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유주(流注)와 상(相) 생주멸(生住滅) (강의)

경호... 2011. 12. 4. 05:42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유주(流注)와 상(相) 생주멸(生住滅) (강의)

    ‘유주(流注)와 상(相) 생주멸(生住滅)’
    이 말은 정확하게 얘기 하면
    ‘유주(流注) 생주멸(生住滅)과 상(相) 생주멸(生住滅)’입니다.
    이 얘기는 앞에 부분에서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다’
    이것을 더 자세하게 주석을 달아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 『인왕반야경』에서
    “처음 찰나에 일어나는 식(識)은 나무나 돌과는 달라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을 생기게 하여,
    각자가 한량없는 오염되거나 깨끗한 식이 될 수 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을 생기게 한다’는 말을 여러분들 아셔야 됩니다.
    ‘처음 찰나에 일어나는 식(識)’이라는 것은
    원각, 본래 깨어있는 마음에서 홀연히 불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무명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오념된 법을 생기게 하고 고통을 갖다 줍니다.
    그런데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나는 데 깨끗한 게 있는데
    이렇게 깨끗한 법을 생기게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얘기 합니다.

    아뢰야식이라는 게 무명의 영향을 받아서 아뢰야식이 되는데
    그런 아뢰야식이 진여의 영향을 받으면 깨달음이 옵니다.
    그것을 깨끗한 법이라 그래요.

    여러분들은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데
    이것을 문자반야라 그럽니다.
    반야는 지혜인데, 그래서 문자에 의해서 지혜가 생기는 거죠.
    이 지혜는 바로 진여의 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걸 얘기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진여의 자리로 들어가는 겁니다.
    진여는 본연의 마음이고 허망하지 않은 참다운 본질이고
    참다움과 다르지 않아서 여(如)라고 한 겁니다.
    우리 본래의 마음은 이렇게 참다웁고 유여해서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불생불멸 영원한 거예요.

    이 진여가 생멸하는 법을 만나면
    생멸하는 번뇌를 없애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깨끗한 법을 낸다 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진리를 깨치고자하는 마음인 보리심을 일으켰다면
    이게 진여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각자가 한량없는 오염되거나
    깨끗한 식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깨끗한 식’은 깨어 있는 마음이고
    ‘오염된 식’은 무명의 마음을 얘기하는 거죠.

    본래가 근본이 처음 찰나부터 불가설겁(不可說劫) 내지
    금강위(金剛位)의 마지막 찰나까지 불가설불가설의 식이 있는 것으로
    모든 유정(有情)의 색(色)과 심(心) 두 가지 법을 생기게 한다”고 밝힌 것은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이 있고 생겨나고 멸하는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식은 생멸문에서 몇 가지 종류의 생멸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 ‘이 식은’ 이라는 말은 팔종식을 얘기 합니다.
    이 팔종식은 몇종류의 생멸이 있느냐고 물은 거죠.

    ‘금강위(金剛位)’라는 것은 십지 마지막입니다.
    금강유정(金剛喩定)의 경지에 갔을 때 금강위라 그럽니다.
    금강에 비유되는 선정에 들었을 때
    아뢰야식 속에 저장된 종자가 완전히 소멸 되는 겁니다.

    답합니다.
    : 진여문은 참성품에 수순하여 묘하게 무생(無生)에 계합한다.
    세간의 모습이 인연을 따라가나 생멸하는 모습이 일어나는 것은 다하였다.
    『능가경』에서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세존이시여, 모든 식에 몇 가지 종류의 생주멸(生住滅)이 있는 것입니까”하니,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답변하시기를
    “식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생주멸이 있으나 사량으로 알 것이 아니다.
    이른바 유주(流注) 생주멸과 상(相) 생주멸이다”고 하셨다.


    앞에는 생멸의 문에서 여기는 진여의 문입니다.
    문(門)이라는 것은 들어가고 나옴이죠.
    ‘생멸문’은 마음이 생겼다 사라졌다하는 그런 세계에 산다 이 말이죠.
    그럼 ‘진여문’은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불생불멸의 문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생불멸의 문으로 들어가야 되요.
    그래야 깨닫는 거죠.

