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강의 - 1)

경호... 2012. 1. 5. 02:09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강의 - 1)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한문을 풀이해보면,
    두루 헤아려서 집착하는 성품을 말합니다.
    집착하기 전에 나타나는 게 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주만물이 전부 허상인데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심지어 법당에 모신 부처님상도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타(他)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인데,
    모든 현상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법당에 부처님상도 많은 불자들이 조성을 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 역시 진짜는 아니다 이런 말입니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원만하게 이룬 참다운 성품, 진여(眞如)를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물을 끼얹어도 젓지 않고, 불로 태워도 타지 않는 게 부처님이죠.
    이것은 바로 원성실성을 근거로 해서 하는 얘기고,
    이게 진짜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지해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부처라 그러고,
    거기서 조금 벗어나면, 인연을 따라서 나타난 부처님을 진짜라 하는데,
    근기가 수승해서 법의 눈을 갖추게 되면 원성실성의 법신을 보게 된다,
    부처님 비유를 들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인생 살아가는 것도 똑같아요.
    모양과 색깔에 끄들여서
    옳고 그름, 높고 낮음, 곱고 추함을 따지고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이런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변계소집성이고,
    조금 법문을 듣고 법의 눈이 트인 사람은
    기도를 해서, 기도 성취가 안 되더라도 ‘아직까지 인연이 아니구나’
    이렇게 모든 일을 인연으로 바라본다면
    그게 의타기성이에요.
    그 다음은, 모든 것은 인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지혜가 생기면 본질을 꿰뚫어 보는데, 그게 원성실성이다 하는 거예요.

    여기 내용은 더 깊이 있는 얘기를 합니다.
    자 공부를 해보죠.

    묻습니다.
    : 삼성(三性) 가운데에 변계소집성은 망상이라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타기성은 인연에 속하는 것이니 있는 것입니까.


    의타기성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이죠.
    변계소집성은 물질, 상을 얘기한다면,
    의타기성은 우리 마음을 얘기 합니다.
    이 마음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타를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거죠.
    그래서 경계의 바람이 불면 일곱 개의 마음이 일어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말나식의 일곱 개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능가경』에 얘기를 하고 있죠.

    다음에 보면, 경계의 대상에 의해서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사실 그 본질은 원성실성, 진여라고 얘기 할 겁니다.
    묻는 사람은, 인연에 속하는 게 있는 거 아니냐, 이렇게 물었죠.

    답을 합니다.
    : 이 두 가지는
    능(能)과 소(所)의 모습으로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으로 모두 어떤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망상으로 인하여 이름과 모양을 세우고,
    이름과 모양으로 인하여 인연을 세웠기 때문이다.
    만약 망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름과 모양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름과 모양이 있지 않아 인연 자체가 공(空)한 것이니,
    만법이 이름과 모양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능가경』 게송에서 다음과 말하였다.


    ‘이 두 가지’는 변계소집성하고 의타기성을 얘기하죠.
    ‘능(能)과 소(所)의 모습으로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능(能)은 주관이고 소(所)는 객관을 얘기 합니다.
    주객이 서로 상대했기 때문에 뭐가 생긴다는 겁니다.
    마치 남녀가 부부 인연을 맺으면 자식이 생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모두 어떤 실체가 없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실체가 없다는 얘기죠.
    만약에 똑같이 실체가 있다면
    아무리 부부생활을 백날 해봐도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거죠.
    실체가 있다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야 되는데,
    씨앗을 땅에 심으면 싹이 트고 잎이 생기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고 바뀐다 이거죠.

