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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마을(대한민국 명승 53호)[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경호... 2015. 7. 23. 00:46

오지에 들어서니 기름진 평야가…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0-1>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마을(대한민국 명승 53호)

 

 

경남 거창군에 있는 황산마을은 거창신씨 130여 명이 거주하는 집성촌이다. 이종호 제공

 

 

개평마을에서 황산마을로 가는 도중 배롱나무 가로수가 줄이어 나타나는데 그 경관이 무척 아름답다. 특히 배롱나무 꽃이 만개했을 때 아름다움이 최고조에 이르므로 전통마을 답사가 아니더라도 한 번 찾아보기 바란다.

‘오지 중의 오지’라 불렸던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있는 황산마을이 다음 목적지다. 이 마을은 울면서 들어가서 울면서 나오는 곳이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산세가 험한 덕유산 줄기에 자리 잡았다.

황산마을이 있는 거창은 예로부터 거열(居列), 거타(居陀), 한들, 거창(居昌), 아림(娥林), 제창(濟唱) 등으로 불렸다. 모두 ‘크고 넓은 들판’이라는 뜻인데 거창분지가 내륙산악지대에서 보기 드문 평야라서 생긴 이름이다. 거창이라는 이름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처음 불린 후 주변 영역과 분할, 합병되면서 여러 지명으로 불리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거창평야 일부를 한들이라 부르는데, 이는 대전의 한밭(大田)이나 한길(大路)과 마찬가지로 ‘큰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 땅에서는 사과, 딸기, 포도, 쌀, 수박, 버섯, 오미자, 밤, 양파, 배추, 무 등 다양한 특산물이 생산된다. 이중환도 ‘택리지’에 ‘거창은 땅이 기름지다’고 기록했다.

●고려 때 귀화해 왕의 장인까지 된 ‘거창신씨’

황산마을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해도 나오지 않으면 ‘수승대’를 검색하면 된다. 대한민국 명승 제53호로 지정된 수승대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이 황산마을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황산1구와 황산2구를 합해 약 150여 호가 사는 매우 큰 마을이다. 특히 ‘큰땀’이라 불리는 황산1구는 거창신씨 130여 명이 거주하는 동족 마을, 집성촌이다.

거창신씨의 시조인 ‘신수(?修)’는 중국인으로 고려 문종 때 귀화해 참지정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신안지’가 병부상서를 역임하고 후손들이 거창에 살게 되면서 거창을 본관으로 삼게 됐다.

이 가문은 ‘신승선(?承善, 1436?1502)’이 이조참판이 되면서 명문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딸과 결혼해 신분을 높였고, 그의 딸을 연산군의 부인인 거창군부인 신씨로 만들었다. 또 그의 아들인 ‘신수근(?守勤, 1450?1506)’의 딸도 중종의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가 되면서 거창신씨는 당대에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거창신씨에게 일어난 변화는 거창에도 영향을 줬다. 연산군은 거창을 왕비의 관향이라 해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단경왕후는 폐비가 됐고, 거창은 다시 현으로 강등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산수 즐기는 ‘요수 선생’이 수양하던 곳

황산마을이 본격적으로 신씨의 집성촌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중종 35년(1540)에 이르러서다. ‘요수(樂水) 신권(愼權, 1501?1573)’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1540년 ‘구연재’을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권은 거창의 거유인 갈천 임훈의 매부이기도 하다. 그는 소년시절 한양에서 공부하다 ‘벼슬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자아는 하늘로부터 받는다. 안빈낙도하면서 오로지 인격수양에 힘쓰겠다’고 황산마을로 내려왔다고 한다.

당시로서 신권의 성격은 다소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데, 스스로 호를 ‘요수’라 부르면서 오로지 후학 양성에만 힘써 황산마을의 명성을 높였다. 신권의 업적을 높이 여긴 사림은 1573년 그가 죽자 구연재를 ‘구연서원’으로 개칭하고, 석곡(石谷) 성팽년(成彭年)과 함께 배향했다.

이후 18세기 중엽 조선 영조 때 이 마을에는 노론계 학자인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선생도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고 마을이 번창하자 사림들은 신수이도 구연서원에 배향했다.

 

 

 

 

개울 하나 두고 양반·평민 나뉜다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0-2>

 

황산마을은 실개천을 중심으로 동쪽을 ‘동녘(황산2구)’, 서쪽을 ‘큰땀(황산1구)’이라고 부른다. 거창신씨의 고가는 큰땀에 있으며, 우리가 찾는 전통마을도 큰땀이다.

