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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중요민속자료 제255호)[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경호... 2015. 7. 23. 00:44

대쪽같은 선비의 기개가 느껴지는 마을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1-1>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중요민속자료 제255호)

 

황산마을의 벽화와 수승대 등을 한껏 맛본 후 경북 성주군 대산리 한개마을로 향한다. 한개마을은 2007년 전국에서 7번째로 지정된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다. 조선시대의 전통마을의 한식기와와 초가, 변형가옥 등 모두 75채의 가옥이 짜임새 있게 잘 배치됐으며,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10동의 건축물이 있을 정도로 한국의 미가 듬뿍 들어있는 곳이다.

 

한개마을의 전경. 이 마을은 풍수지리에 따른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를 하고 있다. 이종호 제공

 

 

한개마을의 한자 이름은 대포리(大浦里)인데 ‘큰 개’ 대신 ‘한 개’라고 부르며 여기서 ‘개’는 포구라는 순우리말이다. 그러므로 ‘한개’란 마을 이름은 예전에 큰 개울 또는 나루가 있어서 붙인 순우리말 이름이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에 따른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원칙을 따르고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마을 뒤로 영취산(331.7m·신령스러운 독수리산)의 줄기가 마을을 감싸듯 청룡?백호로 뻗어있다. 덕분에 이 마을은 영남 제일의 길지(吉地)라고도 알려진다.

마을 중심에서 800m 떨어진 곳에 높이 약 70m의 ‘안산(案山)’이 위치하는데, 이 산은 주산에 비교해 너무 높거나 크지도 반대로 작지도 않다. 한개마을 가옥은 영취산 산자락 해발 40?70m 범위에 남서쪽으로 마을과 집들이 향하며 남에서 북으로 차차 올라가는 전저후고(前底後顧) 모양을 하고 있다.

●꼬장꼬장한 선비 이야기 서린 이씨 집성촌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성산이씨인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해 개척한 집성마을이다. 이우는 세종 때 진주목사와 경기좌도수군첨절제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성산이씨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때는 이우의 6대손이며 퇴계의 직계 제자인 월봉 이정현(李廷賢)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다.

월봉은 과거에 급제한 후 홍문관정자에 임명됐으나 안타깝게도 그해에 26세 나이로 요절한다. 월봉에게는 외아들 수성(壽星)이 있었는데, 그가 아들을 넷 뒀고 이들이 모두 마을에 정착해 성산이씨 각 파의 시조가 됐다.

이들 후손이 씨족마을을 형성한 한개마을은 17세기 중엽인 이수성 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한계마을에서 대과급제자 9명과 소과급제자 24명을 배출해 조선의 양반마을로서 위상을 갖춘다.

꼿꼿하고 강직한 한개마을 선비 이야기는 놀랍다.

돈재 이석문은 영조 38년(1762) 나이 50살 때 무겸(선전관청에 속한 무관)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가 갇혀 있는 뒤주에 돌을 올려놓으라고 명령하자 그는 어명을 거절했다. 그리고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업고 들어가 육탄으로 영조에게 직언하다가 곤장을 맞고 파직될 정도로 기개를 보였다.

한주종택을 중건한 한주 이진상은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 생원이 됐다. 그러나 혼탁한 세상이 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근세 유학 3대가로 불리는 대학자로 성장한다. 중앙 정부는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유일(遺逸·학행과 덕성이 높은 재야의 선비를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의금부 도사(都事)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67세이던 그는 이마저도 거절했다.

이 같은 한개마을의 기질이 이어져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한주의 아들 이승희(건국훈장 대통령장)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고, 이기형(건국포장), 이기정(건국훈장 애족장), 이기원(건국훈장 애족장), 이기인(건국훈장 애족장), 이기윤(대통령표창) 등이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한개마을 선비의 기개를 드높이기도 했다.

 

 

 

 

3대 전통마을 중 하나, 큰 개울가 ‘한개마을’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1-2>

 

 

한개마을은 하회마을, 양동마을과 더불어 3대 전통마을로 꼽힌다. 한창 번창했을 때 이 마을 가구가 100호가 넘었으나 현재는 약 70여 호 정도로 줄었고, 이 중 약 20호는 빈집이다. 사람이 사는 50여 호 중에서 성산이씨가 90%일 정도로 이 마을은 성산이씨의 씨족마을이다. 이처럼 씨족마을의 전통을 계속 이어왔기 때문에 문화재도 많다.