    ‘세간(世間)’은 시간과 공간의 모습이죠.
    ‘유주(流注)’는 주관과 객관이 상대하지 않고 흘러서 머문다는 겁니다.
    ‘유주(流注) 생주멸’은
    흘러서 머물러가지고 생하고 머무르고 멸하는 것은
    아뢰야식 위에서 일어나는 거고[업상, 능견상, 경계상]
    ‘상(相)’은 주관과 객관이 상대해서 나타난 게 상인데,
    그 속에서 생하고 머무르고 멸하는 것을 ‘상(相) 생주멸’이라 합니다.
    이 상(相)은 시각부터 말나식 까지 일곱 개의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은 항상 주관과 객관이 상대하기 때문에 늘 모습이 있습니다.
    상대하니까 모습이 있지 상대하지 않으면 모습이 없어요.

    옛 스님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유주 생주멸은 제팔식의 세 가지 모습이 미묘하게 은폐되어
    종자가 끊임없이 현행하는 면을 오로지 지목하여 유주라 하는 것이다.
    무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처음 업식(業識)이 일어났기 때문에 생(生)이라 한다.
    이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상속되어 머물게 되므로 주(住)라 한다.
    금강 삼매에 도달하여 등각(等覺)의 일념으로
    근본무명을 끊으니 유주 생주멸이라 하는 것이다.


    유주 생주멸하고 상 생주멸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용어가 생소하니까 어렵죠?
    본문에 보면 ‘위유주생주멸상생주멸(謂流注生住滅相生住滅)’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거 같어요.

    ‘유주(流注)’는 흐를 류(流)자에 머물 주(住)자인데,
    물을 끌어서 댄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 유주라는 말은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이렇게 하듯이
    마음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정보]가 현행, 나타났다가
    나타난 동시에 또 저장이 되는데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겁니다.
    이것을 유주라 그럽니다.
    이 말은 보통 아뢰야식 위에서 쓰는 말입니다.
    이 아뢰야식에는 업상(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 세 가지가 있죠.
    업의 모습과 주관의 모습과 객관의 모습이 있는데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마음에 저장된 정보가
    현행했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러므로 해서 업식이 처음으로 생기고,
    오래도록 머무는 것을 주(住)라고 하고,
    이런 상태가 언제 끊어지냐 하면
    금강유정에 가야만 소멸한다 이런 뜻이에요.

    그 다음에 모양 상(相)은 제칠 말나식부터 나타나는데
    아뢰야식에서 나온 종자가 제칠 말나식, 제육 의식, 전오식이 있는데
    제칠 말나식부터 모습을 띤다 해서 상이에요.
    모습을 띠면서 생겼다 머물렀다 하거든요.
    이것은 수행을 해서 팔지 보살이 되면 소멸한다고 해서
    멸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대충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읽으면서 하나하나 얘기를 해보죠.

    유주생주멸(流注生住滅)하고 상생주멸(相生住滅)대한 해석입니다.
    ‘옛 스님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유주 생주멸은 제팔식의 세 가지 모습이 미묘하게 은폐되어
    종자가 끊임없이 현행하는 면을 오로지 지목하여 유주라 하는 것이다.’

    제팔 아뢰야식은 세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업식(業識, 業相), 전식(轉識, 轉相), 현식(現識, 現相)있는데,
    업식(業識)은 주객이 나눠지기 이전의 모습, 주객미분(主客未分)이라 하고
    전식(轉識)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하면 능히 보는 모습, 능견상(能見相)이라 그러는데
    주관을 얘기 합니다.
    현식(現識)은 나타난 모습, 경계상(境界相)인데 객관을 얘기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경계입니다.

    아뢰야식은 이렇게 세 가지의 모습이 있는데,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기 이전에 한 생각이 일어난 생(生)이죠.
    그 모습에 전식이 생기고 현식이 나타나는데,
    이 아뢰야식은 여러분은 모릅니다.
    아무리 알려고 해도 체험을 하지 않는 이상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성인들이 말씀하셨으니까 ‘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10년 전이나 20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거 보면
    ‘아, 아뢰야식이 있구나’ 알 수 있는 거죠.
    이 아뢰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 하는데, 장은 감출 장(藏)자, 창고죠.
    매 순간 보고 듣고 하는 것을 마음에 저장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듣고 있는 법문을 저장하는 것이 아뢰야식이에요.

