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오렌지 세알

경호... 2009. 1. 20. 00:43

처음에 나는 대참사가 일어난 줄만 알았다. 지진과 화재와 폭우가 그 도시를 무참히 유린한 것만 같았다. 호텔들은 무너지고, 불에 타거나, 홍수에 떠내려가고 없었다. 구월도 어느덧 중순에 접어들 무렵, 나는 인도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유산으로 일컬어지는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북인도 아그라 시에 도착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지만 기차역은관광객과 쿨리(짐꾼), 여행자들, 손님을 끌기 위해 고함치는 릭샤꾼들과 호텔 호객꾼들로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저녁나절에 도착하기로 된 기차가 다섯 시간이나 연착하는 바람에 밤늦게 도착한 것이다. 나 같은 여행자로선 무엇보다 숙소를 정하는 일이 급했다. 내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백 명이 넘는 릭샤꾼과 호텔 호객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싸구려 여인숙으로 데려가서는 턱없이 비싼 방값을 요구하는 게 그들이었다. 이미 인도 여행을 몇 차례나 다닌 나였기에 이제는 어떤 사기꾼에게도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인간이 만든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꼽히는 타지마할 때문에 아그라에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발길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도에서 호객꾼들의 등쌀이 가장 심한 곳도 바로 아그라이다. 호객꾼들은 이제 수법이 다양해져서, 멋진 옷에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에서 우연히 아는 체를 한다. 그리고는 학생이나 은행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외국의 여러 나라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마침내 그들이 기꺼이 초대하는 ‘우리 집’에 따라가 보면 그곳은 영락없이 기념품 가게이다. 그들은 으레껏 그곳이 자신의 삼촌이나 형님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소개를 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는 이미 그런 얕은 수작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덧 인도여행에 도가 텄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바였기에 나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호객꾼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의 깊은 시선으로 적당한 인물을 찾았다. 나로선 내 명령에 따라 충실히 내가 원하는 호텔로 데려다줄 어리숙한 릭샤 운전사가 필요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푼 줍쇼!”를 외치는 걸인들까지 떼어놓고 무사히 역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곳에 마침내 내가 찾던 인물이 눈에 띄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자신감이 결여돼 있고, 왠지 서툴러 보이는 릭샤꾼이었다. 그는 감히 고참들을 따라 플랫폼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역 건물 밖에서 혼자 서성대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한테 차례가 올 리도 없었다. 바로 내가 바라던 그런 친구가 아닌가! 나는 손을 번쩍 들고서 잔뜩 권위 있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이다르 아이예(이리 오게)! 컴 히어!”


그는 대번에 총알처럼 달려왔다. 함박웃음을 짓는 그에게 나는 자선을 베풀듯 배낭을 건넸다. 그는 꿈벅 죽는 시늉을 하며 배낭을 릭샤에 실었다. 나는 그에게 대뜸 이름부터 물었다. 식민지 시절의 영국 신사처럼 미리부터 제압을 하고 들어가자는 속셈이었다. 릭샤꾼은 연신 굽신거리며 자신의 이름이 ‘인드라’라고 했다. 인드라는 가장 높은 하늘에 산다는 최고의 신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인도 최고의 신의 이름을 가진 릭샤 운전사와 함께 아그라의 밤 여행이 시작되었다. 릭샤는 부릉거리며 아그라 역을 등지고 타즈간지 구역으로 향했다. 타즈 간지는 타지마할과도 가깝고, 배낭 여행자들을 위한 값싼 여인숙과 게스트 하우스들이 많은 동네다. 인드라는 영어도 서툴고 운전도 서툴렀다. 그런 서툰 점이 나는 맘에 들었다. 인드라는 타즈간지의 어느 호텔로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난내 책자에 줄을 그어 놓은 대로, 가장 값싸고 깨끗한 샨티 로찌 여인숙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인드라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샨티 로찌 여인숙은 보름 전쯤에 무너져버렸다는 것이었다. 부실공사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붕괴해버렸고, 많은 인명 피해까지 났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하자, 인드라는 이곳은 인도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인도의 건물들이 오죽하겠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나는 여행 도중에 인도인들이 개미떼처럼 모여서 건물을 짓는 것을 여러 차례 구경한 적이 있었다. 