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모든 것이 마음이다 (강의 - 1. 마음과 境界는 空寂하다)

경호... 2011. 10. 1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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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모든 것이 마음이다 (강의 - 1) 우리가 유식 공부를 하고 있지만 이런 공부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봤을 때 별종으로 볼 거예요. 이 무지무지 어려운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ㅎㅎㅎ ‘모든 것이 마음이다.’ 이것은 『화엄경』범행품(梵行品)에 보면 ‘일체의 모든 것이 마음 자체의 성품인줄 알면 지혜몸을 이룰지니 다른 일을 말미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는 것을 알 때 그걸 깨달음이라 그러는 거죠. 그런 말을 들어서 깨닫는 것하고 내가 사유해서 깨닫는 것하고 실제 수행해서 깨닫는 것하고 다르죠. 자, 봅시다. 또 『화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엄경』에서 “세존이 남해 바다의 능가산에서 설법하시었다. 그 산은 높고 험준하면서 큰 바다가 밑으로 내려다 보였으나 산으로 들어가는 출구가 없었다. 신통을 얻은 자만이 올라 갈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마음의 근본에 대한 법문을 표방한 것으로 닦거나 증득할 것이 없는 자라야 올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 능가산에서 설법하셨다 이게 『화엄경』에서 얘기 했지만 실제로는 능가산에 설법한 경전은 『능가경』입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산으로 들어가는 출구가 없었다. 신통을 얻은 자만이 올라 갈 수 있었다’ 이런 말을 하죠. 이게 상당히 중요한 말인데, 특히 ‘산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구절 같은 거 이런 경우를 우리가 생각해야 될 부분들이에요. 여기에 해설을 보면 ‘이것은 마음의 근본에 대한 법문을 표방한 것으로 닦거나 증득할 것이 없는 자라야 올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놨습니다. 자, 보시죠. 산이 있고 바다가 있는데, 산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산에 올라가는 문이 없어요. 그럼 바다는 뭐고, 산은 뭐고,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뭐냐.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여러분들 화두공안을 이해 못하면 화두 참구를 못합니다.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보면 육긍(陸亘)대부가 남전(南泉)스님을 찾아와 묻기를, "옛사람이 병 속에다 새끼거위를 키웠는데 거위가 점점 자라서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을 깨뜨릴 수 도 없고 거위를 죽일 수 도 없으니, 어찌하여야 거위를 꺼내겠습니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병은 뭐고, 거위는 무엇을 얘기하고, 그리고 깨지 말고 끄집어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걸 증명해야 되잖아요. 그래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禪)’ 이러면 무조건 말과 생각을 떠나 있는 것이니까 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이거죠. 우선 말뜻을 이해를 하고 그 다음에 참구해서 들어가야 되는데, 그렇다면 병은 뭡니까? 우리 몸을 병이라 그러죠. 그러면 거위는 뭐죠? 결국은 마음이죠. 그럼 병을 깨지 않고 거위를 끄집어낸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본마음을 안다? 아, 참 좋습니다.ㅎㅎㅎ 선사의 법문을 들을 만합니다.ㅎㅎㅎ 이런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만이 선사들의 선문답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남전스님이 육긍대부에게 "대부!" 하니까 육긍대부가 "예!" 이러니까 남전스님이 "나왔느니라." 이랬거든요. 여기에 ‘예’하고 대답하는 게 마음이잖아요. 거위는 마음이고, 병은 몸인데, ‘예’하고 대답하는 게 마음[거위]이니까 대답하는 순간 병[몸]에서 빠져 나온 거죠. 이런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이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여기서도 바다는 무엇을 얘기하고 산은 무얼 얘기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 탁, 와야 됩니다. 자, 얘기를 해 봅시다. 우리가 산꼭대기 올라간다는 것은 무얼 얘기합니까? 수행을 한다? 수행해서 꼭대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건 좋아요. 그러면 꼭대기에 갔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거네요, 그죠? 그럼 산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본다는 것은 뭐예요? 이때 바다나 물은 우리 마음에 곧 잘 비유 한다는 거죠. 산꼭대기 올라가서 바다를 봤을 때 진실을 알았다는 얘긴데, 그러면 출구가 없는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 이것은 무얼 얘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는 게 수행이 맞죠? 그런데 출구가 없는데 올라가 있다는 것은 닦음이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여기에 ‘닦거나 증득할 것이 없는 자라야 올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랬거든요. 