    그래서
    ‘세 가지 모습이 미묘하게 은폐되어 종자가 끊임없이 현행하는 면을
    오로지 지목하여 유주라 하는 것이다.’ 이랬습니다.
    여기에 ‘미묘하게 은폐되어있다’는 것은
    범부 중생들은 깨닫기 전에는 모른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무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처음 업식(業識)이 일어났기 때문에 생(生)이라 한다.’
    무명의 인연이라 했는데
    법계가 하나인줄 모른다, 밝지 못하고 어둡다, 이게 무명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도 이 무명을 없애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럼 업식이 어떻게 생기느냐 하면,
    무명이 진여에게 영향을 줍니다.
    진여가 참다운 마음인데 그 영향을 받으니까 아뢰야식이 생깁니다.
    바꿔 말하면 아뢰야라는 마음은 무명의 영향을 받아서 생기는 거예요.
    업식은 진여가 무명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아뢰야식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 중에 업식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명이라는 게 문제가 심각해지죠.

    업식, 전식, 현식을 나눠서 설명하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무명이 진여에게 영향을 줘서 업식, 망심이 생겼다 이렇게 보시면 되고요,
    그 다음에 경계상[현식]은 어떻게 생기느냐 하면,

    ‘무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처음 업식(業識)이 일어났기 때문에 생(生)이라 한다.
    이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상속되어 머물게 되므로 주(住)라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상속되었다’는 것은 업식이 계속 머물고 있는 거죠.
    아뢰야식 위에서 종자가 현행해서 계속 머물고 있는 것을 주(住)라 한다는 거죠.

    생겨서[生] 머물고[住] 있죠.
    이게 언제 끊어지느냐 하면,
    ‘금강 삼매에 도달하여 등각(等覺)의 일념으로
    근본무명을 끊으니 유주 생주멸이라 하는 것이다.’
    금강 삼매는 금강에 비유되는 선정, 금강유정을 얘기하는데
    이것은 십지보살에 가서 마지막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금강, 깨지지 않는 삼매에 들어가면
    근본무명이 소멸해 버리기 때문에 종자가 끊어집니다.
    이렇게 끊어지므로 해서 이때까지 머물고 있는 업식[망심]이 사라져 버리는 거죠.
    그래서 생주멸이라 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상 생주멸은 나머지 칠식의 마음과 경계가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남으로 상(相)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업식, 전식, 현식은 상이 아니기 때문에 모습이 없습니다.
    너무 미세해서 알 수가 없는데
    현식을 인식하는 놈이 지식(知識, 知相)이 있습니다.
    이것을 말나식[자아의식]이라 합니다.
    의식상에 보면, 의식 뒤에 이 말나식이라는 자아의식이 의식에 영향을 줘서
    자기가 잘났다고 하고 존심을 내세우고 하는 겁니다.
    이런 말나식만 없애버리면
    팔지 보살의 경지에 가서 평등성지를 이루게 되고 경계상이 없어져요.

    이 놈[말나식]이 생기면서 모습[相]이 나타납니다.
    그 다음이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의식이 있고,
    그 다음에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 다섯 가지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전오식하고 의식하고 말나식을 합하면 일곱 개의 마음이에요.
    이 일곱 개의 마음은 상(相), 모습이 있는데,
    모습이 생(生)했다가 머물러[住]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상생주(相生住)라 그럽니다.
    멸(滅), 이것이 소멸할 때가 언젠가 하면,
    칠지 보살의 경지에 가면 없어지기 시작해서
    팔지 보살에 가면 완전히 소멸하는 거예요.

    비록 칠식이 팔식을 반연하여 육식을 보는 입장에서는 미세하더라도
    네 가지 번뇌를 갖추고 있으므로 또한 어떤 모습을 띠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칠식이 팔식을 반연하여 육식을 보는 입장에서 미세하더라도’
    육식은 의식부터 해가지고 다섯 개의 감각을 얘기 합니다.
    칠식이 팔식을 반연하는 것은 굉장히 미세하게 보이는 거죠.

