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강의 - 3)

경호... 2012. 1. 5. 02:11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강의 - 3)

    『섭론』에서는
    “비유하여 분별하는 성품은 뱀과 같고 의타기성은 등나무 끈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색향미촉(色香味觸)의 네 가지 경계를 인연하여 등나무 끈을 분석한다면
    단지 네 가지 모습만을 보고 따로 등나무 끈을 보지 못할 것이다.
    등나무 끈이 단지 색향미촉의 모습일 뿐으로
    등나무 끈이 실재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네 가지 경계를 벗어난 다른 곳에 달리 등나무 끈이 있는 것도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섭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등나무 끈 뱀이라고 알았을 때에
       끈이라는 사실 알면 뱀은 없다네.
       끈이 가진 여러 인연 알아 본다면
       끈을 알고 뱀을 아는 인연 같다네.

    만약 등나무 끈의 성품을 분석하여 공(空)한 것임을 알았다면
    이것은 예를 들어 등나무 끈 위에서 허망하게 뱀이라는 생각을 낸 것과 같은 것이다.


    '『섭론』에서는
    “비유하여 분별하는 성품은 뱀과 같고 의타기성은 등나무 끈과 같다.'
    분별하는 성품은 변계소집성을 얘기 합니다.
    여기서는 등나무 끈으로 얘기를 했는데
    보통 새끼줄로 표현을 합니다.

    ‘등나무 끈 뱀이라고 알았을 때에’이 말은,
    길을 가다가 등나무 끈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을 한 거죠.

    ‘끈이라는 사실 알면 뱀은 없다네.’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서 보니까,
    뱀이 아니고 등나무 끈이라는 걸 알았다는 거죠.
    이것은 등나무 끈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그 사람에게는 늘 뱀이 있는 거예요.

    ‘끈이 가진 여러 인연 알아 본다면
    끈을 알고 뱀을 아는 인연 같다네.’
    끈은 여러 가닥이 모여서 끈이 됐구나,
    뱀은 끈을 잘못보고 뱀으로 알았구나, 이렇게 인연을 안다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나무 끈입니다.
    등나무 끈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착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는 게 나오는 거예요.

    여기에 ‘색향미촉(色香味觸)’이라고 했는데
    ‘성(聲)’이 빠진 것은 아시겠지만, 등나무는 소리하고는 상관없죠.
    우리가 등나무 끈이라는 물질을 보고 냄새 맡아보고 씹어도 보고
    또 만져보고, 이렇게 분석을 해보면
    ‘네 가지 경계를 인연하여 등나무 끈을 분석한다면
    단지 네 가지 모습만을 보고 따로 등나무 끈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이 말은, 등나무 끈이라는 것이 심리 현상이라는 거죠.
    유식학적으로 얘기를 하는데, 이것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비달마」에서는 정신 현상과 물질현상을 구분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찻잔을 만져보면, 매끄럽지만 딱딱하거든요.
    이것을 「아비달마」에서는 딱딱하다고 아는 것은 정신 현상이고
    딱딱한 것은 찻잔에 섞여 있는 물질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그런데 유식에서는
    딱딱하다고 아는 것을 정신현상이라고 인정 안 합니다.
    그렇지만 딱딱한 것은, 잘 살펴보면 느낌이라는 거죠.
    이 찻잔에 고유한 것이 아니고 감각일 뿐이라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게
    ‘등나무 끈이 단지 색향미촉의 모습일 뿐으로
    등나무 끈이 실재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이랬는데
    왜 이렇게 얘기하느냐 하면,
    등나무 끈이라 하도라도 따로 마음 밖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거죠.
    우리가 등나무 끈이라고 보고 있으면
    바로 심리현상일 뿐이라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결국 대상이라는 것은 심리현상이다,
    내 마음이 바깥으로 투영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투영 되어서 나타난 것을 있다고 착각한다, 이 말이죠.
    이게 결론이에요.