큰땀은 마을 입구에 들어가기만 해도 ‘양반마을’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마을 전체가 ‘고래등’같은 기와집들로 연이어 있기 때문이다. 마을 입지는 대체로 평탄하며 주택도 대부분 햇빛을 잘 받는 남동향을 바라보도록 건축됐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이 많아 그 당시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마을 전체가 기와집 무리라는 데서, 이곳에 이른바 ‘씨족 부농’이 살았으며 소작마을을 별도로 뒀다는 걸 알 수 있다. 소작은 토지 소유자가 직접 경작하지 않고, 토지 이용권을 임대인에게 빌려주고 토지이용대가(지대)를 받는 제도다. 소작은 지금도 시행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소작은 왕실·양반 관리·사찰 등 대지주나 향촌의 사대부·향리 등이 농장을 개설하고 노비나 일반 농민을 모집해 운영하는 형태나 소규모 토지단위로 행해지는 형태 등이 있었다. 보통 ‘병작반수제’에 따라 생산된 농산물의 50%를 소작료로 거둬갔다.

이 마을의 큰땀에서는 양반이 살고, 개울 건너에 있는 동녘에는 소작인들이 주로 살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는 전통마을은 기본적으로 큰땀이다.

●듬성듬성 쌓은 돌담의 매력에 빠져보시라

황산마을 즉, 큰땀의 명성은 한국 전통마을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는 ‘마을 돌담길’로도 증명된다. 2006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59호로 지정된 이 길은 ‘전국의 아름다운 돌담길 10선’ 중 한 곳으로 뽑히기도 했다. 1~2km 길이의 토담이 600여 년 전에 이뤄진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됐다.

 

 

황산마을이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돌담길‘이다. 600여 년 전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종호 제공

 

 

황산마을 담장은 대부분의 전통마을처럼 ‘토석담’이다. 토석담은 흙과 돌을 이용하는 황토색이 짙은 담장으로, 자연석과 진흙을 개어 굳혀 만든다. 담장 아래쪽은 방형(사각형 모양)에 가까운 자연석을 사용하되 진흙으로 갈라진 틈을 메우지 않고,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메쌓기는 ‘건성쌓기’라고도 하는데, 대충 빈 곳을 둬 가며 벽을 쌓는 방식이다. 돌의 각 면을 잘 맞춰 빈틈없이 쌓은 뒤 ‘사춤’하는 ‘찰쌓기’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사춤은 담이나 벽 따위의 갈라진 틈을 메우는 작업을 말한다.

이 마을 돌담은 자연석으로 메쌓기를 한 다음, 그 위에 아랫돌보다 작은 20cm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해 진흙과 교대로 쌓았다.

하단부에 큰 돌을 쌓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아래에 큰 돌을 쌓아 안정감을 주고 마당 내에 고이는 물의 배출을 위한 장치로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빗물에 진흙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얹은 것도 빗물에 의한 진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방지한 것이다.

이 마을 돌담을 직접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토속적인 담과 근대의 작품인 도로 바닥재가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만큼 근대에 도로를 설치할 때 바닥 재료를 신중하게 선택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는 또 한국 재래식 토석담이 각종 이질적인 재료와 잘 어울린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고래등’ 같은 기왓집 그득한 그 곳에 가보니...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0-3>

 

황산마을에 들어가는 길 우측에는 수령이 약 600년 정도 된 높이 18m, 폭 7.3m의 느티나무 고목이 보인다. ‘안정좌(安亭座)’ 나무라고도 부르는 이 나무는 전통마을이라면 당연히 존재하는 커다란 나무 중 하나다. 황산마을의 ‘랜드마크’이자 ‘신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씨고가의 입구 모습. 이 집은 규모와 형식 면에서 돋보인다. 이종호 제공

 

 

느티나무를 보면서 좌측 개울길을 따라가면 곧바로 아름다운 담이 계속 이어지는 황산마을의 ‘큰땀’이 나온다. 큰땀에는 신씨 씨족의 기와집이 줄을 잇는데 거의 모든 집이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다.

한 지역에 이처럼 기와집이 밀집한 곳은 거의 없는데, 이중에서도 경상남도 민속자료 17호인 ‘황산신씨고가(원학고가)’는 규모와 형식면에서 이 마을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궁궐서 쓰는 목재·주춧돌에 정교함 돋보여

신씨고가는 당대의 마을에서도 독보적인 재산가의 집이었다. 집 규모도 규모지만 장식이나 가구 구성이 한국 전통 한옥이 갖는 규범과 상당히 다르다.