현재 10점의 지방지정문화재가 있는데, 이는 교리댁(지방민속문화재 제43호), 북비고택(지방민속문화재 제44호), 한주종택(지방민속문화재 제45호), 월곡댁(지방민속문화재 제46호), 진사댁(지방민속문화재 제124호), 도동댁(지방민속문화재 제132호), 하회댁(문화재자료 제388호), 극와고택(문화재자료 제354호), 첨경재(문화재자료 제461호), 삼봉서당(문화재자료 제463호)이다.

 

 

성산이씨 집성촌인 한개마을에는 다양한 지방지정문화재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택호’에 이름 붙이다… 명예 존중한 마을

전통적으로 집에는 ‘택호(宅號)’라는 이름을 붙인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택호는 안주인의 출신 마을이나 그 마을이 속한 면의 이름을 딴다. 그러므로 택호는 안주인의 호칭도 된다. 그러나 집안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 있으면 마을 이름 대신 벼슬 이름을 택호로 삼는다.

장관댁, 장군댁, 교장댁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이런 예다. 그런데 한개마을의 택호는 매우 특이하다. 수십 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지만 벼슬 이름을 택호로 삼은 건 교리댁뿐이다. 진사댁이 있으나 진사는 초시에 합격한 이를 부르는 칭호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벼슬이 아니다.

‘북비고택’이라 불리는 집에서 태어난 응와 이원조는 19세기 중엽 한성부윤(서울시장)과 공조판서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을 판서댁이라고 부르지 않고 응와의 증조부 이석문의 호를 따서 북비고택이라 부른다.

다른 집도 주인의 호를 따서 ‘한주종택’이나 ‘극와고택’ 등으로 부르고 안주인의 출신지를 따서 ‘하회댁’이나 ‘월곡댁’이라고 말한다. 주인의 호를 택호로 정한 집이 한개마을처럼 많은 곳은 거의 없다. 여기서 한개마을 사람이 벼슬보다 이름 즉 ‘명예’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북서쪽 주거지, 웅장한 한옥지붕과 고풍스러운 돌담

 

한개마을 북서쪽 외곽에는 일정한 체계로 연결된 큰 집이 있고, 집 밖을 두른 담장이 성벽처럼 솟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한개마을 북서쪽 주거지에는 일정한 체계로 연결된 큰 집이 밀집해 있다. 입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주거지 양쪽을 두 갈래의 길이 감싸고 있다. 그 중 서쪽 갈래는 활처럼 휘어 올라간다. 이 길을 따라가며 우측을 보면 집 밖을 두른 담장이 마치 성벽처럼 보이고, 높이 솟아있는 한옥 지붕은 더없이 웅장해 보인다.

한개마을 담장은 크게 ‘외곽담’과 ‘내곽담’으로 나뉜다. 외곽담은 측면담과 주택영역을 구획하는 담이다. 마을 가옥이 대체로 경사지에 자리 잡아 산지와 주택 쪽 측면담은 높고,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다.

내곽담은 주거 건물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측을 시각적으로 차단, 또는 연속시킨다. 담장 대부분은 흙돌담이며 보통 메쌓기 없이 하단부터 자연석과 흙을 어우러지게 쌓았다. 돌담이 덩굴과 어우러져 마을의 고풍스러움을 더해준다.

 

 

내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진사’다!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1-3>

 

 

1894년 조선 마지막 진사시험에 합격한 이국희가 태어난 집. 이후 이 집은 ‘진사댁‘으로 불렸다. 초가집이 사랑채이고 기와집이 안채다. 이종호 제공

 

 

마을 입구 관광안내소 왼쪽 길을 올라가면서 우측에 제일 먼저 보이는 집이 ‘진사댁’이다. 이 집 누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卍’자 장식으로 보기 드물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구성을 보인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새사랑채 등으로 이뤄져 있다.

진사댁은 정조 22년(1798)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당시 이 집은 ‘예안댁’으로 불렸는데, 주인의 부인인 진성이씨가 예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진사댁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이국희가 1894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소과에 합격해 진사가 된 이후부터다.

진사를 요즘으로 따지면 대학교를 졸업해 학사 학위를 받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들의 학식은 상당했고 과거도 계속 볼 수 있었다. 진사는 중앙무대에 올라가지 않아도 자신의 근거지에서 명성을 쌓으면 언제든지 관리로 발탁 가능했다. 또 당시 향리 양반이라면 꼭 가져야 하는 중요한 증명서이기도 했다.

