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홀연히 한 생각 일어난다(강의)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난다’
‘홀연히’ 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한 생각’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일어난다’ 는 데 무엇인지 알아야 됩니다.
‘홀연(欻然)’은 ‘갑자기’ 이런 뜻입니다.
원인 없이 일어난 것을 ‘홀연히’ 라는 말을 씁니다.
인과법에서 원인 없이 생긴다면 이상하잖아요, 그죠?
원인은 있기는 있는데,
여기서 홀연히 일어났다는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허깨비하고 같은 거죠.
또 ‘홀연히’는 ‘착각’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한 생각’이라는 것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지해서 일어나지 그냥 일어나지는 않죠.
근본 자성[자성청정심, 진여, 불성]을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난다’했는데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왜 이런 말을 할까,
왜 주제를 그렇게 잡은 것인가를 생각하셔야 됩니다.
이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고통은 시작 되는 겁니다.
‘한 생각’이라는 원인으로 인해서 고통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겁니다.
다른 사건이나 말들, 여러 가지 생각도 있을 텐데
왜 굳이 ‘한 생각’을 얘기하느냐.
분명하게 말씀 드릴게요.
생각은 반드시 행위를 일으키고
그리고 의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 내용에 따라서 행위가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서, ‘화장실 가고싶다’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금방 일어나서 갈 수도 있지만
1,2분 뒤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 가는 거죠.
그런 걸 얘기하는 거죠.
담배 피우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본인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담배 피우는 것 같아도
그 이전에 담배 피우고 싶다는 한 생각[욕구]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한 생각’이라는 게 그런 것인데
‘한’자가 왜 들어갔느냐.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고,
이 순간 밖에 없어요.
현재 일어나는 이 한 가지 생각,
매 순간순간 변하는 것 중에서 현재 이 순간의 생각이
자기 삶의 전부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제가 지금 얘기하는 이 ‘한 생각’은
의식상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입니다.
이것을 더 깊이 들어가서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올라가면 미세한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의 흐름을 생주이멸(生住異滅),
넷으로 나눠서 설명을 합니다.
행위는 생각이 지나가고 난 뒤에 일어났단 말이에요.
그러면 생각이 지나갔다, 이것을 멸(滅)이라 그럽니다.
이(異)는 매순간 바뀌어 가는 건데
보통 의식상에서 일어납니다.
멸(滅)이라는 것은 생각이 지나가고 난 뒤에 행위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은 의식상에 일어나는 게 아니죠.
그래서 수행을 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주(住)가 나오는데
이것은 자아의식[말나식]을 얘기 합니다.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계속 인식 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머문다 해서 머물 주(住)자를 쓰는 겁니다.
그다음이 생(生)인데,
이게 바로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는’게 생입니다.
이것은 아뢰야식에서 일어납니다.
아까 얘기 했듯이 의도를 얘기하고 행위를 일으킨다는 것은
의식상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고
그 이전으로 보면 말나식이 있고 그 뒤에 아뢰야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
결국 그 영향력에 의해서 말나식을 움직이고
의식을 움직이고 감각을 움직인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난다’ 이렇게 얘기 하는 겁니다.
아까 ‘홀연히’라는 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홀연’이라 하는 것은 ‘원인 없이 생긴 것’ 이런 뜻이 있고요,
착각, 환영, 실재하지 않는 것, 이런 뜻이 있어요.
그래서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그럽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닌데
왜 무명을 얘기하느냐 하면,
결국 고통, 괴로움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 괴로움은 진리가 하나인줄 모르는 무명에서 비롯된 거죠.
그런데 이 무명을 타파하게 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눠서 설명을 합니다.
고통은 번뇌에서 비롯됐고,
이 번뇌는 ‘나’라는 생각 자아관념에서 오는 겁니다.
이때의 자아는 의식상의 자아가 아니고
잠재 되어 있는 자아의식[말나식]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이 말나식을 염오식(染汚識)이라 해서
잘 아시다시피 아뢰야식을 그르치고
의식과 감각 모두 그르치는 주범이 말나식이에요.
말나식만 제거해 버리면 그 다음부터 마음이 부동심(不動心)이 되어가지고
오염의 근원이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이 말나식[자아의식] 뒤 배경에는
진리가 하나인줄 모르는 무명이 자리 잡고 있더라, 이거죠.
