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삼성(三性)은 성(性)과 상(相)이 융통하다 (강의)

경호... 2012. 1. 5. 02:15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삼성(三性)은 성(性)과 상(相)이 융통하다 (강의)

    ‘성(性)’은 성품 성자를 얘기하고 ‘상(相)’은 모양 상을 얘기하는데
    이 두 개는 반대적인 개념이에요.
    상(相)은 모양과 색깔이 있지만
    성(性)은 모양과 색깔이 없고 비어있는 걸 얘기합니다.

    묻습니다.
    :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의 법이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만약 같다고 말씀하신다면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있으나
    변계소집성은 없다”고 하신 것과 계합되지 않습니다.
    다르다고 하신다면 또 무엇 때문에 “모두가 동일한 성품으로,
    말하자면 어떤 결정된 성품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 이 세 가지가 같고 다름을 물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우리가 공부를 해야 되요.

    해답을 듣기 전에 얘기합시다.
    변계소집성은 심정적으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심정적으로는 있죠.
    정(情)으로 보면 있는데
    이치를 따져보니까 이름에 지나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것이죠.
    그러면 이치로 따져보니까 없더라 이거죠.

    원성실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바뀌지 않는 것은 불변(不變)이죠.
    그렇지만 인연을 따라서 모습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의타기성위에 변계소집성이 사라지면
    의타기성 자체가 원성실성이라 그랬죠.
    그러면 이것은 인연을 따른다, 수연(隨緣)이죠.

    그리고 타를 의지해서 있는 의타기성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타를 의지한 것은 가짜고, 빌린 것은 있다면
    이게 실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실체가 없는 것은 무성(無性)이 되죠.

    여기서 배대를 쳐보죠.
    변계소집성에 있을 유(有)자하고,
    의타기성은 있는 게 가정되어 있죠.
    그 다음에 원성실성은
    인연 따르는 모습의 현상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렇다면 이 세 가지는 같죠.
    이치로 없는 변계소집성하고, 성품이 없는[無性] 의타기성하고,
    불변하는 원성실성은 같은 거예요.

    그러면 뭐가 다른지 읽어 보면서 공부해 봅시다.
    : 이 삼성(三性)의 법문은 모든 부처님이 은밀한 뜻으로 설파하신 것이다.
    모든 식(識)이 일어나는 자리로, 가르침 전체의 근본이 되는 자리다.
    그러므로 이 법문에서 무언가 취한다면 모두 범부의 상견(常見)에 떨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이 법문을 벗어나 버린다면 모두가 성인의 지혜로 가는 문을 잃게 되는 것이다.


    ‘상견(常見)’은 항상하는 견해라는 말이죠.
    이 법문에 뭐가 있다고 하면 항상하다는 견해에 떨어지는 거고,
    필요 없다고 버리면,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없는 거죠.

    그러므로 현수법장(賢首法藏) 법사는
    화엄종에 의지하여 삼성(三性)의 같고 다른 이치를 풀었다.
    첫째는 원성실성의 진여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하나는 변하지 않는 이치며 또 하나는 인연을 따라 가는 이치다.
    둘째는 의타기성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하나는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치며 또 하나는 결정되어진 자성이 없다는 이치다.
    셋째는 변계소집성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하나는 정식(情識)으로 있다고 하는 이치며
    또 하나는 참된 이치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이치다.


    ‘원성실성의 진여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하나는 변하지 않는 이치며 또 하나는 인연을 따라 가는 이치다.’
    불변(不變), 수연(隨緣) 맞죠.

    ‘의타기성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하나는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치며 또 하나는 결정되어진 자성이 없다는 이치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치며’는 가짜로 있는 거, 가유(假有)죠.
    ‘결정되어진 자성이 없다는 이치다.’ 무성(無性)이죠.

    ‘셋째는 변계소집성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하나는 정식(情識)으로 있다고 하는 이치며
    또 하나는 참된 이치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이치다.’
    역시 이치는 없다는 거죠.
    두 가지 다 나왔습니다.

    여기서 정리를 하죠.
    이치가 없고, 성품이 없고, 불변하는 이것을 ‘성(性)’이라 하고,
    인연을 따르고 가짜로 있고 정으로 존재하는 이것은 모양 상(相)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성품[性]과 모양[相]은 다르죠.
    그렇지만 삼성(三性)에서 같이 원융이 되는 거죠.
    성품은 근본(根本)이고 상은 지말(支末)이에요.
    성상(性相)이 이렇게 구분 됩니다.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 더 얘기하면,
    성품은 진제(眞諦)라 하고 상(相)은 속제(俗諦)라 하는데,
    진제(眞諦)는 말과 생각이 떠난 자리고,
    세속의 진리, 속제(俗諦)는 말이나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 두 개는 분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말과 생각을 떠나있지만
    진리를 표현 하려면 속제의 말과 생각을 빌려야만 표현되기 때문에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거죠.