이것은 「전등록」에 보면, 열심히 수행해서 닦아 보니까 닦을 것이 없고 증득을 해보니까 증득할 것이 없다, 이런 말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닦거나 증득할 것이 없는 자’는 깨달은 자죠. 그런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다 이 말입니다. 증득(證得)이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증득이라는 것은 단계 단계 밟아서 올라가는 것을 ‘증득한다’, 이런 말을 씁니다. 용어 자체에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을 닦고, 단계를 밟아 올라간다 하는 것이 없는 자라는 것은 벌써 깨달은 자를 얘기 하죠. 그럼 깨달은 자 말고 그렇게 표현하는 자는 없을까? 있을 거예요. 깨달음 말고 어떤 자리를 표현할 때 이런 말을 쓸 수가 있거든요. 그건 뭘까요? 깨달은 자는 닦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는 자죠. 그러면 그 깨달은 자의 깨침의 내용은 뭘까요? 모든 게 마음이다?ㅎㅎㅎ 그 마음자리는 깨달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는 자리 아닙니까. 닦는다면 무엇인가 있어야 되는데 없다는 거죠. 그 자리는 비어 있는 자리, 공이고 다른 말로 연기라는 겁니다. 그게 깨달은 내용이에요. 그러면 산꼭대기에서 바다를 내려다 본다는 것은 본연의 마음자리에서 얘기하는 부분이죠. 뒤에 나옵니다. 큰 바다를 내려다 본다는 것은 커다란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표방한 것이다. 마음이라는 청정한 바다가 경계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여져 식(識)의 파도와 물결이 일렁인다는 것이다. 경계의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치는 게 없죠. 그러면 그 자리는 비어있는 자리라는 거죠. 그래서 다음 구절에는 이것은 경계와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통달하면 마음이라는 청정한 바다가 또한 스스로 공적한 것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보니까 공이라는 게 유추가 되잖아요. 이것을 이해할 때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여기서 경계의 바람이 무엇이고 식의 파도와 물결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걸 명확하게 알아야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음이라는 것은 청정한 바다다, 이것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에 분명히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있고, 파도가 있고, 바람이 있다. 그런데 바람은 바람인데 경계의 바람이라 그랬어요.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들리는 것, 냄새, 맛, 촉감, 다 경계에요. 그래서 경계라 하는 것은 인식 대상을 얘기하는 거예요. 또는 인식[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경계라 그럽니다. 누가 비난을 하면 그 소리를 들을 때 기분이 나쁘다, 그러면 마음이 움직였죠. 그 비난이 경계입니다. 물질적 현상만 경계가 아니고 상대가 말한 것, 의미, 이런 것도 전부 경계라 그럽니다. 쉽게 정의를 내리면, 내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 동요가 일어나게끔 하는 것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전부다 경계입니다. 그래서 경계의 바람이다 그러는 겁니다. 바람이라는 것은 비유죠. 그래서 경계의 바람이 불면 바다가 출렁거린다는 거죠. 그게 파도에요. 여기서 바다는 청정한 마음을 얘기하고 파도는 번뇌 망상을 얘기합니다. 바다와 파도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은 모양이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것은 똑같은 물이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와 같은 거예요. 자성 청정한 본래 마음이나,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이나 똑같은 마음이에요. 그런데 같은 마음이지만 차이점은, 번뇌 망상은 반드시 고통을 갖다 주고 자성 청정심이 회복 될 때에는 고통이 없는 거예요. 그럼 경계의 바람은 뭘까요. 이것을 진리가 하나인 줄 모르는 무지[무명]라 그럽니다. 이렇게 진리가 하나인 줄 모르면 모든 존재가 경계의 바람이 되어서 나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렇게 되면 고통이 따르는 거죠. 예를 들어서 얘기하면, 여러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귀신이잖아요. 진리가 본래 하나인줄 알고 주객이 없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귀신이 영향을 주겠습니까? 영향 못 주는 거예요. 아무리 귀신이 아니라 귀신 할애비가 와도 안 되고 귀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악마가 와서 뒤흔들어도 아무렇지도 않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계는 못 가니까 귀신이 오면 반응을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몸도 아파지고 자꾸 이상한 쪽으로 가고 굿을 한다, 천도한다, 뭐를 한다, 난리를 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본연의 마음자리를 회복하고 있으면 그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니까 몸이 청정하고, 몸이 청정하면 환경이 청정하고, 시방세계가 청정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귀신이 해코지를 하려고 왔다 하더라도 청정한 마음을 만나면 그로 인해서 그 귀신이 원한을 도리어 버린다는 말이에요. 