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삼성(三性)은 성(性)과 상(相)이 걸림 없다 (강의)

경호... 2012. 1. 5. 02:16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삼성(三性)은 성(性)과 상(相)이 걸림 없다 (강의)

    삼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죠.
    이 삼성은 성과 상이 걸림이 없다, 이런 말이죠.
    성품 성(性)자는 모양이나 색깔이 없는 것을 얘기하고
    모양 상(相)자는 모양이나 색깔이 있는 걸 얘기 하죠.
    물질적인 상만 얘기하는 게 아니고 정신적인 상도 다 포함해서 하는 얘깁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원성실성과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은
    어느 한 시점 한 곳에서 한정되는 것이 없이 하나를 따르면 전체가 거두어지고,
    진여와 망념이 서로 원융하여 성(性)과 상(相)에 걸림이 없다.


    ‘하나를 따르면 전체가 거두어지고’
    이 말은, 삼성이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고,
    그리고 성과 상이 걸림이 없다고 했는데,
    삼성은 하나이기 때문에 걸리는 게 아니죠.
    그러면 성(性)과 상(相)에 대해서 얘기를 해 봅시다.

    변계소집이라는 것은 ‘헤아려서 집착하는 바’거든요.
    이렇게 헤아려서 집착하는 바의 대상이 상(相)으로 나타납니다.
    의타기성은 우리 마음, 식(識)이고,
    원성실성은 진여라고 기본적으로 이해가 될 거예요.
    여기서 두 가지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상(相)이라는 것은 심정적으로 보면 있는 거예요.
    말뚝을 보고 귀신으로 착각한다든지,
    또는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진짜 있는 것 같이 생각 되니까 정(情)으로 있는데,
    이치로 따져보니까 없더라 이거죠.
    왜 그러냐 하면,
    착각하고 있지만 자신이 착각하는 줄 모르면
    그 귀신이나 뱀은 심정적으로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치를 따져보면 착각이기 때문에 없어요.

    그리고 의타기성에도 두 개가 있는 겁니다.
    타를 의지해서 일어난다 했는데,
    여기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했지만 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새끼줄 자체는 여러 가닥이 꼬여 있으니까
    홀로 독립 된 게 아니고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빌려서 있는 거죠.
    이것을 빌릴 가(假)자를 써서 가유(假有)라 그럽니다.
    이런 새끼줄도 가닥가닥 모이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본질적인 것은 없는 거예요.
    무엇인가 실체도 없고 남는 게 없는 무성(無性)이에요.

    원성실성, 진여에도 두 가지가 있죠,
    진여는 텅 빈 공이고 인연을 따르지만[隨緣],
    본질은 불변(不變)이에요.

    이렇게 봤을 때 유(有)로 있는 것은 모양 상(相)에 들어가는 겁니다.
    인연에 따르는 것도 상이 있는 것이고,
    착각해서 보는 것도 상이 있는 거예요.
    또 이치도 없고 무자성은 성(性)에 속합니다.
    본질이다 이거에요.

    그러고 보면 삼성(三性)이 모두 상(相)과 성(性)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식삼성이라는 게 성상(性相)이 서로 교차해서 있는 거죠.
    그래서 ‘원융하다’ 이런 말을 쓰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수행하면서
    ‘성상이 걸림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우리가 오해를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본질이라 그러면 안 됩니다.
    찻잔을 예로 든다면,
    이것은 4대가 결합되어서 모양이 있는데 이게 상(相)이고,
    이렇게 결합되어 있는 것은
    그 안에 어떤 고정되어 있는 게 없습니다.
    이게 성(性)이에요.
    이렇게 찻잔 하나에도 성상이 같이 있는 겁니다.

    사람도 똑같습니다.
    사람 본질은 자체 성품이 없고[性],
    4대로 결합되어 모양[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상이 같이 있는 겁니다.
    4대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실체가 없고 고정되어 있는 게 없다는 것인데, 이게 성품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결합되어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해체가 가능하죠.
    나이가 들면 죽는 이치가 그겁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은 성(性)이라 하고
    모습이 드러난 것을 상(相)이라 하는데
    이 성상이 서로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죠.

    자 봅시다.
    여래가 가르친 모든 가르침과
    항하사 모래알만큼의 많은 이치가 비밀한 뜻으로
    전체가 모두 삼성문(三性門) 가운데에 있어,
    진제와 속제의 근본과 지말이 한 시점에 모두 거두어지는 것이다.
    유식의 바른 이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다시 여기에 다른 길이 없다.


    모든 가르침이라는 게 삼성에서 벗어나는 게 없다,
    그래서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있는데,
    모양 상(相)은 속제입니다.
    속제는 세속의 진리인데, 말과 생각의 세계에요.
    모양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한 생각을 하죠.
    반면에 성품 성(性)은 말과 생각이 떠났기 때문에 진제라 그럽니다.

