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世上萬事

포크 대부 한대수 / 대한민국 구라열전

경호... 2015. 7. 23. 00:37

 

원재훈 詩人이 쓰는 대한민국 구라열전 ③ 한대수

 

사회가 답답해서 목말랐던 시절 그는 ‘물 좀 주소’를 외쳤다

 

“옥사나(한대수 부인)는 영어로 말하고, 엄마는 한국말 하니까, 고부갈등이 없어요. 서로 무슨 말 하는지 모르거든, 우하하하.”

 

⊙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언어는 ‘소외’와 ‘고독’”
⊙ 할아버지는 연세대 대학원장, 아버지는 당대 최고 핵물리학자
⊙ 파란만장한 가족사의 유산: 초등학교는 한국에서 입학, 미국에서 졸업. 중학교는 미국에서 입학,
    한국에서 졸업. 고등학교 입학은 한국, 졸업은 미국

 

 

 

인터뷰를 마친 한대수씨가 신촌의 단골 포장마차에서 주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며 활짝 웃고 있다.

 

 

한대수의 책 《뚜껑 열린 한대수》를 읽다가, 그가 신촌 뒷골목 모텔촌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가파른 언덕길을 한대수는 겨우겨우 가고 있다. 계단 중간에 벽을 짚고 두어 번 어이구 소리를 내면서 쉬었다 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역광(逆光)으로 어둡게 보이는 한대수의 뒷모습은 생(生)의 일몰(日沒)에 서 있다. 사람이 들지 않고 새만 날아오는 깊은 숲속에 아름답게 불타는 단풍의 절정, 기어이 한 번 터지고 마는 소리꾼의 절창. 이런 이미지들이 어우러진다.

 

시월이 저물어 가던 날, 신촌에서 그와 이야기를 다 마치고 인사를 하고 나서도 나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가 집으로 올라가는 길을 바라본다. 이윽고 계단을 다 올라간 그가 저녁 노을 사이로 사라진다. 잠시 뒤, 나는 그가 걸어 올라간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가면서 세어 보았다. 그가 방금 찍어 놓은 발자국을 그대로 밟았다. 하나, 둘, 셋, 넷,…, 계단은 모두 50개였다. 두 번 오르락내리락하니까 아직 젊은 내가 숨이 차다. 힘겹다. 목 마르다.

 

그 계단은 어쩌면 그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행로인지도 모른다. 한대수. 이제 나이가 예순넷이다. 그의 인생 오십 년간 하이웨이를 바람처럼 구름처럼 달리다가 오십에서 만난 가파른 인생의 계단, 이제 열네 계단 정도는 올라갔다. 그 길은 다른 길이다. 바람의 날개를 달았던 그의 어깨에는 ‘두 딸’이 있다.

환갑에 낳은 ‘양호’와 알코올릭 아내 옥사나이다. 두 사람을 돌보는 일이 그에게는 가장 큰 일이다. 북청물장수가 양 어깨에 물동이를 메고 가듯, 그는 무거운 물동이를 메고 올라간다.

 

사랑과 절망, 결혼과 이혼

 

이야기 도중에 한대수는 이런 말을 했다.

 

“하늘은 참 공평해요. 난 태어나서 50년간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인생을 살았어. 여자도 많이 만났고, 어려운 시절에 내가 하고 싶은 음악도, 사진도 찍으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았지.

그런데 인생 100년이라면 나머지 오십년은… 하하하. 이거 참, 양호하지 못해. 하하하.

하지만 내 딸 양호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지금부터는 구속당하는 거지. 족쇄야. 버릴 수 없는 십자가지.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인데, 아주 지독한 중독자야.

내가 책에도 썼지만 그녀 집안의 이력이기도 해. 중독은 치료가 안되는 건데, 기적이 일어나서 옥사나가 정상인 된다면 좋은 거고. 안되면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해. 중독은 암보다 무서워.”