그래서 무명, 자아의식, 번뇌, 고통 이렇게 네 단계에요.
결국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가 하면,
진리를 모르는 무명에서 왔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겠죠.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지만,
오로지 기도만 하는 사람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기도로 성취하기를 바라지만
성취가 안 되거나 집안이 우환이 생기고 이러면
자기 믿음을 버리게 되는 겁니다.
오로지 절만 하는 사람도 그렇고 주력만 하는 사람도 그렇고
그냥 사마타 수행만 하는 사람도 똑같아요.
그럼 뭐가 중요하냐?
지혜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 지혜는 법문을 듣고 그 법을 사유해야 되고
그 다음에 듣고 사유한 것을 근거로 해서 수행 했을 때
깊은 지혜가 생기고 깨달음을 얻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법을 이해 하셔야 됩니다.
제가 송광사에서 오래 살다 보니까 세상물정을 잘 몰랐습니다.
2002년도에 송광사에서 나와서 인도 다람살라에 갔다가 귀국해서
대구 용연사 주지를 하게 됐습니다.
주지를 하면서 절집 돌아가는 현상을 좀 알게 됐죠.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법문하게 된 이유도 그거와 관련이 있어요.
절집에 다니는 신도분들이 법문은 안 듣고 기도만 하더라는 겁니다.
어찌 이런 불상사가 생겼냐 이거죠.
기도는 기본적으로 하지만
기도를 잘 하려면 법문을 들어야 되는데
법문은 안 듣고 기도만 하니 그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냐 이거죠.
우리가 불법승 삼보를 얘기할 때도 항상 법이 중심이에요.
법을 깨친 분을 부처님이라 그러고
깨치기 위해서 수행하는 사람을 스님이라 하잖아요.
그 중심에 법이 있는데,
진리[법]는 모르고 기도만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기도 성취하는 것도 더딜 뿐만 아니라
법을 모르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이 인과법에 의해서 오는 것인 줄 모르고
무조건 내가 지성을 잘 드리는데 왜 우리 집에 우환이 왔나,
이렇게 의심을 하고 신앙을 바꾼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잘못됐다.
수행을 해도 법문을 들어야 되고
절을 해도 법문을 들어야 되고
공양을 올려도 법문을 들어야 되고,
이 법이 늘 중심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신도들이 너무 무지하니까 법문을 하기 시작 한 거죠.
법문을 해도 성이 차지 않아서
수련회를 개최하고 명상을 가르치고 이랬던 겁니다.
그러니 법문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하는 것은 법을 들어야 지혜가 생긴다는 얘깁니다.
이것에 의해가지고 윤회의 고통, 무지에서 벗어난다는 거죠.
삶과 죽음의 본질을 꿰뚫어 알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겁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거예요.
또 중요한 게 하나가 법문을 듣지 않으면 자비심이 안 생긴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자기가 깨달았다고 해도 자비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 아니에요.
자비의 다른 이름이 지혜고
지혜의 다른 이름이 자비에요.
이게 분리되지를 않습니다.
이 지혜가 고통을 완전하게 없애준다는 겁니다.
자 봅시다.
문 : 깨달음의 바다는 근원이 맑아 한 마음이 담담하고 적멸한 자리인데,
최초에 어떻게 모든 식(識)의 물결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여기 식(識)은 마음이죠.
식(識), 의(意), 심(心)이 다 마음인데 어떻게 구분하느냐,
지난 시간에 배웠는데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상을 분별해서 나누는 것을 의(意)라 하고,
대상을 보고 저것이 무엇이다 하고 인식해서 아는 것을 식(識)이라 그럽니다.
마음이 적멸하다는 것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주객이 없는 자리가 담담한 적멸의 자리에요.
이 마음이 본연의 마음자리를 얘기 합니다.
이 본연의 마음자리가 최초에 어떻게 모든 식(識)의 물결이 일어나느냐,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느냐, 이거죠.
이게 괴로움의 근원이에요.
도둑을 잡을 때
밑에 졸개 도둑, 하수인들을 아무리 잡아도 도둑이 근절이 안 됩니다.
도둑의 두목을 잡아야 되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유식 공부 하면서
고통의 원인인 번뇌의 두목, 이 무명을 잡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근원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답을 합니다.
답 : 비록 식의 물결이라 하더라도 물결이 일어난 곳은 자취가 없다.