    ‘네 가지 번뇌를 갖추고 있으므로 또한 어떤 모습을 띠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세하게 보이더라도 모양은 있다는 거죠.
    그게 어떤 모습이냐 하면, 네 가지 번뇌를 갖추고 있다, 이랬어요.
    이게 제칠 말나식[자아의식]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자아의식의 네 가지 모습은 아견(我見), 아치(我癡), 아애(我愛), 아만(我慢)입니다.
    내다 하는 견해가 아견이고 아치는 어리석은 것,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애, 아만은 내가 높다고 하는 것,
    이렇게 네 가지 번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습이 있다 이거죠.

    여기에 모습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얘기 해보죠.
    상(相)은 심리가 없으면 상이 없는 거고
    심리가 있으면 상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칠 말나식이 아견, 아치, 아애, 아만,
    네 가지 심리가 있으니까 상이 있는 거죠.
    그렇다면 상이 있다는 것은 주관 객관이 서로 상대해 있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남녀가 결혼을 하면 아이가 생긴다,
    아이는 원래 없었던 것인데 상, 모습이 생긴 거죠.

    그래서 무명이 경계상에게 영향을 주면
    업식을 통해서 제칠 말나식이 튀어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말나식이 나와서 경계상을 다시 인식하니까 네 가지 심리가 일어나는 거죠.
    그리고 의식은 심리가 51개라고 하기도 하고 52개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상이 있는 거죠.
    그 다음에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도
    심리가 있기 때문에 상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업식, 전식, 현식에는 상이 없어요.
    주관이 있고 객관이 있긴 있는데
    주객이 서로 상대를 안 하기 때문에 상이 없는 겁니다.
    이것을 서로가 응하지 않는다 해서 불상응(不相應)이라는 말을 씁니다.
    전식은 주관이고 현식은 객관인데
    주객이 상응을 하지 않는 거고,
    상응 하지 않으니까 심리가 안 일어나는 것이고,
    심리가 안 일어나니까 상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심리가 일어나는 것은 말나식 때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모습이 있다 이런 얘깁니다.

    현식(現識)이 스스로 모든 경계를 심어 내는 것에 의지하여,
    이 연(緣)에 계합하여 칠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상생(相生)이라 한다.
    이것이 오랜 세월 훈습되는 것을 상주(相住)라 한다.
    지말번뇌에서 근본번뇌까지 점차적으로 조복받아 끊어서
    보살의 칠지(七地) 경계가 원만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상 생주멸이라 하는 것이다.


    상생(相生)은 모습이 생긴다는 거죠.
    현식(現識)이라는 것은 아뢰야식의 세 번째 경계상을 얘기 합니다.
    이 현식이 스스로 경계를 내기 때문에 경계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연(緣)에 계합하여 칠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상생(相生)이라 한다.’
    칠식이 말나식, 의식, 전오식을 얘기 하는데
    어떻게 연에 계합해서 만들어내느냐 하면,
    무명이 경계상에 영향을 주면,
    경계상은 업식에 영향을 주어서 말나식이 튀어 나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대승기신론소」에 원효스님께서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굉장히 어려운 거죠.

    그 다음에
    ‘지말번뇌에서 근본번뇌까지 점차적으로 조복받아 끊어서’ 이 말은,
    지말번뇌(枝末煩惱)는 거친 번뇌입니다.
    거친 번뇌라는 것이 성을 낸다든지 욕심을 부리면 금방 알 수가 있죠.
    성을 내거나 욕심을 부리면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는데
    이런 것은 전부 지말이에요.
    그렇지만 이것을 하나하나 제거하다보면
    이 번뇌가 점점 아주 가늘어지고 미세해지는 걸 알게 되죠.
    근본번뇌는 말나식에서 일어난다고 보면 틀림없는데, 아주 미세합니다.
    또 근본번뇌는 지말무명의 시작이고 근본 무명에서 비롯된다고 보시면 되요.

    이렇게 조복받아 끊어서
    ‘보살의 칠지(七地) 경계가 원만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상 생주멸이라 하는 것이다.’
    칠지에 가면 말나식이 소멸하는 겁니다.
    찰지까지가 제칠 말나식의 경계입니다.
    팔지 부터는 아뢰야식의 경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여기까지 어렵게 얘기를 했는데 정리를 하죠.
    유주(流住)는 제팔 아뢰야식의 종자가 계속 현행해서 나타나는데,
    현행한 모습이 업식(業識)입니다.
    그 업식이 생(生)해서 계속 머물러 있으니까 생주(生住)라는 말을 쓰는 거죠.
    그런데 이것은 십지보살에 가서 금강유정에 들어야만 소멸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주(流住) 생주멸(生住滅)의 끝에 멸(滅)이 그런 뜻이라는 거죠.