 

요 몇 달 사이 한대수는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다. 그의 가계와 노래에 대해서 여러 매체를 통해 훤히 드러났다. 과거의 전설이 신비감을 걷어낸다. 그게 좀 섭섭한 일이긴 하다. 그가 “자, 이제부터 인터뷰 시작합시다”며 스타트하는데,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하는 노랫말이 담긴 그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 노래 말이야. 이런 사연이 있지요. 젊은 시절 내가 미국 뉴욕의 이스턴 빌리지에서 거지처럼 살아가니까. 지금은 부촌이지만 그때만 해도 빈민가였어. 한국에서 외삼촌이 와서 보시고는 너무 한심하니까 엄마에게 돌아가라고 해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어. 엄마는 내가 어린 시절에 재가를 하셔서 서울 명륜동의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별채가 있었어. 난 거기에서 기타 치고 작곡하면서 아주 잘 살았어, 용돈도 많이 받고. 그 시절 한국에 와서 음악을 한답시고 막 돌아다녔지. 그렇게 해서 김민기, 양희은씨가 내 노래를 불렀지. <행복의 나라로> 같은 노래 말이야.

 

방송국에 왔다 갔다 하다가 양호한 여자를 만났지. 한참 젊은 날이니까 양호한 여자를 만나는 거지. 그리고 여자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줘야 그게 젠틀맨이란 말이야. 하하하.

그 별채에서 애인하고 연애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 별이 쏟아지려는 그 순간에, 흑, 엄마가 문을 벌꺽 열더라구. 우하하하. 하늘에 별이 쏟아지려는 그 순간이 뭔 말인지 알지. 야, 미치겠더라구.

당대 선비 집안의 따님이신 엄마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말이야. 아이고 말도 마. 하여간 그길로 집에서 쫓겨났어. 그래서 어떡해. 성균관대학 뒤쪽에 있는 판자촌으로 옮겼지. 주인방 옆에 있는 곁방에 쪼그리고 있는데 내 신세가 참 한심하잖아. 화폐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우울한 기분을 날려 버리려고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바람아 불어라 불어. 불고 또 불어라.’ 이렇게 시작하는 <고무신>, 답답하니까 <물 좀 주소>를 거기에서 만들어 불렀어.

한두 시간 만에 작사 작곡을 했어. 그땐 집도 사회도 정말 목마르더라구.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이었는데, 그때 장발로 다니니까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으면 ‘어, 이 새끼 남자네’라고 놀려대던 시절이었어. 여러 가지로 사회가 답답했어.”

 

한대수는 이런 글을 적었다.

 

<내가 왜 음악을 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어떤 자극이나 영감을 얻으면 나도 모르게 노래가 만들어진다.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형식도 없고 일정한 법칙도 없다.

(…)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언어는 ‘소외’와 ‘고독’이었다. 그리고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음악을 한 것 같다. 작곡으로 내가 가진 고독과 분노와 갈망을 표현했고, 노래를 부르며 해소의 숨소리를 토해냈다.

창작활동은 내게 나만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찾으려는 출구이자 변명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청년이 되어 사랑과 절망,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면서 음악은 나의 또 다른 탈출구가 되었으며 고독의 방패가 되었다.>

 

 

대중음악계에 거센 복고 열풍을 불러일으킨 ‘세시봉 친구들 콘서트’가 일부 출연진을 교체하고 이름도 ‘세시봉 친구들 두 번째 이야기’로 바꿔 새로운 전국 투어에 나섰다. 가수 윤형주(64)씨가 빠지고 대신 한대수(63), 정훈희(60)씨가 새로 합류했다.

 

 

아버지의 실종

 

기타 연주 중인 한대수씨. 그의 노래에는 짙은 소외와 고독이 배어 있다.

