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색법(色法)에 네 가지 이치가 있다 (강의)

경호... 2012. 1. 5. 02:06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색법(色法)에 네 가지 이치가 있다 (강의)

    묻습니다.
    : 색법(色法)에는 몇 가지 이치가 있습니까.

    색법(色法)에서 색(色)은 물질인데 현색(顯色)과 형색(形色),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현색(顯色)은 색깔이고 형색(形色)은 모양입니다.
    우리들에게 보이는 것은 색깔과 형태가 있는 것들이죠.
    이것을 색(色)이라 그래요.
    그리고 법(法)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인데,
    색깔이라든지 형태도 역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색법(色法)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마음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왜 물질적인 얘기를 하는가,
    우리가 의심을 한 번 해봐야 되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죠.
    유식이니까 역시 물질도 마음의 현상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물질적인 현상이 곧 마음 현상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충격적인 이야기죠.
    왜 그런가 하면,
    내 밖에 따로 찻잔이다, 책상이다, 이렇게 존재하는데
    이것이 전부다 우리 마음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가히 충격적인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질적인 현상이
    마음이 투영되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하는 게 유식에서 하는 얘기에요.
    보통 내 밖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그것을 유식에서는 미혹이라고 분명히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책상이나 앉아 있는 의자가
    왜 내 밖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궁금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 됩니다.

    자 읽어 볼게요.
    답을 합니다.
    : 네 가지 이치가 있다. 『백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는 식(識)이 의지하는 색(色)으로서 오직 오근(五根)에 속한다.
    둘째는 식이 반연하는 색으로서 오직 육경(六境)에 속한다.


    여기 오근(五根)과 육경(六境)을 얘기 했죠.
    정확하게 얘기 하자면,
    색(色)에는 오근(五根, 眼耳鼻舌身)이 있고 오경(五境)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법경(法境)이 있어요.
    그래서 오경과 법경을 합하면 육경(六境)이 되고
    육경과 오근을 합하면 열한 가지가 됩니다.
    색법에는 열한 가지가 있다.
    오근(五根)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이고
    오경(五境)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인데
    이것이 전부다 물질적인 거예요.
    그리고 법경(法境)은 의식의 대상이에요.
    개념입니다.

    셋째는 전체적인 모습으로서는 질감과 덩어리를 갖고 있는 명색(名色)을 말한다.
    넷째는 모습을 나눈 것으로서 말하면 대략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셋째는 전체적인 모습으로서는 질감과 덩어리를 갖고 있는 명색(名色)을 말한다.’
    여기서 ‘명색(名色)’이라는 말을 빼세요.
    번역이 조금 이상했어요.
    ‘셋째는 전체적인 모습으로서는 질감과 덩어리를 갖고 있는 것을 색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질감과 덩어리를 갖고 있는 것’ 이랬는데
    이것은 물질에 속하는 거죠.
    첫 번째는 몸을 얘기하고, 두 번째는 보이는 이 세계를 얘기하고,
    세 번째는 질감과 덩어리가 있다고 얘기하는 거죠.
    여러분 책상을 만져 보면 질감이 딱딱한 느낌이 오죠?
    그러면 이것은 물질적 요소가 맞습니다.

    ‘넷째는 모습을 나눈 것으로서 말하면 대략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네 번째는 다시 두 종류로 나눈다 했어요.

    하나는 질감이 있어 상대적인 개념으로 존재하는 색의 모습이다.
    유종(有宗)의 주장에 근거하면 색은 극미로 만들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대승의 주장에 근거하면 진여의 작용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져[能造色]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는 질감이 있어 상대적인 개념으로 존재하는 색의 모습이다.’
    질감은 있는데 상대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찻잔 질감하고 책상 질감이 다른 것처럼 상대가 되는 것들이에요.
    그런 걸 얘기 합니다.