신씨고가의 사랑채와 안채는 겹집 팔작지붕으로 집주인의 부와 권위를 드러낸다. 평면은 안채·사랑채·중문채·곳간채·솟을대문·후문 등으로 구성됐는데, 다른 지역의 한옥을 보다가 이 건물을 보면 상당히 다른 세계에 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씨고가 사랑채의 모습. 궁궐이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고급 목재로 꾸며져 있으며, 기단도 장대하다. 외형만 봐도 주인의 재력을 짐작할 수 있게 지어졌다. 이종호 제공

 

 

우선 사랑채는 궁궐이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목재와 장식물로 꾸며졌다. 잘 다듬은 커다란 돌로 쌓은 기단도 장대하다. 더구나 받침돌과 기둥을 받친 주춧돌 위에 설치한 주좌(柱座·기둥자리) 등은 조선 중기 이전에는 고관의 집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집에서는 번듯하게 설치됐다. 이런 외형만 보더라도 집 주인의 재력이 보통 수준을 넘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보다 놀라운 것은 세세한 부분에서의 정교함이다. 특히 창호 문얼굴과 창살의 미려함이 방문자들을 놀라게 한다. 여기에는 아무리 재력이 풍부한 사대부가 주문했다 할지라도 뛰어난 장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탁월한 실력이 배어있다. 건축주가 재주가 좋은 명장을 발굴해 그 기술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유·무형으로 지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씨고가는 고객과 기술자의 절묘한 조화가 빚어낸 ‘걸작’인 셈이다.

 

 

사랑채의 기둥 부분(왼쪽)을 보면 주춧돌 위에 주좌를 볼 수 있다. 또 창호의 문얼굴과 창살(오른쪽)이 매우 아름다워 당시 솜씨 좋은 기술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종호 제공

 

 

●전통한옥의 틀 깬 파격적 양식

신씨고가는 전통한옥에서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요소도 많이 갖고 있다. 이는 집이 건축된 시대가 1927년 즉, 일제강점기라 과거 전통규범이 많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또 ‘격식 해체’와 ‘실용성’이 크게 강조됐다는 점도 한몫한다.

안채에는 방을 늘리기 위해 대청을 좁혔으며, 집 안에 화장실을 설치했다. 화장실은 돌 계단으로 올라가도록 높게 설치해 측면에서 변의 처리를 원활하도록 만들었다. 건물 중에서도 안채 옆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만 봐도 전통한옥의 격식에서 벗어난 걸 쉽게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통한옥에서는 사랑채 화장실은 집 밖에 두고 안채 화장실은 집 안에 두더라도 안채 밖에 별도로 전용 화장실을 설치했다.

 

 

신씨고가 안채의 모습. 안채는 다소 전통한옥의 양식을 깬 모습을 보여준다. 방을 늘리기 위해 대청을 좁혔고, 안채 중심에 작은 정원도 만들었다. 이종호 제공

 

 

이뿐 아니다. 안채를 둘러싼 부속건물도 크고 화려하게 치장했다. 안채 중심을 이루는 사랑마당에는 전통한옥에서 보기 드문 작은 정원도 만들었다. 이곳에 작은 나무들을 심었는데 이는 한옥의 기본과 배리되는 일이다. 또 사랑채에 설치하던 누마루를 안채에도 설치해 실용성을 우선으로 했는데 난간의 형태 역시 파격적이다. 닭다리를 닮아 ‘계자’라고 하며 흔히 ‘개다리’라고 불리는 ‘계자다리’를 띠쇠로 난간과 함께 보강한 것이다.

집주인이 아무리 경제력이 풍부해도 나라를 빼앗기고 전통이 해체되는 과정이 아니었다면 이런 위세가 대다한 집이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현대화에 따른 격식 해체와 실용성, 과시성, 심화된 경제적 계층화가 접목된 복합적인 사회현상이 고스란히 반영돼 신씨고가는 이처럼 남다른 대갓집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유난히 낮은 굴뚝의 모습.

흉년 때 연기가 밖으로 새나가면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어서 이렇게 굴뚝 높이를 낮췄다. 이종호 제공

 

 

●대갓집 굴뚝이 낮은 사연?

