽處無聽一任聽], ‘들을 것이 없으나 들음과 하나.’
    이것은 ‘들을 것이 없으나 그냥 듣는 것에 맡겨두네’ 이렇게 됩니다.

    여기에서 설할 것 없고, 들을 것 없다는 말이 있는데,
    왜 이런 말을 할까.
    『천왕반야경』에서 얘기하는 거 하고 이 게송하고
    『사익경』에서 얘기하는 게 뭔가 하나로 쭉 이어지는 게 있죠?
    그것은, 진리는 말과 생각을 떠났다는 거죠.

    『능가경』에서 대혜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대혜 : 세존께서는 “내가 어느 날 밤에 가장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법의 즐거움을 누리다가 어느 날 밤에 반열반(般涅槃)에 들어간다.
    그 중간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고,
    또한 이미 설한 것도 아니며 설할 것도 아니다.
    설하지 않은 이것이 부처님 설법이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정등각(正等覺)인데 무슨 원인으로
    “설하지 않은 이것이 부처님 설법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요즘말로 하면 이런 거죠.
    ‘당신은 49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법을 설하셨는데,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고, 이미 설한 것도 아니며 설할 것도 아니다,
    또 설하지 않는 이것이 부처님 설법이라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렇게 묻는 거죠.
    49년 동안 설해 놓고 안 했다고 하니 답답하죠.
    여기에서 진리가 드러나는 거예요.
    이제 세존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존 : 나는 두 가지 법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무엇이 두 가지 법인가.
    스스로 법을 얻는 인연과 본래 안주해 있는 법을 두 가지 법이라 한다.
    이 두 가지 법을 인하여 내가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스스로 법을 얻는 인연인가.
    여래가 얻는 것이라면 나 또한 얻는 것이다.
    여기에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이 스스로 얻는 법의 구경 경계를 인연하는 것이다.
    이 자리는 언설과 망상을 벗어났고,
    문자의 상대적인 개념에 구속되는 것을 벗어난 것이다.


    스스로 법을 얻는 인연하고 본래 안주해 있는 법, 두 가지를 얘기 했죠.
    ‘법을 얻는 인연’이라는 것은 설할 대상을 얘기합니다.
    첫 번째는 법을 설할 때는 반드시 인연이 있기 때문에 설하는 거고,
    두 번째는 본래 안주해 있다는 거죠.

    어떤 것이 본래 안주해 있는 법인가.
    옛 성인들의 성스런 도가
    금이나 은 등의 성품과 같이 변하지 않고 법계에 상주하는 것을 말한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말든 간에 법계에 상주하는 것으로
    마치 성으로 나아가는 탄탄한 길과 같다.


    ‘어떤 것이 본래 안주해 있는 법인가.
    옛 성인들의 성스런 도가
    금이나 은 등의 성품과 같이 변하지 않고 법계에 상주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법계에 상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지 말고
    ‘법계 상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그 다음에,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말든 간에 법계에 상주하는 것으로
    마치 성으로 나아가는 탄탄한 길과 같다.’
    여기서도 ‘법계’를 ‘법계’으로 고치세요.
    ‘법계’하면 왜 안 되느냐 하면,
    이것은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阿含經』 연기법경(緣起法經)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부처님이여,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드셨습니까, 다른 사람이 만들었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안 나오거나 관계없이 법계 상주한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만일에 ‘법계 상주한다’를  ‘법계 상주한다’라고 하면
    법계, 법의 세계에 연기법이 상주한다는 말이 되겠죠.
    연기법의 다른 이름이 법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계 상주한다’는 말은
    ‘연기법은 연기법에 상주한다’ 이렇게 되는데,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이런 말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번역이 틀렸다는 겁니다.
    이 번역은 한글대장경에도 똑같이
    ‘법계 상주한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틀린 거예요.

    이런 패턴은 『여래장경(如來藏經)』에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거나 안 계시거나 여래장 상주한다.’
    법계가 여래장입니다.
    그러니까 연기법이 여래장이고 여래장이 법계에요.

    그 다음에 『화엄경』에 보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시거나 안 계시거나
    일체 성(性)과 일체 상(相) 상주한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일체 성과 일체 상 상주한다’ 그러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이 번역은 틀렸다는 겁니다.