안길에서 직각으로 우측을 향해 몸을 틀면 짧은 샛길이 보인다. 이 샛길은 특정 집으로 진입하는 데만 사용되는 막다른 골목이다. 주거지 중앙부를 관통하는 안길로 올라가도 샛길을 거쳐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색깔과 크기,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을 황토로 쌓은 토석담을 끼고 걷다보면 ‘교리댁’, ‘북비고택’, ‘월곡댁’ 같은 큰 한옥의 입구가 나타난다.


●‘튼ㅁ’ 구조의 조선판 ‘융합가옥’

 

 

단아한 미가 돋보이는 ‘교리댁‘ 안채의 모습. 이 집은 양반가와 민가의 형태를 섞어놓은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종호 제공

 

 

교리댁은 영해부사,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을 역임한 이석구가 1760년 건립했다. 이 집의 이름은 이석구의 현손인 이귀상이 홍문관교리(궁중의 문헌자료를 관리하는 정5품 관리)를 역임하면서 붙여졌다.

자연적인 경사(傾斜)를 따라 마을 안길로 올라가면 돌담이 둘러진 교리댁 대문채가 보인다. 언덕길을 따라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매우 중후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준다. 600여 평의 대지 위에 대문채, 사랑채, 서재, 중문채, 안채, 사당 등 6동의 건물이 독립적으로 배치됐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이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ㅡ’자형의 정침을 중심으로 각 건물이 독립돼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으로 배치됐다. 이는 태백산맥 일대의 ‘튼ㅁ’자형과 남부 ‘ㅡ’자형 민가를 섞어 놓은 배치로,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민가의 지역간 전파와 교류를 통한 절충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교리댁의 문은 평지로 난 대로에 내지 않고 고샅에 냈다. 이런 비정형이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이종호 제공

 

 

이 건물은 평대문을 정면에 내지 않고 고샅(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 또는 골목 사이)을 지나 담장 뒤로 낸 게 특징이다. 한국미의 핵심은 일방성에 있다고 하지만 이 건물은 ‘정형 속의 비정형’이라 볼 수 있다. 비정형은 오히려 미학을 끌어내는 힘이 있는데 교리댁이 바로 그런 면을 보여준다.

●아이 맞춤형 ‘서당’… 아름다운 ‘사당’

교리댁에서 눈여겨 볼 것은 독립된 서당이다. 다른 마을에서도 방 1칸이 서당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있지만 이곳처럼 번듯한 서당 영역을 별도로 갖춘 한옥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당은 사랑채·안채와 직각으로 배치돼 서쪽을 향하고 있다. 주거 용도의 건물과 방향을 다르게 만든 것은 성격이 다른 건물이기 때문이다. 서당은 주로 아이들이 사용하는 학습 공간이므로 건물 부재나 공간이 상대적으로 작고 마당을 둘러싸는 담도 낮다. 어린아이에게 맞는 인간적인 척도(Human scale)를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서당 건물을 받치는 기단이 매우 높게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서당 높이가 대문채보다 높다. 한필원 교수는 이에 대해 ‘공부하는 아동의 상승하는 기개를 조성하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교리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은 뜻밖에도 사당이다. 대부분 사당은 건물 후면에 자리 잡아 다소 침침하게 느껴지지만 교리댁은 그렇지 않다. 여름에는 배롱나무와 나리꽃이 피고, 올라가는 계단도 정감 가도록 잘 다듬어져 있다.

참고로 교리댁 사랑채 마당에는 수령 150년의 제주도산 감귤나무 한 그루가 있다. 또 말을 탈 때 딛고 일어서는 상마석(上馬石)이 아직도 남아있어 이 집이 전형적인 양반가라는 걸 보여준다.

 

 

정조의 한 마디, “북으로 낸 문이 아직 남아있느냐?”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1-4>

 

 

북비고택에 있는 ‘북비문(왼쪽 위)‘와 ‘정문(왼쪽 아래)‘의 모습. 북비문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갇혀 죽은 것을 애도하기 위해 집 주인 이석문이 낸 것이다. 오른쪽은 북비고택의 회화나무. 이종호 제공

 

 

북비고택(北扉古宅)은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이 깃든 건물이다.

영조 50년(1774) 터전을 잡은 이 집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갇혀 죽은 뒤 북쪽에 사립문이 생겼다. 집 주인인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애도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북비택(北扉宅)’이라는 집의 이름과 ‘북비공(北扉公)’이라는 이석문의 호는 북쪽으로 난 문에서 비롯됐다.