    왜 실체가 없느냐 하면,
    ‘망상으로 인하여 이름과 모양을 세우고,
    이름과 모양으로 인하여 인연을 세웠기 때문이다.’
    망상은 무지, 무명에 의해서 생기는데,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하자면,
    모든 존재가 양자역학에서는 모양과 색깔이 없다고 얘기 합니다.
    파장의 세계고 미립자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면 모양이 있고 저것이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얘기하게 되죠.
    이런 것은 전부 마음이 만들었다고 얘기를 합니다.
    현대 물리학자들도 그렇게 얘기를 해요.
    만일에 사물이 내 밖에 따로 존재한다면
    부서지지 말고 영원히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내 밖에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마치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여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보이는 것이 고정 되게 보이는 것은 가짜다.
    두 번째, 분리 되어서 독립되게 보이는 것도 가짜다.
    세 번째, 실체가 있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 역시 가짜다.

    모든 생명은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지
    독립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시간상 끊임없이 변하는 게 진실이에요.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데, 이것이 진실인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생(生)은 좋아하지만 죽음은 싫어하잖아요.
    고정되기를 원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고정되게 보이는 것은 변하기 때문에 다 가짜다’ 이거죠.
    그래서 무상(無常), 변하는 것이 진리다 이거죠.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지 말고 변화를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변화를 지켜보면 거기서 모든 해법이 다 나오는 거예요.

    두 번째, 분리 되어서 보이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언어를 사용해서 이것은 무엇이다, 무엇이다, 지칭을 하게 되면
    전부다 두 동강 나버린다는 거예요.
    이것은 찻잔이요, 이것은 책상이고, 이것은 시계다, 이러면
    이름 때문에 찻잔과 책상과 시계가 다른 거예요.
    그렇지만 찻잔, 책상, 시계의 본질을 잘 살펴보면
    이런 것들은 부서진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찻잔은 흙, 물, 불, 바람이 결합을 해서 나타나고,
    책상도 나무가 흙, 물, 햇빛 등 여러 가지 인연으로 자라면
    그것을 잘라서 책상이라는 모양을 만드는데,
    이것도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시계도 여러 가지 부속들이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존립하는 것이고,
    그래서 ‘분리되게 보이는 것은 다 가짜다’ 이거죠.

    또 ‘실체가 있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
    이것은 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겁니다.
    이런 게 진실이다 이거죠.

    그래서 변계소집성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고정되게 보고 분리 시켜서 보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이 자기가 그렇게 본다면,
    이 사람은 착각 속에 빠져 산다는 거죠.
    요즘말로 환상 속에 산다고 볼 수 있죠.

    ‘이름과 모양으로 인하여 인연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타기성이죠.
    이름과 모양으로 인해서 인연이 모여졌다는 거죠.
    망상 때문에 이름과 상이 생기고,
    또 이름과 상은 인연으로 발전하게 됐죠.
    그래서 망상이 문제에요.

    ‘만약 망상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름과 모양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름과 모양이 있지 않아 인연 자체가 공(空)한 것이니,
    만법이 이름과 모양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망상이 생기지 않았다면’이랬는데,
    망상이 생기는 원인은 무지, 무명 때문에 그런 거죠.
    이 무명은 비롯된 곳이 없습니다.
    비롯함이 없다는 것은 홀연히 생겼다는 것이고,
    홀연히 생겼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명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현실적으로 괴로우니까.
    왜 괴로우냐?
    번뇌가 일어나니까.
    번뇌 망상은 왜 일어나느냐?
    ‘내다’라는 자아(自我) 때문에.
    자아는 어디서 비롯되느냐?
    무지 무명에서 왔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것은 전 시간에 얘기 했는데,
    감각적으로 오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서 오는 것이고,
    번뇌 망상은 의식에서 오는 것이고,
    ‘나’를 내 세우는 것은 자아관념인 말나식에서 오는 것이고,
    무명은 무의식, 아뢰야식에서 오는 거예요.
    심식을 따져보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망상이 생기지 않으면 모양과 이름이 없고,
    이름과 모양이 없으면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텅 비어 있다 이 말이에요.

    『능가경』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유하면 수행하는 일과 같아서
       한 곳에서 여러 경계 나타나지만
       수행처에 여러 경계 없는 것이니
       망상의 모습도 이와 같다네.


