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방편(方便)의 근본은 일심(一心)이다 (강의)

경호... 2012. 1. 10. 12:4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방편(方便)의 근본은 일심(一心)이다 (강의)

    지난 시간에는 가피의 표현에 대해서 공부를 했고,
    오늘은 ‘방편(方便)의 근본은 일심(一心)이다’
    방편(方便)이라는 것은 방법, 수단, 이런 뜻이죠.

    읽어볼게요.
    광범하거나 개략적인 가르침과 부정과 긍정의 논리에서는
    비록 이치를 전개하고 모으는 형식이 같지 않더라도
    전체와 부분에서 다른 것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오직 마음이라는 종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내 마음을 벗어난 문장은 없다.


    부정은 반야경에서, 긍정은 화엄경에서 논리를 많이 펴죠.
    이런 게 전부 마음에서 나온다는 얘기에요.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항하사 모래알만큼이나 많으니,
    어찌 오직 하나나 두 가지로 증명하는 것에 그치겠는가.
    그러므로 『법화경』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으뜸가는 적멸을 알 수 있는 건
       모든 것이 방편의 힘 때문이라
       여러 가지 공부 길을 설한다 해도
       실재는 불승(佛乘)을 위한 것이다.


    비유를 들면,
    밥은 반찬하고 같이 먹어야 입맛이 돌고 밥맛이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수행도 반야공만 닦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공을 계속 관찰해 간다 하더라도 일심의 근원에 도달 못해요.
    그래서 방편이 필요한 겁니다.

    방편은 반야공 관찰에 도움을 주는 육바라밀,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 지혜 이런 것들입니다.
    그 중에 반야바라밀은 지혜바라밀이니까
    적멸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반야와 방편을 같이 닦아야 된다는 겁니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혼자 수행해서 될 수 있지만
    보살의 길을 가면서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꼭 방편을 함께 닦아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노숙자에게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죠.
    그 역시 공부고 방편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적멸을 알 수 있는 건 방편의 힘 때문이라고 얘기 하는 겁니다.
    ‘불승’은 부처되는 길을 말합니다.

    또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제 지금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 편안토록 해주기 위해
       여러 가지 법문으로 방편을 써서
       일체세계 부처님 길 열어 보인다.


    방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것을 풀이해 보자.
    으뜸가는 적멸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여의 일심으로 본래 적멸한 것이다.
    이것은 윤회하는 생멸의 멸이 아니며,
    또한 관하는 수행으로서 대치하는 멸도 아니다.
    그러므로 으뜸이라 칭한 것이다.


    적멸(寂滅)은 고요할 적(寂)자 멸할 멸(滅)자인데,
    고요하다는 것은 번뇌가 고요하다는 거고,
    멸이라는 것은 번뇌와 번뇌의 원인이 소멸했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적멸이에요.

    ‘이것은 윤회하는 생멸의 멸이 아니며,
    또한 관하는 수행으로서 대치하는 멸도 아니다.
    그러므로 으뜸이라 칭한 것이다.’
    적멸은 윤회하는 생멸의 멸이 아니다 그랬죠.
    생겼다 사라졌다하는 게 생멸인데,
    눈병 난 사람에게는 허공의 꽃이 진짜로 있는 거죠.
    그런데 가짜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느냐 하면,
    허공의 입장에서 꽃을 봐야 되는 거예요.
    허공의 입장에서 보면 허공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없는데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있다는 것은 가짜라는 거죠.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윤회라고 얘기 합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는 고통의 윤회도
    알고 보면 착각이라는 거죠.
    원래 우리는 태어나고 죽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수있느냐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본연의 마음자리에 들어가서 보면
    그 자리는 적멸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윤회라는 것은 사실 허상이고 진실하지 않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없는 본바탕 적멸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과는 다른 거예요.
    소멸했다는 멸은 인연되면 다시 태어나는데,
    적멸의 멸은 아예 처음부터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는 자리에요.
    그래서 첫 번째 얘기가
    생멸의 멸하고 적멸의 멸은 다르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수행을 할 때, 관찰할 때 보면 소멸해 간다,
    몸도 소멸해가고 마음도 소멸해가는 거예요.
    딱 앉아서 지켜보면 몸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계속 반복을 하는데,
    똑같은 게 없는 거죠.
    이게 몸이 소멸하는 겁니다.
    어떤 분은 몸이 흐물흐물하면서 없어지는 사람이 있고,
    어떤 분들은 마치 건축물이 와르르 무너지듯이 사라지는 사람이 있고,
    어떤 경우는 복부나 가슴에 구멍이 뚫여 있다가 점점 없어지는 사람이 있고,
    이렇게 사라지는 게 여러 가지에요.
    수행과정에서 몸만 그런 게 아니고,
    생각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
    의식이 깨어나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게 명확하게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수행 중에 번뇌나 육체가 사라진다는 그 멸하고
    적멸의 멸하고는 다르다는 겁니다.

    이 게 무엇을 근거로 해서 얘기하느냐 하면,
    유식삼성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원성실성은 원만하게 이룬 모습을 얘기하니까 진여에요.
    진여는 여기서 말하는 적멸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윤회는 고통이고,
    집착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성입니다.
    이것은 상(相)을 얘기하는 데,
    존재하지 않는 거북이 털, 토끼 뿔 같은 거예요.