훗날 영조가 사도세자의 일을 후회하고 이석문에게 훈련원 주부(主簿, 종6품)라는 벼슬을 내려 출사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 이곳에 은거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영조의 벼슬을 거절하며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뜻을 굳게 가져야 하는데 뜻이 구차하게 굴복된다면 무엇이 그 사람에게 귀하겠습니까? 나는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무공도 세우지 못하였고 사헌부를 드나들며 간신을 베어 대의를 밝히기를 청하지도 못했으니 저의 뜻은 끝내 펼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초야에 묻혀 편안히 쉬면서 유유자적하겠습니다.’

이석문의 손자인 이규진이 장원급제하자 정조가 그를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어린 정조를 업고 들어가 아버지(사도세자)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 곤장을 맞고 벼슬에서도 쫓겨난 이석문에게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사헌부 장령까지 올랐던 이규진은 순조 21년(1821) 정침과 사랑채를 새로 짓고 북비문 내의 맞배집을 서재로 고쳤다.

●화문담에 기와집까지…한옥서 찾은 ‘장독대’의 품격

이 가옥은 특이하게 건물 뒷부분이 먼저 보인다. 북쪽으로 일각문을 냈기 때문이다. 정면 6칸인 안채를 비롯하여 사랑채·안사랑채·사당·북비댁 등 5채로 구성됐고, 북비댁은 별도의 담으로 구획됐다. 안대문채는 안대문·마방·고방 등으로 이뤄진 8칸으로 매우 큰 건물인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독립사랑채와 안채의 ‘ㅁ’자형배치, 솟을대문 등은 당시 고관가옥의 특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북비고택의 안채. 안채의 건넌방은 아이들의 교육공간으로 활용됐다. 이종호 제공

 

 

안채의 건넌방은 아이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됐다. 이곳은 마을 단위로 공부하는 공간인 재실이자 서당과 별도로 한 가족이 운영하는 이른바 사교육 공간이다. 또 사랑채의 작은 사랑방은 서실로 사용됐고, 이 역시 서당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비고택의 자랑 중 하나는 장독대다. 담을 두르고 기와집을 얹는 것이다. 집안의 맛을 좌우하는 장독대이므로 한 단계 품계를 높여준 것으로 추정된다. 흙돌담도 남다르다. 상단에 기와로 예쁜 문양을 만들어 화문담 모습을 섞은 흙돌담도 보인다.

실제로 장독대는 유교로 똘똘 뭉친 한옥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선 집안 먹거리를 좌우하므로 안주인의 생활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기도하는 공간이라는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보관하고 발효시키는 곳이자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장독은 실용적이면서도 정신적인 공간으로 한옥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북비고택의 사랑채. 사랑채에 있는 기둥은 원형인데, 이는 주로 궁궐 등에만 쓰던 것이다. 정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걸 드러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종호 제공

 

 

안채와 사랑채 앞쪽에 당시 일반 주택에서 사용이 금기시됐던 원기둥이 보인다. 안채의 원기둥은 본래 대초당에 있던 재목을 옮겨 사용했다고 하지만 정조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이 집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비고택과 교리댁에는 커다란 회화나무 2그루가 있다. 김해숙 문화관광해설사는 두 가문에서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2명이 나왔기 때문에 2그루씩 심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깔대기, 아니 겸손의 아이콘 여기 있소이다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1-5>

 

 

한주종택의 사랑채의 모습. 소박한 주인의 성품을 닮아 대문간과 안채, 사랑채 등 집안 건물도 검소하다. 이종호 제공

 

 

‘한주종택’은 마을의 가장 위쪽인 영취산 산기슭에 위치한다. 다소 급경사로 올라가는 주거지의 가장 뒤쪽에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조 43년(1767)에 이민검이 창건했고, 고종 3년(1866)에 이민검의 증손자인 한주 이진상이 중수해 현재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진상의 호를 따 한주종택이라 부르지만 안주인이 상주의 동곽 출신이라 ‘동곽댁’이라고도 불린다.

이진상은 조선 말기 정치가 문란해지자 국가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한 ‘묘충록’을 저술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반대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1876년 운요호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려다 화의 성립으로 중단했고, 주자와 이황의 주리론을 중심사상으로 이일원론(理一元論)을 주장하며 제자들과 함께 한주학파를 형성했다.

●한주종택의 검소한 대문간, 겸손한 주인 닮아

한주종택은 한개마을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집이며, 골목과 담장 주위의 노송이 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특히 담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마을에서 이 집으로 올라가는 길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한주종택의 대문간 모습. 양반의 대갓집은 솟을대문을 높이 세워 위세를 드러내려 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진상은 그러지 않았다. 이종호 제공

 

 

이 집은 동쪽 ‘문간채’에 있는 대문간을 통해 들어가는데 대문간 옆에 하인들이 들어가던 작은 문도 있다. 문간채는 보통 양반집과 같이 규모가 큰 살림집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하인들이 머물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간혹 규모가 작은 서민살림집에서도 문간채를 볼 수 있는데, 이는 가족이 늘어나면서 식구들이 기거할 공간을 만드는 경우다. 문간채는 바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기 때문에 창고나 외양간을 붙여 농사일에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게 기본이다.

