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일을 살펴서 진실을 본다 (강의)

경호... 2012. 1. 17. 01:15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일을 살펴서 진실을 본다 (강의)

    묻습니다.
    :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하여 아는 지혜가
    실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까, 아니면 실제 아는 것이 아닙니까.
    또는 두 가지 모두에 허물이 있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하여 아는 지혜', 이것은 타심통이 되네요.
    그게 진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가 아닌 가짜인지,
    또 두 가지 다 허물이 있는 것인지, 이렇게 물었네요.

    답을 합니다.
    : 앞에서 이미 설파한 것과 같다.
    만약 자타를 구분하여 세우면 종지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
    이것은 모두 세간의 이치로 식심(識心)이 분별하는 것을 기준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식심(識心)’은 마음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은 분별을 하느냐 안 하느냐,
    내가 분별을 하지 않고 아는 것은 진짜고,
    분별해서 아는 것은 가짜다 이거죠.

       남의 마음 경계에서 알아진다면
       여실하게 깨달아서 알지 못하네.
       식의 경계 떠난 것이 아닌 것으로
       부처님만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우리가 궁금한 부분인데,
    ‘자타를 구분하여 세우면 종지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 이랬어요.
    자와 타를 세우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아는 마음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상대의 마음의 비슷한 영상을 인식하는 거죠.
    그래서 상분이라 그래요.
    쉽게 말하면 객관적이라는 거죠.
    주관과 객관을 내세울 때는,
    상대가 내세우는 게 아니고 내가 내세우는 겁니다.
    내가 세우서 내 기준으로 상대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얘기에요.

    자타를 세우는 것은 분별이라 하고,
    이런 마음을 알 식(識), 마음 심(心)을 써서 식신이라 그럽니다.
    여기 알 식은 알음알이인데,
    이 식의 특성은 주관이 객관을 아는 마음을 얘기하죠.
    그러니까 한 마음이 주관의 마음과 객관의 마음으로 나눠지고
    주관의 마음이 객관의 마음을 보는 건데,
    그것은 상대하고 관계없이 내가 그렇게 만들어서 내가 본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부처님만 여실하게 안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님은 식신이 아니고 지혜입니다.
    지혜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거죠.

    그렇다면 식신으로 보는 것하고 지혜로 보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
    식신으로 아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근거한 것을 바탕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겁니다.
    자기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 아뢰야식 속에 수많은 정보[종자]를 근거로 해서
    대상을 인식을 하는 거예요.
    이때 인식 대상은 자기 마음이 바깥으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한 대상을 인식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을 얘기 합니다.

    반면에 지혜로 보는 것은, 지혜의 대상은 공이기 때문에
    공을 봤을 때 지혜가 일어나는데,
    공은 안팎이 없고 자아가 없는 것이죠.
    거기에는 주객을 나눌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분별할 것이 없는 거죠.
    그래서 공에 의해서 계발된 지혜로 대상을 볼 때
    마음에 근거하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눠서 보는 게 아니고
    여실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에요.
    그게 진짜라는 거죠.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라는 것은 여실(如實)하게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안의 마음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것으로서 타인의 마음을 삼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의 의(意)와 의식(意識)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근본 자리이며 여실한 과보로서의 바탕 같은 것은
    언어가 없는 수승하고 미묘한 경계로서 오직 부처님만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곳이다.


    ‘타인의 마음을 아는 지혜라는 것은 여실(如實)하게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안의 마음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것으로서 타인의 마음을 삼기 때문이다.’
    이 말이 그 말이죠.
    자기 마음을 마치 타인의 마음으로 삼아서 본다는 거죠.

    ‘자기 마음의 의(意)와 의식(意識)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의(意)는 자아의식[말나식]을 얘기합니다.
    결국 의식을 한다는 것은 자아의식의 영향을 받는 거예요.
    여기서 의(意)가 등장하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자타가 서려면 ‘나’가 있으면 ‘너’가 있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있어야만 섭니다.
    의식상에 너다 나도 분별하는 것은
    잠재되어 있는 자아의식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의(意)와 의식(意識)이 서로 섞여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부처님의 근본 자리이며 여실한 과보로서의 바탕 같은 것은
    언어가 없는 수승하고 미묘한 경계로서 오직 부처님만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곳이다.’
    언어가 없다, 이랬습니다.
    언어를 매개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사물을 인식할 때 언어가 없으면
    저것이 무엇이라고 발판을 삼아서 판단할 게 없습니다.
    실지 사물을 인식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대개 상대방이 말을 하는 그 언어를 인식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결국 언어가 걸림돌이 되는 거죠.

    그러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마음이 통하는 경우는 어떤 것이냐.
    우리가 언어를 매개로 해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데 의사소통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면 말이 필요 없잖아요. ㅎㅎㅎ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런 게 일어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과 연민, 자비가 있는 곳에는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더라도 서로 알게 된다는 거죠.
    또 하나는 수행을 체험한 사람은 체험한 사람끼리 서로 통합니다.
    예를 들어서 몸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사라지는 체험을 한 사람끼리는 서로 아는데
    체험을 못해본 사람은 그게 뭐내고 자꾸 묻죠.
    그때는 언어가 필요 없다 이거죠.

