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피리 부는 노인

경호... 2009. 1. 19. 12:13

“집에는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습니다. 먹을 거는 없고, 아내는 작년에 죽었지요.” 피리 하나만 팔아달라고 통사정을 하면서 노인은 가정 사정을 늘어놓았다. 어딜 가나 듣는 얘기였다. 워낙 인도의 피리 음악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잠깐 기웃거렸을 뿐이지 사실 그가 가진 형편없는 대나무 피리들을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내가 관심을 보이자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훌륭한 물건입니다. 인도의 어딜 가도 이런 진짜배기 피리들을 구하긴 어렵지요. 싸게 해드릴 테니 제 사정 좀 봐주세요. 막내아이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답니다.”

나는 그가 하는 거짓말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집세도 못 내서 쫒겨났겠군요.” 그러자 노인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우리 식구는 완전히 거리에 나앉았답니다. 그러니 적선하는 셈치고 하나만 팔아 주세요.” 내가 다시 말했다. “물론 1주일 동안 한 개도 못 팔았겠죠?”   노인은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이 피리들이 좋은 것이긴 해도 누가 사줘야 말이죠. 솔직히 말해 당신처럼 히피 같은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인도 피리 따위를 사려고 하겠습니까?”


노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내 환심을 사려고 피리 하나를 꺼내더니 휘엉청 불어제끼기 시작했다. 피리 장사를 오래 한 때문인지 피리 솜씨는 더없이 훌륭했다. 더구나 갠지스 강의 낙조를 배경으로 허공에 솟구치는 피리 곡조를 들으니 감동이 더했다. 피리 한 개를 팔려고 상투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긴 했으나, 피리를 부는 모습은 더없이 진지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인도 여행 때마다 피리 한두 자루를 꼭  사 들고 돌아오곤 했었다. 하지만 막상 사 갖고 온 피리들은 번번이 너무 형편없어서 제대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파는 사람만 멋들어진 곡조를 낼 수 있을 뿐 나 같은 아마추어는 흉내내기도 어려웠다. 나는 또다시 쓸모없는 피리를 사고 싶지 않아서 노인에게 10루피(300원)정도 적선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10루피짜리를 꺼낸다는 것이 그만 덜렁 1백 루피짜리 종이돈이 나오고 말았다. 내가 아차 하는 사이에 1백 루피는 노인의 재빠른 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인은 종이돈을 꽉 움켜쥔 손을 합장을 하고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아, 이런 고마우실 데가! 신께서 틀림없이 당신을 기억하실 겁니다. 나 또한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연신 합장한 손을 이마 위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이미 때는 늦어서 돌려 달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맥없이 1백 루피를 빼앗긴 터라 속이 쓰렸지만 내색할 수도 없고 해서 억지로 자비스런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더 손해를 보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노인은 몇 걸음 더 쫓아오며 감사 표시를 하다가 내가 그만 됐다고 손짓을 하자 마지막으로 합장을 하고는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노인으로선 뜻밖에 횡재를 한 셈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온 나는 할 일도 없고 해서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녘이 됐는데, 난데없이 피리소리 하나가 내 잠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의식으로, 이 피리소리가 꿈속에서 들리는 건지 창밖에서 들리는 건지 몰라 한참을 그냥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것은 창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눈을 부비며 창문을 열자 베란다 밑에 어제의 그 노인이 피리를 불며 서 있었다. 나를 보더니 그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얼른 또다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가락이 긴, 아침에 듣는 인도 전통의 라가 곡이었다. 나는 순간 기가 막혀서 창문을 도로 닫았다. 어제 1백 루피를 빼앗아가더니 이제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흥정을 붙이고 있었다. 그래서는 금방 쪼개져버릴 피리를 떠넘기고 또다시 거금을 우려낼 계획이었다. 나는 고약한 노인네 때문에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창문을 닫은 뒤에도 피리소리는 멎지 않았다. 하는 수작은 미워도 피리 부는 솜씨는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일러서 보낼 생각으로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합장을 하며 내게 아침 인사를 했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보시오. 어제 그만큼 돈을 줬으면 됐지 왜 또 와서 이러는 거요? 난 분명히 말하지만 피리를 살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어서 기시오.” 그러나 노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나는 더 엄숙하게 소리쳤다. “아니긴 뭐가 아녜요? 어서가세요. 더 이상 내게서 뭘 뜯어낼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노인이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난 당신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당신의 방 앞에 와서 피리를 불어주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도움을 주었으니까요. 난 그것 말고는 당신한테 해줄 것이 없거든요.” 노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서 순간 난 내가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노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돈을 더 우려내려고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내가 준 돈에 고마움을 느껴 뭔가 보답을 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노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것이 곧 밝혀졌다. 그는 내가 그 갠지스 강가에 머무는 닷새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내 방앞에 와서 필릴리 필릴리 피리를 불었다. 피리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면 미명을 헤치고 갠지스 강 위로 오렌지색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노인이 불어주는 피리곡 때문에 나는 날마다 새롭고, 뭔가 다른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다.

마음이 내키지도 않은 상태에서 1백 루피, 약 3천 원 정도를 적선한 덕분에 나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노인은 내게 작은 베풂에도 보답하는 자세를 가르쳤고, 가난하지만 아직은 부유함을 잃지 않은 마음을 전해주었다. 그 노인 덕분에 나는 지금도 잘난 체하며 말한다. 나처럼 인도 여행을 멋지게 한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어떤 국가 원수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과연 아침마다 누군가가 와서 환상적인 피리소리로 잠을 깨워 주었겠느냐고. 내가 알기로 인도 역사상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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