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개와 함께 한 여행

경호... 2009. 1. 22. 08:43

늙은 개가 나를 따라왔다. 아마도 낙타상들을 따라다니다가 주인을 잃은 집 없는 개인 모양이었다. 그날 나는 북인도 자이살멜에서 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샘 사구까지 도보여행을 출발했다. 사하라 사막  같은 모래언덕을 구경하기 위해 여행자들은 샘 사구까지 지프차를 빌려타고 가곤했다. 하지만 나는 중간까지 도보로 갈 생각으로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부터 개는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황야를 걸었다. 풀 한 포기 없는 맨땅. 하늘에는 붓으로 그린 것처럼 구름이 한 가닥 걸려 있었다. 태양이 뜨거웠다. 나는 도중에 물과 비스킷을 사서 배낭에 넣었다. 가게 주인에게 돈을 치를 때까지 개는 멀찌감치 서서 딴전을 피웠다. 분명히 나를 따라오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착하는 영리한 놈이었다. 자이살멜 시내를 완전히 벗어났을 때 우리는 한 떼의 염소들을 만났다. 백 마리가 넘은 염소떼가 황야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내가 염소떼를 앞지르기 위해 빙 둘러 돌아가자 개도 열심히 따라왔다. 이 더위에 사막을 걷는 것이 늙은 개에겐 무리였다.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개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전생에 내가 자기의 친구였기나 한 듯이 멀찌감치서 계속 쫒아왔다. 그때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지프차 한 대가 뒤쪽에서 달려왔다. 샘 사구로 떠나는 여행자들이었다. 작은 지프차에 여덟 명이나 되는 서양인들이 착한 학생처럼 앉아 있었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지프차는 휑하니 황야 저편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쪽을 방향삼아 걸음을 재촉했다. 한 시간도 걷지 않아서 목이 말랐다. 나는 물병 마개를 따고 물을 마셨다. 어떻게 하는가 보려고 물병을 도로 집어넣자 개는 자기도 목말라 죽겠다는 듯이 혀를 길게 내밀고 헉헉거렸다. 손바닥에 물을 따라주었더니 개는 꼬리를 흔들며 받아먹었다. 그런 다음에도 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날 따라왔다. 그러나 더위와 허기 때문에 나보다도 개가 먼저 지쳐버렸다. 이윽고 초막으로 지붕을 엮은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사리를 머리에 뒤집어쓴 소녀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다녔다. 어른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를 보자 “포토!포토!” 하고 소리쳤다. 카메라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니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개는 먼  발치서 아이들을 쳐다보다가 내가 떠나는 걸 보고서야 황급히 달려왔다.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없는 황야를 걷는 것이 나는 좋았다. 바람도 없고, 나무도 없고, 사람들도 없었다. 오직 나와 개와 태양뿐이었다. 개는 지쳤는지 나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중에는 백 미터정도 간격이 벌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개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우리는 다시 물과 비스킷을 나눠 먹었다. 그리고 나는 배낭에서 선그라스를  꺼냈다. 인도에 와서 산 것인데, 얼마 가지 않아 테가 부러져 버렸다. 그래서 검정 테이프로 붙들어 매야 했다. 선글라스를 쓰니 눈이 덜 부셨다. 그 사이에 또다시 지프차 한 대가 휑하니 지나갔다. 아까보다 더 많은 여행자가 타고 있었다. 지프차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그만 선글라스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열기 때문에 테이프가 녹아버렸는지 안경테가 다시 벌어지고 알이 빠진 것이다.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나는 부서진 선글라스를 황야에 버려둔 채 걸음을 재촉했다. 개도 잠깐의 휴식에 기운을 얻어 열심히 따라왔다. 이대로 아무리 걸어가도 아무것도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이따금 작은 마을이 나타났지만 그것들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언덕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났다. 처음엔 그것이 눈썹에 얹힌 흙먼지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언덕이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 그 언덕에 올라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개는 언덕이 보이지도 않는지 헉헉대며 뒤로 처졌다. 나는 기다렸다가 한쪽 팔에 개를 안아들고 걸어갔다. 개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가벼운 존재. 나는 한참을 걷다가 개를 도로 내려놓았다. 가벼운 것도 오래들고 있으니 무거웠다. 마치 인생이 그런 것처럼. 언덕에 이르러 우리는 한참 동안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그 언덕이 난 맘에 들었다. 멀리까지 황야를 내다볼 수도 있고, 자세히 보면 빛인지 먼지인지 풀씨인지 하는 것들이 바람에 떠다녔다. 개는 두 다리로 팔베개를 하고 엎드려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후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벌써 해가 중천을 지나 있었다. 우리의 그림자가 등 뒤로 이동했다. 개를 데려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개는 더 이상 걷는 것이 고통스러운지 비틀거리며 쓰러지기까지 했다. 샘 사구까진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나도 지쳤고 개도 지쳤다. 우리는 물과 비스킷을 몽땅 먹어치우면서 반시간 정도 황야에서 기다린 끝에 마침내 뒤에서 달려오는 또 다른 지프차를 만났다.


두 손을 마구 흔들자 멈춰섰다. 개가 먼저 올라타고 내가 뒤따라 승차했다. 다행히 이번 지프차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청년이 나더러 개를 데리고 인도 여행을 하는 중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그런 여행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부러워했다. 빨간 테의 선글라스를 낀 호주 여자는 개가 무척 더러워 보이는지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개가 그녀의 무르팍에 턱을 올려놓고 자꾸만 침을 흘렸기 때문이다.  차는 흙먼지를 날리며 신나게 달렸다. 마침내 샘 사구에 도착했다. 샘 사구에서 보는 모래언덕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멀리 낙타 여행자들이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개와 함께 나란히 서서 한참 동안 황혼녘의 모래언덕을 구경했다. 그날 밤 나는 개와 함께 슬리핑백 속에서 잠을 잤다. 사막이라서 일교차가 심했던 것이다. 슬리핑백 속이 비좁긴 했지만 낮의 피곤한 여행 덕분에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사막의 별들 아래서 개와 함께 슬리핑백 속에서 잠을 잔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개는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샘 사구는 작은 곳이라서 그곳에 있다면 쉽게 눈에 띌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근처에서 다른 개를 만났는지, 아니면 사막으로 뼈를 묻으러 간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인사도 없이 가버린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그 늙은 개가 그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등 온몸이 가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개한테서 이가 옮은 것이다. 사막에서 머무는 동안 내내 나는 다른 여행자들이 지켜보는 중에도 벅벅 긁고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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