    그리고 근본(根本)과 지말(支末)이 있는데,
    성품 성은 근본이고, 근본에서 상이 나왔기 때문에 지말이에요.

    『화엄경』게송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진제를 관찰하게 되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진제는 성품 성이죠?
    성품 성은 비어 있는 공을 얘기 합니다.
    자체 성품이 없는 결여되어 있는 모습,
    이것을 보게 되면 번뇌가 없어지는 겁니다.

    진제를 보려면,
    의타기성, 모든 것은 상호 의존해서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매 순간 변하고 실체가 없다, 이게 의타기성인데,
    이런 의타기성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을 하게 되면,
    변계소집, 자기가 헤아려서 나타난 세계가
    전부다 착각이고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해서 변계소집성이 사라져 버리면,
    그 의타기성 자체가 원만히 실성을 이룬, 원성실성이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식의 바른 이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다시 여기에 다른 길이 없다.’

    의타기성은 유식의 바탕으로서
    의타기성에서 분별을 일으키면 변계소집성이다.


    여기에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의타기성에서 집착해서 헤아린 분별의 결과가 변계소집성인데,
    두루 헤아려서 집착된 바[所]가 객관적으로 모양이죠.
    의타기성에서 무엇을 분별했느냐,
    새끼줄을 분별하니까 뱀으로 나타난 거예요.
    그게 변계소집성이다 이 말이에요.

    내가 대상을 분별하는 것은
    주관[我]과 객관[相]이 서로 의지하고 있으니까 의타기성이고,
    분별의 결과는 허공의 꽃, 뱀, 귀신으로 나타나는 거죠.

    그럼, 확인해 보죠.
    이것은 뭐죠?
    “찻잔요.”
    여러분들이 이것을 찻잔이라고 분별하는 것은
    이 찻잔을 의지해서 분별이 일어나니까 의타기성입니다.
    그리고 분별해서 일어난 결과가 찻잔이죠?
    맞죠? “네”
    그러면 여러분들은 변계소집성에 걸린 겁니다.
    왜냐하면, 찻잔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이름을 붙여서 그런 것이지
    찻잔에 해당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 찻잔에서 아시다시피 지수화풍 4대로 이루어졌는데
    이 지수화풍을 다 걷어버려도 존재한다면 맞는데,
    빼 버리면 온데간데없잖아요.

    그래서 찻잔을 인식하는 것은 의타기성이고
    인식의 결과는 변계소집성이라는 거죠.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 다음에,
    의타기성에서 진실을 깨달으면 원성실성이다.
    분별로 말미암아 한편으로 생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실로 말미암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의타기성에서 진실을 깨달으면 원성실성이다.’ 이 말은,
    ‘의타기성을 알고 보니까 본질은 없더라’, 이게 원성실성이에요.

    ‘분별로 말미암아 한편으로 생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실로 말미암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분별’은 의타기성이고, ‘생사’는 변계소집성이죠.
    그런데 분별을 걷어내니까 의타기성이 바로 원성실성이더라,
    이것이 열반인 거예요.
    이게 대단한 겁니다.
    여기 포인트는 의타기성이죠.
    내가 분별하면 삶과 죽음이 나오는 변계소집성이고
    분별을 떠나버리면 삶과 죽음이 없는 열반인 거죠.

    이 말은 아까 찻잔 얘기를 했는데,
    찻잔이라고 자꾸 고집을 하면 생사에 걸리는 거예요.
    세상에 끄달려 가는 겁니다.
    대상이 있는 것 같이 보기 때문에 거기에 끄달려가지고 생사 유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상이라는 게 고정되거나 분리되거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면,
    마음의 움직임이 그쳐지고, 생사유전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도 보살경지까지 간 분들은 중생이 불쌍하니까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지만,
    열반에 들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얘기해볼까요?
    여러분들이 이것을 ‘찻잔’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몸도 ‘나다’ ‘내 것이다’라고 집착 하고 있다가 죽으면 버리게 되죠.
    죽어서 한 20일쯤 되면 ‘나다’라는 몸이 흩어져 가요.
    집착하던 ‘나’라는 몸뚱이가 없어져가니까 ‘아이고, 큰일 났다’ 이러면서
    육신을 만들어야 되니까 어머니 자궁을 찾아서 헤매는 거죠.
    그래서 또 태어나는 거예요.
    태어나서 1살 2살 되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3살쯤 되면 무엇이든 자기 거라고 낑낑거리고 뺏으면 울고 그러죠.
    그리고 배우는 게, 이것은 내꺼, 이건 엄마꺼, 이건 아빠꺼 이런 걸 배우고
    더 커서 총각 같으면, 저 처녀가 아름답다고 쫓아 와서 청혼하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결혼하면 ‘넌 내거니까 남 쳐다보지 마라’ 이러죠.
    겉으로는 안 그래도 속은 그렇잖아요.ㅎㅎㅎ
    대상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예요.
    좋을 때는 그러다가 싫어지면 이혼하고 난리를 치고 사니 죽니 이러는 거예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또 반복을 하는 거죠.
    이게 고통이 이루 말할 수도 없어요.