이런 대갓집이지만 굴뚝 높이는 남다르게 낮다. 종가집 며느리인 박정자 씨는 이는 마을 사람들을 생각한 배려라고 설명한다.

흉년이 되면 마을 전체가 궁핍하기 마련인데, 이때 대갓집 굴뚝에서 불을 피워 연기가 나오면 마을 사람 간에 위화감이 생길 수 있다. 이를 생각해 굴뚝 높이를 낮춰 만들었다는 것. 이래저래 조선시대 거부에게는 남다른 스트레스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큰땀에 있는 돌담은 그 자체로 문화재다. 신씨고가의 돌담도 어느 곳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우므로 초호화판 건물과 대비하면서 살펴보기 바란다. 길이와 모서리를 특별히 만들지 않고 휘어지는 곡선이 길게 연속돼 그야말로 한국의 담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황산마을은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다. 마을 입구에서 약 50m 정도 들어와 좌측으로 50여m 거리에 ‘시한당’이 있는데, 이 앞 연못도 한옥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형태다. 한국 전통의 연못은 ‘원지방도형(圓池方島形)’인데, 이 연못은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다. 이는 한국인이 편협한 격식에만 얽매지 않았다는 좋은 예다.

조선 양반들은 성리학이라는 구닥다리 학문만 고집하는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평가되기 십상이지만 당대 사대부들도 나름대로 과거 전통을 깨고 있었다. 사람 사는 사회에 ‘예외 없는 예외가 없다’는 것처럼 맞는 말은 없다.

 

아름다운 돌담을 지나면 ‘시한당‘이 나온다. 이 앞에 있는 연못은 한국전통처럼 네모로 만들지 않고 원형으로 만들었다. 이종호 제공

 

 

 

 

전통마을,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되다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0-4>

 

 

황산마을 동녘은 현대적으로 탈바꿈했다. ‘2011 마을미술 프로젝트‘에 선정돼 아름다운 마을벽화를 가지게 됐다. 이종호 제공

 

 

황산마을은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구분된다. 우측 ‘동녘(황산2구)’은 큰땀의 기와집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과거에는 초가집 일색이었고 지금은 새마을운동의 영향을 받아 슬레이트 지붕 등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현대마을이다.

동녘에 있는 마을은 현대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됐다. 하지만 현대화 물결로 역사가 바뀌자 근래에는 완전히 새로운 마을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결국 황산마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하는 ‘2011 마을미술 프로젝트’에 우수한 성적으로 채택돼 마을벽화 조성을 완료했다.

우리나라는 1990년 이후 도시를 가꾸는 지역 단위의 노력이 시작됐다. 이 덕분에 2006년부터 정부의 공공미술프로젝트가 시행돼 전국적으로 60여 곳의 벽화마을이 생겨났다. 황산마을은 경남 거창군과 한국미술협회 거창지부 회원이 벽화를 완성해 질적 수준이 상당하다.

 

마을 첫 집에는 경남 거창의 특산물인 사과가 탐스럽게 그려졌다. 이종호 제공

 

 

큰땀에서 개울의 짧은 다리를 건너면 동녘 초입의 첫 집이 나온다. 이 집의 벽에는 거창의 유명한 특산물인 거창사과가 탐스럽게 그려져 있다. 이어서 마을회관 앞 좌측 벽에는 자작나무들이 그려져 있다.

●‘자작나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자작나무는 추운 기후에 잘 자라는 나무로 높이 20m에 달하고 나무껍질은 흰색이다. 껍질은 옆으로 얇게 벗겨지고 작은 가지는 자줏빛을 띤 갈색이며 지점(脂點)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삼각형 달걀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가 있다. 뒷면에는 지점과 더불어 맥액(脈腋)에 털이 있다.

자작나무는 껍질이 아름다워 정원수·가로수·조림수로 심는다. 가구를 만드는 것은 물론 종이를 대신해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기는 데도 사용됐다. 큐틴(Cutin)이라는 방부제가 다른 나무보다 많이 들어 있어 잘 썩지 않고 곰팡이도 잘 피지 않아서였다.

또 자작나무는 몇 천 년을 땅 속에 묻혀 있어도 썩지 않고 거뜬히 버틴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물인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로 만들었고, 1996년 영국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경도 자작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자작나무가 그려진 것도 인상적이다. 이 나무는 마을을 늘 지켜보며 보호해준다고 믿어졌다.

