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본문)

경호... 2012. 1. 5. 02:08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본문)

    59-6-200
    問 三性中 遍計是妄想卽無. 依他屬因緣 是有不.
    答 此二性能所相生 俱無自體.
    何者. 因妄想故 立名相 因名相故 立因緣.
    若妄想不生 名相何有. 名相不有 因緣卽空 以萬法不出名故.
    楞伽 頌云. 譬如修行事 於一種種現 於彼無種種 妄想相如是.

    : 삼성(三性) 가운데에 변계소집성은 망상이라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타기성은 인연에 속하는 것이니 있는 것입니까.

    : 이 두 가지는
    능(能)과 소(所)의 모습으로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으로 모두 어떤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망상으로 인하여 이름과 모양을 세우고,
    이름과 모양으로 인하여 인연을 세웠기 때문이다.
    만약 망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름과 모양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름과 모양이 있지 않아 인연 자체가 공(空)한 것이니,
    만법이 이름과 모양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능가경』 게송에서 다음과 말하였다.

       비유하면 수행하는 일과 같아서
       한 곳에서 여러 경계 나타나지만
       수행처에 여러 경계 없는 것이니
       망상의 모습도 이와 같다네.

    釋云. 此破妄想遍計性也 如二乘修諸觀行.
    若作靑想觀時 天地萬物 莫不皆靑也. 以無靑處見靑 由心變故.
    於一色境 種種不同. 譬凡夫妄見生死 亦是無生死處妄見生死也.
    又 經 頌云. 譬如種種瞖 妄想衆色現 瞖無色非色 緣起不覺然.
    此破因緣依他起性也. 如目瞖所見 差別不同. 彼實非有 緣所起法.

    이것을 풀이해 보자.
    이 게송은 망상인 변계소집성을 타파한 것으로
    이승이 모든 관행(觀行)을 닦아 나가는 것과 같다.
    만약 파랗다는 생각을 지어 관할 때에 천지만물 모두가 파랗지 않은 것이 없다.
    파란 것이 없는 곳에서 파란 것을 보는 것은 마음이 변화한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한 가지 색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습은 같지 않은 것이다.
    비유하면 범부가 허망하게 생사를 보는 것으로,
    이것 또한 생사가 없는 곳에서 허망하게 생사를 보는 것이다.
    이것을 『능가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유하면 여러 가지 백태와 같아
       망상으로 많은 색을 나타난다네.
       색이다 아니다의 구별 없으나
       인연으로 일어나서 그리 보이네.

    이것은 인연으로 일어나는 의타기성을 타파한 것이다.
    이것은 눈에 눈병이 나 백태가 낀 상태에서 보여지는 것이
    실제와 차별이 있어 다른 것과 같다.
    헛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연으로 일어나는 법이다.

    斯則妄想體空 因緣無性. 卽是圓成究竟一法.
    如明眼人 見淨虛空. 況一眞心 更無所有.
    問 此三性中 幾法是假 幾法是實.
    答 識論 云. 遍計所執 妄安立故 可說爲假. 無體相故 非假非實.
    依他起性 有實有假. 聚集相續分位性故 說爲假有. 心心所色 從緣生故 說爲實有.
    若無實法 假法亦無. 假法依實因而施設故.
    圓成實性 唯是實有. 不依他緣而施設故.

    이러한즉 망상의 바탕은 공(空)한 것으로 인연에 어떤 결정된 성품이 없다.
    이것이 곧 원만하게 구경의 일법(一法)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눈 밝은 사람이 깨끗한 허공을 보는 것과 같다.
    하물며 하나의 진심(眞心)에서 다시 더 망념으로 존재할 것이 있겠는가.

    : 삼성 가운데에 몇 가지 법이 가법(假法)이고,
    몇 가지 법이 실법(實法)입니까.

