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唯識講義

『唯識』- 모든 것이 마음이다 (강의 - 3. 의식 속에는 자성청정심이 같이 흐른다)

경호... 2011. 10. 1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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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宗鏡錄의 冥樞會要의 唯識부분 - (원순 번역)
      모든 것이 마음이다 (강의 - 3) 이 『화엄경』의 뜻은 『해심밀경』의 뜻과는 다르다. 『해심밀경』은 따로 아홉 가지 식을 세워 점차적으로 초심자를 이끌어 남아 있는 번뇌를 보리심으로 기르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화엄경』의 뜻은 마음을 공(空)에다 심기 위한 것도 아니며 또한 마음을 적멸한 공에 떨어뜨려 깨달음의 종자가 사라지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해심밀경』은 따로 아홉 가지 식을 세워 점차적으로 초심자를 이끌어 남아 있는 번뇌를 보리심으로 기르도록 하기 때문이다.' 여기 ‘남아 있는 번뇌를’에서 번뇌를 미혹으로 고치십시오. 번뇌하고 미혹하고는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미혹(迷惑)이라는 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한다든지 없는 것을 있다고 고집하는 걸 말합니다. 과거는 지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데도 과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미래는 오지 않았는데도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부다 미혹입니다. 현재 매 순간 변하는 이 순간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번뇌(煩惱)에서 번(煩)은 불 화(火)변에 머리 수(首)자에요. 머리가 불이 나는 것같이 괴로운 것을 얘기하죠. 뇌(惱)는 괴로워할 뇌자, 심란(心亂)하고 괴로운 것을 얘기하는데 그러니 조금 다르죠. 그 번뇌 속에는 선, 악이 들어가 있을 수가 있는 거죠. 번뇌보다는 미혹이라는 게 좀 더 근원적인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미혹으로 되어 있습니다. 『화엄경』의 뜻은 바탕을 알아버리면 된다는 것을 얘기 하는데 『해심밀경』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지고 초심자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이 『화엄경』의 뜻은 마음을 공(空)에다 심기 위한 것도 아니며 또한 마음을 적멸한 공에 떨어뜨려 깨달음의 종자가 사라지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본문을 직역 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패종(敗種)과 같이 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얘기하느냐 하면, 패종(敗種)에서 패(敗)는 해친다는 거죠. 종자를 해친다, 폐기처분한다, 이런 말인데 종자는 성문(聲聞)의 종자, 연각(緣覺)의 종자, 보살(菩薩)의 종자, 불(佛) 종자가 있는데, 여기는 패종(敗種)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불(佛) 종자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이 『화엄경』의 뜻은 마음을 공(空)에다 심기 위한 것도 아니며 또한 마음을 적멸한 공에 떨어뜨려 깨달음의 종자가 사라지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마음을 공에다 붙여서 하는 얘기도 아니고 또 마음으로 하여금 적멸과 같이 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도 됩니다. 패종(敗種)을 앞 시간에 공부한 ‘이승(성문 연각)이 식을 멸하고’하는 부분과 같이 붙여서 보면 그런 이해가 가능 합니다. ‘적멸한 공에 떨어뜨려 깨달음의 종자가 사라지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길게 해석하면 뜻은 통하는지 모르지만 헷갈립니다. 그 다음에 『해심밀경』의 뜻은 번뇌에 젖어 있는 초심자가 들어가는 문이다. 『능가경』이나 『유마경』은 바로 번뇌가 갖고 있는 본래의 진실을 직시한 것이다. 『능가경』은 팔식이 여래장이 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유마경』은 몸의 실상을 관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을 관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음을 밝힌 것이다. ‘『해심밀경』의 뜻은 번뇌에 젖어 있는 초심자가 들어가는 문이다. 『능가경』이나 『유마경』은 바로 번뇌가 갖고 있는 본래의 진실을 직시한 것이다.’ 여기서도 ‘번뇌’를 ‘미혹’이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능가경』은 팔식이 여래장이 되는 것을 밝힌 것이다.’ 팔식이라는 것은 시각부터 아뢰야식 까지 여덟 가지 식을 얘기하죠. 여래장은 진여를 얘기하는데 이 말은 식을 전화해서 지혜를 얻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유마경』은 몸의 실상을 관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을 관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음을 밝힌 것이다.’ 몸의 실상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말은 『유마경』에 보면 유마거사가 일부러 몸 저 눕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 십대제자라든지 보살들이 문병 오게 하는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몸 저 누워서 문병 온 사람들을 붙들고 몸에 대한 법문을 해주는 게 『유마경』이에요. 유마거사가 일부러 병든 체 하는 거죠. 그래서 ‘몸의 실상을 관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을 관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음을 밝힌 것이다.’는 것은 『유마경』에 그런 내용이 있어서 하는 얘기에요. 『화엄경』은 부처되는 길을 잘 얘기 해주는 것이지 적멸에 머물게 하는 얘기는 아니거든요. 부처되는 길을 제시하는 게 『화엄경』만 그러냐 하면 알고 보면 『유마경』이나 『능가경』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해심밀경』은 대승경전이니까 부처를 지향하는 것이 똑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래장(如來藏)을 지난 시간에도 한 번 설명을 했는데, 여기서 장(藏)에는 뜻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법신편만(法身遍滿), 진리의 몸이 삼라만상으로부터 편만(遍滿)되어 있다는 거죠. 쉽게 말해서 여래의 자궁 속에 중생이 있는 것을 얘기 합니다. 두 번째는, 진여무차별(真如無差別)이라 그랬어요. 