    ‘수행처에 여러 경계 없는 것이니’이랬는데
    본문에는 ‘수행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번역하시면서 넣었느냐 하면, 이런 거예요.
    수행을 하면서 안으로 쭈욱 들여다보면,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영상을 보게 되는데,
    그게 수행처에요.
    이렇게 안으로 들여다보면,
    생각의 기멸을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망상은 의식에서 나타나는데 의식을 상속식이라 그래요.
    이 의식의 특징은 부모가 자식에게 상속하듯이 매 순간순간 지속되는데
    인과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능가경』에서 말한 것을 풀이해보자는 거죠.
    이것을 풀이해 보자.
    이 게송은 망상인 변계소집성을 타파한 것으로
    이승이 모든 관행(觀行)을 닦아 나가는 것과 같다.
    만약 파랗다는 생각을 지어 관할 때에 천지만물 모두가 파랗지 않은 것이 없다.
    파란 것이 없는 곳에서 파란 것을 보는 것은 마음이 변화한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한 가지 색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습은 같지 않은 것이다.
    비유하면 범부가 허망하게 생사를 보는 것으로,
    이것 또한 생사가 없는 곳에서 허망하게 생사를 보는 것이다.
    이것을 『능가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게송은 망상인 변계소집성을 타파한 것으로
    이승이 모든 관행(觀行)을 닦아 나가는 것과 같다.’
    ‘망상(妄想)’은 이미지를 얘기 합니다.
    ‘이승(二乘)’은 성문과 연각이고 ‘관행(觀行)’은 위빠사나를 얘기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지행(止行)이라 그럽니다.
    변계소집성 타파하는 것을 왜 관행으로 해야 되느냐.
    매 순간순간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고정되어 있는 것이 타파가 돼요.
    수행을 하게 되면 모든 사물이 고정되게 안 보입니다.
    매 순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비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관행[觀行, 위빠사나]은
    ‘분리 시켜서 본다’ 그런 말이에요.
    요즘말로 하면, 분석해서 본다, 꿰뚫어 본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모두 상으로 보이고, 고정되게 보이고,
    실체로 보이는 이것을 타파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위빠사나를 닦아나가는 것과 같다 이랬어요.
    그래서 관행을 하게 되면 타파가 되는 겁니다.

    ‘만약 파랗다는 생각을 지어 관할 때에 천지만물 모두가 파랗지 않은 것이 없다.
    파란 것이 없는 곳에서 파란 것을 보는 것은 마음이 변화한 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원래 파란 것이 없는데 내가 파랗다는 생각을 지어서 보게 되니까
    모든 게 다 파랗게 보이는 거예요.
    「청정도론(淸淨道論)」에 보면 성문, 연각 수행법인 관상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흙, 물, 불, 바람, 허공 5대 원소를 관찰대상으로 두고 수행하는 게 있고,
    색깔, 빨간색이든 파란색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흙으로 지름 40cm 원판을 만들어서 앞에 두고 지켜보면서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그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그 이미지를 익숙하게 익혀가는 것, 이게 관상법이에요.
    이런 식으로 생각을 지어가면 마음이 그렇게 만들어서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물을 볼 때도 그렇게 보이는 게 유식이죠.
    오직 마음뿐이고 다른 경계는 없다, 이런 얘깁니다.

    그래서 ‘파랗다는 생각을 지어 관할 때에
    천지만물 모두가 파랗지 않은 것이 없다.’
    원래 파란 것이 없는데 그렇다는 거죠.
    ‘파란 것이 없는 곳에서 파란 것을 보는 것은 마음이 변화한 것이다’
    책상이고 찻잔이고 모든 게 파장, 에너지의 흐름인데
    고정된 모양이나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마음이 지어서 본다는 거죠.
    과학에서 얘기하는 거나 아주 똑같습니다.