    그런데 공부를 좀 해가지고 찻잔을 턱 보니까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진짜가 아닌 거예요.
    찻잔이라는 게 환영에 지나지 않고 이름에 지나지 않는구나, 이렇게 아는 거예요.
    그러면 사물에 대한 집착이 떨어져 버려요.
    몸도 ‘몸은 나도 아니고 내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되면 마음이 안 일어난다는 거죠.

    사물을 볼 때, 그 비어 있는 시선을 보게 되면
    인식이 멈춰지는 현상이 생겨요.
    이렇게 되면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거예요.
    이게 보살의 경지라는 거죠.
    죽어서 몸이 없어져도 전혀 두려움이 안 생기는 거예요.
    그때는 초탈되어서 더 이상 어머니 자궁을 안 찾게 되고 그냥 열반에 드는 겁니다.
    그렇지만 중생들이 이러한 진실을 모르고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안타까움이 생겨서 다시 어머니 자궁을 일부러 선택해서
    색신을 나타내는 거죠.
    이런 분은 생사가 없는 자리에 머물지만
    중생이 그것을 모르고 고통당하니까 너무 가슴이 아프고 불쌍해서
    그것을 가르쳐주려고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서 오는 거예요.
    이게 부처님이에요.

    이해가 되세요?
    우리가 열반을 얻고 부처되는 게 좋죠?
    그러면 의타기성을 통해서 변계소집성을 소멸하고 원성실성을 회복할 때
    우리는 열반을 얻는 거예요.

    분별하는 성품이 공(空)한 것임을 요달하면 생사 자체에서 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진실한 성품이 있다고 잘못 알면 열반 자체에서 생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한 가지 법으로,
    정식(情識)을 따라 이치를 드러내어 세 가지를 만드는 것이다.
    셋은 셋이 아니면서 하나의 이치로 원만하고,
    하나는 하나가 아니면서 세 가지 성품을 온전하게 갖추는 것이다.
    일체법을 드러내고 거두어들이는 데에 하나도 빠뜨리는 것이 없이,
    숨고 드러나는 이치가 항상 여여한 것이다.


    ‘분별하는 성품’은 의타기성이죠.
    ‘의타기성 성품이 텅 비어 있는 것을 요달하면,
    삶과 죽음의 자체에서 열반을 이루는 것이다.’
    이 말은 생사 즉, 열반이에요.
    삶과 죽음이 그대로 열반인데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느냐 하면,
    분별하는 마음을 그치면 되고,
    그치는 방법은 공을 보면 된다,
    공을 보는 것은 무상을 통해서 봐야 된다 이거죠.

    『해심밀경』에서 ‘인연에 의해서 모든 법이 생성한 줄을 잘 알면
    변계소집성이 없어진다’ 이랬어요.
    인연이라는 것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이죠.
    이렇게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모든 존재가 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졌다 반복하는 겁니다.
    그런 시각에서 형상을 잘 보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무상관찰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허공에 꽃이 피었다 졌다하지만
    허공이라는 바탕은 원래 생긴 적도 없고 소멸한 적도 없는 그것을 보는 거죠.
    꽃을 보는 게 아니고 꽃이 피고 지는 그 바탕인 허공을 보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게 아니고
    일어난 곳과 사라진 곳을 보게 되면
    그게 바로 불생불멸이고 열반인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법인(三法印) 중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잘 봐야 만이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얻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얻는 거예요.

    ‘모든 것이 한 가지 법으로,
    정식(情識)을 따라 이치를 드러내어 세 가지를 만드는 것이다.’
    한 가지 법이라는 것은, 삼성(三性)이 다 하나에요.
    ‘정식(情識)’이란 말은 심정적, 감정적으로 그 감정에 따라서 인식하는 마음입니다.
    ‘세 가지’는 유식 삼성이죠.

    ‘셋은 셋이 아니면서 하나의 이치로 원만하고,
    하나는 하나가 아니면서 세 가지 성품을 온전하게 갖추는 것이다.
    일체법을 드러내고 거두어들이는 데에 하나도 빠뜨리는 것이 없이,
    숨고 드러나는 이치가 항상 여여한 것이다.’
    의타기성에서 분별을 말미해서 변계소집이 나타나고,
    진실을 말미해서 원성실성이 이루어지는 거죠.

    하나도 아니요 셋도 아니면서
    진여의 실지(實地) 자리에서 성(性)과 상(相)이 사라지고,
    셋이기도 하고 하나이기도 하면서
    진리가 가득 찬 세계로 빛나게 퍼져 나가는 것이다.
    요긴한 점을 거두어 돌아가는 것이 이 종지(宗旨)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셋이고[三性],
    셋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를 얘기하는 겁니다[眞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