시작도 없고 생겨날 것도 없는 것으로 식의 성품을 궁구할 수 있다.
다만 모르는 사이에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말할 뿐이다.
이 말이 중요한 겁니다.
‘식의 물결’이라는 것은 그전에도 얘기 했지만
경계의 바람이 불면 마음의 파도[물결]가 일어난다 했죠.
누가 비난을 하면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르죠?
여기서 화가 일어나는 것은 물결이 치는 걸 얘기 합니다.
그래서 상대에 반응하는 나 자신이 그게 바로 마음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수행을 하다보면,
화가 났을 때 화를 내게 한 주체도 찾을 수 없고
화라는 것이 머물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서 고통을 느끼느냐 하면,
이렇게 마음의 물결이 일어나면 일어난 곳도 없고 사라진 곳도 없다는 것을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괜찮은데
이런 훈련이 안 된 사람은
화가 나면 화난 모습에 이끌려가지고 화를 내고 증오심을 갖고
슬프면 슬픈 모양에 이끌려서 더 서럽게 울고 이러는 거예요.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죠.
이런 본질을 알려면 수행을 해야 되는데
수행 지도하면서 안타까운 게 뭐냐 하면,
몸이나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잘 관찰하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관찰해가지고 도움이 됩니까?”
이런 말을 해요.
참 안타까워요.
그런 분들이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그만 어떤 모양에 이끌려가지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욕을 하고 증오심을 내고, 별짓 다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일어나고 사라지는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가 일어나도 휩쓸리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고통이 없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하는 얘기가
식이 물결을 일으켜도 아무것도 없는 거다,
그러고 보면 식의 성품은 무자성 공이구나, 이러는 거죠.
그런데 다만 모르는 사이에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말할 뿐이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하면,
본래 일어나도 일어난 곳도 없고
사라져도 사라진 곳도 없는데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다고 말할 뿐이다, 이런 말인데
이게 무슨 뜻인가.
아주 간단한 거예요.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은
일어났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 말이에요.
착각이라는 거죠.
‘착각’을 고전적인 것에 비유를 들어서 얘기 해보죠.
산길을 가다가 새끼줄을 보고 깜짝 놀라서
‘야, 여기 뱀 있다.’ 이런 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 한사람이 자세히 보니까
독사는 없고 새끼줄만 있더라는 거죠.
새끼줄을 보고 놀라서 독사로 착각한 거예요.
그럼 그 착각이 뭐가 있었던 겁니까?
독사가 원래 없었던 거죠.
그것을 착각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다는 게 무엇이냐 하면,
일어난 곳도 없고 사라진 곳도 없는데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다’는 착각이 일어난 거죠.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상대가 비난하니까 화가 나가지고 부글부글 끓는다 이러면,
이걸 ‘홀연히 일어났다’ 이렇게 얘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화가 일어난 곳도 없고 사라진 곳도 없는데 왜 일어나느냐,
상대가 비난하는 그 내용도 알고 보면
실체가 없는데 실체가 있다고 착각해가지고 화를 낸 거죠.
제가 이렇게 얘기를 해도
‘그래도 말이지 내가 화를 낸 것은 나한테 화를 내게 하니까 화를 내지..’
이렇게 얘기하는 분 계실 거예요. ㅎㅎㅎ
화를 내게 했다 이거죠.
그럼 그 화를 내게 한 대상이라는 게
영원한 존재고 실체로 존재하느냐 이거죠.
그렇지 않다면 새끼줄 보고 뱀이라고 착각한 것과 다를 게 뭐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매 순간 홀연히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 거예요.
이게 문제라 그 말이에요.
의식상에서 일어나는 번뇌는 졸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수인이죠.
이 하수인도 전부다 홀연히 일어나는 놈들이에요.
그래서 여기 얘기 하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잔잔하고 맑은 물결에 홀연 바람이 이는 것과 같다.
잔잔하고 맑은 물결에서 무엇이 나온 것도 아니요 들어간 것도 아닌데
용솟음치는 물결이 하늘에 가득 넘치는 것이다.
그렇죠.
물은 절대 움직이는 성질이 없습니다.
다만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물결이 일렁일 뿐이죠.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데 왜 하늘 가득히 넘치느냐 이거죠.
홀연히 바람이 불어서 그런 겁니다.
물결이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물결, 의식상의 물결입니다.
