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자증분(自證分)과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비유 (강의)

경호... 2012. 1. 6. 05:15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자증분(自證分)과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비유 (강의)

    여기서는 자증분(自證分), 견분(見分), 상분(相分)을 들어서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을 얘기 합니다.
    이 내용을 알면,
    수행을 할 때 무엇을 없애야 진실성을 얻는 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래서 이 「종경록」에서는
    기존 「유식」에서 하지 않는 것을 얘기하는 게 참 좋아요.

    자증분(自證分)은 스스로 증명하는 부분, 우리 마음 자체를 말합니다.
    견분(見分)은 보는 부분인데 주관을 얘기 합니다.
    이 주관에는 지난시간에 우리가 배운
    현량(現量, 직관)과 비량(比量, 추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상분(相分)은 모습으로 있는 부분, 객관을 얘기하는데, 인식 대상입니다.

    그래서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면
    저것이 무엇이라고 인식 결과가 오는데,
    이게 증명하는 부분, 자증분이에요.

    그러면 자증분(自證分), 견분(見分), 상분(相分)과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을 배대칠 수 있습니까?
    이 배대를 칠 수 있으면 고수에요. ㅎㅎㅎ

    봅시다.
    또 비유를 들어 자증분(自證分)과 견분(見分) 상분(相分)을 이해하여 보겠다.
    자증분에서 견분과 상분을 일으키고,
    다시 이 견분과 상분을 집착하여 아(我)와 법(法)을 삼는다.


    ‘자증분에서 견분과 상분을 일으키고’
    자증분은 자체이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이 나왔다는 거죠.

    ‘다시 이 견분과 상분을 집착하여 아(我)와 법(法)을 삼는다.’
    아(我)는 견분에, 법(法)은 상분에 해당합니다.
    아(我)는 왜 견분에 해당하느냐 하면,
    아까 얘기했지만 견분은 현량[직관]과 비량[추리]이라 그랬죠.
    우리는 대상을 볼 때 ‘내가 본다’,
    추리를 하면 ‘내가 추리를 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견분도 감각적인 직관이기 때문에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 ‘내가 냄새 맡는다’, ‘내가 맛본다’,
    이렇게 견분에는 ‘내[我]’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상분, 대상을 왜 법(法)이라 하느냐 하면,
    찻잔, 책상, 시계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거죠.
    그게 법이 되는 겁니다.
    보여 지는 것이 상분인데 그 상분[객관]이 마음이 투영 되어서 나타난 거예요.
    찻잔이라는 이미지도 종자가 발현해서 찻잔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찻잔을 개한테 주면, 개는 찻잔이라고 인식 안 합니다.
    이렇게 동물이 보는 것과 사람이 보는 것이 다르다면
    찻잔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게 아닌 거죠.
    사람은 찻잔이라는 종자가 튀어나와서 찻잔이라고 인식하는데,
    개는 찻잔이라고 하는 종자가 없어요.
    그래서 찻잔이라고 보지 않고 다른 거, 개밥그릇이라든지 이런 걸로 보겠죠.
    그렇게 다르게 보는 거예요.
    이런 현상은 내 정보가 투영되어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면
    그걸 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전부 마음이 만든 거죠.

    자, 그러면 자증분은 어디에 해당합니까? 원성실성.
    견분과 상분은? 의타기성.
    아(我)와 법(法)은? 변계소집성.
    됐네, 잘 아시네.
    머리가 조금 돌아가네요. ㅎㅎㅎ

    이것은 마치 수건을 묶어서 토끼를 만든 것과 같다.
    여기서 수건은 존재하는 것으로 자증분을 비유한다.
    수건을 묶어서 토끼 머리를 만들 때에 본래 수건 위에는 토끼 머리가 없었다.
    지금 수건을 묶어서 나온 것이다.
    이런 까닭에 토끼 머리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자증분 위에 본래 견분과 상분이 없는 것과 같다.
    진실을 증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견분과 상분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견분과 상분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수건을 묶어서 토끼를 만든 것과 같다.
    여기서 수건은 존재하는 것으로 자증분을 비유한다.
    수건을 묶어서 토끼 머리를 만들 때에 본래 수건 위에는 토끼 머리가 없었다.’
    원래는 머리가 없는데 나왔죠.
    여기서 수건 자체는 자증분이고, 수건이 접힌 것은 견분 상분이죠.
    주관과 객관이 마주쳐서 토끼 머리가 나온 것은 변계소집성이에요.
    원래 있지를 않은 거죠.

