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하늘호수로 떠난여행

기차는 떠나고

경호... 2009. 2. 1. 08:47


한 사람이 멀리 기차 여행을 떠나는데, 그가 키우는 소와 염소와 닭까지 환송을 나와 기차역에서 마구 배설을 하며 돌아다니는 나라는 지구상에 인도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여행 떠나는 사람은 이불과 매트리스, 냄비, 들통 따위의 세간살이를 전부 챙겨들고 기차에 오른다. 흑백 영화에나 나옴직한 양철로 된 큼지막한 트렁크도 필수품이다. 어디서 구했는지 그런 트렁크를 대여섯 개씩 머리에 이고 등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크고 네모진 가방 두세 개, 무엇이 담겼는지 알 수 없는 자루 한두 개, 영국 식민지 시절의 바부(서기)들을 흉내내는 서류가방 한 개........., 인도에 처음 온 사람이 보면 모두가 빚을 떼어먹고 야반도주를 하는 사람들 같다. 그래서 이제 철도청에선 역마다 ‘한 사람에 가방 하나!’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그러나 나머지 짐을 집에 두고 떠났다간 도둑맞을 우려도 있고 해서 사람들은 여전히 소중한  매트리스를 둘둘 말아 어깨에 울러멘다. 그도 그럴 것이 왕복 70시간 이상 걸리는 캘커타나 뭄바이로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떠나는 길이라면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떠날 순 없는 일이다. 자리를 잡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서 바닥에 깔고 잘  매트리스도 필요하고, 오며가며 밥해 먹을 도구도 필요하다. 그러니 인도의 기차에는 의식주가 다함께 올라탄다.


인도에선 기차가 늘 연착하기 마련이어서,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나무를 주워다 밥을 끓여 먹는다. 그 옆에선 개와 닭들이 즐겁게 겅중거리고, 무임승차를 할 것이 뻔한 노란 옷의 성자는 주위의 어떤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좌선의 경지에 들어가 있다. 집 없는 천민들과 거지들은 꾸역꾸역 역으로 몰려와 시원한 바닥에 쓰러져 잔다. 판잣집을 소유하고 사느니 차라리 손님 많고 널찍한 기차역을 거처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는 표정들이다. 그 사이에 어떤 여행자는 재빨리 빨래를 해서 담장에 말린다. 그리고는 소가 빨래를 걷어 먹을까봐 작대기를 들고 서 있다. 인도의 소들은 먹을 게 없으니 헝겊 조각이든 비닐봉지든 아무거나 먹어치운다. 만일 그곳이 바라나시나 리시케시라면 여기에 성지 순례자들까지 대거 합세해서 대합실은 말 그대로 소음과 혼란의 아수라장이다.  고래고래 외쳐대며 물건을 파는 사람, 머리의 이를 잡는 사람, 쭈그리고 앉아 방뇨하는 사람, 맨땅에 누워 자는 사람, 터번 쓴 남자와 사리 입은 여자, 회교식 복장을 한 노인....... 이윽고 기관차가 꽈앙 하고 위풍도 당당하게 홈으로 들어서면 더 큰 아수라장이 벌어진다. 누가 먼저 올라타나 내기를 하자는 식이다. 팔을 걷어붙이고 멈추지도 않은 기차를 확 낚아채는 청년, 그 뒤로 휘적대며 걷는 성자, 성자를 밀쳐대는 계집아이, 그 계집아이의발에 딴지를 거는 은행 관리, 밀치고 찌르면서 돌진해오는 순례자의 무리.


이들 사이로 소떼들은 기차를 탈 것도 아니면서 콧김을 내뿜으며 밀쳐든다. 거기에 빠담(땅콩)과 기름에 튀긴 때묻은 과자들을 광주리에 이고 설쳐대는 장사꾼들, 난데없이 보자기 같은 검은 천을 얼굴에 뒤집어쓰고서 빼꼼히 내민 눈으로 승강구를 찾는 회교도 여자......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빨간 천으로 똬리를 한 쿨리(짐꾼)들이다. 쿨리들은 머리에다 매트리스 뭉치와 트렁크 두 개를 얹은 다음 양팔에 가방 두 개, 겨드랑이에 자루 하나씩을 껴안고서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몸이 너무 말라서 오랜 기간 금식 수행을 한 자이나교 승려 같지만, 마치 전설 속의 용사들처럼 비틀거리지도 않고 “짐이오, 짐!”을 외쳐댄다.

