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누구나 둥근 하늘 밑에 산다.

경호... 2009. 1. 16. 11:03

버스가 어찌나 만원인지 그대로 있다간 질식할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일자 콧수염 기른 인도 남자와 코걸이를 두 개씩이나 한 아줌마가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더 숨 쉬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는 차라리 버스 지붕에 앉아서가는 편이 더 낫다. 그래서 버스가 차이 스톱(차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라고 잠시 정차 하는 것)을 한 틈에 나는 사다리를 타고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그곳에도 이미 열 명이 넘는 인도인들과 닭 몇 마리가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버스 지붕에 올라타고 가다가 간혹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터라서, 나는 지붕 한가운데의 쌀자루 위에 걸터앉았다. 나 말고도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계집아이, 흑염소 두 마리가 버스 지붕 위로 더 올라왔다. 뒤따라 올라온 노랑머리의 서양인 친구는 지붕 위로 쓰윽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건 말도 안 돼!” 하는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내려갔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가 이리저리 곡예를 부려도 지붕위에 탄 사람들은 이골이 났는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당의 평상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런 자세들이었다. 나 혼자만 아래로 굴러 떨어질까봐 쌀자루를 부둥켜안고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지붕 난간에 걸터앉은 청년이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요?” ‘코리아’라고 대답하자, 청년은 내 말을 얼른 옆사람에게 전달했다. 그 사람은 다시 그 옆사람에게 전하고, 마침내 버스 지붕에 올라탄 사람들 전부가 “코리아!”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계집아이도 고개를 끄덕이고, 흑염소 두 마리는 노란 테두리가 있는 눈동자를 뚫어져라고 코리언을 응시했다. 청년은 또 물었다. “인도엔 처음 온 겁니까?” 내가 네 번째라고 대답하자. 다시 똑같은 순서로 지붕 위의 열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들 손가락 네 내가를 펴 보이며 “네번째!” 하고 합창을 했다. 손가락을 펴 보일 수 없는 염소만 부동자세를 한 채로 날 쳐다보았다. 청년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직업이 뭐예요? 뭘 해서 먹고 살아요?” 작가라는 내 대답에 청년이 손바닥에 글씨 쓰는 시늉을 하며 옆사람들에게 전달하자 마침내 모두가 “작가!” 하면서 손바닥에 글씨 쓰는 시늉을 했다. 월수입은 얼마냐? 부모는 살아 계시며, 형제는 몇이냐? 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었느냐? 목에 걸고 있는 그것은 칼이냐, 볼펜이냐? 인도에 오는데 비행기표는 얼마 주고 끊었느냐? 이건 버스 여행이 아니라, 숫제 버스 지붕 위에서 벌어지는 신원조회나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어찌나 호기심이 강한지 단 한차례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내 입에서 나오는 대답에 따라 일제히 탄성을 지르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유채밭도 지나고 다리도 지나면서 히말라야 산 기슭을 꼬불꼬불 달려갔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는 히말라야에서 녹아내린 물이 차갑게 흐르고 있었다.


청년은 또 한 차례 질문을 던졌다. “왜 머리를 길렀지요? 수행자인가요?” 나는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머리를 깎으면 몸이 아파오는 병에 걸렸기 때문” 이라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청년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어렵사리 옆사람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그 사람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그 옆사람에게 복잡하게 설명하고, 그래서 버스 지붕에 탄 사람들 모두가 개구리처럼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노인이 자기도 예전에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을 목격한 적이 있노라고 선언했다. 구자라트 주에 살던 때였는데, 마을에 희귀한 병에 걸린 사람이 둘씩이나 있었다고 했다. 한 사람은 머리를 자르면 삭신이 쑤셔오는 병이고, 또 한 사람은 타인의 병에 대해서 들으면 자기도 똑같은 병을 앓게 되는 이상한 알레르기에 걸린 사람이었다. 누가 배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그 사람도 배가 아프기 시작하는 병이라는 것이었다. 다들 한마디도 놓칠세라 노인의 설명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노인의 얘기에 따르면, 머리를 깎으면 몸이 아픈 사람은 결국 머리 깎는 것을 포기하고 장발을 한 채 걸인이 되어 떠났다고 했다.  휘귀한 알레르기에 걸린 또다른 사람은 누가 위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그도 그만 위암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자기가 그들을 집적 만나본 것은 아니라고 애매하게 덧붙였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수백 년 전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또 한 청년이 자기도 그런 비슷한 증세를 가졌던 남자를 알고 있는데, 그는 자이나교인 이었으며, 너무 예민한 나머지 머리카락이 하나만 빠져도 몸에 기운이 없고 열이 올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장가를 가서 애를 낳았더니 애까지도 비슷한 증세가 있어서 머리를 잔뜩 기른 채로 학교를 보내야만 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머리의 피부가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정신과 신체의 진화 현상’의 일부인 것으로 ‘사료’된다고 청년은 제법 학술적으로 설명했다. 우리보다 진화한 외계인들이 머리카락이 없는 것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노인 옆에 앉은 계집아이까지 참견했다. 자기도 머리를 깎으면 몸이 아파 오는 어떤 남자아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며,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머리를 깎기 싫어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고 정곡을 찔렀다. 그렇게 해서 버스 지붕은 머리를 깎는 것이 과연 인체에 해로운가 아닌가에 대한 의학적이고 신학적인 토론으로 어지러웠다. 아유르 베다(인도의 자연 의학)와 크리쉬나 신이 등장하고, 전설과 신화가 인용되는가 하면, 염소는 난데없이 음메 울고 닭들은 꾸벅꾸벅 졸았다.


순진한 인도 사람들!

푸른색 버스는 그렇게 북인도의 따사로운 햇살 속을 염소와 닭과 손님들을 가득 싣고 털털거리며 달려갔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히말라야, 내 피부에 와 닿는 햇빛, 그리고 버스 지붕 위에 탄 동화나라의 사람들, 그것만으로도 나는 부족함 없이 행복했다. 그 무렵 나는 누군가가 필요했었다. 별일 없이 잘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기에 아무도 내 마음의 구석진 다락방을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그 다락방 속에서 나는 무척이나 외롭고 사람이 그리웠었다.

그날 버스 지붕 위에서 만난 인도인들, 그들이 그 그리움을 구석구석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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