진여는 차별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은 성인의 진여나 중생의 진여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생도 언젠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얘기를 하죠. 이것을 비유하면 중생의 자궁 속에 태아로 여래가 있다는 겁니다. 세 번째 종성(種性)은 씨앗을 말하는데 부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 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팔식이 여래장이 되는 것을 밝힌 것이다.’라는 것은 여덟 개의 마음은 그 바탕이 진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법을 알아듣고 마음을 돌릴 수 있다 이거죠. 우리는 보통 ‘의식’이 나쁜 놈이니까 의식을 없애야 된다고 하지만 의식 속에는 자성청정심이 같이 작용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여래장이 같이 작용을 해요. 그래서 누가 법의 말이라든지 진리의 말을 한 마디 탁 일러주면 그것이 격발이 되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주체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그 의식 속에는 자성청정심이 같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말을 알아듣고 마음을 바꿀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오염된 이 마음은 항상 자성청정심하고 같이 흐른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시절인연만 만나면 깨달음이 올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팔식이 여래장이 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생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살지만 어떻게 성인이 되고, 성문, 연각, 보살이나 부처가 될 수 있느냐, 이렇게 자괴감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바탕은 불보살하고 똑같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이런 얘기를 밝히는 거죠. 이렇게 될 수 있는 포인트는 마음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화엄경』에 보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또는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러니까 처음 마음을 낼 때가 바로 정각을 이룬다, 이랬거든요. 처음 마음을 내는 게 ‘첫 마음’이라면 정각은 ‘끝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처음과 끝이 하나로 통하는 게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만 바꾸면 다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 바꾸는 게 쉬운 게 아니라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방법이 등장을 하는 겁니다. 기도해가지고는 조금 영향 주다 말지, 완벽하게 마음을 못 바꿉니다. 안돼요. 관상이나 염불해가지고는 마음이 안 바뀝니다. 조금 바뀌다 말아요. 그래서 마음을 바꾸려면 법문을 들어야 됩니다. 법문이 지혜를 얘기하는 거거든요. 법문 듣는 것은 위빠사나에 속합니다. 위빠사나를 해야 만이 마음이 확실히 바뀌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무지는 지혜에 의해서만 사라진다는 거죠. 그 지혜는 위빠사나를 해야 되는데, 거기에는 법문 듣는 게 있고, 법을 사유하는 게 들어가 있고, 법을 관조하는 게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이게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이고 달마스님은 법을 보라고 하지 않고 마음을 관하라, ‘관심일법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 ‘마음을 관찰하는 한 가지가 모든 수행을 다 포함한다’ 이랬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쳐준 방법은 관법(觀法)인데, 달마스님은 관심(觀心)이에요. 법하고 마음은 다른 것 같아도 황벽(黃檗)선사의 전심법요(傳心法要)에 보면 ‘차법즉심(此法卽心) 심외무법(心外無法) 차심즉법(此心卽法) 법외무심(法外無心)’ ‘이법은 곧 마음이므로 마음 밖에 법 없고, 이 마음은 곧 법이므로 법 밖에 마음 없다.’ 법과 마음이 같은 걸 얘기합니다. 법의 본질이 법성이고 마음의 본질이 심성이죠. 그래서 후대에 그 본질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간화(看話)가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간화는 화두를, 화두는 성품을 얘기 합니다. 성품을 보게 한다, 알고 보면 관법(觀法), 관심(觀心), 간화(看話), 이 세 가지는 같은 겁니다. 공연히 조사스님이 말하는 것은 높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낮다고 하는 사람은 시궁창에 있는 오물을 뒤집어써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식하면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줄기가 나왔는데 부처님을 낮게 보고 부정하면 되겠어요? 그건 조심해야 됩니다. 다음에 그러므로 『유마경』과 『능가경』에서 하는 소리가 같다. 그러나 『해심밀경』의 뜻은 이 두 가지 경에서 말하는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어머니 태 속에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늙거나 젊거나, 삶을 도와 어느 곳에 머무르나, 색(色)이든 공(空)이든, 성(性)이든 상(相)이든 간에, 이 모든 것은 자기의 마음이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 이게 결론적인 얘기에요. 다 마음이에요. 마음이라는 것은 육체와 상대되는 마음이 아니고 물질과 상대되는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그럼 뭐가 마음이냐. 여러분은 저를 알고 저는 여러분을 알고 있죠? 그러면 여러분하고 저하고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앎은 마음이니까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죠. 이 앎은 관계를 가지고 있죠. 그래서 연결되는 것을 앎이라 그럽니다. 내가 안다 그러면 그냥 아는 게 아니고 눈과 형색이 만나면 시각이 생기고, 귀와 소리가 만나면 청각이 생기듯이 마음은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질이지 마음자체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거죠. 그래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마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것을 다른 말로 연기다, 연기가 마음이다, 이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