 

 

한대수가 젊은 날을 살던 공간은 미국의 다락방과 한국의 별채로 정리된다. 다락방은 아버지, 별채는 엄마를 상징한다. 이 상징이 바로 소외와 고독이다. 미국의 다락방은 실종된 아버지 한창석씨를 다시 만나 몇 년간 같이 지낸 공간인데,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없는 소외의 공간이었다. 재가하신 엄마 집의 별채에서 다시 머물기는 했지만 고독한 공간이었다. 부모의 한공간에서 지낸 경험이 없는 그는 바람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공간이 인간을 규정한다는 명제 아래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어린 시절, 조부모의 품에서 성장하고, 성장하여 부모를 만났지만 가족을 느낄 수는 없었다. 가족을 느낄 수 없었던 그 세월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이다.

 

“내가 아버지, 엄마 이렇게 좀 불러 보고 싶었어. 난 어려서 그 소리를 한 번도 못하고 자란 거지.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되냐고 물었어. 아주 어릴 때지. 할아버지가 허허 웃으시면서 그건 안 되지 라고 하시더군…. 그래 그건 안 되는 일이지. 할머니를 엄마라고도 할 수 없었어. 아버지는 그런 거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아버지가 되면 자식을 돌봐야 돼.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을 버리거나 그래서는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우리나라 최초의 싱어송 라이터로 일세를 풍미한 한대수. 그는 이 풍진 세상을 살아온 가객(歌客)이다. 그의 출생과 현재의 위치에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언론에서 한대수의 부친인 한창석씨는 비교적 자세하게 조명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한영교씨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한 우리 근대사의 한 인물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려고 하셨는데, 연세대의 언더우드 박사는 신학을 권했지. 음악은 부전공으로 하라고 말이야. 당시 시대적인 요청이었어. 미국에서 신학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연세대학교, 당시는 연희전문이었지, 초대 신학대학장과 대학원장을 겸임했는데, 이분이 음악과 사진을 좋아했어요. 할아버지처럼 나도 음악과 사진을 하잖아.”

 

한대수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할아버지의 사랑이 없었다면 자신이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친부모가 없는 탓에 할아버지가 사랑으로 손자를 키운 것이다. 그럼 어머니는 어떠한가.

 

“우리 엄마 18살, 우리 아버지 19살에 결혼해서 일 년 후에 날 낳았어. 백일잔치를 하고 아버지는 스무 살 청년으로 서울대 공대에서 미국 코넬대학으로 갔는데, 핵물리학을 전공했어. 미국에 양호한 물리학자 에드워드 델리의 양호한 제자였지. 집안과 나라의 자랑이란 말이야. 이렇게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아버지가 연구를 하다가 실종이 되어 버린 거야.

엄마는 19살 나이로 혼자가 된 거야. 그렇게 7년을 계시다가 재가를 하셨어.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살았는데, 어르신들이 대수가 청년이 될 때까지는 연락을 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나 봐. 사춘기에 그런 일 있으면 아이에게 안 좋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엄마가 재가하신 나이가 그래야 스물다섯 살이잖아. 요즘에 보면 아직 애들 같잖아. 하하하.

엄마하고는 지금도 자주 연락을 하고 살아. 우리 옥사나하고도 사이가 좋아요. 옥사나는 영어로 말하고, 엄마는 한국말 하니까 고부갈등이 없어요. 서로 무슨 말 하는지 모르거든, 우하하하.”

 

韓美 간 극비사항이었던 부친의 실종

 

아버지의 실종은 한미(韓美) 간에 극비사항이다. 돌아가실 때까지 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한대수 사진을 보면 양호와 할아버지가 마주 보는 장면이 있다. 임종을 앞둔 한창석씨의 표정을 양호가 보고 있다. 그때 그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잠시 자신의 실종에 대한 생각을 했을까, 한대수가 찍은 그 사진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실종은 무서운 일이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지, 뭐. 지금도 핵 가지고 저 난리들을 치잖아. 그건 매우 불온한 국가 간의 일이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실종은 한국과 미국에서 아마 영원히 봉인되겠지. 그건 그렇고, 우리 아버지 엄마, 내가 딱 한 번 서울에서 모인 적이 있어. 헤어진 지 오십 년 만에 말이야.”