특이한 것은 대갓집인데도 불구하고 대문간이 매우 검소하다는 점이다. 양반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높이 솟은 솟을대문이 아니라 평대문이다. 원래는 문간채에 초가지붕을 이어서 지금보다 더 소박했다고 한다.

남들은 억지로라도 솟을대문을 만들려고 안달이던 때인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한주 이진상의 학문은 높았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아 자신의 본분에 맞게 평대문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3량가·맞배지붕으로 지은 안채, 스스로 낮추는 소박함

한주종택은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공부와 연구 공간을 위한 ‘한주정사’가 있고 거주 공간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있다. 또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종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간구성이다.

안채는 가장 간단한 3량가로 마을 가옥의 안채 배치 중 가장 완전하게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남향 ‘ㅡ’자의 정침과 좌측에 동향 ‘ㅡ’자의 3칸 고방채, 우측에 서향 ‘ㅡ’자 3칸의 아랫채, 그리고 정침과 마주보는 남쪽에 7칸 ‘ㅡ’자의 중문채 등 4동이 ‘튼ㅁ’자를 이루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이런 구조는 모든 활동이 안마당을 중심으로 이뤄지도록 배치한 것이며 이 지방에 전해지는 건물 배치다.

한주종택에서 안채를 3량가로 만든 것은 역시 파격적인 일이다. ‘량가’란 지붕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른 설명인데 3량가는 우리나라에서 시공되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간단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고주3량가의 구조를 나타낸 그림. 우리나라에서 시공되는 건물 중 가장 간단한 형태다. 이종호 제공

 

 

무고조5량가와 1고주5량가의 구조를 나타낸 그림.

양반집은 보통 5량가로 짓는데, 한주종택 안채는 3량가로 지어졌다. 주인의 검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종호 제공

 

 

3량가 건물은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 종도리(서까래가 받치는 횡부재)를 설치하고, 지붕의 앞뒤 양쪽 가장자리에 두 열의 처마도리(외벽의 상부에 있으며 서까래 등을 받치는 보)를 두어 세 열의 도리가 서까래를 받치는 구조다.

일반적인 양반 건물은 5량가이며 더불어 원형기둥은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1고주5량가, 2고주7량가 등의 구조도 있는데, 이는 툇마루를 둬 지붕 높이가 변하는 것에 대비해 안쪽에 고주(高柱, 여러 기둥 중에 특별히 높은 기둥)를 사용한 경우다.

당당한 양반가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안채를 3량가로 건설한 것 역시 자신을 낮추기 위한 것이다. 이뿐이 아니라 한주종택은 대가집인데도 불구하고 평민집을 연상시키는 사각기둥을 사용했다. 북비고택에 양반 건축에서 사용하지 않는 원형기둥을 쓴 것과 대조적이다.

또 양반집은 대체로 안채를 팔작지붕으로 만들고, 사랑채를 맞배지붕으로 만든다. 한주종택에서는 이 역시 한 단계 낮춰 안채와 사랑채 모두 맞배지붕으로 지었다. 이 역시 대갓집의 위품을 스스로 낮춘 것이다. 이처럼 한주종택은 소박한 개념으로 건설한 집이다. 하지만 본채의 마루방, 부엌 앞에 있는 광과 마루방은 고서로 가득 채워 성리학의 대학자의 집임을 한껏 보여준다.


●학문을 닦던 공간, ‘한주정사’

 

한주종택이 유명세를 타게 만든 건물인 ‘한주정사‘의 모습. 이곳에서 당대 문인들과 성리학을 강학했다. 이종호 제공

 

 

한주정사의 현판, ‘조운헌도제‘라고 쓰여있다. 이종호 제공

 

 

한주종택이 한개마을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10년 한주정사라는 정자와 연못이 있는 구역이 건축된 이후다. 한주정사에는 안채를 구분하는 사잇담에 있는 작은 협문과 일각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한주정사는 집의 권위와 위계가 보이도록 기단을 2개의 층으로 나누어 쌓았다. 집안이 보이지 않도록 한 효과와 조망을 위한 방법이다. 이곳은 당대의 문인들과 성리학을 강학하던 장소로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齋)’라 현판했다.