    여기서 원성실성의 진여가 변하지 않는 이치와,
    의타기성의 결정되어진 자성이 없다는 이치와,
    변계소집성의 참된 이치에 아무 것도 없다는 입장을 기준 한다면
    이 세 가지 이치로 말미암아, 세  가지의 성품은 하나로 같은 것이다.
    또 원성실성의 진여가 인연을 따라가는 이치와,
    의타기성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치와
    변계소집성의 정식(情識)으로 있다고 하는 입장에서 기준 한다면
    이 세 가지 이치로 말미암아, 세 가지의 성품은 또한 다른 게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진여가 망념의 지말적인 부분까지 감싸고 있으며,
    망념이 진여의 근원에 확철한다.
    성(性)과 상(相)이 융통하여 장애가 없는 것이다.


    ‘확철한다.’는 것은 꿰뚫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성(性)과 상(相)이 같고 다름인데, 자 봅시다.
    이 성품은 원성실성에 불변(不變)이라는 성품에 기준하면
    의타기성의 ‘무성(無性)’과 변계소집성의 ‘이치가 없다’는 이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죠.
    변계소집성이 번뇌인데, 이 성품은 번뇌까지 다 포섭을 하는 거예요.
    번뇌의 본성이 실체가 없는 무자성(無自性)이에요.
    그래서 번뇌가 실체가 없음을 보면 번뇌 즉, 보리(菩提)가 되는 거예요.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상(相)의 입장에서 보면,
    원성실성이 인연을 따르는 모습이 상(相)을 가지고 있고,
    의타기성에서 가짜도 있고 변계소집성에서도 병으로 있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이 두 개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입니다.
    의타기성에서 분별하면 변계소집성이 나오고
    의타기성에서 분별이 사라져 버리면 원성실성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별로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그럼 확인해보죠.
    이게 찻잔 맞습니까?
    찻잔은 이름이 찻잔일 뿐이다,
    그러면 그 자체는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흙에다 물을 부어 이겨서 모양을 만들고,
    여기다가 유약을 칠하고 불에 구워서 찻잔이 나온 거예요.
    인연에 의해서 찻잔이란 이름이 있는 것이지
    찻잔이라는 고유한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니죠.
    우리 몸도 부모로부터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이 몸인데,
    어쩔 수 없어서 몸이라고 했을 뿐이지
    몸 자체의 어떤 실체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 얘깁니다.
    그런 것은 변계소집이라는 겁니다.
    착각이라 이 말이죠.

    한 발 더 나아가서 물어보겠습니다.
    몸이라는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고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게 맞죠?
    그렇다면 삶과 죽음은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는 몸을 기준으로해서 삶과 죽음을 얘기하죠?
    그런데 허공에 꽃처럼, 새끼줄을 뱀으로,
    말뚝을 귀신으로 착각한 것이나
    몸을 기준으로해서 삶과 죽음을 얘기하는 것이 같다면, 착각이죠?
    그러면 해탈합니다. ㅎㅎㅎ
    진실이 다 드러난 거예요.
    이렇게 진실이 드러나도 명확하게 이해는 되지만
    수행할 때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이냐가 생깁니다.
    그래서 그전에도 얘기 했지만,
    몸이나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졌다하는 것을 잘 봐야 된다,
    일어날 때 일어나는 곳이 있나 살펴보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곳이 있나 살펴보라고 한 겁니다.
    만일에 일어나면 일어나는 뿌리가 있던지
    사라지면 돌아가는 어떤 곳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허공에 꽃일 뿐이다,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거예요.
    이렇게 파고 들어가면 지혜가 생기고 깨달음을 얻는 거예요.

    우리는 마음이 대상에 따라 자주 흔들리기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을 고정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정을 닦아야 됩니다.
    마음이 동요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 선정의 힘이에요.
    그래서 수행을 하면 선정과 지혜가 같이 닦여집니다.
    처음에는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선정을 닦은 다음에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지혜가 계발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성질이 급하고 화를 잘 내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이런 사람은
    위빠사나를 먼저 닦아서 지혜를 계발하고 난 뒤에
    선정을 닦는 게 좋아요.

    그래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선정과 지혜가 갖춰지면
    지관(止觀)을 쌍수(雙修)해 가는 게 최종적인 대승의 수행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