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강의 - 2)

경호... 2012. 1. 5. 02:10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강의 - 2)

    묻습니다.
    : 삼성 가운데에 몇 가지 법이 가법(假法)이고,
    몇 가지 법이 실법(實法)입니까.


    ‘가법(假法)’은 가짜의 현상,
    ‘실법(實法)’은 실질적인 현상입니다.

    답을 합니다.
    : 『식론』에서 말하였다.
    변계소집성은 망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가법(假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겨나 있는 이것은 자체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거짓도 아니며 진실도 아니다.


    유식삼성에 대해서 잊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는 것은 두루 헤아려서 집착하는 성품이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변계소집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착각을 일으키느냐,
    거기는 두루 헤아려서 집착을 하게 되면
    마치 없는 데도 있는 것 같이 보인다는 거예요.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보는 것과 똑같다 이거죠.
    원래 뱀은 존재하지 않는데 착각한 사람에게는 있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이것을 비유 들면,
    눈병 난 사람이 허공을 쳐다보면 허공에 꽃이 피었다 사라졌다 하는 거예요.
    멀쩡한 사람 눈에는 허공에 꽃이 없는데,
    눈병 난 사람에게는 분명하게 있는 거죠.
    여기 비유는 눈병 났다는 게 포인트겠죠.
    그래서 착각을 일으켰다는 것은 잘못 알고 있다는 거죠.

    허공을 비유 들어서 얘기를 했는데,
    여러분들이 병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확인 해보죠.
    이 찻잔이 여러분 보기에 모양과 색깔이 있죠?
    그렇게 보이는 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이게 고정되게 보이고, 딱딱하게 보이고,
    다른 것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렇게 보인다면 여러분은 변계소집성에 걸린 겁니다.
    이런 것을 미혹이라 그럽니다.
    이것은 법문도 듣고, 수행도 해서 바꿔야 되요.

    의타기성(依他起性)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입니다.
    변계소집성은 대상에 대한 것이라면
    의타기성은 우리 마음에 대한 얘기에요.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해서 보는 것을 변계소집성이라고 하는데
    더 자세하게 보니까,
    ‘뱀이 아니고 쌔끼줄이구나.’라고 바르게 안 거예요.
    새끼줄은 여러 가닥으로 꼬여있으니까
    타를 의지해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말이에요.
    ‘아, 사물이든 마음이든 모든 것이 타를 의지해서 있구나.’
    이걸 바르게 사유해서 알았다면 뱀이라는 착각이 사라지는 거죠.
    이게 의타기성이에요.

    그래서 『해심밀경』에 보면,
    무상(無相)을 보려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는 변계소집성에 끌려가지고 모든 상을
    고정되어 있고, 분리 되어 있고, 실체로서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분리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체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 무상이라고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럴 때 얘기가,
    의타기성을 잘 알아야 된다.
    모든 것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이라는 것을 잘 사유하고
    그렇게 볼 수 있으면 ‘아,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고
    매 순간 변하는 하나의 흐름이구나.’이렇게 보는 거죠.
    그리고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이 생각했는데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고 서로 관계성을 가지고 있구나.
    실체로 있는 것 같이 보였는데 실체가 없더라.
    그러다 보니까 상을 찾을 수 없는 무상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이런 겁니다.
    새끼줄이 여러 가닥으로 꼬여졌다는 것을 안 것은 의타기성이죠.
    이 새끼줄을 발뒤꿈치로 문질러보니까
    또 여러 가닥의 삼[麻]으로 이루어 졌더라, 알게 된 거죠.
    비유를 들어서 얘기하는 겁니다.

    모든 사물들은 타를 의지하는 성품으로 봤는데,
    거기에는 자아나 실체를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그것을 무아, 공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원만하게 실다움을 이룬 성품, 원성실성이라고 합니다.

    여기 세 가지 중에 가장 핵심 되는 것이 의타기성인데,
    이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성을 제거하면
    그 자체가 원성실성이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한 주를 쉬었기 때문에 유식 삼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겁니다.

