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성품이 공하면 평등하다 (강의)
여기는 공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깊이 생각 하지 않으면 상당히 어렵거든요.
『중관론』 게송에서 말하였다.
염법(染法)과 염자(染者)가 동일하다면
동일한 법을 어떻게 합할 것인가.
염법과 염자가 다른 것이라면
다른 법을 어떻게 합할 것인가.
염법(染法)은 물든 현상을 얘기 하는데,
물들었다는 것은 물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리면 물이 들듯이 그런 걸 얘기 합니다.
『법구경』에도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시다가
새끼줄을 보시고는 제자더러 새끼줄을 주워 오도록 하였습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그 제자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선 묶었던 새끼줄입니다.”
새끼줄은 본래 냄새가 없는 것이지만
생선을 묶었기 때문에 냄새가 나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악한 자를 가까이하면 마치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처럼 물이 든다.”
또 한참을 가시다가 부처님께서
길가에 버려져 있는 종이 한 장을 제자를 시켜 주워 오도록 하셨습니다.
그 제자는 종이를 주워 냄새를 맡아 보고는
"이 종이는 좋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아직도 그 향긋한 향냄새가 남아 있습니다."
선한 자를 가까이 하면 향을 쌌던 종이처럼
좋은 영향을 받는 다는 걸 얘기하고 있습니다.
물든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여기 와서 유식 강의를 들으니까
유식물이 벌써 들었습니다.
‘염법(染法)과 염자(染者)가 동일하다면
동일한 법을 어떻게 합할 것인가.’
물들은 현상과 물든 자를 얘기하는데,
물이 든다는 것은 번뇌인데,
번뇌에 물이 든다든지 번뇌를 일으키는 주체가 같으냐 틀리냐가 문제거든요.
이제 비유를 들어서 설명 하겠죠.
이것을 옛 스님은
“번뇌는 중생을 물들이는 것이며 중생은 물이 드는 대상이다.
번뇌와 중생이 동일하다면 능소(能所)의 경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며,
다른 것이라면 불과 물의 성질과 같이 다른 성질로 합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합당한 이치가 없다”고 풀어서 말하였다.
‘번뇌와 중생이 동일하다면 능소(能所)의 경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며,’
‘능소(能所)의 경계’, 능(能)은 주관이고 소(所)는 객관이에요.
그러니까 ‘번뇌와 중생이 동일하다면 주관과 객관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며,’
이렇게 되는 거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주객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주객이 없다는 것인데,
주객이 없는데 어떻게 물들은 현상과 물든 주체가 성립을 할까,
주객이 없다면 얘기할 필요가 없잖아요.
주객이 없으면 텅 빈 공한 자리인데
거기에 무슨 번뇌가 있고 중생이 있습니까.
이게 진리가 하나인줄 모르면 무명이 되거든요.
무명에서 자아가 나옵니다.
이 자아가 번뇌를 내고, 번뇌는 고(苦), 고통을 냅니다.
반대로 내가 고통스럽다 그러면,
육체적으로는 고통이 일어나지만 정신적으로는 번뇌 일어나죠.
이 고통스러운 것을 지켜보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데
이게 번뇌더라 이거죠.
이 고통은 감수작용, 감각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정신적인 고통이라든지 신체적인 고통은 감각적이에요.
그것이 번뇌에서 오는 것인데
이 번뇌는 의식에서 일어납니다.
자아, ‘내’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고통이 오는 거예요.
자아는 잠재되어 있는 잠재의식, 말나식입니다.
‘내’라는 생각만 있으면 번뇌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욕심을 부린다든지 화를 내는 그 뒤에는
‘내’라는 것이 다 있는 거예요.
그 ‘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인식하면서
‘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뢰야식 자체는 근본이 무아(無我)거든요.
이런 자아의식은 진리가 하나인 줄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겁니다.
여기서 무엇을 얘기하고자 이런 얘기를 했느냐 하면,
그래서 고통이 있으면 번뇌가 있고 번뇌 뒤에는 자아가 있고
자아 뒤에는 진리가 하나인 줄 모르는 무지가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이 자아라는 것이 주체를 얘기합니다.
또 의식상에서 많이 세우는 자존심 있는데,
이것은 말나식의 영향을 받아서 존심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번뇌가 일어나면 반드시 ‘내’라고 하는 자존심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번뇌에 물 들은 중생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죠.
번뇌가 일어나면 고통을 느끼는데
그것은 ‘내가 아프다’, ‘내’가 들어가죠.