 

그 이야기를 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한대수는 번호를 보더니 급하게 받는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도 따라 일어난다.

 

그날, 신촌에서 젊은 시절 우리들의 우상을 만났다. 그는 칠팔십 년를 보낸 우리들의 전설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한대수는 다른 모습이다. 부인 옥사나의 전화를 받고 눈빛이 흔들렸다. 감각적으로 알 수 있다. 한대수는 지금 불안하다.

 

“중독자여서,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안 돼요.”

 

영어로 한 통화의 내용은, “옥사나, 지금 일어났나? 그래, 나 지금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있어. 다음 스케줄은 없어. 끝나는 대로 금방 갈게” 이 정도였다. 그 통화를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 한대수가 아침마다 출근을 하고, 잠시도 가정을 비울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그건 모든 가장의 일이기도 하다.

한대수는 지금 어린 딸과 아픈 아내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인터뷰를 계속할 수는 있는 건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말을 했다.

 

“그때가 말이야. 언제였더라… 그래 1998년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어요. 유니텔 록콘서트 자리였는데,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서 한국도 한번 볼 겸 해서, 50년 동안 한국에 오지 않으셨는데, 이번에 내가 공연을 하는데 올 수 있냐고 했더니 오겠다고 하시더군. 역시 엄마에게도 내 공연을 보러 오라고 했지. 아버지는 한국에 아마 처음 들어온 거야. 엄마도 아버지가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오시고 말이야. 그렇게 무대 뒤의 대기실에 우리 가족이 모였어.

그런데 말이야. 허, 참. 엄마 열아홉, 아버지 스물에 헤어진 거란 말이야.

… 엄마가, 칠순이 넘으신 엄마가 아버지를 보더니 갑자기 열아홉 살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라고….

살짝 고개를 돌리시면서 수줍어하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야.

당신…, 옛 모습하고 똑같아요. 하나도… 안 변했네요.”

 

아버지 역시 그런 말을 했다. 그 사이에서 아들이 통역을 했다. 아버지는 실종된 15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완벽한 미국인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미국의 정보부를 비롯한 각계에 연락을 해서 겨우 아버지를 찾았을 때 아버지는 미국에서 인쇄업을 하는 성공한 사업자고 미국 가족과 살고 있었다.

처음 아버지를 만났을 때,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생각하는, 거죽만 동양인이었다. 그건 정말 신기한 일이라고 한대수는 말했다. 그런 아버지가 엄마를 만나 오십 년의 세월을 잠시 지웠다. 그때 한대수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그런가, 그 가족사진이 있는가?

 

“그런데 말이야. 거참, 그 사진이 한 장도 찍히질 않았어. 중만이(사진가 김중만)가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친구가 사진 조작을 잘못해서인지 필름이 헛돌아가서 인화를 해 보니까 전부 깜깜밤중이야. 그래서 우리 가족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어. 명색이 내가 사진작가인데 우리 가족사진이 없단 말이야. 우하하하.”

 

이것이 한대수 가족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결국 가족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

 

 

시대와의 불화

 

1969년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첫 번째 콘서트를 갖고 있는 한대수씨

 

 

그는 음악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교회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했으며, 그 인연으로 할아버지의 며느리가 되었다. 즉 음악이 우리 가족을 모아준 시멘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는 태어났고, 매일같이 우렁차게 울리는 음악을 들어 가며 방바닥을 기어다녔다. 음악은 피할 수 없는 집안의 공기였다.

 

내가 직접 음악을 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이다. 기타를 잘 치는 친구에게 기타를 배우게 되면서, 당시 내 우상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헤어스타일도 엘비스와 똑같이 포마드를 바르고 스타일링을 했다. 뒤이어 접한 비틀스는 내게 ‘너도 곡을 쓸 수 있어’라고 용기를 주었고, 밥 딜런이 등장해 ‘가사에도 너의 생각을 담을 수 있어’라고 가르쳐 주었다.