성리학의 비조(鼻祖)인 주희와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 받든다는 뜻의 현판에서 이진상의 학문적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그렇지만 책읽다 걸리면 ‘혼쭐’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1-6>

 

 

안동 하회마을에서 류씨가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의 부인으로 시집오면서 ‘하회댁’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건물은 1745년에 건설돼 한개마을 문화재 한옥 중 가장 오래됐다. 마을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건물의 건축연대를 1630년대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한개마을 반가 대부분은 ‘ㅁ’자형 배치를 보이나 이곳 안채는 ‘ㄷ’자형 평면의 정침과 중문간채의 ‘ㅡ’자형 평면을 취한다. 이는 남부형 가옥 배치방법과 북부형 ‘ㅁ’자형 배치 방법의 중간 형태로 한개마을에서는 흔하지 않는 배치방법이다.

 

‘하회댁‘의 사랑채 모습. 이 집은 며느리를 배려한 공간이 들어난다는 게 특징이다. 여성이 활동하는 데 제약을 받았던 조선시대에 내부에서만은 주도적으로 활동하게 한 것이다. 이종호 제공

 

 

동쪽 날개채에 2칸의 건넛방과 그것에 딸린 2칸의 마루가 있는데, 이곳이 며느리 공간이다. 며느리가 사용하는 건넌방도 대청을 갖추고 있는데 시어머니 공간인 안방, 안대청과 대등한 규모다. 며느리 공간으로 온돌방, 대청, 마당 등이 모두 하나의 독립된 영역으로 구성된 게 특징이다.

여기서 하회댁이 상당히 독특한 건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여성은 소외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억압되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모든 곳에서 그런 규범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하회댁 시아버지는 안대청 옆에 작은방을 별도로 둬 며느리가 낮잠 자는 공간을 만들어 줄 정도로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또한 여성의 바깥 활동은 큰 제약을 받았으나 집 안에서만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즉 이들이 유교 원리에 따라 가정을 이끌 때 생길 부작용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회댁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책 보는 것만은 싫어했다고 전한다.

 

하회댁 고방의 모습(왼쪽)과 고방의 벽 두께(오른쪽). 고방은 지붕을 높이고 벽을 두껍게 쌓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종호 제공

 

 

하회댁에서 특이한 것은 고방(庫房)이다. 지붕을 높이고 돌로 두껍게 쌓아 넓게 만들어 놓은 고방은 과거 이 집의 살림살이를 짐작케 한다. 벽체가 워낙 두껍다보니 밖이 아무리 더워도 안은 서늘해 음식물을 보관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듯하다.

●양반가·민가 만나면 어떤 모습?

‘도동댁’은 철종 시대에 공조판서를 역임한 이원조의 아들 이기상의 살림집으로 1850년에 건립됐다. 이 집은 한개마을 전체 배치로 볼 때 가장 중요한 부분에 위치했으며 배치 형태가 ‘튼ㅁ’자형으로 지역적 특징을 잘 나타낸다.

 

 

조선 철종시대 이기상의 살림집인 ‘도동댁‘의 사랑채 모습. 이종호 제공

 

 

우측으로 난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남향인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 좌측에 안채가 배치됐으며 안채 전면에 세워진 중문채에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가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안마당 좌측에 고방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의 배치형태를 이룬다.

‘극와고택’은 철종 3년(1852)에 건립됐다. 가옥 이름은 국권상실에 직면해 소복을 입고 거실에 거적을 깔고 거처하며 두문불출한 극와 이주희의 아호에서 따왔다. 이주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묘소를 지킨 효자로도 잘 알려졌다.

 

‘극와고택‘의 안채와 사랑채의 모습. 오른쪽에 초가로 지어진 게 사랑채다. 초가지만 양반가옥 형태로 지었고, 안채도 양반가옥에 필적한다. 이종호 제공

 

 

건립 당시에는 안마당 동쪽에 광채가 있어 ‘ㄷ’자형 가옥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현재는 광채가 철거되고 ‘ㅡ’자형의 사랑채와 정침만이 남아 ‘二’자형의 개방적인 배치형태를 취한다. 사랑채가 초가임에도 불구하고 평면구성이 양반가옥과 같은 형태고, 안채 규모도 양반가옥에 필적할 만하다. 또 평면배치가 남부형 민가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 반가와 민가를 이어주는 형태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OO을 꽁꽁 숨기려는 ‘집 속에 집’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1-7>

 

 

월곡댁 사랑채의 모습. 이 집은 안채와 앞쪽 별채 사이에 샛길처럼 좁고 긴 공간이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종호 제공

 

 

‘월곡댁’은 이진희 부인이 초전면 월곡동에서 시집왔다 해 이름이 붙었다. 1911년부터 1940년까지 건립한 이 집은 한개마을 가옥 중 매우 늦게 만들어졌다.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별채, 사당으로 이뤄졌는데 안채와 그 앞쪽의 별채 사이에 샛길처럼 좁고 긴 공간이 형성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마다 기단이 높고 아름다운 돌로 쌓았는데, 지형의 기울기를 받아들이기 위한 석축의 의미가 크다.