    그 다음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유종(有宗)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모든 것은 있다고 주장하는 종파,
    성실종(成實宗)을 얘기합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이 종파의 주장에 근거하면
    ‘색은 극미로 만들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여기서도 ‘것으로 존재하는’을 빼고
    ‘색은 극미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렇게 하세요.
    여기 극미(極微)는 요즘말로 하면 원자 같은 겁니다.
    그래서 물질이라는 것은
    원자처럼 미세한 것이 집합해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대승의 주장에 근거하면 진여의 작용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져[能造色]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승’은 ‘유식’을 얘기 합니다.
    ‘진여’는 없는 것을 넣은 겁니다, 지우세요.
    원문에도 대승즉용(大乘卽用)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끝에 ‘존재하는’ 이것도 지우고
    ‘대승의 주장에 근거하면 작용에 즉(卽)하여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진[能造色] 것이다.’이렇게 됩니다.

    색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거죠.
    하나는 유종(有宗)에서 주장하는 극미가 있고
    또 하나는 능조색(能造色)이 있는데,
    지수화풍 4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말이에요.
    여기서 주장하는 게 대승인데 유식 상에서 하는 얘기에요.
    그런데 대승즉용(大乘卽用), 즉용(卽用)이라는 말을 왜 쓰느냐.
    즉은 나아갈 즉(卽)자, 용(用)은 작용이에요.
    그래서 ‘작용해 나아간다’이렇게 되죠.

    원자로 이루어진 거 하고
    지수화풍 사대의 작용에 의해서 물질이 만들어졌다는 거 하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그러면 하나하나 얘기를 해 봅시다.

    흔히 물질을 얘기할 때
    극미라는 아주 미세한 물질이 모여가지고 하나에 성체를 이룬다고 얘기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타당하냐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장진론(掌珍論)」에 보면 진아보살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물질이라는 게 미세한 극미에 의해서 형태를 이룬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진실일까,
    극미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수천, 수 만개가 모인다고 눈에 보이느냐 이거죠.
    그렇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이건 찻잔이다, 인식을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물질이라는 것이 미립자가 여러 개 모여가지고 형태를 이룬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식을 할 수 없다, 이렇게 보는 거죠.
    왜? 미립자는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게 수천, 수 만개가 결합해도 역시 모양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극미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안 맞는다고 보는 거죠.

    그러면 이 모양과 색깔은 어디서 왔느냐 이거죠.
    미세한 물질이 모여서 여러 가지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하면 쉬울 텐데
    따져보니까 극미는 눈에 안 보이고,
    안 보이는 것을 아무리 쌓아 봐도 역시 모양이 없을 텐데,
    현상은 보이거든요.
    그러면 극미에서 모양과 색깔이 오지 않았다면
    이것은 왜 보이냐 이거죠.
    그래서 유식에서 하는 얘기가
    모양과 색깔은 우리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우리 인식 내부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것을 증명하는 게 예전에는 어려웠는데
    요즈음은 과학의 발달로 쉬워졌습니다.
    이렇게 물질은 극미로 이루어져 있다고 물리학자들이 증명해주고 있는 거예요.
    이 세계를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모양과 색깔이 없는 파장의 세계라고 물리학자들은 얘기 합니다.
    만일 내 밖에 따로 존재하는 형태가 있다면
    전자현미경으로 봐도 그대로 나타나야 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내 밖에 따로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마음이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죠.

    그래도 마음이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많죠?
    그래서 이것을 규명해야 됩니다.
    물질적인 문제가 확실히 규명이 되면
    우리 생활에 일대 변화가 일어납니다.
    형태나 색깔이라는 것이 전부다 내가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라면
    창조적 삶을 살 수가 있다, 얼마나 좋아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영역이 생기는 거죠.
    그런데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없죠.
    그것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 세계는 99% 비어있는 세계라고 과학자들은 얘기를 합니다.
    99% 비어 있다면 책상을 손으로 만지면 쑥 들어가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손을 이루고 있는 전자하고 책상을 이루고 있는 전자가
    서로 밀어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보이는 이 세계가 마음이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여기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만들어졌다는
    능조색(能造色)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되겠죠.
    물질이라는 것은 알고 보면 사실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마음이 밖으로 투영 되어서 보여 지는 것이지
    물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게 유식의 기본적인 가르침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각적으로 보면 모양과 색깔이 있다 이 말이에요.