    ‘만약 등나무 끈의 성품을 분석하여 공(空)한 것임을 알았다면
    이것은 예를 들어 등나무 끈 위에서 허망하게 뱀이라는 생각을 낸 것과 같은 것이다.’
    등나무 끈의 성품을 분석해 보니까 ‘공(空)이구나’ 이렇게 알았다 해도
    사실 알고 보면 등나무 끈 위에서 이것은 뱀이라고 착각하는 거와 진배가 없다,
    이런 얘기에요.
    등나무 끈을 분석해보면 공한 것이 확실히 맞는데
    왜 뱀과 같은 것이라고 얘기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분석했다는 데에 있어요.
    분석해서 공을 알았다는 거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렇게 분석해서 아는 것은 나쁜 게 아니고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를 궁극의 지혜라 하지 않고 유분별의 지혜, 분별이 있는 지혜에요.
    그래서 분별이 있는 지혜에서 나타난 공을 얘기합니다.
    이것은 궁극이 될 수 없어요.
    어떤 게 궁극이냐 하면,
    내가 분석해서 공인 줄 알긴 알았지만 수행을 해서 체득을 해야 됩니다.
    체득을 해가지고 무분별에 의해서 나타난 공이 진실한 거예요.
    그래서 분석해서 알았다는 이 공도
    등나무 끈을 뱀으로 착각한 것하고 진배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분별을 거치고 난 다음에 오는 지혜가 무분별의 지혜에요.
    찻잔은 흙, 물, 불, 바람 4대가 결합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죠.
    결합되어 있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이다, 이렇게 분석을 하죠.
    그렇지만 우리가 분석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마음 움직임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수행을 해가지고 실제로 이것을 분석하지 않고도 공인 줄 알면
    이게 무분별 지혜에요.

    묻습니다.
    : 내가 반연되는 영상을 보는 것이 의타기성으로 있는 것이라면
    응당 의타기성을 보는 실재의 ‘나’가 있는 것입니까.


    자아에 대한 얘기에요.
    답을 합니다.
    : ‘나’라는 상(相)은 인연에 의지하여 생겨난다.
    단지 의타기성의 환유(幻有)인 법으로 실재의 ‘나’가 아니다.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삼기 때문에 이것을 망집(妄執)이라 한다.


    ‘나’라는 상(相)은 인연에 의지하여 생겨난다, 의타기성이라는 얘기죠.

    중론 (中論)에 보면 공가중(空假中)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이것을 공제(空諦) ·가제(假諦) ·중제(中諦)라 해서 삼제(三諦)라 그럽니다.
    자아(自我)를 여기다가 배대를 쳐보죠.
    실아(實我), 진짜 내가 있다는 것은 실체가 없이 비어있다, 공이란 뜻이에요.
    가아(假我), 가(假)는 ‘거짓’, ‘빌리다’라는 뜻이 있죠.
    우리 몸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5대로 이루어져있고[色],
    몸하고 같이 의지해서 작용하는 감수작용[受], 표상작용[想],
    의지작용[行], 판단작용[識]이 있습니다.
    그래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결합이 되어서 ‘나’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중(中)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진아(眞我)라 그러는데 실아(實我)하고 비슷하거든요.
    그래서 이것을 중도아(中道我)라 그럽니다.
    실아(實我)는 ‘내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것이 왜 생겼냐 하면,
    그 뒤에는 변계소집성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두루 헤아려 집착해 보니까 실아, 진짜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런데 이 변계소집성은 아까 공부했듯이 실재하지 않는 착각인거예요.
    대상이라는 것이 내 밖에 있는 게 아니고
    그 대상이 이 감각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거라는 거죠.
    실재한다면 누구나 그 대상을 똑같이 얘기해야 되는데
    각각 다르게 얘기하는 이유는 자기가 분별해서 대상을 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말이죠.
    지가 헤아려서 그렇게 본다는 거죠.
    그래서 실아(實我)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분별해서 집착하면 내가 있다고 착각이 나타납니다.
    착각으로 나타난 시간은 본래 없는 텅 비어 있는 공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가아(假我)는 뭐냐.
    이것은 의타기성이죠.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 가짜, 가아(假我)다 이거죠.
    여러 가지를 빌려서, 오온이 서로 뭉쳐져서 가아(假我)가 나온 거죠.
    인연에 의해서 아(我)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가아(假我)에요.