    ‘변계소집성은 망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가법(假法)이라 할 수 있다.’
    변계소집성이 가법이냐고 물으니까
    가법이라 할 수 있다 그랬어요.
    망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가법이죠.
    눈병 난 사람의 허공 꽃이라든지 뱀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거거든요.
    단지 착각이나 망상으로 지어서 본 것이죠.
    이 망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것이 생겨서 가법이라 한다, 그랬죠.

    ‘그러나 생겨나 있는 이것은
    자체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거짓도 아니며 진실도 아니다.’
    허공의 꽃이나 뱀은 자체 모습이 원래 없기 때문에
    거짓도 아니고 진실이라 할 것도 없다.
    이것이 변계소집성에 대한 얘긴데, 단순하게 보면 안 됩니다.

    『원각경』에서는 역시 허공의 꽃하고 꿈을 비유 들어서 얘기 합니다.
    눈 병난 사람에게는 허공의 꽃이 있고,
    꿈을 꿀 때는 분명히 사물이 있고 대상이 있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눈병 난 사람이
    허공에 꽃이 피었다 질 때 지는 곳이 있는지 살펴야 되고,
    필 때 피는 곳에 뭐가 있는지 살펴봐야 되요.
    그러면 필 때 피는 곳이 없고 질 때 사라진 곳도 없어요.
    그 자리 그 곳이 허공이거든요.

    꿈도 꿀 때는 있는데 깨고 나면 그것이 없어요.
    마찬가지로 수행 할 때도 몸에 현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곳이 있는지 살펴야 되요.
    진동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곳, 사라지면 사라지는 곳이 있는지 살펴봐야 됩니다.
    그렇게 살펴보면 일어난 곳도 없고 사라진 곳도 없습니다.
    이렇게 알면 눈병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허공에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봐도
    이것은 내가 눈병이 나서 헛것으로 보인 것이지
    허공에는 원래 저것이 없지, 이렇게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꿈 꿀 때는 있지만 깨고 나면
    꿈이라는 것이 진실한 게 아니구나, 이렇게 알듯이
    모든 현상도 지나고 나면 기억으로 남지
    현실로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게 되면 꿈을 꿀 때나 꾸기 전이나 사실 똑같고,
    허공에 꽃이 피나 지나 바탕이 비어 있는 것같이 똑같은 거예요.
    이렇게 알면 변계소집성을 제대로 파악 한 겁니다.
    그러면 의타기성으로 돌아오는 거죠.

    이렇게 일어나면 일어나는 곳이 없고
    사라지면 사리지는 곳이 없는 것을 명확하게 보면
    그것을 지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의타기성을 보죠.
    의타기성은 진실로 있기도 하며 거짓으로 있기도 하다.
    의타기성에는 많은 인연이 모여져서 서로 이어지는 분위(分位)의 성질이 있기 때문에
    임시로 존재하는 가유(假有)라고 설한다.


    찻잔은 많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예요.
    흙은 붉은 흙, 검은 흙, 점성이 강한 흙, 약한 흙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물도 깨끗한 물, 오염된 물 등이 있을 테고,
    불도 장작불, 전기로 만든 불, 여러 가지 불이 있을 거고,
    바람도 더운 바람, 찬 바람, 부드러운 바람, 거친 바람 등,
    이렇게 수많은 인연이 결합되어서 찻잔이 된 거죠.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 부모님들이 여러분 태어나게 하려고
    맞선을 본다든지 열심히 연애를 한다든지 해서 태어난 겁니다.
    여러분 부모님들도 태어나게 된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그 위에 부모님들이 열심히 맞선도 보고 연애도 해서
    여러분 부모님이 태어난 거잖아요.
    그 위에, 그 위에, 그 위에 부모님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수많은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 몸뚱아리도
    흙, 물, 불, 바람, 허공 5대 원소로 이루어져 있는 거예요.
    이런 것을 의타기성이라 그럽니다.