    지(地)는 흙이고, 수(水)는 물이고, 화(火)는 불이고, 풍(風)은 바람이죠.
    색깔로 얘기하면, 흙의 색깔은 보통 노란 색이고, 물의 색깔은 흰색이에요.
    불의 색깔은 붉은 색이고, 바람의 색깔은 녹색입니다.
    그런데 이 사대가 감각이라면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책상을 만져 보면 무슨 느낌이 납니까?
    딱딱하죠?
    딱딱하다면 흙의 요소인데, 그것이 느낌으로 전달되죠.
    딱딱하다, 부드럽다, 감각을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물은 젖는 성질이 있고 불은 뜨겁고 바람은 움직이는 성질이 있죠.
    물은 젖기 때문에 촉촉하다는 느낌이죠.
    이 느낌은 촉감, 감각으로 오는 거예요.
    뜨거운 것도 감각으로 오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피부에 부딪치고 지나갈 때
    느껴지는 움직임이 바람의 요소에요.
    그래서 물질적이라는 것은 전부다
    감각이라는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밖에 따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미혹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찻잔을 눈으로 보이고 만지면 딱딱하게 느껴지니까
    여전히 내 밖에 따로 있다고 보는 거죠.
    찻잔은 흙에다 물을 부어서 모양을 만들어서 불에 구워서 만든 것인데,
    이 찻잔이 내 밖에 따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여기서 흙의 요소 빼고, 물의 요소 빼고, 불의 요소 빼고,
    바람의 요소를 다 빼버리고도 이 모양이 그대로 있어야 됩니다.
    형태를 이루고 있는 원소를 다 제거해 버렸을 때
    이 찻잔이 그대로 존재해야 되는데 존재하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내 밖에 따로 독립되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관계 속에서, 인연에 의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조금 더 유식학적으로 얘기하면,
    아뢰야라는 마음에는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 하나에도 온 몸의 정보를 다 가지고 있죠.
    그 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은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어요.
    찻잔이라는 정보도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찻잔을 앞에 내 놓으면 찻잔이라고 인식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찻잔이 공통적으로 우리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면,
    동물들도 이것을 찻잔이라고 인식하냐 이거죠.
    말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게 마음이 바깥으로 투영되어서 나오는 거예요.

    좀 더 깊이 얘기하자면,
    아뢰야식에는 수많은 종자가 있는데
    이 수많은 종자가 아뢰야식의 한 부분인 전오식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할 때
    색이라는 종자가 현행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현행을 하면 전오식이 이것을 보게 되고
    이때 다섯 감각에 의해서 나타나는 물질적 세계는
    전부다 아뢰야식 종자에서 나온 겁니다.
    아뢰야식 종자가 현행해서 대상화 되어서 나타나는 거예요.
    이것을 이해하면 유식에 대해서 다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때 나타나는 색하고
    제6의식에서 나타나는 색하고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 색은 실제로 만지면 촉감이 딱딱하잖아요.
    눈으로도 딱딱하게 보이고,
    두드리면 소리도 나고, 냄새도 나고,
    이렇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렇게 확실히 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 역시 마음이 발현되어서 나타난 거라 이거죠.
    물리학자가 우주는 파장의 세계고 99%가 다 비어 있다고 했듯이
    이렇게 모양 색깔이 나타난 것은 마음의 정보가 발현을 해서
    파장의 세계에 도배를 한 거죠.

