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멸(滅)할 수 있다 (강의)

경호... 2012. 1. 5. 02:13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멸滅)할 수 있다 (강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
    세 가지 얘기를 했는데,
    의타기성은 말 그대로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이죠.
    그것은 없어질 수가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나무는 땅이나 물, 햇빛 등에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의타기성입니다.
    이렇게 타를 의지해서 존재하는 이 나무는 영원히 그대로 살 수가 없어요.
    우리 몸도 부모님을 의지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타를 의지해서 존재합니다.
    물도 필요하고 공기도 필요하고 음식도 필요하고,
    요즘은 미국 쇠고기에도 의지하죠.
    이런 몸뚱이도 타를 의지해서 있기 때문에 바뀌거나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타기성은 멸할 수 있다고 얘기 하는 겁니다.

    묻습니다.
    :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모습은
    단지 자기 마음의 허망한 분별로 있는 것입니다.
    이(理)와 사(事)가 모두 적멸하여 이름과 실체가 함께 허망한 것인데,
    어떻게 근심하거나 즐거워하는 경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理)’는 형상이 없는 것을 얘기하고
    ‘사(事)’는 형상이 있는 것을 얘기 합니다.
    ‘이(理)와 사(事)가 모두 적멸하여 이름과 실체가 함께 허망한 것인데
    어떻게 근심하거나 즐거워하는 경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름과 실체가 허망한데,
    자기마음의 허망한 분별로 이름과 실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허망하다는 겁니다.

    답을 합니다.
    : 비유하여 야밤에 길을 가다가 말뚝을 보고 귀신이라 하고,
    새끼줄을 의심하여 뱀이라 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뱀과 귀신의 이름과 실체는 조금도 없다.
    사람의 성품과 모습이 항상 공적(空寂)하여 얻을 수 없는 것이라도 두려운 마음을 내는 것은
    바탕이 비어 있는 것으로써 현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뒤집어서 얘기하면,
    모든 현상은 비어 있는데 현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이게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여기 찻잔을 보면 현상이 있는 거죠.
    현상이 있는 것은 언제든지 조건만 맞으면 깨질 수 있죠.
    그래서 이것을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깨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현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또 다르게 얘기하면,
    우리 몸도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는 괜찮지만
    횡단보도가 없으면 두려움이 있게 되죠.
    자동차에 치면 경제적 손실도 오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어버릴 수 있잖아요.
    부서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항상 좌우를 보고 부딪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현상은 본질이 비어있다 이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죠.
    비어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하면,
    우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이 몸은 ‘내다’, ‘내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말뚝을 보고 귀신이라 하고,
    새끼줄을 의심하여 뱀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이게 실재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착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전번 시간에도 얘기 했지만, ‘왜 착각을 일으킬까’ 이렇게 생각해야 되요.
    새끼줄은 왜 뱀으로 보이고, 말뚝은 왜 귀신으로 보이느냐 이거죠.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착각이 일어날까’, 의심해 봐야 됩니다.

    제가 출가할 땐데,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산길을
    두려움이 생겨서 『천수경』을 외우면서 가는데,
    그 두려움은 명확하게 잘 보이면 두려움이 하나도 없을 텐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반딧불 같은 것은 왔다 갔다 하고,
    컴컴한 숲 속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는 거죠.

    여기서 두렵다는 것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면 두려워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면 불확실한 게 왜 생기는지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대상이 분명하다면 의심을 하거나 두려워할 게 없지만,
    대상이 불분명하다는 데 있어요.
    그렇다면 대상 자체에서 그런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대상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이 마음에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실제 대상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부터 규명을 합니다.
    특히 유식에서는 이게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거든요.
    과연 대상이 내 밖에 존재하느냐, 실체로서 있는 것이냐,
    이런 것을 생각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공부를 해보면,
    눈앞에 확실하게 보이는 이것도 알고 보면 불확실한 거예요.
    매순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일정한 모양과 색깔이 없는 거예요.
    이 세계도 고정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변한다는 거죠.
    다만 우리가 고정시켜서 볼 뿐이에요.

