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인생

경호... 2009. 1. 21. 11:05

어떤 자는 여행을 하도록 숙명적으로 태어난다. 그는 남루한 옷에 낯선 장소의 고독을 마다히지 않으며, 그가 오랜 시간대에 걸쳐 별들을 여행한 것처럼 이 지상의 여러 마을들을 통과해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바바 하리 다스-


나는 그녀를 북인도 뉴델리 공항에서 만났다. 그녀는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난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인도 여성답게 한눈에 반할 만큼 미인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비행기 좌석을 알아보려고 공항으로 나갔다. 오랜 여행에 몸과 마음이 다 지쳤기 때문에 뭄바이의 명상센터로 돌아가 당분간 쉬고 싶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닷새 뒤에나 자리가 있었다. 나는 막막해져서 대합실 의자에 주저앉았다. 뭄바이까지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또다시 서른 시간이 넘는 여행을 할 순 없었다. 지금은 그런 여행을 하기엔 몸과 마음이 무리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문득 옆자리에 앉은 여성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 역시 혼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긴 머리에 갈색 피부를 한 그녀는 대개의 인도 여성들과는 달리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지 않고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외국 여행자인 내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사실 사리를 입은 여성들은 인도 특유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말을 건네기가 어렵다. 그래선지 나는 현대식 복장을 한 그녀가 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뉴델리 대학의 공대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뉴델리 대학은 인도에서 최고로 꼽히는 명문 대학이다. 누굴 기다리느냐고 묻자 그녀는 친구와 함께 뭄바이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두 시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인도인들의 습관에 대해 몇 마디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그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친구는 인도인이 아니라 서양인 남자 친구예요.” 그 말에 난 잠시 어색했다. 그녀는 약간 슬픔 표정이었다. 매혹적인 눈동자 속에는 어둔 그늘이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인도 처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 서양인 녀석은 누굴까. 마침내 그 뉴델리 여대생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약속은 깨졌고, 나 역시 시내의 호텔로 돌아가야만 했다. 우리는 함께 릭샤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뉴델리 중심가의 코너트 플레이스로 갔다. 릭샤를 내렸을 때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릴루와 함께 근처 식당으로 갔다. 늘 노천 식당에서 싸구려 음식을 사먹다가 에어컨이 설치된 고급 식당에 들어가니 어색했다. 웨이터가 올 때마다 나는 때묻은 옷깃을 감추느라 애를 썼다. 그런 나를 보고 릴루는 킥킥대며 웃었다. 릴루는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웃을 때면 가지런한 치아가 눈부셨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우리는 내가 여행한 도시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 역시 북인도 여러 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열두살 때는 부모를 따라 3천5백 미터 높이에 있는 히말라야의 성지 강고트리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곳 온천에서 목욕을 했으며, 한 힌두 성자가 그녀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성자는 어린 그녀를 바라보며 인생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릴루가 말했다.


“사실 난 그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고통이나 슬픔 같은 것들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성자가 내게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고 말하니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내 인생에서 그때가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난 그 성자가 그냥 아무에게나 그렇게 말하는가 보다고 생각했어요.” 릴루는 그 후 마음이 괴로울 때나 힘들 때면 강고트리의 그 성자가 생각나곤 했다고 고백했다. 성자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졌다는 것이다. 가끔은 그 성자가 아직도 살아있는지, 또 아직도 그곳 강고트리에 있는지 궁금하다고 릴루는 말했다. 릴루는 문득 내게 인도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다. 난 딱히 어떤 이유를 댈 순 없지만 인도의 많은 것들에 마음이 끌린다고 대답했다. 내 얘길 듣고 나서 릴루는 무심코 자기는 이 나라가 싫다고 말했다. 보수적이고 전통 위주인 인도 사회가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릴루의 집안은 가난했다. 그녀의 부모는 20년째 정부가 임대한 소형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으며, 독립된 방도 없이 원룸 형식인 그 아파트에서 늙은 할아버지까지 함께 살았다.  릴루는 낡은 아파트와 천식에 걸린 할아버지에게서 나는 냄새가 싫었다. 더구나 철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은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야만 했다. 바로 밑의 여동생은 아예 집을 나가버렸고, 남동생은 네팔로 간 뒤 소식이 끊어졌다고 했다.


