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육진(六塵)을 바람이라 하는가 (강의 - 5. 마음의 본질은 空이다)

경호... 2011. 10. 9.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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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육진(六塵)을 바람이라 하는가 (강의 - 5) 자, 답을 합니다. 진짜 맞는지 안 맞는지 봅시다. : 이와 같은 팔식은 무시이래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흔들린 적이 없고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네 가지 모습으로 바뀐 적이 없으면서 진실로 상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팔식은 무시이래로’ 시작함이 없는 이래로, 처음이 없다는 말은 끝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그래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은 처음과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창조와 종말이 있는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 말씀이 있었다면, 그게 창조의 시작이죠. 그러면 창조해서 종말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창조해서 종말이 있다는 것은 무상의 세계인데, 말과 생각을 떠난 세계를 뭐라 그럽니까? 매 순간 변하는 거는 이름 붙일 수 있습니까? 생각으로 붙일 수 있습니까? 생각으로 묘사도 못 하지요? 그러면 그 세계를 공이라 그러는 거예요. 말과 생각을 떠난 세계를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붙이자면 공이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 말씀 이전에 뭐가 있습니까? 공이 있는 거예요. 이 공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이거죠. 현상의 세계에만 붙들려 있으면 창조와 종말이 있지만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들어가면 처음과 끝이 없는 무시무종이에요. 그래서 ‘무시이래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흔들린 적이 없고’, 흔들린 적이 없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 머물지 않았다는 거예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네 가지 모습으로 바뀐 적이 없으면서 진실로 상주하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할까. 과거 현재 미래에 흔들린 적이 없다, 이게 뭘까. 아시는 분 있어요? 만약에 실체가 있어가지고 여기 말한 대로 ‘생주이멸의 네 가지 모습으로 바뀐 적이 없다’면 뭔가 잘못 된 거죠. 무엇인가 있다했을 때 변함이 있는 것은 모순입니다. 진짜 실체로서 존재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됩니다. 하나는 관계를 떠난, 독립된 존재여야 되고, 그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면 독립된 존재가 아닌 관계 속에 있는 것이고, 관계 속에 있는 것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관계를 떠나 있어야 되니까 우리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래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알래야 알 수가 없는 것을 자꾸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희론(戱論)입니다. 말장난이라는 거죠. 그래서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 하는데, 왜 불가득이라고 하느냐 하면,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얻을 수 없는 것은 모양이 있습니까? 모양이 없죠. 여기서 생주이멸 한다는 것은 이미지로 봐야 되죠. 그것은 뭘 얘기합니까? 아까 얘기 했잖아요. 예, 공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실상 상주’라는 것은 공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여덟 개 마음의 본질은 텅 빈 공이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공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에 흔들리지 않는다, 생주이멸 네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얘기하면서 진실을 강조한 거예요. 우리가 마음과 공은 따로 있다, 이렇게 생각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마음의 본질은 뭐죠? 공입니다. 지난시간에 마음이 연기라고 배웠습니다. 연기의 다른 이름이 공이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공인 거예요. 그 마음의 본질이라는 게 자성청정심인데, 그래서 여기 보면, 자성이 청정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모습이 원만 구족하여서 부족하거나 잃어버림이 없다. 자성청정심을 얘기하는 거예요. 이 자성청정심이라는 것은 마음이 비어있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공하고 마음하고는 같은 거죠. 확실히 아셔야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게 있어요. ‘자성이 청정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모습’은 형상이 없다는 말이죠. ‘원만 구족하여서 부족하거나 잃어버림이 없다.’ 무엇인가 형상이 없을 때는 부족하거나 잃어버릴 것이 없죠. 그런 것을 원만하다 그래요. 여기서 원만구족이란 말의 또 한 가지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원만구족이란 말은 없는 무(無)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텅 빈 공성(空性)이라는 것은 실체로서의 유(有)도 아니지만 무(無)도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 공성은 비어있어서 자체성품이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인연만 맞으면 모습을 다시 나타내는 거예요. 어머니 자궁은 비어 있지만 인연만 맞으면 애기가 생기잖아요. 이와 똑같은 이치예요. 이 방안이 비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쉴 수가 있죠. 그래서 비어있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언제든지 인연만 만나면 모습을 나타내는 거죠. 그렇지만 비어있는 본질은 안 바뀌고 그대로 입니다. 예를 들어서, 찻잔은 찻잔 자체가 원래 존재하는 거 아니죠? 찻잔을 바깥에 누가 준 것도 아니죠? 찻잔이 원인 없이 생긴 거 아니죠? 그럼 어떻게 생겼습니까? 지수화풍 4대와 사람의 정성이 어울려서, 인연화합해서 찻잔이 탄생한 거 아니에요. 그럼 원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가 준 것도 아니고, 원인 없이 생긴 것도 아니라면 실체가 없다는 얘기죠. 