    : 『식론』에서 말하였다.
    변계소집성은 망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가법(假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겨나 있는 이것은 자체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거짓도 아니며 진실도 아니다.
    의타기성은 진실로 있기도 하며 거짓으로 있기도 하다.
    의타기성에는 많은 인연이 모여져서 서로 이어지는 분위(分位)의 성질이 있기 때문에
    임시로 존재하는 가유(假有)라고 설한다.
    또 다른 면으로은 심(心)과 심소(心所)와 색(色)이 인연 화합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실유(實有)라고 설한다.
    만약 실법이 없다면 가법 또한 없다.
    가법은 실법이라는 원인에 의지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원성실성은 오로지 실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의타기성의 인연에 의지하지 않아도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釋云.
    遍計有名無體 妄情安立 可說爲假. 談其法體 旣無有相 非假非實.
    非免角等可說假實. 必依有體 總別法上 立爲假實故.
    依他假有三種. 一聚集假者. 如甁盆有情等 是聚集法.
    多法一時所集成故. 能成雖實 所成是假.
    二相續假者. 如過未等世 唯有因果 是相續性.
    多法多時上 立一假法. 如佛說言 昔者鹿王 今我身是.
    所依五蘊刹那滅者 雖體是實 於此多法相續 假立一有情 至今猶在故.

    이것을 풀이해 보자.
    변계소집성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이
    허망한 분별로 세워지는 것이니 가법이라 할 수 있다.
    법의 실체를 이야기하나 어떤 모습이 없어 거짓도 아니요 진실도 아니다.
    토끼뿔 등과 같이 거짓이나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을 의지하여
    총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구분되는 법 위에서
    가법인지 실법인지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타기성의 가유(假有)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많은 인연이 모여진다는 가유이다.
    이것은 마치 병이나 화분 및 유정물 등과 같이
    어떤 요소가 모이고 쌓여서 된 법이다.
    많은 요소의 법이 일시에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져 실체가 있다 할지라도 이루어진 요소는 임시로 인연따라 있는 것이다.

    둘째는 상속하는 것으로서의 가유이다.
    이것은 마치 과거 미래 등의 세상에서 오로지 인과(因果)가 있다는 것과 같아
    서로 이어져 지속되는 성품이다.
    많은 법이 많은 시점 위에서 하나의 가법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옛날의 사슴 왕이 지금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오온(五蘊)이 찰나에 멸하는 것에 의지하는 것이 비록 몸체가 실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많은 법이 상속하여 임시로 하나의 유정물을 세워서
    지금에 있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三分位假者. 如不相應行 是分位性 故皆是假.
    一時一法上立. 如一色上 名有漏 可見 有對.
    亦名色等 並是於一法上 假施設故. 若彼實者 應有多體.
    其忿恨等 皆此假攝.心心所色 從因緣種生 故說爲實.
    又 三性者卽是一性. 一性卽無性.
    何者 遍計無相 依他無生 圓成無性.
    解深密經云 瞖眼人如遍計 現靑黃如依他 淨眼如圓成.

    셋째는 분위(分位)로서의 가유(假有)이다.
    이것은 마치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이 분별로서만 자기의 위상을 갖는 것으로
    모두 임시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시점에서 하나의 법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색 위에서 유루(有漏)라 하여
    볼 수 있거나 상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명색(名色) 등이 모두 하나의 법 위에서 가유로 시설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모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응당 많은 실체가 있어야 한다.
    분(忿)과 한(恨) 등은 모두 이 가유에 속한다.
    심(心)과 심소(心所)와 색법(色法)은
    인연 종자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실유(實有)라고 설한다.

    또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동일한 성품이다.
    동일한 성품 그 자체는 결정된 어떤 성품이 없다.
    왜냐하면 변계소집성은 상이 없고 의타기성은 생겨나는 것이 없으며
    원성실성은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심밀경』에서는
    “눈병 난 사람은 변계소집성과 같고
    파랗고 노란 색이 나타나는 것은 의타기성과 같으며
    눈병이 없이 깨끗한 눈은 원성실성과 같다”고 하였다.

    攝論云 分別性如蛇 依他性如藤.
    若人緣四塵相 分析此藤 但見四相 不見別藤.
    但是色香味觸相故 藤非實有. 以離四塵外 無別有藤.
    所以 論偈云.
    於藤起蛇知 見藤則無境 若知藤分已 藤知如蛇知.
    若知藤之性分是空 則例如藤上妄生蛇想.