    중도(中道)는 원성실성이에요.
    원성실성을 진아, 진여라고 하기도 하죠.
    ‘아(我)’는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인연을 하나하나 분석을 해보니까 실체도 없고 자아도 없는 거예요.
    이렇게 실체나 자아가 없는 텅 빈 공을 원성실성이라 그럽니다.
    그것을 진아(眞我) 또는 중도아(中道我)라 그럽니다.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이거죠.
    공(空)은 무(無)로 배대치고 가(假)는 유(有)로 배대치는데, 유무(有無)의 중도에요.

    그래서 공가중(空假中)이 각각 다른 거 같지만 같은 겁니다.
    연기(緣起)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空)이고,
    서로서로 빌려서 존재하기 때문에 가(假)라고 하고,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기 때문에 중도(中道)라 그럽니다.
    그래서 공가중(空假中)은 하나지만,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예요.
    내가 집착을 해서 이리저리 헤아려보고 얘기를 한다면
    변계소집성에서 거기에 나타나는 착각이 일어날 수 있어요.

    저도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 뒷모습이
    마치 어렸을 때 같이 지내던 친구 모습과 너무 닮아서
    너 누구 아니냐고 팔을 댕겼는데 얼굴이 다르더라구요.
    그렇게 착각을 한 경험이 있거든요.
    그런 착각은 누구나 일어납니다.
    등나무 끈을 보고 뱀으로 착각해서 물러섰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뱀은 온데간데없고 등나무 끈만 있더라,
    이렇게 알았을 때 앞에 뱀으로 착각했던 인식은 잘못 됐다고 판단하는 게
    불교에서 보는 입장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나무 끈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게 그런 것을 공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면 여러분들 앞으로 부부싸움 할 일도 없고
    친척 간에 대립될 이유가 없어요.

    여기에는 두 가지 겹쳐지는 모습이 있다.
    ‘나’라는 상이 인연으로 생겨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힘이 마음을 생겨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의타기성의 법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 집착되어진 법의 측면에서는 변계소집성이라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두 개가 겹쳐진다 했어요.
    우리가 ‘아’라는 문제를 가지고 얘기할 때
    내가 분별해가지고 집착해서 ‘아’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실아(實我)라고 했지만
    실재하지 않은 착각이라고 하는 게 하나고[변계소집성],
    또 하나는, 내가 착각해가지고 ‘아’라고 주장은 했지만
    착각하든 안 하든 ‘아’가 존재하는 것은 서로 인연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타기성에 ‘아’가 있는 거예요.

