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鏡銘거울명.衾銘이불명.扇銘부채[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경호... 2015. 7. 23. 00:00

[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선인들의 지혜

 

사물에 새긴 깊이와 멋… 신상좇는 시대 꾸짖는 듯

 

○ 목욕탕에서 훔쳐본 문신

 

10년 전쯤 해운대의 목욕탕. 동서 내외가 출근하면서 집 앞의 목욕탕에 꼭 가보라 권했다. 바다 전망이 ‘끝내준다’고 했다. 한적한 오전이라 탕에는 아무도 없었다. 알몸에 대양을 품고 몽롱하게 풀어져 있는데, 웬 구부정한 아저씨가 두 번째로 입탕. 온탕 저쪽에 들어오더니 역시 바깥의 봄날처럼 나른한 품새다.

 

그 아저씨를 기억하는 까닭은 어깨에 새긴 하트와 큐피드의 화살 때문이다. 아마 저 아저씨도 청춘 시절에는 진한 사랑을, 변치 않을 사랑을 꿈꾸었을 것이다. 세월은 사람을 늙게 했으나 촌스러운 문신은 시간을 타지 않았다. 조금 후, 이번에는 덩치 좋은 청년의 입장. 그런데 이 친구 등짝엔 용이 한 마리, 풍덩 탕으로 들어오는 동작이 기세등등하고 위압적이다. 그리고 줄줄이 들어오는 호랑이와 용과 뱀들을 보고 그제야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임을 눈치 채게 되었다. 서울로 돌아와 부산 친구에게 무섭더라고 했더니 그 정도로 뭘 그러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자기는 등판에다 ‘힘’이라는 단 한 글자를 새긴 사내도 보았다면서.

 

○ 사물에 새긴 깨달음의 문학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반지를 끼워주고, 순간의 아름다움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다. 기대하고 꿈꾸는 것이 스쳐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행위들이 얼마나 많은가? 몸에 새긴 하트 모양이나 호랑이, 용, 그리고 ‘힘’이라는 문신도 벗겨보면 속살이 같다. 갈망이 지워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마음 씀이 같아서다.

 

옛사람들이라 해서 그런 심리가 없었을까마는 선인들의 문신술(文身術)은 그 매체나 표현이 달랐다. 부모님께서 주신 몸을 함부로 훼손해선 안 된다는 이른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의 윤리감각으로는 귀한 몸에 문신하는 일이 허락될 리 없다.

 

그 대신 선인들은 몸이 아닌 마음에 새기기를 좋아했고 마음에 새긴 것은 눈으로 볼 수가 없기에 사물의 형체를 이용했다.

아들의 나막신, 며느리의 과자 상자, 허리춤의 호리병, 여행을 함께한 지팡이에 몇 글자를 새겨두었던 것이 그런 예들이다.

 

○ 기물명의 깊이와 멋

 

선인들은 이런 사물을 ‘기물(器物)’이라 불렀고, 여기에 글씨를 새겨두는 행위를 일러 ‘명(銘·새길 명)’이라 했으며, 둘을 합쳐 ‘기물명(器物銘)’이라 불렀다.

기물과의 교감을 짤막하고 압축적인 형태로 표현한 글이 곧 기물명인 셈이다.

 

 

‘나무가 잘못 자라면, 사람이 바로잡아 준다. 사람이 비틀거리면, 나무가 부축해준다

(木倒生 人正之 人行危 木支之).’

 

이것은 지팡이에 새긴 ‘장명(杖銘)’이다.

성호 이익 선생의 조카인 이용휴(李用休·1708∼1782)라는 분이 지었다. 이 열두 글자를 새긴 지팡이를 짚고서 그는 꼿꼿하고 바르게 살려고 했으며, 박지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18세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남았다.

 

19세기의 학자였던 유신환(兪莘煥·1801∼1859)은 어린 아들에게 나막신을 주면서 이렇게 썼다.

 

‘미투리 신으면 편안하고, 나막신 신으면 절뚝거리지. 그래도 편안하며 방심하기보다는, 절뚝대며 조심하는 편이 나으니라.’