    ‘지금 수건을 묶어서 나온 것이다.
    이런 까닭에 토끼 머리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자증분 위에 본래 견분과 상분이 없는 것과 같다.’
    그렇죠, 자증분 위에서는 견분과 상분이 없죠.

    ‘진실을 증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견분과 상분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분별이 일어났다는 의타기성이에요.

    ‘이런 까닭에 견분과 상분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자증분의 입장에서 보면 견분과 상분은 없는 거예요.
    원성실성 입장에서 보면 의타기성은 없는 거죠.
    그래서 지난번에 얘기 했죠.
    삼성 중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뭐라 했죠?
    원성실성하고 변계소집성이고 사라지는 것은 의타기성이라 했죠.
    그래서 여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수건을 묶어서 만든 토끼 머리는 이미 한 겹의 거짓이다.
    여기에 다시 두 개의 토끼 귀를 묶어 내는 것은 또 한 겹의 거짓이다.
    이것은 마치 자증분에서 견분과 상분을 전변하여 일으키는 것은 이미 한 겹의 거짓이고,
    다시 이 견분과 상분을 집착하여 아(我)와 법(法)으로 삼는 것은
    또 한 겹의 거짓이 덮어진 것과 같다.
    곧 견분과 상분이 거짓으로 있는 것 같더라도,
    사실은 분별하는 종자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我)와 법(法) 두 가지에 집착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망상으로 두루 헤아려 허망하게 집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견분과 상분은 아뢰야식 종자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정리를 하죠.

    변계소집성은 상(相)이라 해서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의타기성은 식(識)이고, 원성실성은 진여입니다.
    원성실성은 자증분을 얘기하고,
    의타기성은 견분과 상분을 얘기하죠.
    그 다음에 변계소집성은 견분은 아(我), 상분은 법(法), 이렇게 나오는 것이죠.

    의타기성이 식(識)이라는 것은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는 거라 했죠.
    그러면 견분이 상분을 보는 게 맞죠.
    이렇게 견분이 상분을 보고 있는 모습은
    서로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의타기성의 모습이에요.
    서로 의지하는 데서 어떤 집착이 오느냐 하면,
    볼 때, 보는 아(我)가 있고 보여 지는 대상이 있다 보니 법(法)이 생기는 겁니다.
    이 견분은 자증분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견분과 상분이 사라지면 자증분으로 돌아가죠.
    자증분은 마음 자체, 진여를 얘기합니다.
    이 진여가 수연(隨緣)을 하게 되면 식(識)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하지만 본질은 늘 불변(不變)이에요.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럼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
    주객이 사라져 버리면 깨달음을 얻는다 이거죠.
    그래서 『화엄경』 ‘공덕품’에 보면
    ‘주객이 사라졌을 때 그것이 진실하다’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대상 인식이 멈춰져야 된다는 거죠.
    분별하는 마음은 의타기성이고,
    분별한 결과가 변계소집성, 상(相)이라고 했죠.
    그래서 이 분별이 멈춰지면 상이 사라져 버리고
    동시에 그 의타기성은 원성실성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여기서 얘기가, 견분 상분이 사라져버려야 된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자증분만 남게 되죠.
    이게 진실이에요.

    중요한 얘기는,
    아(我)와 법(法)은 전부다 저장된 종자[정보]에서 나온 겁니다.
    종자가 현행해서 주관이 되고 현행해서 객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종자는 생멸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견분 상분, 주관 객관이 항상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뭔가 하면,
    우리가 심한 충격을 받으면 의식이 가버리잖아요.
    의식이 가버리면 주객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것을 기절이라 그래요.