    여러분 몸만 그런 게 아니고
    정신작용하고 몸하고 상호관계도 잘 파악해야 하고
    또 주변의 환경도 잘 파악하게 되면 여러 가지 인연이 나타나는 거죠.
    몸은 지수화풍공 5대,
    정신은 감수작용, 표상작용, 의지작용, 판단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죠.
    가족관계, 자연계의 관계, 이런 여러 가지 인연에서
    자기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임시로 존재하는 것을 가유(假有)라 그럽니다.
    계속 변하기 때문에 지속이 안 되는 거죠.
    여기서 가(假)는 거짓이라는 뜻도 있지만 빌린다는 뜻입니다.
    내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다른 것을 빌려서 존재한다고 해서
    가유(假有)라 하는 겁니다.

    또 다른 면으로은 심(心)과 심소(心所)와 색(色)이 인연 화합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실유(實有)라고 설한다.


    이때 마음[心]은 심왕(心王)을 얘기 합니다.
    심왕은 여덟 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의식을 얘기 합니다.
    그리고 심소(心所)는 심왕이 소유한다는 뜻에서 심소유법(心所有法)인데
    줄이면 심소, 요즘 말로하면 의식에 따라서 일어나는 심리를 얘기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찻잔을 보는데,
    전체적으로 보는 것을 심왕[의식]이라 그러고,
    동시에 이 모양과 색깔을 자세히 부분 부분 캐치해서 보는 것을 심소라 그럽니다.

    그리고 심(心)과 심소(心所)와 색(色)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얘기 합니다.
    그런 것이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설한다.
    여기에서 인연으로 모여진 것은 가유(假有)지만
    마음을 가지고 얘기하면 실제로 있다고 보는 것인데,
    유식에서는 마음은 있다[有]고 보는 입장이에요.
    그래서 오직 마음뿐이고 다른 경계는 없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보는 유(有)도 깨집니다.

    만약 실법이 없다면 가법 또한 없다.
    가법은 실법이라는 원인에 의지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원성실성은 오로지 실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의타기성의 인연에 의지하지 않아도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실법이 없다면 가법 또한 없다.
    가법은 실법이라는 원인에 의지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얘기를 해 보죠.
    심(心), 심소(心所), 색(色)은 인연화합으로 이루지기 때문에
    가유(假有)로 봐야 되는데 왜 실유(實有)로 볼까요?
    몰라요?
    모르면 너머 갑시다. ㅎㅎㅎ
    여러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원성실성을 보겠습니다.
    ‘원성실성은 오로지 실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실법’을 ‘실유’로 고치십시오.
    본문에 실유(實有)로 되어 있습니다.
    ‘원성실성은 오로지 진실로 있는 것[實有]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원성실성은 진여를 얘기하기 때문에 실유로 보는 거예요.
    진여는 허망하지 않고 참답고 바뀌지 않아서 진여인데,
    그것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죠.

    ‘의타기성의 인연에 의지하지 않아도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타기성의 인연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원성실성은 실제로 있다 이런 겁니다.

    ‘의타기성의 인연에 의지하지 않는 것’, 이것을 공부 합시다.
    원래 어려운 걸 공부해야만이
    머리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요.
    의타기성에는 가유(假有)가 있고 실유(實有)가 있죠.
    원성실성에는 오로지 실유(實有)만 있고
    변계소집성은 가유(假有)가 있죠.

    가짜로 있다는 것은 배대를 쳐보면,
    의타기성의 가유하고 변계소집성이 닮았고,
    의타기성의 실유하고 원성실성하고 닮았죠.
    그래서 의타기성 위에 변계소집성이 없어지면
    의타기성 그대로 원성실성이 된다는 얘기에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변계소집성은 있지도 않은 거죠.
    망상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유다 이거죠.
    의타기성에 가유가 알고 보면 변계소집성입니다.
    망상으로 이루어진 것도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눈병이 나서 허공에 있지도 않은 꽃이 피고 지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죠.
    그렇지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집니까?
    눈병 났기 때문에 그렇죠.
    눈병이라는 원인에 의해서 허공에 꽃이 피고지고 하는 거죠.
    그러면 눈병이라는 인연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허공에 꽃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도 인연인 거예요.
    그래서 변계소집성의 망상으로
    마치 허공에 꽃이나 꿈이 있는 것 같이 보였지만 가짜였더라,
    그런데 가짜를 분석해보니까 타를 의지하는 성품,
    인연으로 이루어졌다 이거죠.
    그게 곧 가유죠.