어린 아들의 나막신에 새긴 글이라는 뜻의 ‘치자극명(穉子銘)’이다.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이다. 쓰고 나면 버리는 일회용품이 부지기수다. 이제 지팡이나 신발과 같은 사물에 깨달음과 소망을 담아 전하는 문화는 쉬 보이지 않는다. 할 일 많고 바쁜 세상에 이런 데 마음 쓸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정신적인 성숙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야말로 되물을 일이다.

기물명은 역사가 지운 일회용품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정신은 호랑이 문신보다 우아하다. 사물마다에 마음이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깊은 매력을 품고 있는 보물이다.

 

 

 

[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조선 선비의 거울

 

아버지가 남겨준 거울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새겨

 

○ 선비의 아침 풍경

 

 

 

조선시대 거울.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이빨을 마주치고 뒤통수를 퉁기며, 침을 잘게 씹어 진액을 삼킨다. 옷소매로 갓을 쓸어 티끌을 털어내며,

세수할 땐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고, 양치질할 때는 냄새가 없게 한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양반전(兩班傳)’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도가(道家)의 수련법에 따라 아침을 여는 선비의 모습을 다소 희화적으로 묘사한 장면이다.

박지원의 벗이었던 이덕무(李德懋·1741∼1793) 또한 ‘사소절(士小節)’이란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군자가 거울을 보고서 의관을 정제하고 용모를 가다듬는 것은 요염한 자태를 꾸미자는 것이 아니다. 거울을 늘 손에 쥐고 눈썹과 수염을 매만지며 날마다 고운 자태를 일삼는 자가 있는데 이런 짓은 부녀의 행동이다.’

 

수백 년 전에도 꽃미남을 바라는 남성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덕무는 더 나아가 ‘남이 보는 데서는 가려운 데를 긁지 말고, 이를 쑤시지도 말고, 벌거벗은 채 벼룩을 잡지 말고, 혹은 손톱에 벼룩 잡은 피를 씻지 않아 남이 추하게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권하였다. 어쩔 수 없었던 당시 풍속의 이면이다.

 

○ 세면하고 거울을 보는 선비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면 거울을 본다. 예나 이제나 이런 모습은 같지만, 조선시대에 거울은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화장품 갑, 화장실, 자동차, 쇼윈도, 그야말로 도처에 거울이 널려 있는 요즘 세상과는 딴판이었다.

그렇지만 거울을 소재로 한 문학으로 치자면 도리어 옛날이 오늘날보다 더 많게 느껴진다.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산문 ‘거울에 대하여(鏡說)’는 이미 아는 분이 많을 텐데, 그가 거울에 관한 시를 지었던 사실까지 아는 분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앞에 예로 든 박지원도 ‘설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 보며(元朝對鏡)’ 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두어 올 수염이 문득 돋았으나, 여섯 자 몸은 전혀 크지 않았네.

거울 속 모습이 해마다 달라졌으나, 어릴 적 마음은 지난해 그대로이네

(忽然添得數莖鬚 全不加長六尺軀 鏡裡容顔隨歲異 穉心猶自去年吾).”

 

해마다 모습은 달라졌으나 어릴 적의 순수한 마음은 그대로라는 뜻을 담았다. 몸은 늙어도 정은 늙지 않는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 미수(眉) 허목(許穆)의 거울과 다짐

거울을 소재로 해 기물명(器物銘)을 남긴 명인은 셀 수 없이 많다. 사물을 있는 대로 비춰주는 정직함과 티끌이 끼지 않아야 바로 볼 수 있는 깨끗함은 거울이 본래부터 지닌 속성이요 본질이다. 고결한 마음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거울을 자주 소재로 활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17세기의 명필이었던 미수 허목(1595∼1682)의 거울에는 남다른 사연이 깃들어 있다. 허목은 환갑이 넘어 정계에 나가 송시열과 일대 격론을 펼쳤던 인물로, 그야말로 굽히지 않는 소신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준 거울이 있었는데, 팔순이 다 되어가는 즈음에 이 거울에 다음과 같은 다짐을 새겨두었다.