청정한 마음이 발현될 때는 자비심이 발현되는 겁니다. 자비심이라는 것은 무아, 공을 얘기하기 때문에 역시 청정의 다른 표현이 자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도를 안 하더라도 마음이 열린 수행자에게는 귀신이 오면 다 조복 됩니다. 전부다 마음을 열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대한민국 어느 절도 천도하지 않는 절이 돼야 됩니다. 천도하는 절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누구든지 천도 안할 정도의 경지에 가면 우리는 거의 도인의 경지에 다 간 거예요. 천도가 필요 없는 거예요. 귀신이 해코지하러 왔다가 깨달아서 가니 얼마나 좋냐 이거죠.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죠. 그래서 실제적으로 천도 잘 하는 사람은 법력으로 하기 때문에 요령하나 안 흔들고 목탁 한 번 안치고 천도 잘 하잖아요. 아예 귀신하고 대화도 해서 마음을 돌려놓기도 하고 그러죠. 우리가 본연의 마음을 회복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왜냐하면 귀신의 본질도 자성 청정심이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해도 깨닫지 못하고 그러면 교화를 해야죠. 귀신보다 더 나쁜 상태로 있는 지옥중생들 있잖아요. 지옥에 가더라도 중생 구제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들의 할 일이에요. 그런 능력이 없으면 그런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을 하고 그러는 거죠. ‘이것은 경계와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통달하면’ 경계도 텅 비어 있고, 마음도 텅 비어 있다는 것을 통달하면, ‘마음이라는 청정한 바다가 또한 스스로 공적한 것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텅 비고 고요하다 이거죠.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적하면 어떠한 일도 비추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은 마치 큰바다에 바람이 없으면 해와 달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 화엄경의 뜻은 바로 근기가 익은 사람을 위하여 종자의 업식(業識)이 여래장이 되는 것을 단번에 설파하는 것이다.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적하면 어떠한 일도 비추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도 중요한 말이에요. 본문에 보면 ‘심경구적(心境俱寂) 사무부조(事無不照)’ 이런 말이 있죠. 심경구적(心境俱寂), 마음과 경계가 다 공적하면 사무부조(事無不照), 비추지 않는 게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주관과 객관이 다 비어버린 상태에서 그 모습은 비추지 아니함이 없이 늘 비춘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여기 번역도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공적하면 어떠한 일도 비추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게 되어 있네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심경구적하면 그 모습이 비추는 모습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왜 그렇게 해석이 가능한가 하면, 「종경록」에 보면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마음이 공하고 대상이 공하다 하는 말을 할 때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잘 하고 있거든요. ‘주관이 공하면 객관이 고요하다’, 이렇게도 하고 ‘객관이 비어 있으면 주관도 비어 있다’, 이런 말도 하는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주관이 비추면 객관도 비춘다’ 이런 말을 하고 있거든요. 이것은 주객이 공적하고 주객이 비춘다는 말이거든요. 이것을 쌍적쌍조(雙寂雙照)라 그럽니다. 또는 쌍차쌍조(雙遮雙照), 막을 차(遮)를 쓰는데 주객이 공적하다는 똑같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객이 비춘다는 말이 맞죠. 비유를 들면, 허공은 텅 비어 있죠? 거기에 햇빛이 비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허공에 햇빛이 비치는 것과 같은 거죠. 그래서 ‘어떠한 일도 비추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도 맞지만, ‘마음과 경계가 공적한 그 모습은 비추지 않는 것이 없는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도 번역이 가능하겠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는 두루 편(遍)자를 써서 두루 비춘다, 비추지 않는 것이 없다 해서 편조(遍照)라는 말을 씁니다. 앞에는 ‘보이는 것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지 않으면 비추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말이죠. 이게 주객이 없다는 얘깁니다. 마음이 아주 깨끗하다는 것을 알려면 사물을 볼 때의 마음, 시선이죠. 이 시선을 보게 되면 깨끗한 마음이 드러나요. 보는 것만 그런 게 아니고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느끼는 것, 다 그렇다는 거죠. 마음이 바깥으로 흘러 나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깨끗한 줄을 안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큰바다에 바람이 없으면 해와 달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큰 바다에 경계의 바람이 사라져 버리면 맑고 깨끗하니까 해와 달이 다 비추죠. 