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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경호... 2015. 7. 30. 03:27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 시집 『정말』(창비시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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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정말’ 이래 재미나고 웃겨도 되는지 모르겠다. 수준 높은 성인용 개그 드라마 한 편이다. 동네 아주머니의 입을 빌려 술술 풀어내는 풍성한 입담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소문에 의하면 충남 홍성 출신인 그는 실제로 오래전 개그맨 시험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붙었더라면 최양락과 동기가 될 뻔 했단다. 소설가 한창훈은 발문에서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유랑극단 변사를 했을 것’이라면서, 그 입담은 ‘구라’로 유명한 황석영 선생이 고개 저으며 ‘너한테는 졌다’고 할 정도란다. 시인은 현재 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시인의 수업은 학생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는 시집 서문에서 ‘시는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고 온몸으로 줍는 거’라고 했다. 시인이 받들고 주워 담은 것들은 웃음만이 아니다. 삶의 무게를 슬며시 밀어 올리는 저 능청과 해학 가운데 알싸한 비감이 걸러지고, 또 이상하게 그것으로부터 따스한 위로를 얻는다. 그의 말대로 ‘사랑의 주소는 자주 바뀌었으나, 사랑의 본적은 늘 같은 자리’이기에 그런가 보다. 참 빠른 그 양반을 추억하며 사랑의 대궁과 우듬지를 통해 생의 ‘화양연화’를 다 본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