밝고 밝은 것 오직 거울이라
이로써 용모를 가지런케 하고
이로써 몸을 반성할 수 있으리
皇皇唯鏡 可以整其容 可以省其躬

―거울에 대한 다짐(경명·鏡銘)

허목의 말을 따르자면, 이 유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임진왜란 당시에 군량미를 대며 3년간 병사들을 뒷바라지하다가 얻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80년이 흘렀다. 이제는 그 자신도 노인이 되어 거울을 보다가 감회를 정리하여 쓴 것이 이 작품이다. 이 무렵 그는 송시열, 송준길 등과 격렬하게 예송(禮訟) 논쟁을 펼치며 태풍의 눈으로 부상해 있었다. 파란의 한복판에서 고요히 거울을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되새겨보는 마음이 꼿꼿하다. 그리고 훗날 그는 흔들림 없는 노년의 상징으로 강렬하게 기억되었다.

 

 

 

[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사마광과 성호 이익의 이불

 

자신의 신념을 이불에 새겨 덮고 자던 그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지난 일을 거울삼아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뜻이다.

역사가들은 자치통감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더불어 불후의 걸작으로 칭송한다. 이 책을 지은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왕안석(王安石)의 개혁에 반대하다가 낙양(洛陽)으로 물러나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이불 한 채를 선물로 받았다. 둘은 천하를 놓고 서로 겨루던 명사였으니 그 이불이 귀하디귀한 것이었을 성싶다. 하지만 의외로 이불은 삼베로 짠 검소한 것이었다.

사마광은 이 삼베 이불을 특히 아꼈다. 그래서 존경했던 선배 범중엄(范仲淹)의 아들 범순인(范純仁)이 ‘포금명(布衾銘)’, 곧 ‘삼베 이불에 새긴 글’을 써 주자 이내 이불 테두리에 그 글을 써 넣었다.

‘거친 밥을 먹고 검소하게 살았어도 안회(顔回)는 만세의 모범이 되었지만, 살아서 호화를 누렸던 주왕(紂王)은 죽어서 외로운 인간으로 묻혔다’는 내용의 110자 예서였다.

사마광의 삼베 이불은 그의 임종 순간까지 함께했다. 범순인은 사마광이 내내 덮고 지냈던 이불로 고인의 시신을 고이 덮어 주었다. 살아서 검소했으니 죽어서도 검소함을 따르지 않겠느냐는 이심전심의 배려였던 것이다.

 

아마 사마광으로서는 피안의 길이 결코 춥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이불의 행간에는, 가난한 집 출신으로 재상을 지냈으면서도 지독할 만큼 검소했던 범중엄의 삶과 그런 부친의 자세를 흠모해 검소함을 추구했던 범순인의 사람됨, 그리고 사마광의 마음을 바닥까지 읽어낸 벗의 교감이 실려 있었다. 명인이 명인을 알아보는 이심전심의 릴레이가 바로 이 이불에 담긴 영원한 매력인 것이다.

○ 성호(星湖) 노인이 이불에 생긴 소망

700년쯤 흘러 경기 안산 바닷가 성호(星湖)라는 곳에 걸출한 학자가 살았다. 성호 이익(李瀷·1681∼1763), 우리나라 실학의 명실상부한 명인으로 꼽히는 바로 그분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해 더 나은 세상을 염원했던 그의 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사마광처럼 애중하는 이불이 있었으며, 손수 이불에 관한 명(銘) 두 편을 남겼다.

우선 ‘이불에 새긴 글’이라는 뜻의 ‘금명(衾銘)’은 이렇다.

“남이 알지 못한다고 속이지 말자. 털끝조차 천리(天理)에서 나옴을 잊지 말아야지

(莫誣人不知 須念毫髮皆從天理來).”

자신을 속이지 않고 하늘과 사람의 바른 길을 찾고자 했던 그 의지가 서릿발처럼 매섭다.