도구라고는 세숫대야 같은 걸로 자갈과 모래를 져 나르는데, 건축과정이 어찌나 허술한지 도무지 건물이 설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가고자 하는 여인숙이 보름 전쯤 붕괴해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시금 이곳이 인도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나는 가이드 북을 펴낸 출판사에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두 번째 후보로 점찍어 둔 싯달타 호텔을 떠올렸다. 싯달타 호텔로 가자는 나의 말에 인드라는 아까보다 더 크게 놀랐다. 그곳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싯달타 호텔은 한 달 전쯤에 화재가 나서 전소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계 최고의 여행 가이드 책자에서 가장 좋은 싸구려 숙박시설이라고 소개한 두 여인숙이 건물 붕괴와 화재로 한꺼번에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릭샤 운전사 인드라는 인도의 숙박시설에 화재 경보 장치나 소화기 시설이 제대로 돼 있겠느냐며 나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릭샤는 안개와 어둠에 가려진 아그라 시내를 붕붕거리며 달려갔다. 나는 마지막 후보로 선정해 둔 타지케마 호텔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은 인도 정부가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시설은 우수하지 않지만 아침에 타지마할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아열대의 새벽 공기 속에서 세계 최고의 전축물인 타지마할을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이었다. 더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주저없이 인드라에게 타지케마 호텔로 갈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인드라는 달리는 릭샤에서 떨어질 것처럼  펄쩍 놀라며 그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또다시 불길한 말을 듣게 될까봐 걱정이 된 나는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인드라는 차마 말하기가 미안하다는 듯이 머뭇거리다가, 타지케마 호텔은 지난여름의 우기 때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 버렸다고 말했다. 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인도의 장마는 유명하지 않느냐는 인드라의 설명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하기야 바라나시의 역사적인 건축물들도 장마비에 떠내려가는 판이니, 이해가 안 가는 일도 아니었다. 마치 도시 전체에 대참사가 일어난 것만 같았다. 무너지고, 불타고, 떠내려가다니! 이런 도시에 여행을 온 나 자신이 한심했다. 타지마할은 안전한지 그것조차 의심이 갔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여행자 신세였다. 어디선가 하룻밤 잠을 정해야만 했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노숙을 시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침울해진 내 마음을 인드라가 서툰 영어로 위로했다.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며,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인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마침내 인드라는 자기가 아는 호텔이 한 군데 있는데, 타지마할도 잘 보이고 방마다 목욕탕까지 딸린 곳이니까 그곳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그곳은 자기의 삼촌이 운영하는 호텔이라서 잘하면 값도 깎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삼촌이 운영한다는 말에 얼핏 의심이 갔지만, 이미 늦은 밤 시간이라서 릭샤 왈라를 붙들고 왈가왈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인드라는 한껏 속력을 내어 밤안개 속을 내달렸다. 마침내 나는 릭샤 왈라가 소개한 누추한 여인숙에 도착했다. 콧수염을 기른 주인 남자는 미소로 날 맞았으며, 인드라가 거들어준 덕분에 숙박비도 약간 깎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인 남자가 인드라의 삼촌인 것 같지는 않았다 생긴 모습이 영 딴판이었다. 나는 서둘러  짐을 풀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내가 자고 있는 여인숙이 강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장면에 기겁을 하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셔서 더 이상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나는 세수를 하고 나서 배낭에 든 오렌지 세 알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을 먹기 전에 먼저 타지마할을 구경하고 싶었다.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다는 말은 순전한 거짓말이었다. 