그것은 말나식의 자아관념을 의지해서 일어난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동일하다면 주객이 성립이 안 되죠.
‘다른 것이라면 불과 물의 성질과 같이 다른 성질로 합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합당한 이치가 없다”고 풀어서 말하였다.’
이 말은 동일하다해도 안 맞고 다르다 해고 틀린다 이거죠.
이런 것은 물들은 현상과 물들은 주체의 상호 관계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동일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둘 다 틀린 거죠.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죠.
누가 좋은 말은 그냥 흘려버리지만
기분 나쁜 말을 하면 오래갑니다.
남이 기분 나쁜 말을 해서 내가 기분 나쁘다면 두 가지 다 있습니다.
기분 나쁜 현상[染法]이 있고 기분 나쁘다는 ‘내’[染者]라는 주체가 있는 거죠.
그래서 염법과 염자, 두 개가 다 있는 겁니다.
그런데 기분 나쁜 현상하고 기분 나쁜 주체하고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르다고 하자니 염법과 염자가 같이 일어나니 다르다고 할 수 없죠.
그래서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고 그런 겁니다.
『지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생각의 번뇌가 마음에서 일어나도
십법계(十法界)의 백 가지 법을 다 갖추어 서로 방해하거나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많다 하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일지라도 다른 게 없는 것이 아니다.
많아도 쌓아져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라 해도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생각의 번뇌가 마음에서 일어나도
십법계(十法界)의 백 가지 법을 다 갖춘다’ 했어요.
십법계는,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 여섯 개 있죠.
그 다음 성문, 연각, 보살, 부처 이러면 십법계가 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도 십법계의 백 가지 현상들이 다 갖춰져 있는 거예요.
한 생각 번뇌가 있는데
이게 성격에 따라서 십법계에 나는 거죠.
그 한 생각이 번뇌라면 육도를 윤회할거고
반야지혜라면 사성(四聖)에 태어나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
‘한 생각의 번뇌가 마음에서 일어나도
십법계(十法界)의 백 가지 법을 다 갖추어 서로 방해하거나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러는 겁니다.
‘이것이 많다 하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일지라도 다른 게 없는 것이 아니다.
많아도 쌓아져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라 해도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은 물질이 아니니까 쌓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흩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얘기 하는 겁니다.
결국 이 얘기는
번뇌를 일으키는 물들은 현상과 물들은 주체,
이 두 가지는 전부다 마음의 현상이라는 거죠.
그게 유식이잖아요.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물들은 현상과 물들은 주체, 이 둘 관계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한 생각이 십법계하고 관계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듯이.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한 생각이 십법계하고 같다고 할 수 없죠, 분명히 다르니까.
또 다르다고 할 수 없죠, 같은 마음이니까.
현상을 보면 분명히 다른 것인데, 본질을 보면 분명히 같은 거예요.
많아도 다른 것이 아니며, 하나라 해도 같은 것이 아니다.
많으면서 하나이며, 하나면서 많은 것이다.
또한 이것은 처음 등불을 켤 때에 밝음이 어둠과 함께 머무는 모습과 같다.
이와 같은 밝음과 어둠은 서로 방해하거나 장애가 되지 않으며
또한 서로 파괴하지도 않는 것이다.
‘많아도 다른 것이 아니며, 하나라 해도 같은 것이 아니다.’
아귀로 태어나는 한 생각하고 축생으로 태어나는 한 생각하고 다른 거예요.
하지만 어디를 가든 같은 마음이라는 것은 동일 한 거죠.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또한 이것은 처음 등불을 켤 때에 밝음이 어둠과 함께 머무는 모습과 같다.
이와 같은 밝음과 어둠은 서로 방해하거나 장애가 되지 않으며
또한 서로 파괴하지도 않는 것이다.’
불을 탁 켜면 밝은 부분도 있고 어두운 부분도 있죠.
하지만 밝은 부분은 어두운 부분을
어두운 부분은 밝은 부분을 장애하거나 파괴하지 않죠.
이와 같이 번뇌의 성품이 공(空)한 것임을 요달한다면
네 가지 종류의 폭포수 같이 흐르는 번뇌도
오로지 바른 법이 행해지는 태양 아래에서 말라버릴 수 있는 것이다.
‘네 가지 종류의 폭포수’는 사폭류(四瀑流)죠.
욕(欲), 유(有), 견(見), 무명(無明)입니다.
욕폭류(欲暴流)는 욕계에서 일으키는 번뇌를 말하고
유폭류(有暴流)는 삼계(三界)의 생존, 곧 삼유(三有)를 얘기 합니다.