또 하나는 ‘지피명(紙被銘)’, 곧 ‘종이처럼 허름한 이불에 새긴 글’인데, 이에 얽힌 사연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성호 노인에게는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저자로 알려진 안정복(安鼎福)이란 애제자가 있었다. 안산 곁의 광주(廣州)에 살았던 안정복은 사실은 평생 성호를 몇 번밖에 찾아뵙지 못했다. 하지만 편지를 왕래하며 때로는 스승의 비판자로, 때로는 스승의 벗이 되었으며 진정으로 스승을 존경했다.

때는 1756년, 당시 75세이던 성호 노인이 안정복에게 편지 한 통(‘答安百順 丙子’)을 보내왔다. 헌데 그 속에 근래에 지었노라며 지피명의 전문을 넣었다. 지피명에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정결(淨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전달한 대목이 있었다. 또한 ‘사마광도 이불 하나로 몸을 덮고 염(殮)했으니 가난한 내게라면 더욱 알맞지 않겠느냐’는 독백이 들어 있었다.

○ 우리는 무엇을 덮고 살아갈까

숲은 이슬방울을 데려가고 대지는 인간의 몸을 거두어 간다. 그것이 생명의 질서다. 우주의 생명체 중에 유독 인간만이 살아 있는 동안 이불을 만들어 덮고 잔다.

어떤 이는 이 이불에 수(壽)와 복(福) 수놓아 두고, 어떤 이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장자가 말한, 어떠한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낙토)의 태평한 꿈을 갈구하며, 또 어떤 이는 이불을 죽부인처럼 껴안은 채 고려 가요 만전춘(滿殿春)에 나오는 얼음 위 댓잎 자리 위의 춘몽(春夢)을 꾼다.

 

흥부네 식구들처럼 줄줄이 덮고 자는 이불은 참으로 정겹기도 하다. 그런데 사마광이나 성호 노인의 이불처럼 생사를 초극한 숭엄(崇嚴)한 이불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려본다. 성호 노인 또한 제자가 마지막 덮어준 그 이불로 정녕 흐뭇하게 웃었을 것이라고.

 

 

 

[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시-그림 담은 부채, 선인들의 최고급 선물

 

 

을사조약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영환은 부채에 “한나라 고조가 승리하고 항우가 패배한 까닭은, 인(忍)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 있을 뿐이었다”로 시작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제공

 

 

얼마 전 배우 엄앵란 씨(75)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할리우드 스타 리처드 기어(62)에게 부채를 선물했다. 그것을 보고 여러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래, 참 좋은 선물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부채를 펼치듯 부채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 부채를 선물하는 문화

서양인에게는 이색적이겠지만 동아시아인들에게 부채는 멋이 깃든 물건이다. 부채춤에서 볼 수 있듯이 부채는 흔희 실용을 넘어 예술로 도약한다. 또한 부채는 마음을 전하는 소중한 선물로 애용돼 왔다.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부채를 시원한 바람과 함께 선사했던 풍속이 그러하다.

 

혹 ‘고려송선(高麗松扇)’을 들어보셨는지. 고려에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소나무 껍질로 곱게 짠 ‘솔부채(송선·松扇)’를 고려의 특산물로 강조했다.

둥그런 모양의 이 부채는 사신을 통해 송나라 대문호 소동파와 황정견에게까지 선물됐다. 그들은 이 부채를 기념해 시를 지었고, 부채질을 한 번 할 때마다 ‘티끌 세상 밖으로 몸을 벗어나게 한다’며 그 미덕을 예찬했다.

조선은 어떠했을까?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단오절에 맞춰 부채를 진상하는 것이 관례였던 듯하다. 임금은 이 부채를 받아 궁인들에게 나누어주거나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데 썼다. 정약용은 정조가 하사한 부용선(芙蓉扇·연꽃을 그린 부채)을 받은 적이 있는데, 부채에 그려진 그림은 김홍도가 그린 것이었다고 한다.