    이렇게 변계소집성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이것이 제거돼 버리면
    원성실성의 실유가 나타나는 겁니다.
    쉽게 얘기해서 의타기성에 변계소집성이 없어져버리면
    의타기성 자체가 원성실성이다 이 말이에요.
    그것이 실유라는 거죠.
    이때의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동일한 겁니다.

    이렇게 동일한 것을
    수연(隨緣)과 불변(不變),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인연 따라서 일어난 모습[隨緣]은 의타기성이고, 불변(不變)은 원성실성이죠.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란 말이에요.
    인연을 따르지만 본질은 늘 비어 있는 거예요.
    본질은 늘 비어 있으면서 대상을 만나면 인연의 모습을 나타내는 거예요.
    그때는 변계소집성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연을 따르는 모습을 집착해버리면 변계소집성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집착을 하지 말아야 되요.
    이게 의타기성하고 원성실성의 관계에요.
    원성실성을 진여라고 하는데,
    이 진여가 허공처럼 텅 빈 것만이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변계소집성이 빠진 의타기성을 원성실성이라고 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인연을 따르는 모습이거든요.

    이게 참 어려운데, 예를 들어서 얘기 하면
    인연을 따르는 모습은 이런 겁니다.
    이 세상 살다보면 ‘참, 세상이 허망하구나.’
    이렇게 알고부터는 하는 일에 집착을 다 놔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선근이 있는 사람이에요.
    ‘세상일이라는 것이 다람쥐 체 바퀴 도는 것과 같은 것인데
    명예나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허망할 뿐이다.
    내가 인생 살아온 것을 뒤 돌아보니까, 맞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내가 이룬 명예와 지위와 부라는 것이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구나.
    인연이 다 되어서 인생이 끝난다면,
    명예와 지위와 부라는 것은 결국 놓고 가야 되는 것이지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아는 사람은 인생을 제대로 산겁니다.
    그렇지 않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끝까지 명예, 지위를 붙들고
    부를 쌓아가지고 놓지 않으려 하고,
    이런 사람들은 죽을 때 후회하는 거예요.

    그런데 수행을 하면,
    과거는 지나가서 돌아오지 않아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원래 없고,
    현재는 매순간 바뀌는구나, 이렇게 아는 순간,
    이때까지 집착하던 것을 탁 놔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연 따라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지만 마음속에는 아무 흔적 없이 텅 비어 있는 거죠.
    그게 불변수연(不變隨緣)의 모습이에요.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도인이라 그러는 겁니다.

    공의 입장에서 얘기를 해보면,
    텅 빈 그 자리는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못 깨달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속법에는 그렇지 않다 이거죠.
    열심히 기도하고 공양 올리고 공덕을 짓는 게 있는 거예요.
    이렇게 공덕을 지으면
    그 공덕의 힘에 의해서 수행에 진전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성문 연각을 거쳐서 보살의 위치에 가서 부처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거죠.
    그렇지만 그 노력하는 바탕의 성인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둘 관계가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원성실성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거기에는 부처랄 것도 없기 때문에
    백날 부처님께 기도해도 다 소용이 없고
    백날 남에게 베풀어 줘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거기 그 자리는 부처, 중생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지만 세속에서는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깨달을 만한 법이 아무것도 없다면
    어느 누가 보살이나 부처를 지향하겠느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연등부처님[燃燈佛] 처소에 있을 때
    내가 뭘 받은 게 있느냐?”하니까, 없다고 얘기 하죠.
    그러니까 석가모니부처님이
    “내가 거기 가서 법이라도 받은 게 있다면 석가모니라 이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부처가 되려면 법이라도 받아야 부처가 될 텐데
    받은 게 없다면 어떻게 보살이 부처가 되려고 수행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런 의심을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본질의 입장에서 주고받고 하는 것은 분명히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연의 세계에서는 주고받는 게 분명하고
    공덕을 짓는 게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 진전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법문 듣고 기도도 하고,
    또 스님들에게 공양 올리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거,
    이런 게 헛된 것이 아닌 거죠.
    그렇지만 진여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게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원성실성은 오로지 실유로서 존재하는 것이다.’하는 것은
    진여를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존재하는 것이 의타기성의 인연에 의하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의타기성의 인연’은 변계소집성을 얘기 합니다.