결국 그 말은 바다 자체가 비추는 성질이 있다 이 말입니다. 수행해서 체득하는 경계를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구절은 나중에 공부할 때 이러한 경계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거와 비슷하게 표현을 하게 되죠. 「대승기신론」에 보면 마음을 거울이라든지 허공에 비유하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거울에 비유해서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각체(覺體)라는 말을 써가지고 ‘깨달음의 바탕은 마치 거울과 같다’, 그러면서 ‘물체가 거울에 비칠 때 그 물건이 가고 옴이 없다’, 왜? 끄집어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거울에 비치는 물체는 다 실체가 없고 허상이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그거와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거울과 같이 됐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마음에 비치는 모든 존재는 허상으로 나타나는 거죠. 환영(幻影)이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바다가 거울과 같이 비치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실제적으로 수행을 해서 자기 마음이 깨끗하고 청정하고 거울 같이 됐다고 봤을 때 보이는 세계가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을 생각 해 봐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거울이 됐다고 상상을 하고 보이고 들리는 것은 모두 거울에 비치는 영상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꿈같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것을 알 수 있지, 안 그러면 도저히 이해를 못합니다. ‘이 화엄경의 뜻은 바로 근기가 익은 사람을 위하여 종자의 업식(業識)이 여래장이 되는 것을 단번에 설파하는 것이다.’ 여래장은 자성청정심을 얘기 합니다. 그러면 자성청정심이라고 하지 왜 여래장이라고 바꾸어서 썼을까. 감출 장(藏)이라는 장은 가능태(可能態)를 얘기 합니다. 가능태라는 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진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요. 여래장은 세 가지 뜻이 있는데, 법신편만(法身遍滿), 진리의 몸이 삼라만상으로부터 편만(遍滿)되어 있다. 비유를 들자면, 일체 모든 중생이 바로 자궁 안에 태아로 있는 거예요. 자궁은 법신이고 그 안에 중생들이 태아로 있는 겁니다. 이게 법신편만이에요. 두 번째는, 진여무차별(真如無差別)이라 그랬어요. 진여는 차별이 없다, 우리 본래 마음이 참답고 허망하지 않는 것을 얘기합니다. 참답고 허망하지 않아서 바뀌지 않는다, 그걸 진여라 그럽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는 거예요. 이것은 중생의 자궁 속에 부처가 태아로 있는 거예요. 세 번째 의미는, 자궁 속에 있는 중생 씨앗이 언제든지 세상에 태어나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얘기 하는 겁니다. 그것을 종성(種性)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결국 여래장, 이 감출 장(藏)자는 가능태(可能態)를 얘기하는 거죠. 자성청정심이라는 것이 어떤 고정된 물건이라든지 실체라든지,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활발발한 거예요. 어려운 얘기를 좀 해볼까요? 그래서 이 자성청정심이라는 것이 어떻게 작용을 하느냐. 『원각경』 ‘문수보살장’에 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인지법행(因地法行)이라는 얘기가 있어요. 인지(因地)라는 것은 원인의 땅이죠. 여기서 지(地)라는 것은 마음을 얘기 합니다. 법행(法行)은 법의 움직임을 얘기하는 거예요. 작용입니다. 인지법행이라는 말을 쓰는데, 사실은 우리 본연의 마음자리가 자성청정심이거든요. 이 자성청정심이 중생의 괴로움을 만나게 되면 그 괴로움이 자성청정심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 자신도 자성청정심이고 삼라만상 우주도 다 자성청정심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사는 중생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죠. 여러분들이 지금 유식 강의를 듣는 것도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발로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자성청정심이 중생이 괴로움을 만나게 되면 중생의 고통을 없애려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때 제일 먼저 생기는 마음이 인지법행(因地法行)입니다. 인지(因地)는 출발하는 마음이고 결과는 과지(果地)라 그러는데, 바로 부처죠. 그래서 자성청정심이 중생의 고통을 없애려고 마음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것이 인지법행이에요. 법행(法行), 법은 원인과 조건이 만나서 생기는 현상이라 그랬죠. 그래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 법행입니다. 이렇게 첫 마음이 일어나서 번뇌, 고통을 없애가는 거예요. 수행의 출발은 자성청정심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출발해서 번뇌 망상을 인지법행을 통해서 다 없애면 인지(因地)가 원인이 익어서 결과가 오는 과지(果地), 부처로 바뀌고 이렇게 되면 다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자성청정심에서 나와 가지고 자성청정심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이 자성청정심을 깨달음, 원각(圓覺)이라 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것입니다. 