 

 

자작나무에는 물도 잘 스며들지 않는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이점을 이용해 튼튼한 목재로 만든 카누(배)에 자작나무 껍질을 바른 다음 나무진으로 방수 처리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서 기름을 짜내 가죽 가공에 쓰는데, 이 가죽으로 책표지를 만들면 곰팡이이가 생기거나 좀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자작나무 나무껍질을 ‘백화피(白樺皮)’라고 하며 이뇨·진통·해열에 쓴다.

고대인은 자작나무의 눈처럼 생긴 모양에 신통력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자작나무가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작나무는 중요한 곳에 의도적으로 심었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가 중국의 돈황 주위에 있는 자작나무다. 이 나무가 돈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 있으니 이곳에서 도둑질 등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돈황에 있는 많은 석굴들이 지금까지 보존된 게 자작나무의 효력 때문이라고 믿기도 한다.

자작나무가 마을 초입에 그려진 자작나무는 황산마을에 와서도 ‘나쁜 짓 하기에는 틀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통 담은 ‘예술 벽화’ 보러오세요~”

황산마을과 연계되는 ‘수승대’와 ‘요수정’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은 벽화가 등장한다. 농촌의 상징인 힘센 소가 담장을 뚫고 나오는 사실적인 그림도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돌담에 예쁜 꽃들이 피어나고 나비가 날아다닌다. 강아지 두 마리가 목을 빼고 내다보는 그림도 정겹게 다가온다. 주인이 외출해서 빨리 돌아오기만 바라는 외로운 강아지 모습이 마을을 아름답게 만들며 귀여운 고양이도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

 

 

황산마을 근처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수승대‘의 모습(위쪽)과 담장을 뚫고 나오는 듯한 소(왼쪽 아래), 목을 빼고 내다보는 강아지 두 마리(오른쪽 아래)를 벽화로 그린 모습. 이종호 제공

 

 

벽화 재료가 다양하다는 점도 보는 이들을 즐겁게 만든다. 대부분의 벽화는 페인트로 그렸고, 타일을 이용해 사계절 동안 지지 않는 아름다운 꽃과 대나무 등을 그린 벽화도 있다. 또 거창의 자랑거리인 대리석 이용해 잠자리를 벽에 붙여 놓기도 했다.

벽화만 있는 게 아니다. 이웃집의 남매 모습의 조각을 담 안에 설치해 동심을 유발하는 조형물도 있다. 옛날 시골마을의 정겨운 생활을 그린 풍속도가 파노라마처럼 그려졌고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를 의미하는 ‘사신도’도 있다.

공공미술프로젝트가 시행돼 경남 통영군 ‘동피랑마을’, 울산시 ‘신화마을’ 등 많은 곳에 벽화마을이 생겼다. 황산마을이 이들과 다른 점은 수백 년을 이어 온 전통마을과 벽화를 조화시켰다는 데 있다.

 

 

시골마을 생활을 그린 풍속도(왼쪽 위와 가운데), 남매 조각을 설치한 조형물(왼쪽 아래), 사신도(오른쪽)의 모습.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벽에 그림을 그려놓은 점은 매력적이지만 벽화 골목이 하나뿐이라는 점은 아쉽다. 더구나 페인트로 그린 벽화는 3∼5년 안에 퇴화한다는 문제가 있다. 몇 년마다 새로 벽화를 그리는 등 관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현재 많은 마을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벽화그리기에 주력하는데 퇴화에 관한 대비책도 병행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이야기에 귀기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거북 바위에서 막걸리 한 사발로 풍류를 즐겨볼까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0-5>

 

 

황산마을의 진수는 도로 맞은편에 있는 ‘수승대(搜勝臺)’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승대는 그 자체가 황산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황산마을과 인연이 깊다. 이 때문에 전통마을 답사에도 반드시 포함되는데 지금은 이곳이 ‘수승대국민관광지’로 개발돼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황산마을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수승대국민관광관지가 있다. 위락시설을 지나 우측으로 몇 백m 떨어진 곳에 ‘관수루(觀水樓)’가 보이는데, 자연 그대로의 굴곡을 살린 나무 기둥이 천연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수승대‘로 들어가는 도중에 있는 ‘관수루‘의 모습. 이 누각은 황산마을 선비들이 수양했던 서원인 ‘구연서원‘의 문루다. 이종호 제공

 

 

이 건물은 구연서원의 문루인데, 구연서원은 황산마을의 입향조인 요수(樂水) 신권(愼權), 석곡(石谷) 성팽년(成彭年),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영조 16년(1740)에 건립한 서원이다.