    연기법[법계]에는 몇 가지 뜻이 있느냐 하면,
    아주 중요한데, 유식에서도 그대로 인용합니다.
    첫 번째는 무시이래(無始以來), 무시시래(無始時來)의 것이다.
    두 번째는 일체법이 의지한다.
    세 번째는 윤회가 있고, 네 번째 열반이 있다.
    이 연기법을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毗達磨雜集論)」에 이렇게 해석하고 있고,
    「보성론(寶性論)」에 보면 범본에도 법계를 법성이라고 하면서
    똑같이 저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무시시래(無始時來)’라는 것은 시작도 없다는 거죠.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 연기법이에요.
    ‘일체법이 의지한다.’는 것은 생성소멸하는 모든 것은 다 연기법이다,
    그게 다른 말로 법계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윤회가 있고 열반이 있다 이거죠.

    연기법은 네 개로 나눕니다.
    첫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둘째,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셋째,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다,
    넷째,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 이게 연기법이에요.

    윤회가 있는 것은,
    무명이 있음으로 윤회가 있다, 맞죠?
    열반이 있는 것은,
    지혜가 있음으로 열반이 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전부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연기법을 모르면 윤회하고,
    연기법을 알면 열반을 얻는 거고, 그런 겁니다.
    윤회나 열반이나 연기의 모습이에요.
    연기를 다른 말로하면 법계, 법성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여기서 얘기하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거나 하지 않거나 법의 계 또는 법성은 상주한다’
    이게 본래 머무는 법, 본주법(本住法)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줄기차게 법문을 하셨는데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본주법(本住法)을 얘기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출현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법의 계는 상주하는 겁니다.
    출현했으면 법을 설했을 것이고 출현 안 했으면 법을 설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그거와 상관없이 법은 상주하는 거예요.
    이런 뜻입니다.

    자, 이제 비유를 얘기 합니다.
    비유하여 어떤 사람이 광야의 거치른 들판을 가는 중에,
    옛 성으로 뻗쳐 있는 평탄하고 바른 길을 본 것과 같다.
    곧 이 길을 따라 성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성읍경(城邑經)」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밀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옛길을 발견하게 되고,
    그 길을 따라들어 갔더니 아주 크고 아름다운 도시를 보게 되죠.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왕에게 도시를 본 이야기를 하니까
    왕이 그 성으로 옮겨가서 나라가 부강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성을 ‘열반의 성’이라고 하고
    가는 길은 ‘팔정도의 길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옛 성으로 뻗쳐 있는 평탄하고 바른 길을 본 것과 같다.’
    이렇게 얘기를 했죠.
    이 ‘길’이라는 것은 ‘옛날 길’을 얘기 합니다.
    그 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었다는 거죠.

       어느 날 밤 보리수에 깨달음 얻고
       어느 날 밤 사라수에 열반할 때에
       깨달음과 열반까지 이르는 동안
       조금도 법이라고 설한 게 없다.


    이것을 보니까 생각나는 게,
    『법화경』‘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보면 나옵니다.
    ‘부처님은 새삼스럽게 이 세상에 태어서
    출가하고 부처를 이루고 49년간 법문을 설하다가 열반에 들었다’가 아니고,
    부처는 구원겁(久遠劫) 이전에 벌써 성불해 있었다, 죽는 법이 없느니라.
    그런데 왜 태어나서 출가, 수행, 법문하고 죽는 것은 왜 보여주느냐,
    그것은 중생들이 공부를 안 하니까 방편으로 보여준 것이라는 거죠.
    이 세상에 부처님이 안 계신다고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어서 공부할 거 아니냐 그거죠.

    그래서 그 비유를 이렇게 드는 겁니다.
    자식들이 독약을 먹어서 혼미하니까
    명의(名醫)인 아버지가 그 소식을 듣고 쫒아 와서 약을 지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들은 정신없이 혼미하니까
    아버지인줄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약도 독약인줄로 의심이 들어서 먹지를 않는 거예요.
    그 아버지는 이 자식들을 놔두면 죽을 텐데, 고민 하다가 묘책이 떠오른 거예요.
    약을 다 만들어 놓고 해외여행을 가버린 거예요.
    그리고 소문에 해외에서 아버지가 죽었다고 하니까
    자식들이 잠시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그 소식을 들으니까 너무 급한 거예요.
    ‘아이쿠 큰일 났다, 내가 아버지 약 아니면 죽는데,
    어차피 이리 된 거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약이나 먹자’
    이래서 그 약을 찾아 먹고 다 나아졌다는 얘기에요.