수행을 왜 하느냐하면 저절로 고통을 없애고자하는 마음이 일어나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대로 법문을 듣고 스승을 잘 만나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헤매지 않고 인지법행이 잘 작동을 해서 과지를 얻어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데, 그렇지 않으면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확실히 있어서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사이비수행을 하기도 하고 삿된 스승을 만나가지고 헤매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시간만 허비하고 다음 생에도 또 잘못 된 인연으로 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선근(善根)을 심고 바른 견해를 길러야 됩니다. 착한뿌리, 선근을 심으려면 불보살이나 깨달은 자나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려야 돼요. 그렇게 해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좋은 인연을 맺으면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법문을 듣게 되는 거죠. 그런 과정이 전부다 인지법행입니다. 공양올리고 하는 것도 인지법행이에요. 삿된 스승을 만나서 잘못된 법문을 듣는 것도 인지법행의 한 과정이에요. 그렇게 수행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래장을 회복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종자의 업식(業識)이 여래장이 되는 것을 단번에 설파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죠. 업식은 아뢰야식을 얘기 합니다. 그리고 종자라는 말을 쓰는데, 보고 듣고 하는 모든 정보가 마음[아뢰야식]에 저장이 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일체종자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일체 모든 종자가 함장(含藏)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종자가 있는데, 그 종자는 선한 종자도 있고 나쁜 종자도 있어요. 마음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는 언제든지 경계의 바람이 불기만 하면 튀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계속 만들고 허물고 만들고 허물고, 반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긴다,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현상이 사라진다, 하고 원효스님께서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 이 종자가 사라지는 거죠. 제8지 보살에 가면 저장된 정보가 다 사라지고 제10지 금강유정(金剛喩定)에 도달하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모조리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여래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종자의 업식(業識)이 여래장이 되는 것을 단번에 설파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 하는 겁니다. 여기 ‘단번에 설파한다’는 뜻도 알아야 되는 겁니다. 결국 자성청정심을 붙들면 다 해결 된다 이런 말입니다. 그럼 자성청정심을 붙드는 방법은 뭐냐, 알려 드리겠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즉비(卽非)로 붙든다고 합니다. 어떤 현상이든 바로 즉비(卽非), 곧 바로 부정을 해버립니다. 곧 즉(卽)자 즉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를 말하는 거고, 아닐 비(非)자 비는 부정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를 바로 부정하는 게 즉비에요. 그러니까 현재 의식이 늘 깨어 있는 상태를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말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이름이 세계다’ 여기에 핵심이 즉비가 들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즉비가 지혜가 되는 거죠. 모든 것은 꿈과 같이 환영과 같이 그렇게 보면, 과거, 미래, 유, 무가 다 부정되는 거죠. 그렇게 보는 것을 지혜라 하고, 다른 말로 즉비라 그럽니다. 그러면 꿈같고 환영 같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에요? 공이죠 공. 그래서 자성청정심을 붙들려면 마음과 경계가 다 같이 공적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늘 비춤이 있는데 그게 자성청정심이다, 그걸 얘기 하고 있는 거죠. 앞부분에 ‘경계와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통달하면’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핵심을 잡는 거예요. 핵심 잡는 방법을 아셨죠? 그래서 마음이 공하고 경계가 공하다, 이게 핵심이에요. 『금강경』에서 얘기하지 않는 부분이 공하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그게 자기 마음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이 마음이다’ 그러는 겁니다. 그게 여기서 얘기하고자하는 유식(唯識)이에요. 정리하면, ‘모든 것이 마음이다’ 이게 핵심인데, 핵심만 잡으면 된다, 그렇게 알려면 마음과 경계가 공적함을 통달해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공부 어려웠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