    『섭론』에서는
    “비유하여 분별하는 성품은 뱀과 같고 의타기성은 등나무 끈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색향미촉(色香味觸)의 네 가지 경계를 인연하여 등나무 끈을 분석한다면
    단지 네 가지 모습만을 보고 따로 등나무 끈을 보지 못할 것이다.
    등나무 끈이 단지 색향미촉의 모습일 뿐으로
    등나무 끈이 실재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네 가지 경계를 벗어난 다른 곳에 달리 등나무 끈이 있는 것도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섭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등나무 끈 뱀이라고 알았을 때에
       끈이라는 사실 알면 뱀은 없다네.
       끈이 가진 여러 인연 알아 본다면
       끈을 알고 뱀을 아는 인연 같다네.

    만약 등나무 끈의 성품을 분석하여 공(空)한 것임을 알았다면
    이것은 예를 들어 등나무 끈 위에서 허망하게 뱀이라는 생각을 낸 것과 같은 것이다.

    古德問云 我見所緣影像 若是依他有者 應有依他性實我.
    答 此相仗因緣生. 但是依他性幻有之法 而非是我. 由彼妄執爲我故 名妄執.
    此有兩重相. 約此相從因緣生 有力能生心 此乃是有 名依他性法.
    於此不稱所執法義邊 名遍計所執 乃名爲無. 如人昏冥 執石爲牛 石體不無.
    我見所緣緣 依他相有. 如石本非牛 妄心執爲牛. 此所執牛 其體全無.
    如相分本非我 妄心執爲我. 此所執其體全無.

    : 내가 반연되는 영상을 보는 것이 의타기성으로 있는 것이라면
    응당 의타기성을 보는 실재의 ‘나’가 있는 것입니까.

    : ‘나’라는 상(相)은 인연에 의지하여 생겨난다.
    단지 의타기성의 환유(幻有)인 법으로 실재의 ‘나’가 아니다.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삼기 때문에 이것을 망집(妄執)이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겹쳐지는 모습이 있다.
    ‘나’라는 상이 인연으로 생겨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힘이 마음을 생겨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의타기성의 법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 집착되어진 법의 측면에서는 변계소집성이라 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어두워짐에 돌을 잘못 알고 집착하여 소라고 하나,
    돌의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내가 반연되는 인연을 보는 것은 의타기성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본래 돌이 소가 아니나,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여 소가 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집착된 소는 그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나’로 보여지는 모습이 본래 ‘나’가 아니나,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여 ‘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집착되어진 ‘나’는 그 실체가 전혀 없는 것이다.

    但有能執心 而無所執我. 謂於此石處 有所緣石 而無所執牛.
    於此相分上 有所緣法 而無所執我.
    又 況云. 如南方人 不識駝毛 曾於一處 聞說龜毛.
    後忽見駝毛 由不識故 妄謂駝毛以爲龜毛.
    此所見駝毛是有故 如依他性法 其駝毛上無龜毛 妄心謂爲龜毛 如所執實我法故.
    論云 有義一切及心所法 由熏習力 所變二分.
    從緣生故 名依他起. 遍計依斯 妄執定實 有無一異俱不俱等 此二名遍計所執性.

    단지 집착할 수 있는 마음만 있는 것으로 집착 되어진 ‘나’는 없다.
    이것은 돌이 있는 곳에서 반연되어진 돌은 있으나
    집착되어진 소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보여지는 모습 위에서 반연되어진 법은 있으나 집착되어진 ‘나’는 없는 것이다.

    또 비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남쪽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낙타털을 알지 못하고
    일찍이 어느 곳에선가 거북이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것과 같다.
    뒷날 우연히 낙타털을 보고도, 낙타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낙타털을 거북이털이라 하였다.
    여기서 눈 앞에 보여지는 낙타털은 존재하는 것이므로 의타기성의 법과 같다.
    그러나 낙타털 위에 거북이 털은 없는 것이다.
    허망한 마음으로 거북이털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집착되어진 실재의 ‘나’가 있다는 법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사물의 일체와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법은
    모두 훈습된 힘으로 말미암아 변해지는 것에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의타기성이라 한다.
    이 의타기성에 의지하여 두루 짐작하고 헤아려서 허망하게 결정하여
    실재의 있고 없음이나, 같고 다름이나, 갖추고 갖추지 않음 등에 집착하니,
    이것을 변계소집성이라 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