    우리가 상대방과 다투게 될 때 ‘네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그 ‘잘못했다’는 종자가 튀어나와서
    상대방에 덮어씌워놓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게 서로가 각자 경계를 만들어놓고 잘못했다고 하는 거지 진실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지가 만들어놓고 지가 싸우고 있는 격인데
    그것을 맞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면 영상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대개 감각을 통해서 나와요.
    자비수관도 공부를 해보면
    피부 속에, 아뢰야식 속에 있는 정보가
    마치 스크린 같은 역할을 하는 몸을 통해서 다 나와요.

    그런데 제6의식에서 나타나는 색은 영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수행 중에 나타나는 것도 다 영상입니다.
    전오식을 통해서 나타나는 세계는
    마치 진짜 같이 보이기 때문에 힘이 있는데
    제6의식을 통해서 나타나는 영상은 힘이 없습니다.
    10년 전, 20년 전 수많은 영상이 눈을 감고 있으면 나타나지만
    이것은 같은 영상이라도 구속력이 없어서 힘이 없습니다.

    정리를 하면 이런 겁니다.
    흙은 딱딱하고, 물은 촉촉하고, 불은 뜨겁고,
    바람은 움직임이고, 이런 것은 감각입니다.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게 ‘대승즉용(大乘卽用)’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또 하나는 질감이 없어 상대적인 개념이 없는 색이다.
    극미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의식의 대상인 법처(法處)에서 거두어지는 색이다.
    이것은 마치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일체 색법이 인연이 모여져서 있는 것과 같으나,
    사실 그 바탕과 작용은 모두 비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하나는 질감이 없어 상대적인 개념이 없는 색이다.’
    영상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질감이 없죠.
    이렇게 질감이 없이 의식에서 나타나는 색을 법경(法境)이라 그럽니다.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수행도 그렇고 꿈도 그렇고 여기에 얘기한 것처럼
    ‘그 바탕과 작용은 모두 비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이렇게 보면 되는데,
    수행과정 중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또 무슨 꿈을 꿨다고 꿈 풀이 해주기를 바라고 그러잖아요.
    그런 분들은 이 유식공부를 해야 돼요.

    그래서 질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튀어나오는 대상인 반면에
    의식상에 나타나는 것은 영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의식상에서 나타나는 걸 찾아 봤는데,
    극략색(極略色), 극형색(極逈色), 수소인색(受所引色), 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
    정소인색(定所引色), 다섯 개가 있습니다.
    극략색(極略色)은 지극할 극(極)자에 다스릴 략(略)자, 지극히 작은 색, 극미를 얘기하고,
    극형색(極逈色)은 지극할 극(極)자에 멀 형(逈)자, 밝음, 어둠, 빛, 그림자를 말하고,
    수소인색(受所引色)라는 것은 계(戒)를 받으면 계체(戒體)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살생을 하려는 마음을 낼 때
    ‘살생하지 마라’하는 계가 생각이 나면 딱 그치게 되는데,
    이렇게 사라지게 하는 게 계체라 그럽니다.
    그런데 계체에 대해서 유부(有覆)에서는 물질적인 것이라고 보는데,
    색은 색인데 표가나지 않아서 무표색(無表色)이라 하고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정신작용으로 봅니다.
    그래서 수계(受戒)에 의해서 발현되는 색이므로 수소인(受所引)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은 두루 계탁해서 일어난 색입니다.
    이것은 착각이에요.
    거북이털 보셨어요? 없죠.
    이것은 거북이가 바다에서 나올 때 등에 미역 같은 해초가 있는 것을 보고
    거북이털이라고 착각해서 보는 거죠.
    그리고 토끼뿔도 멀리서 토끼를 보니까
    두 귀가 마치 뿔인 것으로 착각해서 보는 것처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 자기가 헤아려서 있다고 보는 겁니다.
    또 하나는 정소인색(定所引色)인데,
    선정을 통해서 이끌어져서 나타나는 색입니다.
    선수행을 하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의식상에 나타나는 것은
    전부다 영상에 지나지 않고 구속력이 없습니다.
    결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얘기 하는 겁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게,
    첫 번째는 물질이라는 것은 전부다 마음이 만든 것이다,
    두 번째는 마음이 만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 수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의 바탕과 대상의 바탕이 모두 다 성품이 공(空)하여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모두 자체의 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는 상대상으로 인하여 존립하는 것이며,
    상대상은 자기의 존재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상대상은 자기의 입장에서 보는 상대상이며,
    자기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자기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성립시키기도 하면서 빼앗기도 하는 것으로
    독자적으로 결정된 자기의 성품은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바탕과 대상의 바탕이 모두 다 성품이 공(空)하여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모두 자체의 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품이 공(空)하여’ 이것은 실체나 자아가 없다는 얘기죠.
    제가 얘기 했죠.
    의식상에 나타나는 영상은 별로 힘이 없다.