    그 다음 얘기가 재미있는 거죠.
    자식들이 약을 먹고 다 나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탁 나타나서
    ‘애들아 나 안 죽었다’ 이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하시는 말씀이
    ‘그 장자, 의사는 부처님이고 자식들은 중생이고,
    약은 바로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가르침을 얘기 한 것이다’ 이런 거예요.
    그래서 부처는 구원겁(久遠劫) 이전에 벌써 성불해 있고
    죽는 법이 없느니라, 이러는 거예요.
    그것은 본주법(本住法)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본래 머무는 법을 깨치셨기 때문에 부처님은 죽지 않는 거예요.
    불사(不死)의 약을 먹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되신 거죠.
    불사(不死)를 이룬 분은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가르침은 전부다 불사의 약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이 불사약을 먹고 다 죽지 않는 부처를 이루는 거죠.

    49년 동안 하나도 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애초부터 본래 법이 다 현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기서 얘기가 그런 얘깁니다.

       자기의 본래 법을 인연하므로
       내가 이제 이 같이 말을 하나니
       부처님과 중생인 우리 사이에
       지혜와 번뇌로서 차별이 없다.


    ‘부처님과 중생인 우리 사이에 지혜와 번뇌로서 차별이 없다.’
    여기에 ‘지혜와 번뇌로서’ 이 말을 끼워 넣었네요.
    본문대로라면, ‘부처님과 중생인 우리 사이에 차별이 없다.’ 이렇게 됩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인연이 되니까 법을 설하고 했지
    본래는 부처님이 살아계시나 안 계시나 관계없이
    진리는 다 갖추고 있다는 얘기에요.

    이것을 풀이해보자.
    이것은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先師)께서 풀이하는 겁니다.
    이것을 풀이해 보자.
    여기에 두 가지 인(因)이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 법을 얻는 것을 인연하는 것이다.
    스스로 얻어지는 법이라는 것은 도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법을 증득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번뇌를 벗어나면 공덕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본래 안주해 있는 법을 인연하는 것이다.
    본래 안주해 있다는 것은 곧 옛 성인들의 성스런 도다.
    이것은 옛 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서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 내용은
    이러한 이치에 근거하여 증득한 자리에서 “설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단지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면 부처님은 항상 설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얻는다는 것은 내 스스로 수행해서 얻는다는 말입니다.

    ‘법을 증득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번뇌를 벗어나면 공덕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증명할 증(證)을 쓴 ‘증득(證得)’이라는 말이 있어요.
    증(證)을 쓸 때는 반드시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증이라는 것은 즉각적으로 증명되는 게 아니고 단계가 있는 겁니다.
    차츰 차츰 밝아가서 체득된 것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얻어지는 법이라는 것은 도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이게 그런 말입니다.
    증득했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노력을 해서
    단계 단계 밟아가서 얻었다 이 말입니다.

    ‘법을 증득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번뇌를 벗어나면 공덕이 드러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진리 아닌 게 없어요.
    그래서 밖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나에게도 그 법이 있기 때문에 안으로 돌려서 내면을 지켜보기 시작하면
    이 법을 깨달을 수가 있는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어디든 통용 안 되는 게 없는 거죠.

    공덕이 드러나는 것은
    중생을 도와주려는 마음, 구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게 공덕이에요.

    ‘또 하나는 본래 안주해 있는 법을 인연하는 것이다.
    본래 안주해 있다는 것은 곧 옛 성인들의 성스런 도다.
    이것은 옛 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서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

    ‘위에서 말한 내용은
    이러한 이치에 근거하여 증득한 자리에서 “설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단지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면 부처님은 항상 설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수행해서 법을 증득하니까,
    그 자리는 불생불멸이고 공이기 때문에 말과 생각을 떠나 있고,
    또 하나는 본래 안주해 있는 법은 무상, 공, 무아, 이런 법을 얘기하죠.
    예를 들어 팔정도, 육바라밀, 이런 것은 전해 내려오는 것이지
    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죠.
    이런 것은 본래 안주해 있는 법이다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부처님께서 한 말씀도 설하지 않았다는 이치가 드러나죠.
    이것을 뒤집어서 얘기하면, 진리라는 것은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거죠.
    본래 안주해 있기 때문에 발견하면 깨달을 수 있는 거죠.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고 스스로 발견해야 됩니다.

    그러면 유식삼성 중에
    본주법, 본래 주하는 법은 어디에 해당하는 겁니까?
    본주법은 항상 상주하는 것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까 원성실성이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