비어있다는 겁니다. 남자는 남자로서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여자는 여자로서 결정되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남녀라는 것은 가변적인 존재를 얘기 합니다. 이생에 여자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원인과 조건이 맞으면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인연과 조건만 맞으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거예요. 인간에 한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존재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이와 같은 일체공덕이 법계와 같기 때문에 두 가지 모습이 있지 않다. 두 가지 모습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의 모습이다. 오직 하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또한 상대적 개념으로 나타나는 어떤 모습도 없다. 모든 것이 다 어떤 모습도 없으므로 모습이 없다는 이 자체도 또한 어떤 모습이 없는 것이다. 법계라는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 십법계 전존재를 얘기하죠. ‘일체공덕이 법계와 같다’는 것은 일체의 공덕이 그 만큼 크다는 겁니다. 공덕이라는 말은 안 좋은 것, 일체 번뇌 망상이 없어진 모습이 공덕이에요. 그래서 수행의 결과를 공덕이라 그래요.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수행을 해가지고 ‘몸도 원래 텅 비어서 실체가 없구나’, 몸이 사라지고 나면, ‘몸이 내다 할 것도 없고, 내 것이라는 것도 없구나’, 또 계속 공부해가니까 ‘이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지만 무상 속에는 자아도 없고 실체도 없구나, 자체가 청정하구나’ 이렇게 알죠. 이렇게 알면 공덕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일체 공덕이 법계와 똑같다는 거죠. 그럼 이런 공덕은 어떤 작용을 하느냐. 지혜에 의해가지고 자아 없고 실체가 없음을 알아서 공덕이 생긴 사람은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번뇌와 마주치면 그 번뇌를 없애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깨달은 사람 곁에 있으면 깨치지 못한 사람의 번뇌가 그 만큼 제어되거나 없어지는 현상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안 좋은 것도 없애는 힘, 공덕이에요. 그리고 모든 것을 상호 소통시키는 힘을 갖고 있죠. 마음을 여는 것을 얘기 합니다. 아무리 미운소리 싫은 행동을 해도 다 받아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소리나 행동을 한다고 욕을 한다든지 하는 사람은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고, 자아가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은 진실을 알기 때문에 화가 안 난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오히려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그런 힘이 있는 거예요. 그것을 공덕이라 하는 거죠. 그래서 중요한 게 본질을 알자, 마음의 본질은 실체가 없고 자아가 없음을 알자 이거죠. 알면 세상이 평화롭고 그런 겁니다. 그게 공덕의 모습이죠. 저도 이런 말을 하지만 어느 때는 그런 게 많이 올라오거든요. 올라오면 똑같습니다.ㅎㅎㅎ 그리고는 지나가면 후회하고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끊임없이 하셔야 돼요. 자 봅시다. ‘두 가지 모습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의 모습이다.’ 두 가지 모습이라는 것은 현상이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비교하니 두 가지 모습이 생긴다 할 수 있습니다. 또 ‘오직 하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또한 상대적 개념으로 나타나는 어떤 모습도 없다.’ 그것을 무상(無想)이라 그래요. 또 ‘모든 것이 다 어떤 모습도 없으므로 모습이 없다는 이 자체도 또한 어떤 모습이 없는 것이다.’ 어떤 모습도 없다, 상이 없다 하면 거기서 끝나버려야 되는데 사람들은 상이 없는 무언가가 또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상이 없는 것도 또한 없는 것이다 이러는 겁니다. 이런 것은 지혜의 모습이기도 하고 정념적(正念的)인 지혜를 계발하는 논리에요. 그래서 『금강경』에 얘기하죠. ‘내가 말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이름이 세계다’ 똑같은 겁니다. 내가 말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다,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름이 그런 것이다, 이러면 사람들은 없다고 하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이름이 세계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이 얘기도 전 시간에 한 얘긴데, 『염처경』에 보면, 백정이 소를 잡아가지고 살을 살대로 뼈는 뼈대로 내장은 내장대로 다 나눠서 팝니다. 백정이 파는 것은 고기고, 사람들이 사는 것도 고긴데, 그럼 소는 어디로 가버렸어요? 소가 없죠? 이상하잖아요. 인간도 똑같은 거예요. 사람이라고 하지만 분해해 보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흙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허공의 요소로 다 분해 시켜 보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결국 몸이라는 것이 이름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사람도 사람이 아니고 다만 그 이름이 사람일 뿐인 거죠. 그러니까 진실은 분해시켜 보니까 아무것도 없더라 이겁니다. 우리는 인연 화합 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없다 이렇게 얘기 하지만 그 모습을 분해시켜보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말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 이름이 세계다’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성철스님 말씀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 말씀도 똑같은 논리에요. 여기는 유식을 얘기하는 부분이지만 반야 지혜도 같이 얘기 하는 겁니다. 실체 없고 자아 없음을 아는 게 지혜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이 구절이 유식도 가르쳐주고 반야도 가르쳐주는 대목입니다. 오늘 제가 얘기하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알았다면 아마 예쁜 것을 쫓아서 성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ㅎㅎㅎ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