인도의 철도는 전체 6만 킬로미터에 달한다. 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길이이다. 날마다 하루 1만 1천 대의 기관차가 달리며, 7천여 개의 역으로 9천만 명의 승객을 실어나른다. 단일 회사로서 160만 명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용인을 거느린 것이 바로 인도 철도 회사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긴 플랫폼은 서인도 벵갈 주에 있는 카락푸르  기차역으로, 그 길이는 자그만치 833미터나 된다. 현지 인도인들은 그럭저럭 북새통을 뚫고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만, 외국인 여행자는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이럴 때는 씩씩해 보이는 쿨리에게 5루피를 주고 기차에 미리 올라타 자리를 잡아줄 것을 부탁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이제는 인도 전역에 편리한 컴퓨터 시스템이 들어서서 시즌이 아니라면 기차 예약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등칸이나 에어컨 1등칸, 에어컨 침대칸 들을 예약하면 이런 북새통에 시달리지 않고도 신사처럼 편안히 기차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2등칸의 북새통과 아수라장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들리는 파리떼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렇게 되면,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인도 여행이 아니다. 인도의 기차는 편안함을 찾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화려하고 이국적인 풍경을 노리는 사치스런 여행자는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소유한 것 없이 묵묵히 지상의 삶을 견뎌낼 줄 아는 자에게 인도의 기차는 열려 있다. “여행의  백미는 기차 여행이고, 그중에서도 3등칸 기차 안에 민중의 삶이 있다.”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이것은 이제 사라져가는 불문율이 되어 버렸지만, 9억의 인구가 버티고 있는 인도에선  아직 그 불문율이 그대로 통용된다. 인도의 기차 여행은 지구상의 그 어떤 종류의 여행과도 다르다고 여행자들은 곧잘 말한다. 인도의 기차는 너무 자주, 그것도 아무 데서나 선다. 그곳이 정거장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정지하는 이유조차 뚜렷하지 않다. 인도인들은 근처에 자기 집이 있다는 이유로 종종 비상 정지 케이블을 잡아당겨 기차를 세우곤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비상정지 케이블을 잡아당기는 사람에게 상당한 액수의 물리고 있지만 워낙 대륙이 넓으니 도망치면 끝이다.


기관사 또한 시간 개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도 여행중에 나는 몇 차례나 다섯 시간 이상 연착한 기차를 경험한 적이 있다. 이유를 물을 때마다 역무원들은 아마도 기관사가 도중에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으러 간 모양이라고 태연히 대답하곤 했다. 기차가 이유없이 정지해서 한두 시간씩 기다려도 인도인들은 마냥 태평스럽다. 그들은 승무원에게 항의하거나 유리창을 때려부수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좌석에 앉은 이상한 외국 친구를 한두 시간 더 구경하게 된 것이 즐거운 표정들이다.  

  인도의 기차 여행은 불편하기 짝이 없고, 때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화장실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차 있어서 소변을 볼 수도 없었다. 온갖 형태의 불구자들이 쉬지 않고 열차 칸을 돌며 구걸을 하는가 하면, 어떤 여인은 기차도 탈 겸 돈도 벌 겸해선지 줄곧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내 앞에 와서 무려 네 시간 동안이나 돈을 달라고 어거지를 부렸다. 돈을 줘도 더 달라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여자 때문에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같은 시대에 같은 별에 태어났는데 어쩌면 이렇게 삶이 다를 수 있는지 그 현장에 있으면서도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아우성과 어거지와 불편함만이 전부라면 인도의 기차 여행은 별 의미가 없으리라. 캘커타로 가는 라즈다니 특급열차에서 맞은편에 앉은 한 힌두 노인은 느닷없이 내게 물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여행하면서 어떤 것을 배웠소?” 그는 북인도 카르타나카에서 온 힌두 탁발승이었다.  둘둘 만 검은 머리를 흰 천으로 동여매고, 이마에는 가로 세로로 흰 선과 붉은 선을 그었다. “당신은 무엇을 이 세상에서 베웠소? 돈을 버는 재주를 배웠소? 아름다움과 추함을 배웠소? 아니면 신이 존재한다거나 내세가 존재한다는 걸 배웠소?” 그는 너무 빼빼 말라 자칫하면 부러질 것 같았지만, 정신만큼은 인도의 고행자답게 푸르게 살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기차는 인도 들녘의 햇살을 어깨로 떠받치며 작은 간이역들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힌두 노인은 기차를 내리면서 내게 말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와서 장사하는 재주를 배울 수도 있고 병 고치는 기술을 배울 수도 있소. 하지만 무엇보다 신을 배우도록 하시오. 당신이 이곳을 여행하는 동안 신과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그 여행은 무의미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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