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영혼의 푸른 버스

경호... 2009. 1. 17. 02:38

라니켓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초만원이었다. 각양각색의 인도인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차 있었다. 10루피(300원)짜리 싸구려 사리 입은 여자와 머리에 터번을 쓴 남자와 오렌지색 누더기를 걸친 수도승이 한 무리로 뒤엉켰다. 그 틈새를 비집고 차장이 차비 안 내고 숨은 사람을 찾아나섰다. 들킨 승객은 돈이 없으니 한번만 봐달라고 통사정했지만 소년 차장은 막무가내였다. 마침내 할 수 없다고 여긴 승객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데 지폐가 여러 장이었다. 기가 막힌 차장이 째려보자 승객은 당당하게 소리쳤다. “내가 이까짓 차비를 안 내려고 꾀를 부린 게 아니야. 난 어디까지나 너의 자비심을 시험해본 거야. 돈 몇 푼에 그렇게 인색하게 군다면 넌 이미 영혼을 잃은 거나 다름없어.” 그 당찬 입심에 어린 차장은 말을 잃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승객들이 더 올라타서 이젠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버스 지붕으로도 사람들과 염소가 올라타고, 난데없이 닭 비명소리가 들렸다. 의자 밑에 있는 닭을 누가 밟은 모양이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내 옆에는 이마에 붉은 점을 친 힌두교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내가 차를 올라탄 다음부터 한순간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커다란  두 눈이 마냥 찌를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인도인은 얼굴이 아니라 영혼을 바라본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인도인은 중간에 시선을 돌리는 법도 없이 사람을 끝까지 쳐다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번은 영화를 보러 극장엘 들어갔는데 내 왼쪽에 앉은 남자가 영화 화면은 보지 않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줄곧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이 인도인 역시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날 쳐다보기로 작정한 듯싶었다.  이런 경우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만큼 난감하다. 같이 쳐다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어색하다.  탈 사람이 다 탔는지 이윽고 버스가 출발했다. 금방 부서져버릴 것 같은 차체는 그 안에 탄 온갖 희한한 사람들과 동물들을 동화의 세계로 인도하듯 숨을 몰아쉬며 히말라야 기슭으로 내달렸다. 그러다가 버스는 몇 사람을 더 태우기 휘해 코딱지만한 어느 마을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영영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은 덥고, 사람들 한복판에 끼여 있으니 인도인 특유의 카레냄새 때문에 견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바로 옆에서는 힌두교인 남자가 차가 달리든 말든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만 버스를 내리고 싶었지만 그 작은 마음에 여인숙이 있을 성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세 시간을 더 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마을에 멈춰선 버스는 도무지 떠날 기미기 안 보였다. 검문을 받는 것도 아니고, 차가 고장난 것도 아니었다. 버스는 그렇게 그 자리에 30분이 넘도록 마냥 서 있었다. 하지만 승객들은 아무도 불평하거나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북인도 나이니탈에서 이틀을 머물고 더 북쪽의 라니켓으로 가는 중이었다. 버스 안에 있는 외국인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버스가 떠나지 않는 것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도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한 시간이 지날 무렵 나는 그만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달리는 만원버스 안에서도 한 시간은 긴 시간인데 찌는 날씨에 이유도 모르는 채 무작정 멈춰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어딜 가나 이런 상황이니  나라가 발전할 리가 없었다. 나는 누구한테랄 것도 없이 큰소리로 물었다. “ 이 버스, 왜 안 떠나는 거요?”

그러자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아무도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힌두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화가 나서 소리쳤다.


“버스가 한 시간이 넘도록 서 있는데 당신들은 바보처럼 기다리기만 할 겁니까? 이유가 뭔지 알아봐야죠.” 그러자 그때까지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던 그 힌두교인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운전사가 없으니까요.”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운전사는 그곳에 도착한 순간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조차 볼 수 없었다. 내가 바라는  대답은 그런 멍청한 게 아니었다. 나는 마치 그 힌두인 때문에 버스가 움직이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따져 물었다.

“그렇다면 운전사가 어디로 갔는지 밝혀내야 할 게 아닙니까? 갑자기 배탈이 나서 쓰러졌는지, 아니면 옛날 동창생이라도 만난겁니까?” 그때 더욱 화를 돋우는 대답이 버스 앞쪽에서 들려왔다. “맞아요, 운전사가 친구를 만났어요. 둘이서 저쪽 찻집으로 갔어요.” 나는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콩나물시루 속에 사람들을 가둬놓고 친구와 함께 노닥거리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그가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평 한마디 없이 무한정 기다리고만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인도라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나는 당장 뛰어내려 운전사를 메다꽂고 싶었다. 그때 힌두교인 남자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나는 화가 나서, 라니켓으로 간다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또 묻는 것이었다.


“그 다음엔 또 어디로 갈 예정입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 엉뚱한 인도인의 호기심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 그 다음엔 다시 남쪽으로 내려올 거예요. 그래서 뉴델리에 들렀다가 며칠 뒤 우리나라로 돌아갈 겁니다. 이제 됐습니까?” “그럼 그 다음엔 또 어디로 갑니까?” “그거야 아지 모르죠. 또 인도에 올지도 모르고, 네팔로 갈 수도 있고. 하지만 오늘 라니켓에 도착하는 것조차 불확실한 마당에 나중의 일을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러자 그 힌두인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린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서둘러 어딘가로 가려고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나는 말문이 막혔다. 곁에 서서 한 시간이 넘도록 내 영혼을 꿰뚤어본 이 남자는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버스는 떠날 시간이 되면 정확히 떠날 겁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가 어떤 시도를 한다 해도 신이 정해 놓은 순서를 뒤바꿀 순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덧붙였다.


“여기 당신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버스가 떠나지 않는다고 마구 화를 내든지, 버스가 떠나지 않는다 해도 마음을 평화롭게 갖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버스가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왜 어리석게 버스가 떠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쪽을 택하겠습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조용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바보들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문득 남루한 인도인들로 변장한, 인생을 초월한 대철학자들 틈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마의 대 철학자 에픽테투스는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되어가기를 기대하지 말라.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라.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오게 하고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가게 하라. 그때 그대의 삶은 순조롭고 마음은 평화로울 것이다.”

 

에픽테투스는 원래 노예였다고 한다. 그의 주인은 늘 그를 학대했는데 어느 날 주인이 심심풀이로 에픽테투스의 다리를 비틀기 시작했다. 에픽테투스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계속 비틀면 다리가 부러집니다.” 주인은 어떻게 하는가 보려고 계속해서 다리를 비틀었고, 마침내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자 에픽테투스는 평온하게 주인을 향해 말했다고 한다. “거 보십시오. 부러지지 않습니까.” 그날 그 낡은 버스 안에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감정에 흔들림 없이 현실을 수용할 줄 아는 수많은 에픽테투스들을 만난 셈이었다.

마침내 나타날 시간이 되자 운전사는 미안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타났고, 떠날 시간이  되자 버스는 떠났다. 그리고 나는 수천 년 전부터 예정된 시간에 정확히 나리켓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삶이 정확한 질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데, 내 자신이 계획한 것보다 한 시간 늦었다고 해서 불평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넉넉한 마음을 지닌, 영혼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싣고 버스는 7천8백 미터의 난다 데비 히말라야의 품안으로 성큼 달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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