 

내가 내 자신을 거울로 삼아 살아온 과정을 되비춰 보면 참 희한하다. 왜 그렇게 굴곡이 심했고 변화가 많았는지, 그것도 동서양을 오가며 말이다. 나는 한 나라에서 학교의 입학과 졸업을 마친 적이 없다.

초등학교는 한국에서 입학하고 미국에서 졸업했다. 중학교는 미국에서 입학하고 졸업은 한국에서 했다. 고등학교 입학은 한국, 졸업은 미국이었다. 대학과 전문학교에서는 ‘칭총’(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으로 불렸고, 한국에 오면 ‘양키’라고 놀림받았다.

(중략)

왜 나는 음악을 하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내가 2주일 전에 작곡한 ‘When I Was A Child’는 며칠 전 내 마누라 옥사나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우리 마누라가 만취한 상태에서 자기 부모를 그리워하면서 동시에 원망하는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옥사나의 부모는 옥사나가 아주 어릴 때 이혼을 했고,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 옥사나의 모습을 통해 나도 부모 없이 자란 내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었다.

(중략)

이 극복할 수 없는 상처가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또 그 상처가 없다면 내 음악도 없었을 것이다. 작곡은 내 마음의 상처의 치유다. 그리고 내 음악이 여러분들의 상처에 치유가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작곡을 한다.>

 

간혹 한대수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벽에다 대고 울부짖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대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한대수는 자신의 젊은 시절에 이 땅에서 추방당한 시인으로 살았다. 그는 머무를 수가 없었다. 역시 너털웃음을 날리면서 말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프리카 수단보다 가난한 나라였어. 젊은이들이 쌀밥 먹는 게 소원이었어. 계란 프라이하고 말이야. 지금은 그거 누가 거들떠나 보나. 모든 게 너무 풍요로워서 비만 환자들이 득실대잖아.

하지만 그땐 엄청 가난했어. 박정희 정권은 경제였지. 가난 극복이 최우선이었어.

그때 내가 머리를 기르고 청바지 입고 히피로 나타났단 말이야. 나라에서 보기에 이건 말이 안되는 거지. 시대 상황과 안 맞았어. 내가 가족과 어긋난 것처럼 난 시대와도 어긋났지. 그러나 땀과 피가 필요한 시대에 문화적인 비타민도 필요하단 말이야. 그런 시대에 난 더 튀어나가려고 했어. 너무 튕겨져 나가 결국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어.”

 

그의 노래는 당대에는 금지곡들이 많다. 하긴 이장희의 ‘그건 너’라는 노래가 남 탓 한다고 금지를 하던 시대였다. 한대수는 미국에서 아버지를 만나 도망치듯 돌아온 한국, 명륜동 엄마의 별채에서도 쫓겨났고 모국의 한 귀퉁이에서도 정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정신은 어느 나라에나 있단 말이야. 대영제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여왕 물러가라고 절규를 했잖아. 사회에 대한 분노, 시대에 대한 절망에서 난 노래를 부른 거야. 그냥 터져 나온 거지. 그런데 묘한 것이 지금의 젊은이들 모습이 내 젊은 날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는 거지. 이렇게 풍요로운 시대에 말이야. 내가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요즘 젊은이들이 유학이니 뭐니 해서 해외에 다녀오고 나서 우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있겠나? 그거 비슷한 거야.”