    이것을 예를 들으면 『원각경』에서 얘기하는데,
    눈병 난 사람이 허공에 꽃이 피고지고 한다고 하면, 그것이 실재하는 겁니까?
    실재하지 않는 것이죠.
    이렇게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변계소집성에 가아(假我)로 보는 거예요.
    변계소집성에 아(我)로 보든 말든
    눈병이라는 인연으로 해서 허공에 꽃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면,
    이것은 인연에 의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의타기성이죠
    이 두 가지가 겹쳐진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변계소집성으로 보는 ‘아’는
    허공에 꽃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실재하지 않는 거죠.
    그렇지만 눈병이 나든 뭐가 나든
    타를 의지해서 나타난 허공의 꽃은 진짜 있는 거예요.
    내가 착각을 하더라도 인연에 의해서 착각한 입장에서는 의타기성이고,
    인연에 의해서 착각한 줄 모르고
    실재 있다고 보는 착각은 변계소집성에서 온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의타기성 위에 바로 변계소집성이 있는 거예요.
    이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성을 제거하면
    바로 원성실성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사람이 어두워짐에 돌을 잘못 알고 집착하여 소라고 하나,
    돌의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내가 반연되는 인연을 보는 것은 의타기성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본래 돌이 소가 아니나,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여 소가 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집착된 소는 그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나’로 보여지는 모습이 본래 ‘나’가 아니나,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여 ‘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집착되어진 ‘나’는 그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어스름한 저녁에 돌을 봤는데, 소로 착각한 거죠.
    그렇다면 돌을 소로 봤는데 소는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죠.
    돌은 있는데 소만 없죠.
    그러면 이것은 의타기성에 비유되는 거예요.
    착각이든 진짜든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은 의타기성이라 그랬죠.
    그렇지만 소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것을 착각해서 있다고 보는 것은 변계소집성이다 이거죠.
    그래서 두 개가 겹친다 이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변계소집성을 없애야 되는데 없애는 방법이 뭘까요?
    서로가 모든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그것이 맞을 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고 그렀죠.
    등나무 끈의 인연으로 인해서 뱀이라는 착각이 일어나고
    돌이라는 인연에 의해서 소라는 착각이 일어난다 이거죠.
    이때 나타난 뱀이나 소는 착각이기 때문에 변계소집성이라 하지만
    그 인연은 존재한다 이거죠.
    그렇다면 그 인연을 밝혀야 되겠죠.
    그래서 『해심밀경』에서는
    변계소집성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없을 무자 모양 상, 무상이라 그럽니다.
    원래부터 상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 수가 있느냐, 이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바로 의타기성을 얘기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진 줄 알아야 된다.
    그렇게 하면 상이 없는 무상을 체득을 한다, 이렇게 예기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인연인 줄 알 수가 있나.
    첫 번째는 불법학습을 해서 인연인 줄을 알아야 되요.
    두 번째는 자기 몸과 마음을 관찰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몸과 마음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인 줄을 알게 되면
    원래 모든 상은 상이 없다는 무상임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는 이론적으로 알아야 되고,
    두 번째는 실상을 수행해가지고 아는 것이 진짜다 하는 얘기에요.

    그리고 착각을 없애는 방법은 관계성을 사유해야 됩니다.
    모든 게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사유를 해가면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고, 고정되어 있지도 않구나,
    모든 것은 고유한 게 아니고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구나, 이렇게 알게 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사유를 통해서 지혜를 계발하지만
    실제 수행을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거예요.
    이렇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아무리 제가 얘기를 해도 알쏭달쏭하니까
    변계소집성에 걸려있는지 아닌지 점검을 해볼게요.
    사물을 볼 때 고정되게 보이면 변계소집성이라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두 번째, 독립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어 보이거나,
    세 번째,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 보면 변계소집성에 걸려있는 겁니다.
    그럼 실제 생활에서 변계소집성의 모습은 이런 겁니다.
    어떤 물건에 집착해 있다면 변계소집성에 걸려있다고 보면 됩니다.
    두 번째는, 싫증이 나고 분노가 일어나고 화가 난다면
    그 대상에 대해서 변계소집성에 걸린 겁니다.
    이 두 가지를 들면 얘기 충분 합니다.

    어떤 것을 보고 좋아하는 마음,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변계소집성에 걸려 있는 겁니다.
    그것은 대상이 고정되어 있고 독립되어 있는 실체로 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두 번째는 금방 얘기 했지만,
    화가 나거나 싫어한다면 변계소집성에 걸려 있는 거예요.
    대상에 어떤 모양이나 색깔이 없다면
    화를 내거나 싫어할 게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일상생활에 대해서 점검을 해보셔야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에 대해서 화가 나고 싫증이 난다면 변계소집성에 걸려 있는 겁니다.
    어느 날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까 마누라가 예뻐 보인다, ㅎㅎㅎ
    또는 남편이 근사하게 보인다,
    이것도 역시 변계소집성에 걸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ㅎㅎㅎ
    그냥 멍청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야 됩니까?
    “수행을 해야 되요.”
    그렇죠, 수행을 해야 되죠.
    그래서 의식을 깨워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훈련을 키워야 되요.
    이런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은 화도 안 내고 욕심도 안 부리고
    마음은 늘 편안하고 평화롭다 이거죠.