    ‘한 가지 색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습은 같지 않은 것이다.
    비유하면 범부가 허망하게 생사를 보는 것으로,
    이것 또한 생사가 없는 곳에서 허망하게 생사를 보는 것이다.
    이것을 『능가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삶과 죽음이 본래 없는데 어리석은 중생들은 삶과 죽음을 본다는 거죠.
    생사는 본래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입니다.
    태어나면서 성장해 가지만,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겁니다.
    하지만 현재 삶을 이루고 있죠.
    그래서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인데
    이것이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있으면 고통이 따르는 겁니다.
    여기서 ‘생사를 본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이거죠.

    생사가 없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공을 얘기 합니다.
    텅 빈 자리, 가(假)도 없고 실체가 없는 자리는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어요.
    삶과 죽음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비유를 들어서 삶과 죽음이 있다는 것은
    마치 눈병 난 사람이 허공에 꽃을 보는 것과 똑같다 이거죠.

       비유하면 여러 가지 백태와 같아
       망상으로 많은 색을 나타난다네.
       색이다 아니다의 구별 없으나
       인연으로 일어나서 그리 보이네.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인 즉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뜻이에요.
    ‘연기불각(緣起不覺)’이라는 말이 그런 말입니다.

    이것은 인연으로 일어나는 의타기성을 타파한 것이다.
    이것은 눈에 눈병이 나 백태가 낀 상태에서 보여지는 것이
    실제와 차별이 있어 다른 것과 같다.
    헛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연으로 일어나는 법이다.


    ‘이것은 인연으로 일어나는 의타기성을 타파한 것이다.’
    타(他)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타파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까 사물을 보는 것, 세 가지를 얘기 했죠.
    사물을 고정 되게 보는 것이 첫 번째에요.
    이렇게 보는 것은 자기가 헤아려서 보는 것이고
    이것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그래요.
    지식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일반사람은 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법[佛法]을 모르면 이것을 고정되게 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가장 낮은 차원에서 미혹한 상태에서 보는 겁니다.

    두 번째는 조금 불법을 들어가지고 의식이 깨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의타기성(依他起性)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기도도 의타기성입니다.
    기도가 성취되는 이유가,
    만일 부처님이 고정되어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 고정되어 있다면
    백날 해도 기도 성취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을 내면
    바로 불보살하고 연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보조스님 말씀에
    ‘능례소례(能禮所禮)가 진성연기(眞性緣起)한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 받는 부처님하고는 서로 참성품이 연기한다,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거죠.
    그러기 때문에 아주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성취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이치를 모르고 기도를 하면,
    성취되면 좋아하고 성취 안 되면 싫어하고,
    우환이 생기면 기도를 안 할 뿐만 아니라 종교까지 바꾸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도 성취가 안 되고 안 좋은 일이 생길 때에는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법을 알면 그 이유를 알게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업장, 죄업이 미리와 가지고 소멸되는 거예요.
    이런 이치를 알면 참으로 불보살님께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죠.
    이게 다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의타기성이에요.

    여기에 의타기성 타파는
    실체가 없는 공으로 볼 때 타파한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죠.

    ‘이것은 눈에 눈병이 나 백태가 낀 상태에서 보여지는 것이
    실제와 차별이 있어 다른 것과 같다.
    헛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연으로 일어나는 법이다.’
    ‘인연으로 일어나는 법’이라는 것은 텅 비었다는 거죠.
    그래서 인연을 잘 보면 텅 빈 공을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의타기성을 타파한 것이 된다 이런 얘깁니다.