 

탄생과 소멸, 만남과 결별, 사랑과 고통. 이러한 연결고리는 싯다르타의 무념, 무상, 무심한 세상으로 가고자 하는 한대수의 노래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화폐를 모아야 해”

 

 

딸 양호를 안고 작품 사진을 들춰보고 있다

 

 

당대 젊은이들은 그 생명수를 한방울 먹으려고 싸구려 선술집이나 어두운 골목길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외치듯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가 정작 한국에서는 가수들이 번안가요를 부르던 시절, 미국에서 돌아와 우리나라 노래라 할 수 있는 창작곡으로 노래를 부른 것은 다양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 중심에는 몽골과 같은 대지, 유목민의 대지와 바람이 분다. 바람이 한대수의 사연을 만나 흔들리고 외치고 흐느끼는 것이다. 사연이 맺혀 있음으로 그의 노래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탄생한다. 그의 노래는 시대의 체증이 풀리듯 쑥 빠져나오는 것이다.

 

내가 만난 2011년의 한대수는 십자가를 지고 있었다. 그의 표현대로 상당히 무거운 인생의 짐이다. 바람의 나라에서 살았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가 말했다.

 

“우선 난 나이가 너무 들었어요.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힘들어. 그리고 이 나이에 화폐를 벌기 위해 아침에 방송국에 가서 일을 하잖아. 그럼 부인이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 놓고 굴비 한 마리 구워 놓고, 마누라와 딸이랑 저녁 먹어야 되잖아. 하하하, 그게 안돼.

난 저녁이 되면 아내와 딸을 돌봐야 된다고. 이제 우리 양호가 네 살이야. 환장하는 거지. 그래서 난 화폐를 벌어야 돼. 하하하.”

 

신촌의 한 포장마차. 오뎅 하나를 간장에 발라 먹으면서 한대수는 말했다. 떡볶이와 튀김, 순대를 비롯한 분식 포장마차를 한대수는 고급 레스토랑이라고 소개했다.

‘레스토랑’의 주인 아줌마는 양호를 무척 예뻐한다고 했다. 너무 ‘예쁜 아이’라고 주인이 말한다. 가끔 양호와 여기에서 분식을 먹는 것 같다.

 

“출출하면 여기서 오뎅 하나 먹고 화폐를 모으는 거야. 양호가 대학에는 가야 되니까 말이야. 숙녀가 될 때까지 내가 돌봐야 돼.”

 

그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첫 아이를 얻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아빠’소리를 들었다. 양호의 영어 이름은 미셸, 그리스어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는 원한다. 딸이 양호하게 자라서 양호하게 살고, 양호한 사회를 형성해 가는 양호한 일꾼이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대수의 눈에 비친 세상은 험하고 악의 씨로 뿌려졌고 정의롭지 않다.

삶 자체를 고뇌로 본다. 이러한 인생에서 열심히 일해서 행복을 찾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는 양호에게 고통을 피하지 말고 맞서서 이겨내고 행복의 나라로 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옆에 있어야 한다. 한대수는 양호를 통해 이 세상을 다시 보았다. 바로 자본주의다.

 

“나이 육십에 자본주의를 알았어. 사실 노래 부르는 남자 혼자 살면 화폐가 뭐가 필요해. 그냥 사는 거지.

하지만 화폐가 말이야. 그게 없으면 양호가 거지가 돼. 처음으로 자본주의가 무서운 것을 알았지.

양호 전에는 자본주의가 뭔지 몰랐어. 요즘엔 항상 화폐를 준비하고 있어야 해. 갑자기 양호가 아프면 병원에 가야 되잖아. 화폐를 모으면서 오래 살아야 돼. 난 오래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어. 하지만 이젠 좀 살아야 해.”

 

그는 양호에게 보내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물이다. 돈 없으면 죽는다. 돈만 있으면 못하는 게 하나도 없다. 단 인간의 마음만 빼고는.

 

일을 해야만 돈이 생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몸을 움직이면 식욕도 생기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 가장 돈을 많이 벌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어떠한 사람과 거래를 하느냐에 따라 액수가 변한다. 그러니 항상 자기 분야에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하라. 아마추어는 절대 피하라. 피곤하기만 하고 돈도 안된다.