    그 다음에
    이것을 풀이해 보자.
    변계소집성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이
    허망한 분별로 세워지는 것이니 가법이라 할 수 있다.
    법의 실체를 이야기하나 어떤 모습이 없어 거짓도 아니요 진실도 아니다.
    토끼뿔 등과 같이 거짓이나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을 의지하여
    총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구분되는 법 위에서
    가법인지 실법인지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성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이
    허망한 분별로 세워지는 것이니 가법이라 할 수 있다.
    법의 실체를 이야기하나 어떤 모습이 없어 거짓도 아니요 진실도 아니다.
    토끼뿔 등과 같이 거짓이나 진실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끼뿔은 귀가 삐쭉 올라와 있으니까
    그것을 뿔로 착각할 수가 있죠.
    토끼뿔이 없다면 진짜다 가짜다 얘기할 게 없는 거죠.
    이렇게 사물을 볼 때
    마치 고정되어 보이고 실체로 보이고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전부다 지가 헤아려서 변계소집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거죠.
    고정되어 보이고 실체로 보이고 분리되어 있다고 보이면
    ‘아! 내가 헤아려서 보고 있구나, 병에 걸렸구나.’
    이렇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반드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을 의지하여
    총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구분되는 법 위에서
    가법인지 실법인지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어떤 실체가 있는 것을 의지하여’그랬는데,
    실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총괄적인 것이든 부분적인 것이든 그것을 전제로 해가지고
    가법이다, 실법이다, 이렇게 세우는 건데,
    토끼뿔은 실체가 없잖아요.
    거기는 가법이고 실법이고 세울 수가 없죠.
    이게 변계소집성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히 헛것을 보고 있다는 거죠.

    의타기성의 가유(假有)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많은 인연이 모여진다는 가유이다.
    이것은 마치 병이나 화분 및 유정물 등과 같이
    어떤 요소가 모이고 쌓여서 된 법이다.
    많은 요소의 법이 일시에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져 실체가 있다 할지라도 이루어진 요소는 임시로 인연 따라 있는 것이다.


    ‘첫째는 많은 인연이 모여진다는 가유이다.’
    이것은 얘기 됐죠.

    ‘이것은 마치 병이나 화분 및 유정물 등과 같이
    어떤 요소가 모이고 쌓여서 된 법이다.’
    마치 책상이나 찻잔 같은걸 얘기하죠.

    ‘많은 요소의 법이 일시에 모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져 실체가 있다 할지라도 이루어진 요소는 임시로 인연 따라 있는 것이다.’
    인연 따라 있는 것이다 그랬는데,
    우리가 죽게 되면 몸은 인연 따라 다 흩어져 버립니다.
    피부, 뼈, 장기는 흙의 요소로 가버리고,
    혈액, 타액, 소변, 이런 것은 물의 요소니까 물로 가버리고,
    몸의 온기는 불의 요소로 가고,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기운은 바람의 요소로 돌아 가버리죠.
    그래서 ‘실체가 있다 할지라도 이루어진 요소는 임시로 인연 따라 있는 것이다.’
    이 몸은 임시로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죽기 마련입니다.
    죽더라도 없어지는 게 아니고 부모의 인연 만나서 또 태어나는 겁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소나 고양이나 돼지 부모를 만나지 않도록 하세요.ㅎㅎㅎ
    그래도 인간 부모를 만나야 불법 공부를 하지
    축생 부모 만나면 결국 고기로 둔갑해서 인간 입으로 들어온다는 얘기에요.
    불쌍하죠?
    그러니까 고기는 먹지 마세요.
    고기라는 게 전부 돈하고 연결 되어 있잖아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생명을 길러서 고기를 탐낸 건데,
    그놈에 돈을 가지고 천 년 만 년 살 것도 아닌데,
    그럼 돈의 무게하고 생명의 무게하고 저울로 단다면 어떤 것이 무겁습니까?
    당연히 생명의 무게가 무겁죠.
    돈이라는 것은 싸늘한 것이기 때문에 안 좋은 거예요.
    그래서 되도록 고기 먹지 마시라는 겁니다.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 결국 고깃덩어리가 된다,
    불행을 자초하는 겁니다.

