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새벽 두 시에 잃어버린 것

경호... 2009. 1. 22. 08:38

그게 뭘까. 자다 말고 눈이 떠졌다. 새벽 두 시였다. 자이살멜. 인도 북서부 타르 사막에 있는 작은 도시. 호텔 스와스티까에서 나는 문득 잠이 깼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나무침대에 누워 골똘히 생각하다가 나는 벌떡 일어나 배낭을 열고 소지품을 점검했다. 여권, 비행기표, 돈, 스프링 달린 수첩, 5루피 주고 산 성자의 목걸이 ...,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어제 오후에 나는 라자스탄 주의 두 번째로 큰 도시 조드푸르를 떠났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아홉 시간 만에 인도 북서부 끄트머리인 자이살멜에 도착했다. 12세기의 성과 모래바위로 지어진 옛 저택들이 있는 곳. 주위는 온통 황야이고, 먼 사막에선 낙타들이 지나다녔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여전히 뭔가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사람은 이따금 어떤 상실감에 시달리기 마련일까. 영혼의 상실감은 흔히 이국땅에서 새벽 두 시경에 여행자를 방문한다고 하지 않는가. 똑똑. 누구세요?  난 당신의 영혼입니다. 웬일이세요? 당신은 뭔가 잃어버렸군요. 내가요? 뭘 말인가요? 글쎄요. 혹시 영혼을 잃지나 않으셨나요?


자이살멜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성벽에 올라가 낡은 집들 너머의 황금빛 사막을 바라보았다. 내 옆에는 한 늙은 인도인이 서서 사막인지 무엇인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내려간 다음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인생에서 무엇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런데 난 뭘 잃어버린 걸까. 아. 시계야! 시계를 잃어버렸어! 마침내 알아냈다. 세 번째 산 시계인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어찌된 일인지 인도제 시계는 손목에 차고서 5백 미터 정도만 걸어가도 툭! 하고 고장이 나버렸다.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 톱니에서 떨어져버리곤 했다. 세 번째 산 시계는 그런대로 쓸 만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머리맡을 살폈다. 아, 그런데 시계는 베개 밑에 들어가 있었다. 새벽 두 시를 가리키면서. 그러니까 잃어버린 건 시계가 아니었다. 그럼 뭘까. 마치 하나의 화두처럼 그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침에 다른 외국인 여행자들과 함께 사막으로 낙타 여행을 떠나기로 예약했기 때문에 잠을 푹 자둬야만 했다. 그런데 느닷없는 상실감이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이었다.

어제 오후 느지막이 나는 자이살멜 북쪽 사막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까지 걸어갔었다. 그곳 지명은 바다바그였다. 원색의 사리를 입은 여인들이 거기서 생산된 과일과 채소들을 머리에 이고 사막을 지나 시내로 운반하고 있었다. 바다바그에 앉아서 나는 황혼을 구경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의 황혼은 아름답다. 타고르는 “나는 황혼녘에 지상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당신의 품안으로 돌아갑니다.”라고 노래했다. 황혼이 어둠으로 변하고 별 하나가 떠올랐을 때 나는 걸음을 서둘러 호텔 스와스티카로 돌아왔다. 아, 그렇다 드디어 내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바로 ‘별’이었다.


인도에 오기 전, 나는 사막의 별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고요한 사막 위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누워 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만 이틀 동안이나 호텔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침대를 내려와 서둘러 옷을 입었다. 낙타 여행에는 사막에서 자는 사흘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별들은 그때 실컷 구경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동행자가 없는 고독한 사막에서 나 혼자 별들과 마주하고 싶었다. 나는 담요를 둘둘 말아들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거리는 적막해서 그림자만 날 따라왔다. 이렇게 밤중에 걸어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성문을 통과하면 버스 정류장이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개 한 마리가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모양이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줄 게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시늉을 해 보여도 개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머리가 나쁜 개였다. 나는 모르는 척하고 걸어갔다. 달빛에 그림자를 떨구고 나도 걷고, 개도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개는 걸음을 멈추고 달빛 아래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다시 걸음을 옮기면 따라서 걸었다. 이윽고 바다바그에 도착했다. 개는 지쳤는지 내 옆에 와서 풀썩 쓰러졌다. 바다바그에 이르러 시계를 보았더니 여전히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걸어오는 사이에 또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 빠져버린 것이다.  나는 담요를 깔고 바닥에 누웠다. 그 순간, 마치 누가 영사기를 틀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떤 별은 감자만했고, 어떤 별은 다른 별들과 무리를 이뤄 큰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별들 하나하나가 내 귓가에 속삭이며 어떤 전설을 들려주는 듯했다.


개는 아예 내 옆에 와서 벌렁 누웠다. 배가 고팠던 게 아니라 외로웠던 모양이다. 친구가 필요한 개였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서로를 가깝게 해주는 건 고독감인지도 모른다. 손을 뻗어 목을 쓰다듬자 개는 편안히 내게 몸을 맡겼다. 그날, 새벽의 질투어린 여신이 미명을 몰고 와 몰아갈 때까지 나는 바다바그의 오아시스에 누워 별들을 구경하고 또 구경했다. 내 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별들을 바라본 시간이었다. 별들은 마치 생의 비밀을 간직한 암호들 같아서, 그 암호의 세계로 들어서기만 하면 무언가가 내 영혼을 가득 채울 것만 같았다. 그 세계에선 누구도 고독하지 않고, 누구도 상실감으로 고통받지 않으리라. 새벽 두 시에 느꼈던 영혼의 상실감은 사막 위에 뜬 별들로 인해 어느덧 치유되었다. 세상 전체가 나의 집이었다. 별들은 인간이 만든 성벽과 궁전과 온갖 장신구들보다 영원하고 아름다웠다. 늙은 개는 나와 함께 별을 응시하다가 내 옆에서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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