    여기서 의타기성은
    변계소집성에 의해서 나타나는 염분의타(染分依他)를 얘기 하는데,
    그것을 타파하는 겁니다.
    이렇게 타파된 의타기성을 깨끗하다 해서 정분의타(淨分依他)라 그럽니다.
    이것은 바로 원성실성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러한즉 망상의 바탕은 공(空)한 것으로 인연에 어떤 결정된 성품이 없다.
    이것이 곧 원만하게 구경의 일법(一法)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눈 밝은 사람이 깨끗한 허공을 보는 것과 같다.
    하물며 하나의 진심(眞心)에서 다시 더 망념으로 존재할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즉 망상의 바탕은 공(空)한 것으로 인연에 어떤 결정된 성품이 없다.’
    결정 된 것이 없다, 이것이 공을 얘기 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 하면,
    위의 게송에서 ‘망상으로 많은 색을 나타난다네.’
    결국에는 모양과 색깔을 보고 있는 것은
    망상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이거죠.
    망상에 의해서 모양과 색깔을 보는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인데 모양과 색깔을 볼까요, 안 볼까요?
    알아둬야 할 것은, 모양과 색깔은 망상인 마음이 만든다는 얘기에요.
    부처님도 삼라만상 우주를 만드셨는데,
    그렇다면 부처님도 망상으로 만들었느냐?
    그게 아니라는 얘기죠.
    부처님은 중생들을 위해서 모양과 색깔이 나타나도록 만든 거예요.
    부처님을 물을 끼얹어도 젓지 않고 불에 태워도 타지 않는다고 표현하듯이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삼라만상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망상에 의해서 모양과 색깔이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갖다 주고
    반면에 깨달은 사람이 나타낸 모양과 색깔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게 다른 점이에요.

    오늘은 의타기성 까지만 얘기를 하죠.
    이런 것에 이치를 잘 알아서 일상생활에 응용해서
    기도를 할 때도 고정되게 보지 말고,
    불보살의 힘을 빌려서 원성취하는 것도 의타기성, 연기라는 사실을 알고,
    본질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현상에서는 닦아 나가는 게 있지만
    진리 그 당체에서는 닦아 나아갈 게 없어요.
    그 자리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자리에요.
    그렇지만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은
    우리가 고통이 있기 때문에 그렇고,
    진리를 깨우쳐주기 위해서 출현하신 겁니다.

    항상 법이 중심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아시고
    법은 수행을 할 때 제대로 구현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수행할 때 마장이 생기고 힘겨울 때는
    불보살님께 기도를 해야 됩니다.
    기도는 그럴 때 하는 것이지,
    남편 승진시켜 달라,
    아들 수능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 이런 기도는
    부처님의 공덕 중에 천만 분의 일도 못 쓰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의 공덕을 최대한으로 잘 쓰는 것은
    앞에서 말한 수행할 때 하는 기도가 제대로 쓰는 것이고
    그 외에 하는 기도는
    불보살 공덕을 천만 분의 일도 못 쓴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인과의 법칙을 잘 아는 이는 기도를 안 합니다.
    그렇지만 대승불교에서 기도를 많이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수행을 해도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불보살에게 청하는 겁니다.
    초지를 지나가지고 십지보살이 되더라도
    항상 불보살님께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칠지에서 십지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이끌어주고,
    마지막 십지에서 불지에 이르게 될 때 나타나는 보살이 보현보살이라 그럽니다.
    왜 보살이 나타나느냐 하면, 혼자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일상사에서의 기도는 별거 아니죠.
    기도의 한계는 삶과 죽음을 해결 못해준다는 데에 있어요.
    부처님께 ‘삶과 죽음을 해결해 주십시오.’, ‘해탈시켜 주십시오.’,
    ‘깨닫게 해 주십시오.’ 이런 것은 안 되는 겁니다.
    본인이 해야 됩니다.

    가장 이상적인 기도는 수행하고 곁들이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기도할 때 참회를 합니다.
    절을 많이 해서 내 업장을 소멸시킴으로 해서
    불보살의 가피를 빨리 받는 겁니다.
    그 다음에 염불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아미타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인연이 되어서 왕생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깨달아서 중생 구제 원을 세우고
    항상 중생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은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이는 하나도 없어요.
    이 기도가 제일 좋은 기도에요.
    그래서 불교 기도는 항상 수행하고 결부 되어서 함께 한다는 거고
    불교 외에 종교에서는 수행이 없기 때문에 기도만 하는 겁니다.
    이것이 타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법을 나타나는데
    수행이 중심이 되어야 만이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