    둘째는 상속하는 것으로서의 가유이다.
    이것은 마치 과거 미래 등의 세상에서 오로지 인과(因果)가 있다는 것과 같아
    서로 이어져 지속되는 성품이다.
    많은 법이 많은 시점 위에서 하나의 가법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옛날의 사슴 왕이 지금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둘째는 상속하는 것으로서의 가유이다.
    이것은 마치 과거 미래 등의 세상에서 오로지 인과(因果)가 있다는 것과 같아
    서로 이어져 지속되는 성품이다.
    많은 법이 많은 시점 위에서 하나의 가법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옛날의 사슴 왕이 지금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상속하는 것을 가유로 봤어요.
    “옛날의 사슴 왕이 지금 나의 몸이다” 이랬죠.
    석가모니부처님이 보살시절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어느 때는 사슴으로 태어났었어요.
    사슴의 왕이 되어가지고 많은 사슴의 무리를 거느리고 살았는데,
    그 나라 왕이 사슴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전부 붙들려서 우리에 갇히게 된 거예요.
    그리고 사슴들에 순번을 정해서 왕에게 요리로 바치는 거죠.
    그런데 새끼를 밴 암사슴이 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내 배속에 아기가 있는데
    내가 죽으면 이 아기도 같이 죽을 거 아닙니까.
    이 순번을 좀 바꿔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다음에 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제가 죽겠습니다” 이런 거예요.
    그 소리를 들은 사슴의 왕이 자기가 대신 죽으러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나라 왕은 사슴 왕 만큼은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사슴의 왕이 죽기를 청하니까,
    요리사가 왕에게 가서 보고를 합니다.
    그래서 왕이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으니 돌아가라.”하니까
    사슴 왕이 “오늘은 새끼를 밴 어미 사슴이 차례가 되었는데,
    어떻게 새끼를 밴 어미사슴을 죽일 수가 있습니까.
    제가 대신 나온 것이니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왕이 이 말에 감동을 받아서
    그때부터 사슴고기를 먹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거죠.

    그래서 사슴의 왕으로서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이 지금의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몸뚱아리지만 모습만 바꿔서 과거부터 계속 상속된 것이죠.
    그래서 이것도 가유로 있다는 거죠.

    오온(五蘊)이 찰나에 멸하는 것에 의지하는 것이 비록 몸체가 실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많은 법이 상속하여 임시로 하나의 유정물을 세워서
    지금에 있게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오온(五蘊)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죠.
    색(色)은 지수화풍, 물질이고,
    수(受),상(想),행(行),식(識) 네 개는 정신 작용이죠.
    수(受)는 감수작용(感受作用), 상(想)은 표상작용(表象作用),
    행(行)은 의지작용(意志作用), 식(識)은 판단작용(判斷作用)입니다.
    물질과 네 가지 정신작용이 하나로 뭉쳐졌다고 해서
    쌓을 온(蘊), 오온이라 그럽니다.
    이것은 가유로 존재하기 때문에 실재하는 게 아니다 이거예요.

