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화장지와 기차와 행복

경호... 2009. 1. 23. 13:36


나는 인도의 뭄바이 거리에 서 있었다. 10월이었지만 날은 여전히 무더웠다. 나는 공중수도에서 얼굴을 닦기 위해 멈춰 섰다. 인도는 더운 나라라서 도심의 거리에는 공중수도가 흔히 눈에 띈다. 나는 배낭을 옆에다 내려놓고 수도꼬지를 틀려고 몸을 숙였다. 그때였다. 한 인도인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내 배낭을 뒤적이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배낭 안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꺼내더니 한 손에다 마구 휘감아 가져가는 것이었다. 화장지의 주인인 내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서 어이가 없었다. 인도는 화장지가 귀한 나라이고 화장실에서도 물로  뒷처리를 하는 관습 때문에 많은 부피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그 두툼한 두루마리 화장지를 가방에 넣어갖고 다녔던 것이다. 처음에 나는 그를 정신이상자쯤으로 여겼으나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 화장지는 내 물건인데 왜 함부로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인도인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게 왜 네 꺼냐? 네가 잠시 갖고 있는 것이지.”

아열대의 뜨거운 태양 때문이었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약간 현기증이 났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그 속으로 바람이 들어온 듯했다. 그 동안 나는 그런 비슷한 말을 명상서적에서 많이 읽었었다. 이 화장지는 네 것이 아니다. 네가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네 것이 될 수 없다. 네 것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평범한 인도인 남자가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자 왠지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물이 쏟아져 나오는 공중수도 옆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인도인 남자는 내 화장지를 손에 감은 채로 멀리 가버렸다. 나는 약간 화가 나기도 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 그래, 다 가져가라.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잠시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까 다 가져가라구.”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나머지 화장지를 또 다른 인도인에게 빼앗기기 전에 얼른 배낭 안에 감춰버렸다. 어쨌든 화장지가 내 배낭 안에 있는 한 그것은 내 꺼였다.  며칠 뒤 나는 뭄바이에서 아그라로 가는 2등칸 열차 안에 있었다. 40시간 정도  걸리는 긴 여정이었기에 나는 기차표 파는 여자에게 볼펜을 선물하면서까지 어렵사리 좌석표를 구했다. 좌석은 세 명이 앉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두 좌석이 마주보고 있어서 앞쪽의자에도 세 사람이 앉고 내 자리에도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이 앉았다. 나 말고는 모두 인도인이었다. 터번을 두른, 독수리 같은 인상의 시크교인도 있었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줄곧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차는 한밤의 누추한 정거장을 느릿느릿 빠져 나갔다.


조금 가서 어떤 인도인 남자가 우리 좌석으로 다가오더니 엉덩이를 들이밀고 끼여앉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당연히 자기 자리인 것처럼 좌석 한켠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자리엔 네 명이 앉게 되었고 당연히 내 자리는 비좁아졌다. 두세 정거장을 지나가자 또다른 남자가 다가와 우리 좌석에 끼여앉았다. 그 역시 아무런 양해의 말도 없었다. 세 명이 앉게 되어있는 좌석에 다섯 명이 앉았고, 내 자리는 형편없이 좁아졌다. 기차가 뭄바이를 떠난 지 두 시간밖에 안 지났으니 아직 서른여덟시간의 긴 여정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자리가 좁아져서 좌석 등받이에 등을 기댈 수조차 없었다. 나는 잔뜩 구부린 자세로 차창에 얼굴을 부벼대야만 했다. 그러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잠결에 피곤을 느낀 나는 습관적으로 좌석 등받이에 등을 기대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떤 것이 걸리적거려서 눈이 떠졌다. 놀라서 뒤돌아보니 좌석 등받이와 내 등 사이의 좁은 공간에 또 다른 인도인 남자가 와서 턱하니 걸터앉아 있었다. 정말 상식밖의 행동이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불편한 자세로 서른다섯 시간을 더 여행하느니 차라리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나았다. 화가 난 나는 벌떡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서 내 좌석표를 꺼냈다. 그리고는 좌석표도 없이 무례하게 끼여앉은 인도인들에게 일일이 보여주며 소리쳤다. “이 자리는 내 자립니다. 이 표를 보세요. 여긴 내 자리라구요. 그러니 당신들은 다른 데로 가시오. 여긴 내 자리니까 내가 앉을 겁니다.” 그러자 그 중의 한 남자가, 외모로 보아 쉰 살 정도 돼 보이는 평범한 남자가 나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넌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 자리를 너의 자리라고 주장하는가? 이 자린 네가 잠시 앉았다가 떠날 자리가 아닌가? 넌 영원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인가?”


또다시 훅하고 뜨거운 바람 같은 것이, 현기증 같은 것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기차표 한 장을 사 갖고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가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잠시 앉았다가 떠나갈 자리를 놓고 나는 왜 어리석게 내 자리라고 소리높여 주장한단 말인가. 세 번째로 내가 머릿속 뜨거운 바람을 체험한 것은 올드델리의 거리에서 물건을 살 때였다. 히말라야 산중 마을들은 한 해의 절반 정도가 폭설로 길이 차단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주민들은 주로 은공예나 자수 등 수공예품을 만든다. 나는 뉴델리 옆의 올드델리의 거리에서 그 수공예품들을 발견하고 반가움이 일어 몇 개를 사고자 했다. 내가 다가가서 물건값을 묻자 인도인 청년은 우선 내 얼굴부터 살폈다. 내가 초보 여행자인가 아닌가를 살피는 눈치였다. 그러다니 그는 1천 루피라는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다. 우리 돈으로 3만 원에 해당하는 실로 거금이었다. 아마도 나를 돈 많은 일본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초보 여행자가 아니었다. 나는 인도인 청년을 째려보며 “1백 루피!”하고 값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얼른 “150루피!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방금 전에 1천 루피라고 했다가 금방 150루피로 값을 내리면서도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나는 이번에는 더 값을 내려 70루피를 불렀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110루피를 외쳤다. 남는 게 없어 그 이하로는 도저히 깎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흥정을 계속한 결과 마침내 나는 그 물건들을 모두 합해 70루피에 살 수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의 영리함에 스스로 뿌듯했다. 1천 루피를 부른 것을 70루피에 사다니! 이것은 후일의 여행담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물건 값으로 70루피를 받은 인도인 청년은 종이에 물건을 싸서 내게 내밀었었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기분이 좋아서 돌아섰다. 그때였다. 내 등 뒤에 대고 그 청년이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 유 해피?”

너 행복한가? 그런 뜻이었다. 물건을 그렇게 싸게 사서 넌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고 그 행복은 얼마나 오래 갈 행복인가? 그런 뜻이었다. 순간 나는 현기증이 일어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다시금 뜨거운 바람 같은 것이 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이었다. 나는 돌아서서 인도인 청년에게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반문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하지만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문제다.” 인도인 청년은 말을 마치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 앞에서 감히 내 자신이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다. 내 영리함을 한껏 발휘해 물건을 이토록 싸게 샀으니 참으로 행복하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많은 여행을 하고 많은 가르침을 접했지만 나는 인도에서의 이 세 가지 체험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머릿속으로 훅하고 불어들어온 뜨거운 바람 때문에 한동안 내가 나 같지 않았고, 내 삶이 내 삶인 것 같지 않았다. 어느 곳을 갈 때나, 어떤 것을 수중에 넣었을 때나, 그 말들이 내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류시화 산문집 <달새는 달만 생각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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