    이 말은 실재 대상하고 인식하는 의식이 정확하게 일치를 하지 않는 다는 거예요.
    만일에 이 대상이 진짜 고정되어 있다면 누가 착각을 일으키겠어요?
    착각이 일어날 리가 없죠.
    그렇지만 이것이 눈으로 보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매 순간 바뀌는 겁니다.
    우리 몸은 전생에서 지은 업의 결과로서 받은 육체인데,
    우리 마음은 이 몸뚱아리를 의지해서 일어나요.
    그래서 육체를 근(根)이라 그러는 겁니다.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하고, 말뚝을 보고 귀신이라고 착각하듯이
    우리 몸도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죠.
    그러면 몸을 볼 때 어떻게 봐야만 진실입니까?
    이런데 와서 막힌다니까.ㅎㅎㅎ
    이게 자기 몸 맞죠?
    맞다면 『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 인용을 해보면,
    백정이 소를 한 마리 잡는데,
    가죽도 베끼고,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내장은 내장대로 분리를 해서 올려놓고
    ‘고기 사십시오.’ 하면 여러분들은 ‘고기 몇 근 주십시오.’ 이럴 거 아니에요.
    그럼 소는 어디 갔습니까?
    마찬가지로 결국 이 몸을 보고 ‘내다’하는 것은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말뚝을 귀신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러면, 동화사는 가짭니까 진짭니까?
    “가짜요.”
    대구는 가짭니까 진짭니까?
    “가짜요.”
    대한민국은 가짭니까 진짭니까?
    “가짜요.”
    지구는 가짭니까 진짭니까?
    “가짜요.”
    우주는 가짭니까 진짭니까?
    “가짜요.”
    그러면 진짜는 뭡니까?
    여기서 긍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전부다 상호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동화사다, 대구다, 대한민국이다, 우주다, 하는 것은 다 가짭니다.
    가짜인줄 알고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붙였다고 봐야 됩니다.
    이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이름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치 ‘소’라는 것은 이름일 뿐이지
    소에 걸 맞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명확해 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뱀과 귀신의 이름과 실체는 없다’ 이거죠.
    이런 게 없는데 왜 두려운 마음을 내느냐.
    있다고 착각하니까 두려운 마음을 내고,
    또 있다고 하는 것이 형상이 바뀌니까 두렵다 이거죠.
    모든 존재가 사실은 그렇게 보면 비어 있는 게 맞죠.
    이때 비어있다는 것은 이름만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이름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잖아요.
    ‘두려운 마음을 내는 것은 바탕이 비어 있는 것으로써
    현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누가? 마음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묻습니다.
    : 분별하는 성품과 진실한 성품과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성품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멸할 수 없고, 어느 것이 멸할 수 있는 것입니까.


    ‘분별하는 성품’은 변계소집성이고, ‘진실한 성품’은 원성실성이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성품’은 의타기성입니다.
    그럼, 멸할 수 있는 것은 세 개중에 어떤 게 멸할 수 있습니까?
    먼저 원성실성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죠.
    그리고 새끼줄을 뱀으로, 말뚝을 귀신으로 착각하는 게 변계소집성인데,
    착각한 뱀이나 귀신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은 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뭐냐? 이름만 존재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의타기성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게 맞습니다.
    내가 눈병 나가지고 허공에 꽃을 본다면,
    허공에 꽃은 원래 존재하는 겁니까?
    존재 하지 않는 것이죠.
    눈병으로 말미해서 나타난 것이지, 원래 허공에는 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눈병으로 말미해서 허공에 꽃이 생기는 것은
    눈병이라는 인연에 의해서 생긴 거니까 의타기성 맞죠?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꽃]은 놔두고,
    인연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은 의타기성이거든요.
    이렇게 생기게 하는 이것은 존재하는 겁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변하고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변계소집성하고 원성실성은 없어지지 않지만
    의타기성은 소멸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답을 합니다.
    : 『불성론』에 기준하여 말하겠다.
    두 가지가 멸할 수 없고, 한 가지는 멸할 수 있다.
    무엇 때문인가.
    분별하는 성품은 본래 없기 때문에 멸할 수 없다.
    진실한 성품은 본래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멸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성품은 진실이 아니니,
    이런 까닭에 멸할 수 있는 것이다.


    멸한다는 것은 계속 바뀌어 간다는 겁니다.
    확실히 아셨죠?
    우리가 유식삼성은 확실히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유식삼성을 이렇게 안 것을 가지고
    명확하게 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이게 그냥 단순한 게 아니에요.
    공부를 더 해야 됩니다.

    유식공부 핵심이 유식삼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것만 다 알면 우리 인생 전반을 다 알 수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