견폭류(見暴流)에서 견은 인과를 부정하는 삿된 견해입니다.
무명폭류(無明暴流)는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를 얘기 합니다.
이 네 가지가 한데 어울려가지고 폭포수같이 흘러가는 거예요.
이렇게 흘러가지만 태양을 만나면 말라 버리는 거죠.
공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몸이 사라지면 공이라는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몸이 사라져도 공이라고 하면 안 되죠.
그럼 무아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공이 아니면 무아가 아니죠.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그것은 공하고 다른 허공입니다.
그래서 오해가 있다는 거죠.
물질을 망치로 부숴가지고 없애버리면 공인 줄 아는데,
공은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는 것을 공이라 합니다.
이 공은 물질적 현상이든 정신적 현상이든 배제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세간의 모습을 부숴서 진실한 모습을 찾으려 하지 마라’ 이렇게 했어요.
그런 것은 허무주의나 절대주의에 빠져 버린다.
텅 비어 있는 것에 집착하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으니까 허무하다 이거죠.
이런 사람은 ‘아, 모든 것은 허망하고 아무것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삶에 대한 의욕이 없거나,
죽어도 남는 게 없는 공인데, 도둑질하든 살인 강도짓을 하든
무슨 상관이 있나, 하면서 생활자체가 방탕으로 흘러버리는 삶을 살죠.
이러면 안 된다 이거죠.
저도 수행을 해서 몸이 다 비어버리니까
아! 이게 공이구나, 무아구나, 이렇게 생각 했거든요.
며칠 지나고서 아이고, 속았구나, 했습니다.
자기가 만든 거예요.
그 만든 마음의 본질이 바로 공이고 무아에요.
일곱 가지 겹겹의 아만 덩어리도
평등한 지혜의 바람으로 인하여 꺾어져 버리는 것이다.
침해하고 침해를 받았던 것이 모두 사라지고,
자기를 묶고 남을 묶었던 것이 똑같이 풀어지는 것이다.
인연을 만나면 연꽃 위에 맺힌 맑은 물방울과 같고,
처리하는 일 모두가 허공의 걸림이 없는 바람과 같다.
‘평등한 지혜’는 공을 볼 때 생깁니다.
‘일곱 가지 겹겹의 아만 덩어리’ 이게 ‘칠중만(七重慢)’입니다.
교만(憍慢)에서 교(憍)는 남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훌륭하다는 생각,
만(慢)은 다른 이와 견주어 자기 가치 이상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이죠.
1) 만(慢) :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낫다고 우쭐대고,
동등한 사람에게는 나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태도다.
2) 과만(過慢) : 지나친 교만이죠. 동등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더 낫다고 뽐내고,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에게 대해서는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만과만(慢過慢) :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
자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4) 아만(我慢) : 오온이 인연화합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참된 나로 삼아 집착하는 교만심이다.
5) 증상만(增上慢) :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으면서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거짓말인데 자기가 모르는 거짓말이에요.
6) 비만(卑慢) : 자기보다 월등하게 나은 자에 대하여
자기는 조금 못할 뿐이라는 교만이다.
7) 사만(邪慢) : 덕이 없음에도 덕이 있다고 내세우는 교만이다.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순간을 항상 종경에 머물러
만 가지 법에 다름이 없음을 본다.
이것은 마치 큰 허공에 분별하는 식으로 인하여
명색(名色)의 그림자를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다.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명색은 본래 없다.
성품이 공(空)한 자리에서는 아름답고 추한 것이 평등한 것이다.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순간을 항상 종경에 머물러
만 가지 법에 다름이 없음을 본다.’
종경(宗鏡)은 오직 마음뿐이 없다는 최고의 가르침이죠.
‘최고의 가르침에 머물러 만 가지 법에 다름이 없음을 본다.’
만 가지 법도 그 본질은 종경이란 얘기죠.
‘이것은 마치 큰 허공에 분별하는 식으로 인하여
명색(名色)의 그림자를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다.’
명색에서 명은 정신작용을 얘기하고 색은 물질을 얘기 합니다.
허공은 아무것도 없는데 분별해서 명색이 생긴다는 거죠.
실제로는 늙고 병들고 죽음이 없는데
무지에 의해서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는 거죠.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데 만들어내는 게 명색입니다.
‘성품이 공(空)한 자리에서는 아름답고 추한 것이 평등한 것이다.’
분별 속에는 아름답고 추함이 있지만
텅 비어 있는데 거기에 아름다움이 어디 있고 추함이 어디 있습니까.
이 공도 자기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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