    셋째는 분위(分位)로서의 가유(假有)이다.
    이것은 마치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이 분별로서만 자기의 위상을 갖는 것으로
    모두 임시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시점에서 하나의 법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셋째는 분위(分位)로서의 가유(假有)이다.
    이것은 마치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이 분별로서만 자기의 위상을 갖는 것으로
    모두 임시로 존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연화합에 의해서 얘기를 하고,
    두 번째는 시간적으로 상속해가는 걸 얘기하고,
    세 번째는 분위(分位)를 얘기 합니다.
    여기서 나눌 분(分) 자리 위(位), 분위(分位)는 어떤 위치를 얘기하는 거죠.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이라 그러는데,
    이것은 분별로서만 자기 위상을 갖는 것이다 그랬죠.
    분별로서만 있다, 허상이라는 얘기죠.
    이 허상은 실제 인연화합하고는 관계없는 거죠.
    그래서 그것은 ‘임시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시점에서 하나의 법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하나의 시점, 1시면 1시, 2시면 2시,
    이렇게 어느 시점에 세워졌다는 것인데,
    이런 것을 분위(分位)라 그러는 거죠.
    여기 분(分)자가 시분(時分)할 때 분자로도 생각 되네요.

    마음하고 상응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색 위에서 유루(有漏)라 하여
    볼 수 있거나 상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명색(名色) 등이 모두 하나의 법 위에서 가유로 시설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응당 많은 실체가 있어야 한다.
    분(忿)과 한(恨) 등은 모두 이 가유에 속한다.
    심(心)과 심소(心所)와 색법(色法)은
    인연 종자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실유(實有)라고 설한다.


    ‘이것은 하나의 색 위에서 유루(有漏)라 하여
    볼 수 있거나 상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명색(名色) 등이 모두 하나의 법 위에서 가유로 시설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모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응당 많은 실체가 있어야 한다.’
    ‘명색(名色)’은 오온(五蘊)이죠.
    명(名)은 수(受),상(想),행(行),식(識)을 얘기하고
    색(色)은 그냥 색(色)이에요.

    오온(五蘊)이 하나에 분위(分位)가 되는 거죠.
    오온이라는 것 위에서
    색(色)과 수(受),상(想),행(行),식(識)이 시설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치 실체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런 게 아니다 하는 얘깁니다.

    ‘유루(有漏)’라는 것은 샐 루(漏)자, 번뇌를 얘기합니다.
    눈, 귀, 코가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마음이 흘러 나갑니다.
    눈은 형색을 보면서 눈을 통해서 마음이 흘러 나가고
    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귀를 통해서 마음이 흘러 나가고
    코는 냄새 맡으면서 코를 통해서 마음이 흘러 나가고
    이런 것을 유루라 그럽니다.
    그래서 ‘색 위에서 흘러나간다’는 것은 뭐냐 하면,
    몸도 색이고 바깥에 보이는 것도 색인데,
    이게 상대해가지고 흘러나가는 거예요.
    이렇게 흘러 나가는 이것이 분위(分位)로서 가짜로 있는 것[假有]이다,
    정신작용을 얘기 하는 겁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몸 위에서 정신작용이 일어나는데
    정신작용은 매 순간 바뀌니까 실재하는 게 아니죠.
    그게 가유(假有)를 얘기하는 겁니다.
    이것을 분위로서 가유다, 이렇게 보는 거네요.

    ‘분(忿)과 한(恨) 등은 모두 이 가유에 속한다.’
    분노와 한은 가유에 속한다, 심리를 얘기하는 거네요.

    ‘심(心)과 심소(心所)와 색법(色法)은
    인연종자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실유(實有)라고 설한다.’
    인연종자로부터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실유다, 이렇게 했습니다.
    ‘인연종자’는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에요.
    의식도 아뢰야식 속에 종자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심리도 역시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에서 발현 되는 거예요.
    색법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또 하나 알아야 될 게 있는데,
    의식상에서 일어나는 영상들이 있죠.
    밖에 외출해서 집에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면
    집에 불이 나는 영상이 그려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종자에 의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감각기관(눈, 귀, 코, 혀, 피부)을 통해서 감각되는 이 대상들은
    전부다 종자에서 나온 겁니다.
    보이는 것, 소리, 향기 다 종자에서 발현되어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밖에 있는 것 같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종자가 발현 되어서 나타난 것을 잘 안 믿을 거예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학에서 얘기하잖아요.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까
    실제로 모양과 색깔이 있는 게 아니고 파장의 세계더라 이거죠.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지, 모양과 색깔이 없는 세계에요.