    그런데 수행을 해서 정말 주객이 없는 자리에 머무르면,
    그것은 깨달음이고 진여자리입니다.
    그래서 주객이 없는 자리에 가려면,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까지 가서
    그 다음에 주객이 없는 진여의 자리, 초지(初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능소주객(能所主客)이 다 사라졌다, 이러는 거죠.
    이것은 무상관찰을 통해서 사라지는 겁니다.

    이 무상관찰은,
    몸 사라지고 그 다음에 수상행식(受想行識), 정신적인 것까지
    자아가 없고 실체가 없음을 알 때 아공(我空)을 이루고,
    내 밖에 보이는 이 세계도 자아나 실체가 없다는 법공(法空)을 이루고,
    그 다음에 아공 법공 평등공에 이르러서
    더욱 용맹정진을 하게 되면 진여자리에 들어가는데,
    용맹정진할 때까지 해야 됩니다.
    이 무상을 통해서 진여의 자리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 시간이 쪼께 걸릴 겁니다. ㅎㅎㅎ

    몸만 사라져도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이 사라지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죄, 거짓말, 이간질, 악담, 꾸미는 말, 이게 없어지는 거예요.
    거기에 따라서 수상행식(受想行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탐진치가 소멸해 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공(我空)이 되는 거죠.
    그래서 보이는 이 세계도,
    ‘아, 실재하지 않는구나.’, 법공(法空)으로 가는 겁니다.
    이런 것은 전부 후천적인 번뇌가 없어져가는 과정이고
    선천적인 번뇌로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또 있어요.
    그래서 이 생에 다 못하면 다음 생에 또 하고,
    줄기차게 해야 됩니다.

    초지에 들어가면 성인인데, 재가자로서 하기에는 참으로 힘들어요.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하는 게 너무 많아가지고
    진척이 있을만하면 후퇴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면서 나아가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재가자들은 수행에 진전이 잘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진전이 없나.’ 하면서
    가르치는 사람을 원망을 해요.
    본인이 그런 환경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러는 거죠.

    한 마디 하자면,
    주관과 객관을 얘기할 때
    정신현상이든 물질현상이든 객관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 소멸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그 다음 주객이 없는 자리에 가는 거죠.
    심지어 우리가 고요하다고 하는 선정상태도 객관화 된다면, 그것도 없어집니다.
    객관화 될 수 있는 것은 소멸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주와 하나가 됐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인식 되는 것은 사라지는 거예요.
    무엇인가를 대단한 체험을 했다하더라도
    그 체험한 것이 느끼고 불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체험은 없어지는 거죠.
    어떤 경지에 갔다 하더라도 그 경지가 객관화 될 수 있는 거라면
    그 경지는 바뀌는 거예요.
    대상을 인식하는 게 주관이라 하더라도
    주관이 다시 객관화 되어서 인식 된다면
    그 주관은 사라지게 되어 있는 거죠.
    이런 사실을 잘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얘기 해줬는데도 불구하고
    꿈이라는 것이 객관화 되어서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인데,
    꿈을 꿨는데 꿈 풀이 해달라고 이러죠. ㅎㅎㅎ
    그리고 수행 중에도 뭐가 나타났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서
    아주 희망을 품죠. ㅎㅎㅎ
    그런데 별거 아니라고 하면,
    기대가 팍 무너져가지고 실망하는 표정이 역역하고 그러는 거예요.
    나타나는 것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단,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마음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수행 진도를 알아 볼 수 있기는 있어요.
    그런 겁니다.

    겨우 몸 사라진 것을 가지고 대각(大覺)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인데,
    그것을 가지고 안과 밖이 없고, 무아고 이런 소릴 하잖아요.
    하지만 몸 사라지면 안과 밖이 없고,
    ‘몸은 내다’하는 게 사라지는 무아가 맞긴 맞아요.
    그런데 그것이 수행 52단계 첫 번째 십신(十信), 열 가지 믿음의 단계입니다.
    이제 수행 출발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난리를 치고 하는 사람 참 많아요.
    그러면 안 됩니다.
    아직 먼 거예요.

    끝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