 

돈은 제일 먼저 너와 너의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써야 한다. 자기 가족도 돌보지 못하면서 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기 가족의 생활이 풍요롭게 이루어진 후 돈의 여유가 있을 때 남을 도와라. 너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너의 돈의 가치가 제곱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너에게는 작은 돈이 다른 사람에겐 아기 병원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성서에는,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남을 금전적으로 돕는 것은 필수로 적혀 있다.

 

절대 도박은 하지 마라. 역사적으로 도박해서 돈을 번 사람은 없다. 벌었다고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도박은 간단히 말해 중독이다. 로또도 사지 말고 라스베이거스 슬롯머신도 당기지 마라. 계에도 들지 마라. 도박은 너의 집과 너를 망하게 하는 길이다.>

 

 

‘화폐’란 말과 ‘양호’란 말

 

 

늦둥이 양호 양의 첫 돌잔치를 앞둔 한대수, 옥사나 부부가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신촌 한 오피스텔에서 몽골식 복장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대수에게는 ‘양호 이전의 한대수’와 ‘양호 이후의 한대수’가 있다. 이런 극명한 인생의 전환점은 바로 가족이었다. 그는 아버지 무덤에 안 가겠다는 극단적인 가족 부정주의자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내준 것이 또한 가족이다. 이런 아이러니. 그래서 한대수의 말과 노래에는 유머와 풍자가 넘친다.

 

자신의 고통을 채찍질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요하다. 그나마 없으면 돌아버린다. 그의 유머는 태생적인 것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한대수에게 “너는 너무 싱거워서 소금공장 딸과 결혼을 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대수는 실제로 부산 소금공장 딸과 사귀고 있었다며 웃었다. 소금은 빛과 더불어 생명의 상징이다. 그의 노래는 싱거운 시대의 소금이었다. 지금도 유효하고 절실하다.

 

궁금한 것이 있다. ‘양호하다’와 ‘화폐’라는 한대수표 ‘구라’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아, 그거. 그래, 내가 양호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 예쁜 여자를 봐도 ‘양호하다’고 말해. 그건 내가 미국에서 다시 한국에 돌아온 지난 1998년·99년 경부터 쓰기 시작한 건데, 어쩌다가 좋은 일을 보고 ‘양호합니다’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웃어요. 웃으면 좋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양호하다는 말을 쓰기 시작했지. 뜻도 좋고 말이야. 그리고 화폐는 공연이나 출연을 하고 나면 돈을 받는데, 거 돈이라는 말을 좀 하기가 그렇더라고.

돈을 얼마나 주나요. 출연료는 얼마입니까. 돈은 언제 줍니까. 이러기가 좀 그렇잖아. 예술가가 말이야. 그래서 화폐라고 했지. 그랬더니 사람들이 또 웃어요. 그래서 이거 써먹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신촌 뒷골목 모텔촌 사이로 난 계단을 오르는 한대수씨.

 

 

묘하게도 이 두 단어는 지금 그의 인생의 말이 되었다. 딸 이름이 양호, 필요한 것이 화폐이다. 그가 가장 많이 쓰고 필요한 말을 그는 유머로 풀어낸다. 그는 항상 웃었다. 심각한 일이 있어도 사람들 앞에서 “하하하” 하고 웃어 버린다.

 

“그래, 우리 사회는 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유머 감각이 모자라. 가난한 시절에는 가난 때문에, 지금은 지금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그럴 때 유머가 필요하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일본·러시아·중국, 뭐 이런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기적적으로 살아가고 있잖아. 외국에 나가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치를 보고 그 위상에 대해 정말 놀랍다고 하지. 더군다나 분단국가에 살고 있어요. 이중고(二重苦)지.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심각해, 심각해. 모든 게 심각해. 그래서 문화 비타민이 필요한 거지. 유머로 푸는 거야. 내가 엄마에게 쫓겨나서 왜 고무신을 떠올리며 좋아 좋아 했겠어. 하하하.”