사랑채에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으나, 별채에서는 중문채를 거쳐야만 안채로 출입할 수 있는 구조다. 별채는 안채 앞쪽에 세웠는데 사방이 담으로 막혀 있어 폐쇄성이 매우 강하며 중문채 앞 작은 협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한옥에서는 채의 앞뒤로 모두 개구부가 설치되나 이 집 별채 뒤쪽 벽체에는 개구부가 전혀 없다. 별채를 안채 쪽으로 폐쇄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한마디로 별채는 ‘집 속의 집’인데, 이 같은 공간 배열은 한개마을이 엄격한 원칙에 따라 조성됐음을 의미한다.

 

 

월곡댁 별채로 통하는 ‘협문‘의 모습. 별채는 사방이 담으로 막혀 있어 폐쇄성이 매우 강해 이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별채가 이렇게 폐쇄적으로 설계된 데에는 주인의 의도가 배어있다. 처음 별채에는 주로 분가하지 않은 자녀들이 거처했다. 그러나 이진희의 손자대에 와서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진희 손자가 소실을 들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집의 기본은 여성을 숨기려는 의도가 다분한데, 이러한 배치는 공간 구성에 있어 절대적인 지침을 어긋나게 만든다. 바로 사당의 위치다.


●양반 중의 양반, 여자 때문에 ‘주자가례’ 무시?

한개마을 특징 중 하나는 사당, 정자, 재실 등 선조를 기념하는 건축물이 10동이나 된다는 점이다. 현재 8동이 남았는데 한 마을에서 이렇게 조상을 기념하는 건축물이 많은 곳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들 기념물의 배치가 다소 예외적이다.

‘주자가례’에는 ‘집을 지을 때 다른 것보다 사당을 먼저 건립하고 위치는 정침의 동쪽으로 한다’로 명시돼 있을 정도로 유교에서는 사당 건립을 살림집보다 우선했다. 그런데 양반 중의 양반이 산다는 한개마을에서 이런 지침이 지켜지지 않았다.

집의 동쪽에 있는 진입로로 들어가는 한주종택은 사당이 안채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지만 서쪽으로 진입하는 교리댁, 북비고택, 월곡댁 등은 사랑채 뒤나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뒤쪽에 사당을 놓아 안채 서쪽에 위치하게 했다. 이 같이 유교의 전통이 기반인 성리학으로 똘똘 뭉친 한개마을의 양반집이 절대 참고서인 주자가례조차 무시했다는 것은 건물의 공간 구성 때문이다.

한개마을에서 여성의 공간은 은닉, 즉 감추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남녀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가 드높은 현대라면 ‘여성을 집 안에 가둬두려는 당시 의도’가 큰 호응을 받지는 못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전통마을에서 이런 개념이 기본이었다.

집 안에서 볼 때 가옥 진입은 왼쪽이나 오른쪽이 기본이며 주택에서 가장 안쪽에 놓이는 게 안채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숙이 숨겨진 곳이 바로 여성의 활동 공간인 부엌이다. 이는 부엌의 위치가 동향이나 서향으로 고정되는 게 아니라 집으로 진입하는 샛길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이때의 원칙은 부엌을 진입로에서 가장 먼 곳에 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 공간을 뒤에 둬 보이지 않게 하면 사당을 어디에 놓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만약 사당을 정통적인 방식대로 오른쪽에 놓으면 제사 주인공인 남자가 여성 영역인 안채를 거쳐 사당으로 가야한다.