길을 물어가며 한 시간도 넘게 걸었을 때야 비로소 타지마할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었다. 우유 넣은 차와 바나나를 파는 노점상들이 군데군데 늘어서 있고, 비디오 카메라를 든 단체 관광객들이 거리 풍경을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타지마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거리에 선 채로 호주머니에서 오렌지를 꺼냈다. 인도의 오렌지는 볼품은 없지만 맛이 있다. 한가로이 서서 오렌지 껍질을 벗기고 있는데, 문득 내 시야에 호텔 싯달타의 간판이 들어왔다. 어젯밤 내가 가고자 했던 바로 그 호텔이 아닌가! 릭샤 운전사 인드라는 분명히 싯달타 호텔이 화재로 홀랑 타버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멍한 기분으로 싯달타 호텔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오렌지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지나가던 소가 얼른 그것을 집어삼켰다. 싯달타 호텔에서 서양인 남녀 여행자가 똑같은 선그라스를 끼고서 즐겁게 걸어 나왔다. 순진한 릭샤 왈라에게 당한 것이다. 심사숙고해서 어리석해 뵈는 친구를 골랐는데, 멋지게 나를 속여넘긴 것이다. 대단한 친구다. 멀쩡하게 잘 있는 호텔을 한 달 전에 불타버렸다고 거짓말을 하다니! 나는 근처에 있는 샨티 로찌 호텔도 확인했다. 폭삭 무너지기는커녕 어떤 곳보다 많은 여행자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나는 더 기분이 나빠져서 또다시 오렌지 하나를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홍수에 떠내려갔다는, 인도 정부가 운영하는 타지케마 호텔도 타지마할 오른편에 멀쩡하게 서 있었으며, 역시 전망으로 따지자면 최고의 위치였다. 몇 푼 커미션을 벌기 위해 엉터리 거짓말을 해대고 나를 다른 호텔로 데려갔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면 백일하에 드러날 거짓말을 하다니! 그날 아침나절을 나는 타지마할 을 구경하는 것도 집어치우고 인드라를 찾아 낼 생각으로 사방팔방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마침내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아그라에만 ‘인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릭샤꾼이 쉰 명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인드라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했지만, 결국 내 꾀에 내가 넘어간 셈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정오가 지날 무렵, 나는 인드라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서 마지막 남은 오렌지 한 알을 까먹으며 타지마할을 행해 발길을 돌렸다. 타지마할은 파리의 에펠탑처럼 인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그 아름다움과 신비는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인도를 점령한 모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그의 아내 뭄 타즈는 열네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마지막 열다섯 번째 아이를 낳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샤 자한은 죽은 아내를 추억하기 위해 타지마할이라는 이 역사적인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이기 이전에 타지마할은 예술의 완성품이다. 그것을 짓기 위해 인도 전역과 중앙아시아로부터 2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고, 프랑스 보르도의 건축가 오스틴과 이탈리아 베니스의 건축가 베로네오가 건물의 장식을 담당했다.  주요 건축은 이란의 시라즈 출신의 이사 칸이 맡았다. 건축은 1631년에 시작되어 1653년에 완성되었다.  어쨌든 타지마할을 구경하게 돼서 나는 행복했다. 마침 보름날이 다가왔으므로, 밤에 다시 와서 구경하기로 했다. 흰 대리석의 타지마할은 보름달 아래서 볼 때 그 미학이 완성된다고 하지 않는가, 밤에 보면 허공에 떠 있는 신비의 궁전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60년 전에 인도인들은 이토록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웠다. 나는 미처 그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릭샤 운전사에게 순진하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세계적인 건축물 타지마할을 세운 이 나라의 건축가들이 아무 이유 없이 폭삭 주저앉거나 홍수에 간단히 떠내려갈 건물을 지을 리 없었다. 서너 번 인도 여행을 한 걸 갖고 마치 인도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만만하던 내게 인드라는 큰 교훈을 심어주었다. 인생역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신이 모든 걸 아는 것처럼 잘난 체하는가.

“신은 자만심에 차 있는 사람과 가장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신을 필요로 하지만, 자만심에 찬 사람은 신 없이도 자신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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