    업식은 무명이 진여에게 영향을 줘가지고 생긴 게 업식인데
    이게 무명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전식과 현식을 만들어 냅니다.
    이 업식, 전식, 현식, 세 가지는 심리작용이 없습니다.
    업식은 주객이 나눠지지 않은 주객미분이고,
    주관의 모습이 전식, 객관의 모습이 경계상으로서의 현식인데
    이것은 주관과 객관이 상대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작용이 없고
    심리가 없기 때문에 모양, 상이 없다는 거죠.

    또 상생주멸(相生住滅)은 알다시피
    경계상[현식]이 무명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다시 이 경계상이 업식에다가 영향을 줘서 업식에서 말나식이 생깁니다.
    이 말나식이 지상(知相)인데 이게 경계상을 반연을 하는데
    그때 심리가 일어나면서 상(相)의 모습을 띠게 된다는 겁니다.
    이 상생주(相生住)가 멸(滅)하려면
    칠지 보살의 경지까지 가야 된다는 것을 얘기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아의식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거죠.
    설사 초지의 경지에 가가지고 주객이 없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보통 주객이 없는 자리에 들어갔다 그러면 견성이거든요.
    설사 거기 들어가도 ‘내다’하는 상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의식상에서는 ‘내’가 없어졌지만
    말나식의 자아관념은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아(我)라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 말나식이 아뢰야식도 오염시키고
    의식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 다섯 가지 인식도
    전부다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보는 겁니다.
    의식상에서 ‘나’라고 나타나는 것은 보통 다 보이죠.
    아만(我慢)을 세우면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봅니다.
    그리고 남을 배척하는 것은 무조건 ‘나’라는 게 있어서 배척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보이는데, 이게 전부다 말나식에 영향을 줘가지고 그렇다는 거죠.

    외국에서는 심리치료에 자아에 의해서 그렇다 해서 자아강화법을 쓰는데
    생각이 바뀌어가지고 ‘무아심리학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거기서 주장하는 게 뭐냐 하면,
    자아(自我)야말로, ‘나’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병의 근원이다,
    이렇게 보고 시작을 하는 거죠.
    외국에서는 그렇게 본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2500년 전에 벌써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알고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전부다 ‘나’라는 것이 있어서 일어나는 건데
    요놈을 어떻게 하면 없앨 것인가 하는 게 중요해요.
    이것을 타파해야 되거든요
    .
    나르시스(Narcissus)라는 말을 많이 들어봐서 아시겠지만
    자아라는 것은 허상이에요.
    인간계에 태어나는 것도 자아관념이 있어서 태어나는 겁니다.
    자아가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를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은 심리적인 불안감을 많이 가집니다.
    그런 불안감으로 인해서 어두운 곳에 가면
    공포심을 많이 느끼고 잘 놀라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자아관념이 강하면 고집도 세고 아주 강건한 것 같은데도
    반대로 깨지기 쉽기 때문에 어떤 위험에 봉착하면 늘 두려워하고 그러는 겁니다.
    우울증도 자아관념 때문에 걸리데
    명상을 하면 이게 없어집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지만 의식이 나오고 전오식이 탄생을 합니다.
    전부다 무명의 영향을 받아서 다 나오는 건데,
    이것도 똑같은 탄생 과정을 거친다고 보시면 됩니다.

    유주 생주멸에 의지하여 미혹과 깨달음의 의지처를 세우고,
    상 생주멸에 의지하여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의 의지처를 세운다.
    생주멸(生住滅)이 형성되는 기간이 앞의 것은 길고 뒤의 것이 짧음에 따라
    모습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유주 생주멸과 상 생주멸이다.

    이 때문에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마음이 경계를 만나면 긴밀한 흐름의 유주생(流注生)이 되는 것이다.
    앞의 파도가 뒤의 파도를 끌어다 큰 바다에 일렁이니 멈춤이 없다.
    새로운 생각이 지나간 생각을 이어 마음을 뒤흔드니 항상 생각이 일어난다.
    이것으로 맑고 청정한 근원을 어지럽히니
    깨달음의 바다가 어둡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