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코코넛 열 개

경호... 2009. 1. 15. 13:47

코코넛 물이 마시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코코넛 파는 리어카가 없었다. 인도 여행에서 물은 필수품이라지만 세포 구석구석까지 여행자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것은 아무래도 코코넛 열매를 따를 수 없다. 열매꼭지를 칼로 툭 쳐내면 그 안에 어떤 청량음료보다도 시원한 물이 꽉 차 있다. 값도 5루피(150원)밖에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인도 여행중에 물보다 코코넛 열매를 즐겨 찾았다. 그런데 두 번째로 찾아온 남인도의 해변 도시 폰디체리엔 코코넛이 없었다.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폰디체리는 인도 출신의 영적 스승 스리 오로빈도가 정신과 물질이 조화된 이상적인 도시를 건설하고자 미라 알파사라는 프랑스의 여성과 힘을 합쳐 세운 도시다. 이 전무후무한 계획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1968년에 인도 대통령과 121개국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프닝 행사가 열렸다. 그 이후 이상주의에 심취한 프랑스와 독일, 영국, 네델란드 등으로부터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스리 오로빈도가 세상을 떠난 뒤 내부 분열이 일어나 이상주의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남인도에 위치한 도시이면서 코코넛이 없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코코넛이 없다면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룬 도시를 만들 수도 없다고 난 생각했다. 그리고 코코넛이 없다면 인도에선 명상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난 생각했다. 아쉬람(명상센터)에 들어가 스리 오로빈도의 무덤 옆에서 명상에 잠기면서도 난 코코넛을 떠올렸다. 코코넛이 없다고 생각하니 갈증이 더 심해졌다. 명상을 하려고 눈을 감으면 내 자신이 커다란 코코넛 열매 속에 들어가 빨대를 물고 앉아 있는 것이 자꾸만 상상되었다. 한때는 이상적인 도시를 꿈꾸었겠지만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아쉬람 안에서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까지 제약을 하고 있었다. 남자 화장실은 소변보는 곳만 있을 뿐 대변보는 곳은 아예 만들어 놓지도 않았다. 대변보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없다는 대답만 무뚝뚝하게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코코넛만 있다면 참을 수도 있었다. 인도인들처럼 해변으로 나가서 볼일을 보면 되니까. 그러나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아열대의 태양을 코코넛 없이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 있을 필요 없이 조만간 폰디체리를 떠나겠다고 생각했다. 코코넛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 가도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연이 그곳에 온 인도인 가족과 합석하게 되었다. 가족을 데리고 모처럼 저녁 외식을 나온 그 집의 가장은 마침 폰디체리 우체국 직원이었다.

우체국 직원은 내게 폰디체리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나는 마침 대화 상대를 만난 터라 잔뜩 흥분해서 이상적인 도시의 허구성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코코넛조차 없는 도시는 인도에 폰디체리 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뜻밖에 우체국 직원은 내 비난 섞인 의견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러냐고 하면서, 저녁을 먹고 난 뒤 가족들을 데리고 밤바다에 놀로 가야겠다고 화제를 돌렸다. 이튿날 아침, 내가 머물고 있는 빅토리아 여인숙으로 누군가 찾아왔다. 문을 열고 나가니 전날 만난 우체국 직원이었다. 뚱뚱한 체구의 그는 상자 하나를 두 팔로 껴안듯이 들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코코넛 열 개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나는 감격해서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순간부터 폰디체리가 맘에 들기 시작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코코넛 상자와 함께 그 우체국 직원을 한참 동안 껴안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날 점심때 나는 여인숙에 투숙한 외국 여행자들과 함께 코코넛 파티를 열었다. 코코넛 속에 든 물을 다 마시고, 그것도 아쉬워 흰 열매 속까지 숟가락으로 파먹었다. 그리고 다 먹은 껍질을 바가지처럼 머리에 얹고 있으니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폰디체리 우체국 직원 덕분에 빅토리아 여인숙의 배낭 여행족 모두가 코코넛  바가지를 하나씩 머리에 쓴 채로 어린애처럼 행복할 수 있었다.

“이상적인 도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들 인간 개개인의 가슴속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가슴을 향해 난 길, 그 길밖에는 이상적인 도시로 가는 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폰디체리 오프닝 연설문에서 스리 오로빈도가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