    그 다음에 수행이라는 것이 마음인데,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성을 인연생멸로 관찰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정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다, 실체로 존재한다,
    이렇게 계속 바깥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변계소집성 때문에 윤회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연생멸을 잘 관찰해 보니까,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게 없더라,
    또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리되어 있는 게 없고,
    계속 변하는 속에는 실체가 없다 이거예요.
    이렇게 알아 가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윤회에는 생멸이 있는데,
    이 생멸이 꽃이 피었다 사라졌다하는 거예요.
    이 멸하고 적멸의 멸은 다르다는 거죠.

    이렇게 인연생멸을 잘 관찰해보니까 변계소집성이 없죠.
    변계소집성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사라지면 의타기성이 남습니다.
    이 의타기성도 타를 의지하고 일어나는 이 마음을 관찰해 보면,
    이것 역시 생멸을 합니다.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이 모습이라는 게 실체나 자아가 없고
    본질은 비어 있는 원성실성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멸하고 적멸의 멸하고 또 다른 거예요.
    적멸의 자리는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는 불생불멸을 얘기하는 겁니다.

    일심이 적멸한 가운데서는
    그 자체에 어떠한 법도 부연하거나 드러낼 수가 없고,
    어떠한 도(道)도 건립할 것이 없다.
    깨닫지 못한 자를 위하여 방편인 대자비심의 힘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다른 도를 설파하더라도,
    근본 바탕에 나아가 논한다면 오직 일심인 불승(佛乘)을 가리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더 다른 일은 없다.


    세속, 원인과 조건으로 이루어진 인과의 세계는
    밟고 올라가는 단계가 있는데,
    일심, 본연의 자리는 단계가 없습니다.
    여기 얘기가 그런 얘기에요.

    내가 이제 지금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시방세계 부처님과 더불어 똑같이 이 법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이와 같아서, 이것으로써 일체 유정을 안락하게 해주는 것이다.
    성문과 연각과 보살과 오성(五性)의 여러 가지 법문을 보이고,
    오직 마음이라는 부처님의 도를 선양하는 것이다.


    오성(五性)은 오종종성(五種種姓)이라고 하는데,
    이 다섯 가지 성품 중에서 깨달을 수 없는 성품이 있다고
    유식에서 주장한 바가 있어요.
    다섯 가지가 뭐냐 하면,
    이승종(二乘種)이라 해서 성문[聲聞種姓] 연각이 될 수 있는 사람[緣覺種姓],
    보살이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菩薩種姓 또는 佛種姓],
    또 하나는 부정종성(不定種姓)이라 해서 결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
    성문연각이 될 수도 있고 보살이 될 수도 있고 부처도 될 수 있다는 거죠.
    다섯 번째가 무성종성(無性種姓), 깨달을 수 있는 성품이 없다는 겁니다.

    현장(玄藏)스님이 인도에 나란타사(那爛陀寺)에 가서
    계현(戒賢)이라는 스님 밑에서 유식을 배웠어요.
    그 유식에서는 오성각별(五姓各別)설을 주장해가지고 무성(無性)을 내세웁니다.
    현장스님이 난감해서 얘기를 합니다.
    우리 중국에서는 누구나 부처님 성품이 있어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데,
    깨달을 수 없는 성품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우리 중국 불자들에게는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얘기를 하니까
    그 스승이 제자를 몹시 꾸짖었다는 거죠.

    그런데 이 현장스님에게 배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원측(圓測)스님이에요.
    원측스님은 설사 깨달을 수 없는 무성이 있다하더라도
    궁극에는 다 부처님이 될 수 있다,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주장을 했어요.
    현장스님이 창시한 종파가 법상종(法相宗)인데,
    거기서 주장하는 것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은 틀림이 없어요.
    그런데 티베트에서는 원측스님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를 굉장히 존중을 해요.
    인도에 세친(世親)보살이나 무착(無着)보살의 설도 안 따르고
    중국에 현장스님 설도 안 따르고
    오직 원측스님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만 받든다는 거죠.
    그래서 팔지보살 이상의 보살로 대접을 해요.
    여기 오성(五性)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있는 겁니다.

    제가 추측을 해건데,
    유식에서는 종자설을 얘기하기 하는데,
    종자는 씨앗이기 때문에 알맹이가 들어 있는 것도 있고 쭉정이도 있잖아요.
    그런 것을 근거로 해서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쭉정이 같은 종자가 있지 않겠나,
    이래서 오성각별설이 생긴 게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것은 그냥 추측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방편은 왜 필요한가를 얘기하고,
    방편의 근원은 알고 보면 일심이다, 하는 겁니다.
    오성각별(五姓各別)설을 얘기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근기가 각각 다르다는 거예요.
    진여의 자리는 다 똑같지만 그 자리에 가는데 있어서는
    근기가 다 다르다는 거죠.
    『해심밀경』에서도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방편은 왜 필요한가 하면,
    근기가 낮은 수행자들을 위해서 방편을 쓰면
    그것이 극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반야를 통해서 공을 깨달아가는 것도 이 방편이 힘이 되어서
    빨리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조건 수행만해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
    남을 도와줄 줄 알아야 된다, 도움을 주는 게 방편이에요.
    이런 것은 보시바라밀에 속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도,
    고기를 먹으려다가 소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안 먹었다면
    그것은 계를 지키는 지계바라밀이고 이 또한 방편이에요.
    또 누가 욕을 하거나 비난해도 화를 안 내는 것은 인욕바라밀이고
    이것도 방편이에요.
    그런 겁니다.

    이 방편은 일상생활에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데 참 좋습니다.
    앉아서 공을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면서 오는 내 감정을 다스릴 수가 있어서 좋은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반연은 식이 나타낸다’를 공부하겠습니다.
    끝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