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음악회장에서

경호... 2009. 1. 15. 13:55

우연히 쑤닐을 만난 것은 점심을 먹으려고 찾아 들어간 뭄바이의 어느 노천 식당에서였다. 쑤닐은 인도의 타악기 타블라를 발아래 내려놓고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옆 테이블에 앉은 나는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와 인도 음악에 대한 얘길 나누게 되었다. 쑤닐은 뭄바이에 있는 사설 음악 학교에서 인도의 북 타블라를 배우는 학생이었다. 나 또한 인도 음악이라고 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온 터였다. 인도 음악을 수집하고 감상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쑤닐과 나는 자리를 합석하고 앉아서 남인도의 카르타닉 음악과 북인도이 힌두스타니 음악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성악가 키쇼리 아몬카르를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연거푸 냉수를 마셔댔다. 쑤닐은 나의 음악 지식에 놀라면서, 마침 그날 저녁에 라비 상카의 시타르 연주회가 있으니 들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너무 흥분해서  물컵을 엎지르고 말았다. 시타르는 인도의 대표적인 현악기이며, 바리 상카라고 하면 시타르의 달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도 최고의 음악가다.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는 바리 상카의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10년 이상 명상 수행을 하는 것보다 라비 상카의 시타르 연주를 한 시간 듣는 것이 더 깊은 명상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대가의 음악을 실제 연주로 듣게 되다니 놀랍고 흥분된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인도 여행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행운이었다. 쑤닐은 자기도 연주회에 갈 예정이니 저녁에 그 식당에서 자기와 만나 함께 가자고 말했다. 연주회는 밤 열 시에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인도는 무더운 나라라서 한밤중에 그런 연주회들이 많이 열린다. 쑤닐은 자기가 연주회 장소로 안내하겠다며 저녁 여덟 시까지 잊지 말고 그 식당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쑤닐이 먼저 식당을 떠난 뒤에도 나는 흥분이 돼 제대로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음반으로만 들어오던 대가의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바리 상카의 음반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계획했던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남은 시간을 뭄바이 해변에서 산책을 하며 보냈다. 아라비아 해의 미풍이 얼굴을 간지럽히고, 산책로에선 인도인들이 코브라에게 피리를 불어대고 있었다. 코브라는 더위에 지쳐선지 피리로 뒤통수를 얻어맞아도 춤을 추려고 하지 않았다. 라비 상카, 키쇼리 아몬카르, 그리고 피리 연주의 대가 하리 프라사드......이들은 음악으로써 내 젊은 영혼을 지배한 이들이었다.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그들의 음악과 목소리가 채워주었던가.


쑤닐과의 약속 시간은 저녁 여덟 시였지만 마음이 급한 나는 일곱 시 반쯤 시내에 있는 그 노천 식당으로 갔다. 물론 쑤닐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망고 주스를 시켜놓고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렸다. 이윽고 여덟 시가 되었다. 그러나 쑤닐은 오지 않았다. 여덟 시 반이 지나고, 아홉 시가 되어도 그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밤 아홉 시가 되어도 그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밤 아홉 시 반이 됐을 때 나는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연주회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쑤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마냥 그를 기다리고 있다간 연주회를 놓칠 것만 같았다. 나는 서둘러 지나가는 릭샤를 잡았다. 쑤닐이 말한 연주회 장소를 댔지만 릭샤 운전사는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내 기억이 틀린 모양이었다. 나는 망설이는 운전사를 재촉해 어떤 뮤직홀이든 유명한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인도 음악의 최고봉인 라비 상카가 싸구려 음악당에서 연주회를 가질 리 없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게 헤맨 끝에 찾아낸 라비 상카의 연주회장은 거창한 예술의 전당이 아닌 어느 고등학교의 넓디넓은 운동장 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연주회가 막 시작된 상태였다. 나는 간신히 연주회장을 찾아낸 것에 기뻐하며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청중이 구름떼처럼 운동장에 운집해 있었다. 나는 가능하면 앞자리에 앉아서 음악을 감상하고 싶었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잘만 부탁하면 귀빈석 자리를 차지한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연주회장 맨 앞줄에 폼을 잡고 앉아 있었다. 다름 아닌 쑤닐이었다. 나와 만나기로 약속을 해놓고선 저 혼자 먼저 와서 좋은 자릴 차지하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태연하게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니! 더구나 나는 이 장소를 찾느라고 말도 통하지 않는 릭샤 운전사를 다그치며 낯선 밤거리를 얼마나 헤맸던가. 그런데도 녀석은 지그시 눈을 감고서 사뭇 감상가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가 난 나는 객석의 앞줄로 걸어가서 녀석의 뒤통수를 한 때 후려갈겼다. 갑자기 일격을 당한 쑤닐은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를 따져 물었다. 녀석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 아아, 그래요.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지요.” 나는 그 말투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아,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지요 라니......, 아무리 인도인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약속을 어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비 상카의 연주회만 아니라면 당장 끌어내 혼을 내고도 싶었다.


내가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쑤닐이 내게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내 잘못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내 잘못을 갖고 자신까지도 잘못된 감정에 휘말리는군요. 그건 어리석은 일 아닌가요?” 그 지적에 놀라서 내가 쑤닐을 돌아보는 순간 띠융띠융 하며 라비 상카의 시타르 음들이 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혼을 때리는 듯한 그 절묘한 가락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쑤닐이 또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건 감정에 휘말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인도 음악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를 리야 없겠지요.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또다시 라비 상카의 긴 손가락이 띠융띠융 하며  현란한 음들을 내 존재 속에다 쏟아부었다. 쑤닐의 지적이 옳기도 했지만, 자꾸만 사람의 혼에 와서 울려대는 시타르의 선율 때문에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날 밤 라비 상카의 시타르 연주회는 현을 조율하는 데만 무려 두 시간이 걸렸다. 청중과 교감이 이루어질 때까지 현을 고르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본 연주가 시작되었다. 본 연주는 악보 없이 열 시간이나 계속돼 아침 열 시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무려 열두 시간이나 걸린 연주회였다.


학교 운동장에 운집한 구름떼 같은 인도인들은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아침이 밝아오고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새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대가의 음악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곳에선 도무지 지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거기 음악을 연주하는 이도 사라지고, 음악을 듣는 이도 사라졌으며, 오직 한 음 한 음만이 남아 허공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 역시 평범한 음악 생도가 아니라 힌두의 철학자다운 내면을 지닌 쑤닐 옆에 앉아 온 존재가 대가의 음악으로 가득 차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참석한 음악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한밤의 열린 음악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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