이 의식상의 물결이 왜 홀연히 일어났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까 홀연히 일어난 것은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거예요.
그 바람도 홀연히 분겁니다.
아뢰야식에서 나오는 한 생각이 바로 바람이에요.
무명의 바람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거꾸로 된 미친 마음이
경계에 두루하여 식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이다.
일체 마음이 여기서 일어난다 이거예요.
우리가 본연의 마음자리, 존재의 본질을 꿰뚫고 있으면
식의 물결이 안 일어날 것이고
이 물결이 안 일어나면 고통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본연의 마음자리가 무엇인지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한 생각 홀연히 일어났다’는 것을 바르게 알아야 됩니다.
『기신론』에서는 “진여의 법이 하나인 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상응하지 못한다.
여기에 홀연 한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고 하였다.
무명(無明)은 밝음이 없다는 말이죠.
그럼 밝은 상태는 어떤 상태를 얘기하느냐 하면,
『대승기신론』에서는 두루할 편(遍)자 비출 조(照)자, 편조(遍照)라 그럽니다.
보는 곳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곳이 있는데
두루 보는 이 편조는 보는 곳이 없기 때문에 두루 다 보는 겁니다.
이걸 밝음이라 그럽니다.
무명은 주객이 나눠져서 내가 대상이 있어서 보고 있는 상태에요.
그렇게 되면 보지 않는 부분, 어둠이 생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객 속에 빠져있는 이상은 늘 어둠 속에 있는 걸 얘기합니다.
그래서 진여법인 하나가 주객이 없는 겁니다.
우리 본연의 마음자리는 본래 비어 있고 주객이 없는 줄 알기만 한다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 하는 얘기에요.
이것은 근본무명이 지극히 미세한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 자리는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차별이 있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심왕과 심소가 왜 상응하지 않느냐 하면,
차별이 없기 때문에, 나눠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심왕과 심소에 대해서 공부를 하죠.
심소(心所)라는 것은 심(心)을 소유한다,
‘너는 내꺼’, ‘책상도 내꺼’, ‘시계도 내꺼’
이렇게 ‘내꺼’ 라고 하는 것은 소유를 얘기합니다.
그러면 심소유라는 것은 마음에 소유된 것,
법은 마음에 소유된 법, 이때 법은 심리를 얘기 합니다.
심리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게 심리가 됩니다.
눈과 눈의 대상인 형상이 인연이 되면 시각이라는 생기고
귀와 소리가 만나면 청각이 생기는데
이때 시각 청각을 심소유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심소는 심리를 얘기 합니다.
심왕은 뭐냐 하면,
‘왕(王)’자가 붙었죠.
왕은 크다는 의미도 있지만 주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이렇게 여덟 개의 심왕이 있습니다.
왕은 비유인데,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왕은 의식이에요.
심소유도 심왕에 소속되어 있는 법이니까 신하를 얘기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심왕과 심소를 분명하게 구별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자 봅시다.
이게 뭐죠?
찻잔이죠.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심왕이에요.
그런데 잔을 보면 색깔은 회색이고 모양은 둥글죠?
이렇게 둥글게 보고 회색으로 보는 것은 심왕입니까, 심소입니까?
심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물을 보더라도 심왕과 심소가 같이 작용해요.
심왕은 전체를 보고 심소는 부분 부분을 보는 겁니다.
이것을 왕과 신하로 비유하는 거예요.
왕은 이래저래 하라고 툭 던지면,
신하는 그것을 세분화 해가지고 만들어서 밑에 사람에게 또 하달하죠.
그래서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전체를 보는 동시에 부분 부분 같이 본다는 거죠.
심왕 심소라는 말이 그런 말이고
우리 마음 작용이 그렇게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왕성하게 인식하는 마음은 의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하는 것을 의식의 작용이라 하고
이것을 심리라 그럽니다.
이렇게 작용하는 심리를 심소유법, 줄이면 심소라 하고,
그 때의 의식을 심왕이라 그럽니다.
아뢰야식에서 한 생각이 탁 일어나는 것을 업상, 업의 모습이다 그럽니다.
업이라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인데 주관과 객관이 나눠져 있지를 않아요.
그것을 주객미분(主客未分)이라 그래요.