 

한대수는 너털웃음을 자주 날린다. 신호처럼 보인다. 횡단보도의 녹색등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인생에서 고스란히 묻어나는 잠언들이다. 신촌에 많은 사람들, 그 사이에서 이야기도 하고 오뎅도 먹고 차도 마셨다. 한대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웃었다. 카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그는 문득 말했다.

 

“아이 스탠드 온리 원(I stand only one). 니체가 그랬지요. 양떼가 어울려 풀을 뜯으면 안전하다. 홀로 풀을 뜯으면 고독하다. 나는 고독하고 심각한 사람이에요.”

 

한대수를 표현하는 여러 가지 말 중에 ‘평화양호당’ 당수가 있다. 내가 만난 한대수는 평화를 위해 화폐를 부지런히 모으면서 사랑을 베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글의 서두에 나는 50계단 이야기를 적었다. 묘하게도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신촌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다. 밥을 먹고 나는 다시 그 계단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 모텔들의 네온사인이 요란하다. 수상한 사람들이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모텔을 찾고 난리가 났다. 난 우두커니 그 계단을 바라보았다. 한대수 선생에게 전화를 할까, 뭐 좀 더 물어볼까 하다가 계단을 다시 한 번 올라가고 내려왔다. 우하하하, 눈물이 난다. 마침표는 이걸로 찍자. 그날 밤엔, 한대수의 노래를 몇 곡 들었다.

 

 

원재훈
⊙ 50세.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1988년 《세계의 문학》에 <공룡시대> 外 여러 편의 시로 등단.

 

/ 월간조선

 

 

 

 

한대수 - 행복의 나라로(Last ver.)

 

 

포크록 창시자 한대수, 생애 마지막 녹음!

1974년 '물좀주소'로 파격적인 데뷔, 히피문화를 선도한 한대수는 청년 한대수가 아닌 할아버지 한대수, 양호 아빠 한대수의 느낌으로 last 버전, sad 버전 두가지 버전의 2011년판 '행복의 나라로'를 선보인다.

'생애 마지막 녹음'이라는 타이틀로 딱 한번, 원테이크 녹음으로 진행된 이번 레코딩에서 한대수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여유로움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녹음은 9월 방송 예정인 MBC 창사 50주년 다큐멘터리 '웃으면 복이와요' 제작진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음원과 함께 '웃으면 복이와요' 편집영상도 일부 공개된다. 한대수는 '웃으면 복이와요'를 통해 자신의 웃음과 노래 및 '행복의 나라로'의 마지막 녹음 현장과 거칠고 무뚝뚝한 이미지의 한대수가 아닌 세월이 흘러 인생과 융화되어 느껴지는 한대수의 유쾌한 카리스마를 보여줄 예정이다.

 

 

물좀주소 - 한대수

 

 

 

 

한대수 - 바람과 나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 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넘어 물결 같이 춤추던 님
무명(無名) 무실(無實) 무감(無感)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 볼래 지녀 볼래
물결 건너 편에
황혼에 젖은 산 끝 보다도 아름다운
아 나의 님 바람
뭇 느낌 없이 진행하는 시간 따라
하늘위로 구름 따라
無目(무목) 여행하는 그대
인생은 나 인생은 나

 

 

 

하룻밤(공동경비구역 JSA)

 

하룻밤(공동경비구역 JSA)  / 한대수


하룻밤 지나서 저 초가집 안에 구수한 나뭇내 맡으며
오르는 새 하늘 날으는 흰구름 긴 숨을 한 번 또 쉬자

비치는 새 태양 참새의 첫울음 이 모든 것은 나의 새 세상
뛰어라 염소야 새날을 맞으러 첫 발자국 듣기 전에

 

새벽에 빛나는 펴진 바다 보면서 모래 차며 바닷가로 거닐 때
두 손이 두 마음을 잡고 연결해 말도 없이 웃는 얼굴들

하얀 갈매기는 옆을 지나가면서 기쁜 맘의 노래소리 들리네
그대여 가볼까 저 수평선 아래 파도 아래 슬픔 던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