국상 중에는 고운 그림 부채를 쓰지 못하게 하고 대신 상복처럼 흰 부채를 사용하게 했다. 어떤 때는 진상품 부채 저장 창고에 불이 나서 5만 개가 재로 변한 적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운송 도중에 도적 떼에게 물건을 탈취당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조정에서는 대책을 마련하느라 논의가 분분했다고 한다.

○ 신정하와 이언진이 겪은 해프닝

무엇보다 부채가 각광받았던 이유는 그것이 예술품으로 승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인의 솜씨가 덧보태어진 부채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소장품이 되곤 했다. 18세기의 문인 신정하(申靖夏)가 조카에게 써준 편지에 우스운 해프닝 하나가 소개돼 있다.

식사 후 노곤한 그에게 어느 날 석강이라는 ‘놈’이 부채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이 자는 노름에 빠져 노모를 속상하게 한 불효자였다. 그는 글씨도 못 읽는 주제에 부채에다 초서로 시를 한 수 써 달라 청했다. 신정하는 마지못해 이렇게 써 주었다.

“아침에는 동쪽 도박장 저녁에는 서쪽 도박장, 하루 동안에 천만 관의 돈을 날리네. 너는 보지 못했느냐? 도성 안의 거지들, 그들도 한때는 부귀가의 자식이었던 것을.”

18세기 역관 이언진이 겪은 일화도 재미있다. 1763년 통신사의 일원이었던 그가 일본 앞바다의 배 위에 있을 때다. 홀연 일본인들이 찾아와 매달리며 부채 500자루를 내놓고 시를 재촉했다.

당시 24세의 이언진은 즉석에서 오언율시(五言律詩) 500수를 지어주었다. 찬탄과 경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잠시 후 일본인들은 다시 부채 500자루를 싣고 왔다. 그러곤 “시 짓는 능력은 알겠으나 기억력은 어떠한지 궁금하다”는게 아닌가! 태연히 아까의 그 500수를 다시 써 준 뒤, 이언진은 희대의 천재로 기억됐다.

 


○ 부채를 아끼는 또 다른 연유

 

 

 

 

 

 

 

부채는 그 모양에 따라 동그란 단선(團扇)과 접히는 접첩선(摺疊扇)으로 나뉜다. 고려시대에는 아마 송선처럼 동그란 부채가 유행했던 듯하고, 조선시대에는 동그란 부채와 접는 부채가 함께 유행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든 부채의 멋은 주인의 기품과 비례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선의 유학자 강재항(姜再恒)은 둥근 부채에 이렇게 ‘단선명(團扇銘)’을 썼다.

“형체는 보름달 같고, 쓰임은 맑은 바람 같다. 손아귀에 두는 권세가, 오직 주인옹에게 달려있네(體則明月 用則淸風 掌握之權 惟主人翁).”

조물주처럼 청풍과 명월을 손바닥 안에 담았다 했으니 그 기상이 시원하고 호쾌하다.

반면 다산 정약용은 접부채에 다음과 같이 ‘접첩선명(摺疊扇銘)’을 적었다.

 

“꽉 차고 꽉 찬 것이 공기라, 움직이게 하면 바람이 된다. 움직일 힘을 지녔으되 접혀 있으니, 고요히 바람을 간직하고 있구나(盈盈者氣 動之則爲風 有動之之才而卷而懷之 寂然而風在其中)”라 했다.

대붕(大鵬)의 웅지를 접힌 부채에 투사한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의 재상 이규보는 단선명에다 ‘부른 것도 애원한 것도 아닌데, 시원한 바람이 절로 오누나. 가마처럼 끓는 이 세상을, 맑은 바람으로 씻기고 싶다’고 갈구했다.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의 부채답다.

더위가 지나고 가을이 오면 부채는 쓸쓸해진다.

선인들은 상자 속으로 들어갈 가을의 부채, 곧 추선(秋扇)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후텁지근하고 지루한 여름은 오고 또 오리라.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부채를 찾게 될 것이다. 자동차도 좋지만 자전거의 멋이 또 다르듯, 부채에는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따라잡을 수 없는 멋이 있다. 리처드 기어도 부채가 품고 있는 멋을 음미하고 있을까.

 

/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 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