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구두가 없어도 인도에 갈 수 있다.

경호... 2009. 1. 21. 11:08

대학교 3학년 때 나는 문리대학 안에 <나다>라는 이름의 연극부를 만들었다. ‘나다’는 스페인어로 ‘무’라는 뜻이다. 연극부에서 나는 주로 연출을 맡았고, 무대에 올린 작품은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부조리극 들이었다.

한번은  연극 공연 중에 어떤 남학생이 무대 뒤로 날 찾아왔다. 그는 히피처럼 장발을 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대뜸 나더러 학교를 때려치우고 인도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우리는 소극장이 있는 학생회관2층 베란다에서 잠시 얘길 나눴다. “인도엔 왜?” 성지 순례라도 떠나고 싶은 거야?“ 내가 묻자 초면의 남학생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사라지는 거야. 인도의 뒷골목으로 사라지러 가는 것이지.” 그때 웬지 그  ‘인도의 뒷골목’이란 말이 내 귀에 크게 울렸다. 그 친구와 헤어져 나는 곧 무대 뒤의 연출석으로 돌아갔고, 학교를 계속 다녀 대학을 졸업했으며, 몇 군데 직장을 다니기도 했다. 도중에 <나다>라는 제목의 카페를 만들어 이상한 고전음악과 인도음악 같은 것에 파묻혀 지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깡마르고 앞니가 벌어진 친구는 정말로 인도의 뒷골목으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다신 연락이 없었다.


나 또한 슬슬 인도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세상이 자꾸만 날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만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올해엔 반드시 인도로 사라지는 거야, 뒷골목으로 말야,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나 난 떠나지 않았다. 자꾸만 미뤘다. 이 지구의 동식물들 중에서 ‘미루는 것’을 발명한 것은 인간뿐이다. 어떤 나무도, 동물도 미루지 않는다. 인간만이 미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편의 충격적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했다. 폴란드의 한 유태인 마을에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자식을 키웠으며, 가축들을 돌봤다. 그런데 그들 각자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죽기 전에 성지 순례를 한번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여 앉으면 입버릇처럼 말했다. “올해는 꼭 성지 순례를 다녀와야지. 더 나이 먹기 전에 다녀와야겠어.” 그러면서 그들 각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 집 소가 새끼를 낳으면 꼭 가야지. 소가 배가 잔뜩 불러갖고 있으니 떠날 수가 있어야지.” “ 난 신고 갈 구두가 없단 말야. 구두만 사면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꼭 가겠어.” 또다른 사람은 말했다. “ 난 성지 순례를 가면서 그냥 갈 순 없어. 멋진 노래를 부르면서 가야지. 그런데 내 기타가 줄이 끊어졌단 말야. 기타줄만 갈면 떠나야지.” 그렇게 이유를 대면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성지 순례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독일군이 마을에 쳐들어왔다. 마을의 유태인들은 모두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야만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은 발가벗기운 채 가스실로 향하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집 소가 계속 새끼를 낳았는데도 난 성지 순례를 떠나지 않았어. 그때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어.” “난 구도가 없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지. 고무신을 신고서도 갈 수 있었는데 말야.” 음악가는 말했다. “난 기타 핑계를 댔지. 기타줄이 없으면 성지 순례가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어. 그냥 노래만 부르면서 갈 수도 있었거든.” 그들은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그때 갔어야 하는 건데! 이미 때는 늦었어!” 그들의 말처럼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가스실 문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영화가 끝이 났다. 관객들이 다 나간 뒤에도 나는 한참을 혼자서 앉아 있었다. 영화관을 나온 뒤 난 곧바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고, 1주일 되 밤 열두 시에 인도 뭄바이 공항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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