    ‘능연(能緣)’은 능히 반연하는 주관을 얘기하고,
    ‘소연(所緣)’은 반연 되는 바, 대상을 얘기 합니다.
    그러면 ‘주관과 객관이 모두 자체의 힘을 갖고 있지 않다’이렇게 되는 거죠.
    전오식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이 세계는 질감이 느껴지는데 반해서
    의식상에서 나타나는 대상은 질감이 없는 거죠.

    ‘자기는 상대상으로 인하여 존립하는 것이며,
    상대상은 자기의 존재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상대상은 자기의 입장에서 보는 상대상이며,
    자기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자기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성립시키기도 하면서 빼앗기도 하는 것으로
    독자적으로 결정된 자기의 성품은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주객이 상대해서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 그 자체는 원래 비어 있어서 성품이 없다는 거죠.
    아뢰야식이 발현되어서 나타나는 이 세계는
    인과의 법칙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하고
    공간적으로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주이멸하는 거예요.

    또 능(能)은 소(所)로 인하여 성립하는 것이며, 소는 능으로부터 세워진다.
    능이 자체적인 힘으로서 결정된 경계가 없으므로 소에 들어가는 것이며,
    소가 자체적인 힘으로서 결정된 경계가 없으므로 능에 들어가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거두어들이면서 서로의 존재를 도와주는 것으로 모두 다 임시로 시설된다.
    인연이 모이면 있는 듯 하나 인연이 흩어지면 다시 사라진다.
    모든 것은 오직 식(識)이 지닌 것으로서 끝내는 공한 성품에 돌아가는 것이다.


    ‘또 능(能)은 소(所)로 인하여 성립하는 것이며’
    능(能)은 주관이고 소(所)는 객관이죠.
    그러면 ‘또 주관은 객관으로 인하여 성립하는 것이며’

    ‘능이 자체적인 힘으로서 결정된 경계가 없으므로 소에 들어가는 것이며,
    소가 자체적인 힘으로서 결정된 경계가 없으므로 능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소는 대상이에요.
    그러면, ‘주관인 능이 자체적인 힘으로서 결정된 경계가 없으므로 대상에 들어가는 것이며,
    대상은 자체적인 힘으로서 결정된 경계가 없으므로 주관인 능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서로가 서로를 거두어들이면서 서로의 존재를 도와주는 것으로 모두 다 임시로 시설된다.
    인연이 모이면 있는 듯 하나 인연이 흩어지면 다시 사라진다.
    모든 것은 오직 식(識)이 지닌 것으로서 끝내는 공한 성품에 돌아가는 것이다.’
    내밖에 따로 존재하는 게 있다면
    인연의 화합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마모되거나 무너지지 말아야 되죠.
    그렇지만 무너지고 마모된다는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전부 마음이 만든 거고
    마음이 만든 것은 역시 인과법칙에서 못 벗어난다 하는 거죠.

    결국 이 물질세계가 알고 보면 전부다 마음이 만든 것이다,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깊게 파헤치면서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다음 시간에는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 유식 삼성이라는
    아주 중요한 핵심이 되는 공부를 하겠습니다.

    끝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