    제가 이렇게 까지 설명해도 모르면 제 책임 아니에요. ㅎㅎㅎ

    단지 집착할 수 있는 마음만 있는 것으로 집착 되어진 ‘나’는 없다.
    이것은 돌이 있는 곳에서 반연되어진 돌은 있으나
    집착되어진 소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보여 지는 모습 위에서 반연되어진 법은 있으나 집착되어진 ‘나’는 없는 것이다.


    ‘단지 집착할 수 있는 마음만 있는 것으로 집착 되어진 ‘나’는 없다.’
    집착하는 마음만 있는 것이지 집착 되어진 ‘나’는 없다 이거죠.
    왜? 착각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그렇다 그 말인데,
    지난 시간에도 한 얘긴데 또 한 번 하죠.

    어느 거사님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불교에서는 무아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집착하는 마음이 있고 집착 되어진 나가 있다면
    여기서 말하는 변계소집성이 분명하다 이거죠.
    그럼 이것은 어떻게 하면 타파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앞으로 그런 분들 만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하면 ‘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변계소집성을 깨트려줘야 되는데,
    이때 필요한 게 감정적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그 방법은 연기법으로 깨트려줘야 됩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는 ‘나’가 있고 반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나’가 없죠.
    이런 분은 ‘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나’라는 생각을 계속 일으키고 있는 거죠.
    그래서 생각을 지켜보는 훈련이 필요한데, 그 방법을 알려 줘야 됩니다.

    그런데 말로서 설명할 때는
    “생각이 없을 때는 ‘나’가 없죠?”하고 물어보면 없다고 할 겁니다.
    그럼 이 사람은 생각을 한 번도 지켜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생각의 속성을 모른다면, 그 말뜻을 이해 못할 거예요.”
    이렇게 얘기해야죠.
    “혹시 꿈 꿀 때는 ‘나’가 있죠?”
    “예, 있죠.”
    “그럼, 깊이 잠들었을 때는 ‘나’가 있습니까?”
    깊이 잠들었을 때는 의식이 작용이 없어요, 움직이지 않습니다.
    의식이 활동을 안 하면 생각이 안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깊은 잠속에는 내가 있습니까, 물어봐야 되요.
    “없습니다.”하면,
    “그렇다면 ‘나’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네요.
    깊이 잠들었다는 그 인연으로 봤을 때 그 결과는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깊이 잠들었다는 인연을 들었죠?

    그래도 ‘나’가 있다고 하면 어쩝니까?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한 가지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게 있습니까?”
    분명히 없다고 그럽니다.
    이것을 보여주면 찻잔이라 하고 이것을 보여주면 펜이라 그러는데,
    앞에 찻잔이라고 알았던 마음은 어디 갔냐 이 말이에요.
    사라진 거죠.
    마음은 움직이기 때문에 한 생각이 지속적으로 가는 것은 없어요.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거든요.
    그래서 ‘나’가 없다는 것을 얘기해주려면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얘기해 줘야 됩니다.

    그래도 이해를 못하고 주장하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나’라는 게 있다면 가져와 보십시오.
    내놔 보십시오.”ㅎㅎㅎ
    그 거사님이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나’라고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닌데 어떻게 내 놀 수 있습니까?”
    “그럼, 내 놓을 수 없고,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이라면
    실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거짓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눈빛 보니까 설득이 안 된 거 같았어요.
    ‘스님, 그래도 나는 있습니다.’그런 눈빛으로 보고 갔는데,
    안 찾아오는 거 보니까 아직 해결 안 된 거 같아요.
    이것을 알려면 수행을 해야 되고 제가 말한 것을 곰곰이 따져봐야 되요.
    그렇지 않고는 안 됩니다.

