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경호... 2009. 1. 17. 02:33

인도 대륙을 내 집처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병이 나서 호텔방에 쓰러졌다. 이국땅에서 병이 나면 말할 수 없이 두렵고, 외롭고, 아프다. 몸도 아프고 영혼도 아프다.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다 보면 온갖 병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물이다. 오염된 물은 먼저 손톱 주위나 항문에 부스럼이 생기게 하고, 양치질을 한 다음에도 생수로 헹구지 않으면 수돗물 속의 병균이 잇몸을 붓게 만든다. 게다가 인도인들이 아무데서나 수돗물을 들이켜는 걸 보고 흉내를 냈다간 당장 이질이나 설사병에 걸리고 만다. 만일 인도 여행을 다녀온 어떤 사람이 자기는 아무 물이나 마셨어도 괜찮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순전히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인도는 눈에 보이는 풍경마다 가슴이 아려서 도무지 여행할 수가 없는 나라다. 어떤 모임에서 만난 한 여성은 인도에 처음 갔다가 여덟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내내 울었다고 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거지와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도처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한없이 광활한 들판들도 눈물이 번지게 만든다. 만일 인도 여행을 다녀온 어떤 사람이 자기는 인도에서 한 달이나 있었지만 운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를 경계하라. 그는 이미 가슴을 어딘가에 팔아버렸을지도 모르니까.


가이드북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눈물병도 인도에서 걸리는 심각한 풍토병 중 하나다. 물 때문에, 형편없는 음식 때문에, 그리고 가슴팍이 아파오는 병 때문에 나는 고열이 나고 신음까지 하기 시작했다. 낯선 곳이라 의사를 찾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에서 기차를 타고 뉴델리로 왔는데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온몸에 오한이 나고 호흡곤란증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자꾸만 까부라졌다. 겁이 더럭 났다. 이러다가 인도 땅에서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묵은 호텔은 뉴델리 철도역 근처의 파할간지 구역에 있었다. 하룻밤 숙박료가 2천 원 정도로, 아래층에 식당이 딸려 있었지만 밥을 먹으러 갈 기운조차 없었다. 나는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방안에 전화도 없어서 한국의 가족이나 출판사에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난 죽는구나. 그토록 인도에 오려고 난리를 치더니 드디어 인도 땅에서 불귀의 객이 되는구나.”

나는 그렇게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내 이마를 짚어봐도 열이 40도는 넘는 것 같았다. 입술이 말라 자꾸만 껍질이 벗겨졌다. 물이 마시고 싶어도 생수가 없으니 참아야 했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로 열에 들떠 온몸을 떨었다.


정신이 혼미해졌을 때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났다. 어슴푸레한 형체가 침대맡으로 다가오더니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꺼칠했지만 느낌은 부드러웠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 형체는 욕실로 가서 수건에다 물을 축여다가 내 이마에 얹었다. 그리고는 내 귀에다 뭐라고 속삭이고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잠시 후 그 천사는 미네랄 워터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베개로 내 머리를 받쳐 몰을 마시기 편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천장에 설치된 팬을 돌려 방안에 시원한 바람이 돌 게 했다. 침착하고 조용한 행동으로 그는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약간 정신이 들긴 했지만 아직도 온몸을 휘두르는 정체 모를 병 때문에 끙끙 신음소리를 냈다. 그때 그 천사가 다시 내 귓가에 대고 뭐라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처음에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내 귀에 대고 물었다.

“두 유 원트 쉬-?” 쉬-하고 싶은가? 그런 뜻이었다. 어머니의 속삭임과도 같은 그 정겨운 ‘쉬-’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속에 있던 두려움과 고독감이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수없이 들어서 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그 한마디가, 낯선 곳에 병들어 쓰러진 내 영혼을 부드럽게 위로해주었다. 물론 나는 그 천사의 부축을 받아가며 오랫동안 ‘쉬’를 했다. 그것은 어떤 약보다 효과 있는 치료제였다. 그때 나를 치료해준 천사는 그 호텔에서 잡일을 하는 인도 소년 하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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