한개마을의 선비들이 이런 내용을 모를 리 없다. 결론은 교과서인 주자가례 방침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주자가례 지침을 어긴 집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주거자들이 의도한 목적에 부합하면서도 불편하지 않는 실생활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성 은닉이라는 대전제를 포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붕어빵’ 같은 집은 싫어…‘개성만점 한옥’

[이종호의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제3부]<11-8>

 

 

첨경재는 조상의 분묘를 ‘공경한 마음으로 섬긴다’라는 뜻으로 성산이씨의 누대(累代) 선조의 묘소에 대한 묘제(墓祭)를 봉행했던 병사(丙舍)다. 이종호 제공

 

 

한개마을 뒤쪽 영취산 기슭에 마을사당인 ‘첨경재’가 있다. 이곳은 마을 우측에서 약 5분 정도 걷는 거리에 있다. 첨경재는 조상의 분묘를 ‘공경한 마음으로 섬긴다’라는 뜻으로 성산이씨의 누대(累代) 선조의 묘소에 대한 묘제(墓祭)를 봉행했던 병사(丙舍)이다.

이 건물은 영취산에서 뻗어 내린 협곡 사이에 토석담장을 두르고 일각문도 세운 매우 큰 사당이다. 전면에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3량가 맞배지붕의 첨경재가 중심이고 좌측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고직사를 배치했다.

 

 

첨경재 입구의 모습. 토석담을 두르고 일각문까지 세운 큰 사당임을 알 수 있다. 이종호 제공

 

 

처음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해 창건당시의 원형은 잃어버렸다. 그러나 기념건축물답게 단순한 평면 형태를 취하고 있고 성산이씨들의 종당(宗堂)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곳이다.

한개마을의 놀라운 점은 마을과 건물이 원칙과 규범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의 주거공간을 구성하는 논리가 일정하게 적용됐음에도 실제는 상당히 다양하다.

안채만 봐도 한주종택과 북비고택은 일자형이고 월곡댁과 교리댁은 ‘ㄱ’자형, 하회댁은 ‘ㄷ’자형이다. 큰 틀에서 나름의 유형과 원칙을 토대로 집을 구성하지만 현대 아파트 같이 ‘붕어빵 주거개념’은 단연코 거부했다는 게 이 마을의 특징이다.

한개마을 옛 골목길과 돌담길이 매우 아름다워 이를 따라가면 자신도 모르게 고대의 선비들이 걷는 듯한 착각을 느낄 수 있다.

이 마을에서 다소 떨어진 서쪽에 정면 6칸, 측면 1.5칸, 팔작지붕의 ‘여동서당’이 있다. 현판도 여동서당이라고 적혀있는데 방이 2개로 훈장이 기거하며 어린아이들을 가르친 곳이다. 여동서당을 가기 전에 재실인 ‘서륜재’가 있는데 재실은 기와집이지만 좌측에 있는 소위 관리인 집은 초가집이다.

●‘세종대왕 자태실’ ‘감응사’ 등 볼거리

한개마을 주변 명소로는 사적 제444호인 ‘세종대왕 자태실’이 있다. 이곳에는 세종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조성된 태실 등 모두 19기가 군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이다. 보물 제1575호인 ‘성주향교’, 사적 제86호로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는 ‘성주성산동고분군’, 성산가야 때 축조된 것을 추정되는 ‘독용산성(경북기념물 105호)’ 등도 있다.

또한 영취산(325m) 중간에 신라 애장왕 때 건립한 ‘감응사’가 있다. 감응사에는 애장왕에 관한 전설이 내려온다. 애장왕이 왕자 시절에 눈이 아파 앞을 볼 수 없었는데 어느 날 꿈에 나타난 스님의 말을 듣고 독수리가 날아가 앉은 곳의 약수로 눈을 씻었다. 그러자 애장왕은 앞을 볼 수 있었다. 이 은혜를 잊지 못한 그는 약수가 나는 곳을 옥류정(玉流井)으로 부르고 감응사를 지었다. 삼성각에 특별히 용왕신을 모시고 있다. 감응사에서 한개마을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명품 경관이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속마을이 되면 마을이 상업화되고 진정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또 주민 사이에 반목과 갈등도 생기는데 한개마을에서는 이런 면을 느낄 수 없다. 마을 자체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있으나, 그보다는 한개마을 주민들이 전통마을의 참 뜻을 저해하는 상업시설을 철저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흔한 관광상품점은 물론 식당도 없으니 한개마을을 찾을 때는 음료수 등을 꼼꼼히 챙기기 바란다. 참고로 한개마을도 전통가옥 숙박체험, 마을 역사탐험, 전통농경체험 등을 주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성주한개마을보존회에서 주관한다.

 

참고문헌 :
『한옥마을』, 신광철, 한문화사, 2011
『성주 한개민속마을』, 성주군, 2012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한필원, 휴머니스트, 2011
「[古宅은 살아있다] <25>성주 한개마을」, 정창구, 매일신문, 2012.06.20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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