그러다가 릴루는 최근에 뉴욕에서 여행 온 미국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청년은 그녀에게 결혼을 약속했고,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패션 디자인을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잠시 생의 희망이 그녀를 찾아왔다. 하지만 미국인 애인은 오늘 공항에서 만나자는 릴루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질루를 버리고 혼자 떠난 것이다. 릴루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나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는 시내를 산책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우리는 박물관에 가서 기원전2.3세기 경의 마우라 왕조의 목각품과 테라코타를 구경했다. 청동 조각품과 세밀화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릴루에게 그림보는 눈이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역사적인 사실까지 곁들여 가며 그림의 특징들을 하나씩 설명했다. 릴루는 한때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했다. 벽화와 세밀화들을 설명할 때 릴루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치고, 그녀는 잠시 발랄하고 매력적인 처녀로 되돌아왔다. 박물관은 오후 다섯 시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서둘러 저녁이 찾아왔다. 릴루와 나는 다시 시내 중심가로 돌아왔다. 한낮의 열기가 사라지고, 형형색색의인도인들 위로 아열대의 오렌지색 노을이 번졌다. 저녁이 되자 릴루는 다시 고독해졌다. 대화를 하는 중간에도 그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저녁이 오면 자꾸만 누군가 날 부르는 것 같아요. 어디론가 가야 할 것 같은데,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어요. 나는 분명히 뭔가를 원하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날 릴루와는 시내 중심지 어딘가에서 헤어졌다.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의 분위만은 똑똑히 기억난다. 릴루와 나는 손을 흔들며 헤어졌고, 인파들 속에 묻혀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는 어떤  허무감과 슬픔 같은 것이 교차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울적한 기분을 달랠 겸 가게에 들러 ‘구루’라는 상표가 붙은 맥주 두 병을 샀다. 구루는 영적 스승이란 뜻인데 그런 걸 맥주 이름으로 하다니 역시 인도다웠다. 맥주는 이름 때문인지 무척 비쌌다. 호텔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한 인도인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현관으로 들어서는 내게 얼른 팸플릿 한 장을 건네주고 멀어져갔다.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들고 계단을 올라가면서 펴보니 팸플릿에는 ‘히말라야의 영원한 성지 강고트리로 오세요!’ 라는 글귀와 함께 배경엔 강고트리의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릴루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갔다던 그 성지 강고트리였다. 낮에 릴루와 함께 강고트리에 대한 얘길 했는데 또다시 강고트리를 설명하는 여행 팸플릿을 받다니 이상한 우연이었다.      방에 돌아온 나는 맥주를 조금 마신 다음, 텔레비전에서 인도영화를 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었다. 수화기를 드니 호텔 프런트의 직원이었다. 누가 날 찾아왔다는 것이다. 릴루였다. 릴루는 낮의 옷차림에다 긴 초록색 인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흔들리며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스카프에 매달린 작은 장식용 거울 조각들에 방안의 불빛이 반사되어 어른거렸다. 술에 취해 있진 않았지만 왠지 그녀가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고 난 기억된다. 우리는 잠시 어색했다. 그리고 곧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릴루는 아까 나랑 헤어져 집에 들렀다가 다시 외출해 친구를 만난 뒤 이리로 왔다고 했다. 릴루는 바닥에 앉아 내가 마시다 남은 맥주를 마시고, 나는 침대에 기대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릴루는 자기가 부담이 되면 곧 가겠다고 말했다. 자기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건 자기 자신인데, 타인에게까지 부담을 주는 건 싫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일랑 갖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날 밤 릴루는 맥주를 더 마시고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새벽이 밝아오도록 벽에 기대어 잠이 오지 않았다. 릴루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었다.  가끔 뭐라고 잠꼬대를 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릴루가 뉴델리 대학의 학생이 아니더라도 내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평온하게 잠이 든 그녀는 어렸을 때 히말라야의 성지 강고트리에서 힌두 성자로부터 축복을 받던 그 순수한 얼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삶이 고통스럽다 해도 그녀는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내적인 힘까지 다 잃은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금만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었다. 고독한 여인의 영혼! 고독하기 때문에 근접할 수 없고, 신비감과 허무함이 교차하는 한 영혼이 릴루에 대한 나의 오랜 기억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기억은 더 뚜렷해져서 릴루가 더욱 고독하고 신비하게만 다가온다. 다음날 아침 헤어지면서 릴루는 내게서 강고트리의 여행 안내 팸플릿을 가져갔다. 그녀는 말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강고트리로 가겠어요. 어렸을 때의 그 성자도 찾아보구요. 만날 수 있을진 모르지만요. 성자를 만나지 못한다 해도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눈 때문에 길이 끊어지기 전에 서둘러야겠군. 곧 있으면 많은 눈이 내리겠지. 그리고 지금 떠나면 내년 봄에 눈이 녹아야 내려오게 되겠군. 그런데 여비는 있나?”

“어떻게 마련하게 되겠죠.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건 더 미루지 말고 뭔가를 찾아 떠나야 한다는 거예요. 어제 당신과 얘길 나누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식으로 계속 절망하며 살아갈 순 없어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떠났다. 나는 내게 남아 있던 여비를 절반으로 쪼개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마다했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똑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여비는 나눠 써야 한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릴루와 헤어진 뒤 나도 짐을 꾸렸다. 더 이상 비싼 호텔에 묵고 있을 수가 없었다. 뭄바이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려던 애초의 계획도 취소했다. 여비가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돈을 아껴야만 했다. 나는 곧바로 뉴델리 기차역으로 가서 히말라야 발치에 있는 도시 바레일리로 향하는 3등석 기차에 몸을 실었다. 장기간의 여행으로 지쳤던 몸과 마음에 갑자기 기운이 생겨났다. 그 기운은 바로 릴루가 내게 준 선물이었음을, 흔들리는 기차에 앉아 멀리 인도 대륙을 바라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생의 고통을 체험한 뒤, 홀연히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여행을 떠나기로 한 그 용기가 내게도 힘을 주었던 것이다. 그 생명력이 어느새 내 안에도 옮겨와 있었다. 그 생명력 말고도, 릴루는 헤어지면서 내게 자신이 두르고 있던 그 초록색 인도 스카프를 선물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흘렀지만 난 아직도 그 스카프를 갖고 있다. 가끔 그걸 꺼내 스카프에 매달린 작고 둥근 장식용 거울들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또다시 인도에  가고 싶다. 릴루는 잘 있을까. 그녀는 정말로 강고트리의 그 성자를 만나러 떠났을까.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자기 안에서 찾아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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