    세간에서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지혜는
    두 가지 법에서 여실하게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취할 수 있고 취해지는 경계로서 허망하게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식(識)으로 무량무변한 깊고 깊은 경계로서
    중생의 알음알이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의 법상종(法相宗)의 측면에서 설파한 것과 같다.


    ‘세간에서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지혜는
    두 가지 법에서 여실하게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취할 수 있고 취해지는 경계로서 허망하게 분별하기 때문이다.’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주관이고 취해지는 경계는 객관이죠.
    주객이 함께 해서 허망하게 분별한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오직 식(識)으로 무량무변한 깊고 깊은 경계로서
    중생의 알음알이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의 법상종(法相宗)의 측면에서 설파한 것과 같다.’
    중생의 알음알이로서 측량할 수 없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겠죠.
    타인의 마음을 아는 게 쉬운 게 아닌데,
    두 가지 법이라는 것은 취할 수 있고 취해지는 경계라 그랬는데,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우리가 여실하게 알 수는 없는 겁니다.

    만약 법성종(法性宗)의 측면에서 이야기 한다면
    옛 스님은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일의 진실을 살핌에 이치의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 밖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경계로서 알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자타(自他)로 분별하는 모습이 끊어진다면
    중생의 마음과 동일한 바탕이기 때문에 마음 이외의 다른 것은 없다.
    이 이치는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법성종(法性宗)의 측면에서 이야기 한다면
    옛 스님은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모두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법상종(法相宗)은 유식이고, 법성종(法性宗)은 성종(性宗)이라고도 하는데
    상종(相宗), 즉 법상종과 상대되는 불교교의(佛敎敎義)의 전문분야인데
    성종은 참선 선(禪)자 선종(禪宗)하고 통하는 거예요.

    상(相)의 입장에서는 걸림이 있지만
    성(性)의 입장에서는 걸림이 없죠.
    그래서 법성종의 입장에서는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여실하게 안다 이거죠.

    ‘일의 진실을 살핌에 이치의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일’이라는 것은 현상계, 모양 같은 거죠.
    이치의 진실을 본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이 찻잔은 ‘일’이죠.
    ‘일의 진실’은 이 찻잔의 진실,
    지수화풍 4대의 인연 화합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러면 한 꺼풀 이치가 드러났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인연은 시간상 변한다,
    변하기 때문에 일정한 모양이나 색깔이 없다,
    그래서 거기는 실체나 자아가 없다, 이렇게 들어가는 거죠.
    이렇게 이치, 진실을 하나하나 껍질을 벗겨서 살펴 들어가면,
    있는 그대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찻잔처럼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그 체성이 없다고 보는 게 제대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시각적으로 그렇게 보입니까?
    그렇게 안 보이죠?
    안 보이니까 여러분들은 공부해야 되는 겁니다.

    이렇게 언어를 통해서 이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귀로 들어서 지혜가 계발되는 문소승의 반야라 그럽니다.
    그런데 언어문자가 끝나면 모릅니다.
    그게 단점이에요.
    그래서 늘 얘기하지만, 그때는 사유를 해야 됩니다.
    법을 사유하면 사유할 때는 분명히 지혜가 생기는데
    사유 안 하면 지혜가 없어져 버리죠.
    그래서 수행을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해서 내 몸과 마음을 통해서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 인연과 조건에 의해서 존재한다’
    이런 걸 체달하게 되면 그때는 앉으나 서나 똑같아요.
    그렇게 될 때까지 노력을 하셔야 됩니다.
    그때 되면 시각적으로는 삼라만상이 고정되게 보이지만
    심안이 열려있다면 육안을 통해서 심안이 같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것이 비어 있는 걸 보게 됩니다.
    시선이 사물을 차고 나가면서 비어 있는 걸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일의 진실을 살핌에 이치의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이렇게 본다면 제대로 상대의 마음을 아는 지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마음 밖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이 없으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연한 거고,
    ‘경계로서 알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알 수 있다’, 이런 말이죠.
    여기는 그렇게 해 놨는데,
    제가 번역한다면 ‘알만한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겠어요.
    이 말은, ‘경계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이런 얘기에요.
    눈에 보이는 것도 경계지만 마음의 상태도 경계입니다.
    ‘저 사람은 어느 정도 경계에 갔구나’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의 깨침의 경지를 얘기 하는 겁니다.
    수행해서 그런 경계에 도달 했으면 남이 알려주는 게 아니고 스스로 알죠.

    ‘자타(自他)로 분별하는 모습이 끊어진다면’
    주객이 끝난다면, 이런 소리죠.

    ‘중생의 마음과 동일한 바탕이기 때문에 마음 이외의 다른 것은 없다.
    자타가 끝나버리면 주객이 같아지기 때문에 저절로 중생의 마음을 아는 거죠.

    ‘이 이치는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경계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하고 같은 말이에요.

    여기 얘기가 마음위에 다른 것 없다, 이렇게 했어요.
    이것은 자타의 분별이 끊어져 버렸을 때 오는 현상이에요.
    자타가 없는 세계는 공의 세계입니다.
    그 공한 마음이 본연의 마음자리에요.
    이것은 당연히 변하는 게 아니죠.

    남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여기서 하는 말이
    자타의 분별이 끊어지면 지혜고 식신은 아니라는 거죠.
    그것이 모든 중생의 마음은 한 가지 마음 상태라는 겁니다.

    분별이 끝나는 그 자리는 언어가 없다 이거죠.
    아주 좋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