    그럼 모양과 색깔은 어디서 나왔느냐 이거죠.
    종자가 발현되어서 파장의 세계를 덮어씌워서 우리가 보고 있는 거예요.
    자기만 그런 게 아니고 남들도 그렇게 보이는 것은
    서로 업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개가 볼 때 다르고, 소가 볼 때 다른 거예요.

    그래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나타난 것은
    전부 종자에서 발현 된 것이다 이거죠.
    그런데 여기서는 종자에서 나온 것은 다 실지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렇지만 종자도 찰나생, 찰나멸하기 때문에 진실한 게 아니죠.

    또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동일한 성품이다.
    동일한 성품 그 자체는 결정된 어떤 성품이 없다.
    왜냐하면 변계소집성은 상이 없고 의타기성은 생겨나는 것이 없으며
    원성실성은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또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동일한 성품이다.’
    왜 동일한 성품이냐 하면,
    의타기성이 마음이라 그랬죠.
    이 의타기성위에서 집착하는 마음이 변계소집성이고
    의타기성이라는 마음 위에서
    자아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을 원성실성이라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일한 성품, 동일한 마음이죠.

    의타기성은 경계의 바람이 불면 마음이 일어나듯이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입니다.
    마음은 독립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대상에 의해서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의타기성입니다.

    ‘동일한 성품 그 자체는 결정된 어떤 성품이 없다.’
    그렇죠.

    ‘왜냐하면 변계소집성은 상이 없고 의타기성은 생겨나는 것이 없으며
    원성실성은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성은 상이 없다, 무상(無相)이라 했는데,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했지만 원래 뱀은 없기 때문에 무상이에요.
    의타기성은 타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지
    자연적으로 생기는 게 아니죠.
    여러분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 모습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고 부모를 의지해서 태어났다 이거죠.
    그래서 자연생이 아니기 때문에 무생(無生)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 다음에 원성실성은 무성(無性)이라고 얘기합니다.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기 때문에 특별한 성(性)이 없어요.
    그래서 이것을 유식삼무성(唯識三無性)이라 그럽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착각하고 사는지 알 수가 있는 거죠.

    이것을 『해심밀경』에서는
    “눈병 난 사람은 변계소집성과 같고
    파랗고 노란 색이 나타나는 것은 의타기성과 같으며
    눈병이 없이 깨끗한 눈은 원성실성과 같다”고 하였다.


    ‘눈병 난 사람은 변계소집성과 같고’
    이 말은, 눈병 난 사람에게만 꽃이 피고지고하기 때문에 그런 거죠.
    꽃이 피고지고 하는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은 건데
    자기가 두루 헤아리는 분별하는 성품으로 그게 나타난 다는 거죠.

    ‘파랗고 노란 색이 나타나는 것은 의타기성과 같으며’
    이 말은, 맑고 투명한 수정 구슬이 있는데,
    파란 색을 같다대면 파란구슬로 노란 색을 같다대면 노란구슬로 나타납니다.
    수정 구슬은 원래 투명한데 파랗고 노랗게 나타나는 것은
    구슬에 파란색이나 노란색이 인연되어서
    파란구슬, 노란구슬로 나타나는 거죠.
    그게 의타기성이라는 거구요,

    ‘눈병이 없이 깨끗한 눈은 원성실성과 같다’
    눈병이 없으면 허공에 꽃이 피고지고가 없는 거죠.
    또 파란색 노란색을 치워버리니까 그대로가 투명한 거예요.
    그게 원성실성이다 이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