그 다음에 능히 보는 상 능견상(能見相), 주관이 생기고
그 다음에는 경계상(境界相), 객관이 생깁니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주관과 객관이 서로 상응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심왕과 심소가 상응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들 이 찻잔을 보지 않을 때는 심왕과 심소가 작용 안 하죠?
의식[심왕]과 의식의 작용[심소]이 없어요.
그런데 딱 보는 순간 의식이 일어나고 의식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이 찻잔이 없으면 그런 게 없다 이거죠.
찻잔이 있다는 것은 내가 보는 마음과 보여 지는 찻잔,
이렇게 주객이 상대하면 심왕과 심소가 작용 하는데
주관과 객관이 상대 안 한다 이거죠.
그래서 업상은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지 않는 모습이고
능견상은 주관이고 경계상은 객관인데,
이렇게 주간과 객관이 나왔기는 나왔는데
서로가 상대를 안 하는 거예요.
주객이 상대 안하니까 심왕이 작용 안하고 심소도 작용 안하는 겁니다.
그래서 심왕과 심소가 상응을 하지 않는다 이러는 거예요.
이런 것은 무엇을 얘기하느냐 하면,
번뇌가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얘기 합니다.
너무나 미세해서 미세한 모습만 있지
어떤 결정적인 모양과 색깔을 띠고 있지 않은 거예요.
이런 것은 아뢰야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불가지(不可知)라,
아뢰야식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집보다 동화사가 더 춥죠? ㅎㅎㅎ
그럼 더 추운 걸 어떻게 알았어요?
“여기 와서 알게 됐어요.”
그럼 여기 온 게 한 시간 전인데,
한 시간 전에 것을 기억하고 있죠?
‘아, 집 보다는 더 춥더라’, 지금 기억 냈잖아요.
이 기억이, 더 춥다고 저장되어 있는 장소가 아뢰야식입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따라가는 거예요.
업상, 능견상, 경계상은 아뢰야식에 있다는 거예요.
의식에는 저장할 공간이 없어요.
그래서 의식은 늘 존재를 안 합니다.
의식에 강한 충격을 주면 기절하잖아요.
이 기절하는 마음에는 보고 듣고 하는 정보를 저장하는 능력이 없어요.
그럼 기절했을 때 누가 그것을 알고 있느냐?
아뢰야식입니다.
이 아뢰야식은 기절하지 않습니다.
24시간 늘 깨어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한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뢰야식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술한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를 수밖에 없죠.
그럼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뭐냐 하면,
수행을 해가지고 팔지 보살 경계에 가기만 하면 이 진실이 드러납니다.
그 전에는 몰라요.
팔지 보살의 경계는
아뢰야식이 완전히 소멸해가지고 평등성지를 이룬 거죠.
그래서 아뢰야식의 경계상이 소멸 되어야 만이
말나식[자아의식]이 작용 안하는 겁니다.
자이의식이라는 것은 아뢰야식의 경계상이 있기 때문에
그 경계상을 보고 ‘내 것이다’,
또 능견상을 보고 ‘내다’ 이러는 겁니다.
이렇게 팔지 보살까지 가야만이 아뢰야식의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자, 봅시다.
이 자리는 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차별이 있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심왕과 심소가 상응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오직 이 무명만이 염법(染法)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지극히 미세하다.
무명은 아뢰야식 위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무명을 업상이라 그럽니다.
한 생각이 일어날 것도 없는 데 일어났으니 무명이라 그러죠.
이 무명을 물들일 염(染)자, 염법(染法)의 근원이다 그랬는데,
도둑은 잡고 잡아도 근절이 안 되는 이유는
계속 생겨나는 근원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 근원이 도둑놈의 두목인데 그 놈을 잡아야 도둑이 근절이 되죠.
마찬가지로 무명이 있는 이상은 늘 괴로움이 있고 착각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무명을 잘라 없애버리면
그때는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무명을 ‘물들게 한다’ 해서 염법(染法)이라 하는 겁니다.
이 무명은 감각에서부터 말나식까지 물들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심왕에 물이 드니까 심리현상[심소]도 다 물이 드는 거죠.
그래서 이 무명에 의해서 나타나는 일도 많습니다.
여기에 다시 염법으로서 염법의 근본이 될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홀연히 한 생각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염법으로서 염법의 근원이 될 수 없는 것은 뭐냐 이거죠.
홀연히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최초로 일어난 한 생각이고
이게 염법의 근원이다 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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