    또 비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남쪽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낙타털을 알지 못하고
    일찍이 어느 곳에선가 거북이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것과 같다.
    뒷날 우연히 낙타털을 보고도, 낙타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낙타털을 거북이털이라 하였다.
    여기서 눈 앞에 보여지는 낙타털은 존재하는 것이므로 의타기성의 법과 같다.
    그러나 낙타털 위에 거북이 털은 없는 것이다.
    허망한 마음으로 거북이털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집착되어진 실재의 ‘나’가 있다는 법과 같은 것이다.


    ‘또 비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남쪽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낙타털을 알지 못하고
    일찍이 어느 곳에선가 거북이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것과 같다.
    뒷날 우연히 낙타털을 보고도, 낙타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낙타털을 거북이털이라 하였다.
    여기서 눈 앞에 보여지는 낙타털은 존재하는 것이므로 의타기성의 법과 같다.’
    이것은 마치 어스름한 저녁에 돌을 보고 소로 보는것 같가 이거죠.

    ‘그러나 낙타털 위에 거북이 털은 없는 것이다.’
    그렇죠, 돌 위에 소는 없다.
    등나무 끈 위에 뱀이 없는 거와 같은 거죠.

    ‘허망한 마음으로 거북이털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집착되어진 실재의 ‘나’가 있다는 법과 같은 것이다.’
    ‘나’라는 것이 전부 조작해서 나온 것이죠.
    색수상행식 오온이 결합해서 있는데 거기서 ‘나’를 자꾸 찾는 거예요.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앉아 있으면 ‘나’가 있다고 생각 하죠?
    이게 낙타털 위에서 거북이 털을 찾는 거예요.
    토끼의 귀도 멀리서 보면 뿔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거북이 털이나 토끼 뿔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있다고 보는 것은 전부다 변계소집성이에요.

    그러므로 논에서는 “사물의 일체와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법은
    모두 훈습된 힘으로 말미암아 변해지는 것에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의타기성이라 한다.
    이 의타기성에 의지하여 두루 짐작하고 헤아려서 허망하게 결정하여
    실재의 있고 없음이나, 같고 다름이나, 갖추고 갖추지 않음 등에 집착하니,
    이것을 변계소집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법은 모두 훈습된 힘으로 말미암아 변해지는 것에 두 가지로 나눈다.’
    이 말은, 결국 바깥으로 보이는 이 세계가
    내 안[아뢰야식]에 종자가 발현되어서 나타나는 거예요.
    찻잔을 봐도 찻잔이라는 종자가 발현되어서 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찻잔은 매순간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찻잔 자체는 없는 거죠.
    다만 내 마음속에 종자가 발현해서 찻잔이라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기에 ‘훈습됐다’는 말은 그런 겁니다.

    ‘하나는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의타기성이라 한다.’그렇죠.
    내 마음에 정보가 발현한 것은 대상과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발현하죠.

    ‘이 의타기성에 의지하여 두루 짐작하고 헤아려서 허망하게 결정하여
    실재의 있고 없음이나, 같고 다름이나, 갖추고 갖추지 않음 등에 집착하니,
    이것을 변계소집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결국 우리가 대상을 반연해서 인식을 한다면 그것은 의타기성이에요.
    그렇지만 대상을 반연하는 그 위에다가
    어떤 사실이 마치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
    뱀이나 소나 거북이 털, 이런 것을 본다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다 이거죠.
    그게 변계소집성이라 그럽니다.

    이제 두 개가 중첩된 것이 무엇인지 아셨죠?
    기본은 의타기성입니다.
    의타기성 위에 변계소집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타기성을 잘 관찰하면
    그 위에 나타나는 변계소집성을 제거할 수 있다 이거죠.
    이게 수행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