관수(觀水)는 ‘맹자’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한 이름이다.

맹자에는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누각은 일반적으로 군현의 관아 소재지에 세우는데 트기 경치가 수려한 곳을 골라 짓는다. 누각은 고을 현감이나 중앙 관리가 일정한 날을 선택해 인근 선비들을 불러 시회(詩會)나 연회를 열기도 하고, 평소 고을 사람이 올라 쉬거나 더위를 피하기도 하는 장소다. 결국 누각은 고을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이기 때문에 사찰 대웅전 앞이나 향교와 서원의 입구에 누각을 세워 그 건물의 격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구연서원‘의 모습. 매년 이곳에서는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린다. 이 서원 왼쪽에 수승대가 있다. 이종호 제공

 

 

관수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계자난간 팔작지붕이다. 커다란 거북이 형상을 한 자연석 위에 세운 활주와 휘어지고 굽어 용트림하는 형태의 기둥을 사용한 게 특징이다. 관아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휘어진 기둥을 사용한 것은 고의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추진한 의도로 추정된다.

관수루 뒤로 구연서원이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거창의 자랑인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린다. 구연서원 좌측으로 유명한 거북 모양의 특이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승대’다.

●퇴계 이황이 지어준 이름 ‘수승대’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거북 모양의 연못)을 만들면서 빚어 놓은 거북 모양의 커다란 천연바위 대(臺)다. 대의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에 이르며,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과 같아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도 한다.

 

 

구연서원 왼쪽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인 ‘수승대‘. 수승대에서 이별하면 다시 볼 수 없음을 슬퍼하는 뜻에서 ‘수송대‘로 불리던 것을 퇴계 이황이 수승대로 고쳐 불렀다. 이종호 제공

 

 

수승대는 원래 ‘수송대(愁送臺)’라고 불렸다. 백제 국세가 쇠약해져 멸망할 무렵, 백제 사신을 이곳에서 송별하면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해 ‘근심 어린 송별’이란 뜻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1543년 퇴계 이황이 이곳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으로 고칠 것‘을 권해 이름이 바뀌었다. 또 이황은 사율시(四律詩)를 지어 신권에게 보냈는데 그의 시가 바위둘레에 새겨졌다.

 

 

반대쪽에서 본 ‘수승대‘의 모습. 거북의 등과 다리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종호 제공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 하노니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먼 산의 꽃들은 피어나려고 하고
응달의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

수승대를 찾아 구경하지 못했으니
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
수승의 절경을 만끽 하리라.’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루를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이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바위 한쪽에는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 장주갑(藏酒岬)이 있다. 이곳에 막걸리를 한 말 넣었다가 스승의 물음에 합격하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받아먹었다고 전한다.

●사계절 볼거리 가득해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구연교를 지나면 요수 신권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요수정(樂水停)’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자연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했다. 정자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종보가 있는 5량가로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 정연한 부채살 형식의 서까래를 배치했다. 세부장식에서 격조가 높으며 양반을 위한 정자양식이 잘 반영돼 있다.

 

 

 

신권 선생이 제자를 가르쳤던 ‘요수정‘의 모습. 자연암반을 주춧돌로 그대로 썼으며 거창 지역 특색이 드러나는 건축물이다. 이종호 제공

 

 

특히 이 건물은 추운 산간지역 기후를 고려해 정자 내부에 방을 놓기도 하는 등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거창 지역의 대표 건축물이다.

여름철 수승대교 아래는 야외수영장으로 바뀌며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린다. 한편 봄부터 가을까지 오리배와 보트를 탈 수 있는 유선장도 운영하며 사계절 썰매장도 가동한다. 더불어 황산마을에서는 약 10여 가구가 민박을 운영해 옛 선조들의 주거생활도 체험할 수 있다.

인근에 덕유산·가야산·지리산이 있고 신라 때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영취사의 부속암자로 지은 송계사와 송계사계곡, 거창조각공원, 금원산자연휴양림, 월성계곡, 거창박물관, 화계사, 쌍계사계곡 등의 관광지가 있다.

 

참고문헌 :
『궁궐의 우리나무』, 박상진, 눌와, 2002
『과학삼국사기』, 이종호, 동아시아, 2011
『한옥마을』, 신광철, 한문화사, 2011
「산수향의 고장 거창」, 장원수, 네이버캐스트, 2009.06.15
「한옥에서의 하루」, 한국관광공사, 2012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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