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世上萬事

枕銘 베개.烟袋銘담뱃대.杖銘지팡이.酒器銘 술잔[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경호... 2015. 7. 22. 23:58

[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아홉번 반성하며 살자”… 베개에 새긴 삶의 원칙

 

 

 

 

 

가래나무로 만든 목침. 마름꽃 모양의 구멍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듯 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늘한 대자리에 누워 목침(木枕)에 턱을 괸 채 흘러가는 흰 구름을 바라본다. 가끔 이러고 싶을 때가 있다. 장마가 물러가고 연일 쾌청한 하늘이 펼쳐지고 있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하고 산뜻하다. 불쑥 ‘부석사의 능금은 참 행복하겠지?’ 하고 운을 띄웠더니 아내가 그냥 피식 웃는다.

저 햇살이 사과만을 익어가게 하지는 않으리라. 뙤약볕을 피해 마을 정자에 팔을 괴고 누워 계실 아버지는 아마 고추가 여무는 날씨라며 좋아하실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문득 ‘사람을 익어가게 하는 베개’가 떠올랐다. 베개에 기대 흰 구름을 바라보는 한가로운 정경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그 뒤에는 베개를 상대하는 문화의 차이가 고요히 흐른다.

○ 어떤 베개를 떠올리시나요?

 

“베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느냐”고 다시 아내에게 물었다.

첫 번째 대답은 동침(同枕)이다.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뜻의 동침(同寢)이 아니라 부부가 나란히 베는 그런 베개를 말한다.

두 번째로는 연침(聯枕)이라 답했다.

 

친구들이 나란히 베는 베개를 연침이라 하는데, 베개가 둘이어도 좋고 하나이면 더 좋지 않으냐 한다.

더 물었다면 딸 쌍둥이의 포동포동한 허벅지 베개가 좋다 했을지 모르겠다.

세상의 수많은 베개가 지닌 공통점은 수면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묻는가에 따라 답은 달라질 수 있다. 옛글을 자주 읽은 분께 여쭈면, 시원한 시냇물을 베개 삼아 눕는다는 ‘침류(枕流)’의 멋이나 팔베개를 한 채 편히 쉬는 ‘곡굉이침(曲肱而枕)’을 빼놓지 않을 듯싶다.

반면에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묻는다면 약이 되는 베개, 곧 약침(藥枕)을 말하지 않을까?

국화 베개는 머리를 맑게 해주고, 녹두베개는 풍을 없애준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하고, 도자기 배게는 눈을 맑게 해준다는 처방까지 해줄 듯하다.

○ 세상의 베개와 침명(枕銘)의 베개

그렇다. 세상의 베개들은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좁쌀 메밀 잣 국화 등을 넣어 만든 것, 부들이나 짚을 엮어 만든 것, 소나무 대추나무 고목뿌리를 잘라 만든 것, 돌 상아 도자기 크리스털 등을 소재로 한 것까지 재료 따라 다르고, 동그라미 네모 세모 사다리꼴 반달에서 동물 모양까지 그 생김새가 참으로 다채롭다.

학침(鶴枕) 모란침(牧丹枕) 연화침(蓮花枕)처럼 꽃과 동물을 그려 넣은 것들, 부(富)·귀(貴)·수(壽)·복(福) 등의 문자를 수놓은 것들도 있다. 부모 봉황과 일곱 마리의 새끼 봉황을 수놓은 구봉침(九鳳枕)은 부부의 소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베개다.

선인들의 문학 작품에도 베개가 종종 등장한다.

‘늙어갈수록 한가로운 정취가 많아져, 창가에서 목침 베고 태평시절을 꿈꾼다(老境漸多閒意味 一窓高枕夢羲皇)’라고 한 유성룡의 ‘복숭아나무 목침(書桃枕 庚子)’이 그 예다.

‘의서(醫書)에 이르기를, 무자일(戊子日)에 복숭아가지로 베개를 만들면 이목(耳目)이 총명해진다’고 적어둔 내용도 흥미롭다. 늙어갈수록 지키고 싶은 것이 총명함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선인들의 붓 끝에 자주 올랐던 베개는 ‘침명(枕銘)’이 새겨진 베개다. 베개에 새겨두는 짤막한 운문이 침명인데, 이 침명을 가진 베개들은 대체로 소박한 목침들이었다.

굴목침(掘木枕·굽은 나무 베개), 도침(桃枕·복숭아나무 베개), 조목침(棗木枕·대추나무 베개)이 그런 유이다. 금강산이나 울릉도의 나무로 베개를 만든 사연, 혹은 아버지가 물려준 특별한 목침에 눈길이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비단으로 감싼 화려한 베개가 침명에 초대된 예는 매우 드물다.


○ 사악함을 물리치는 청장관의 베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남긴 18세기의 문인 청장관 이덕무에게도 특별한 베개가 하나 있었다. 서얼로 태어난 아픔을 이기고 문예의 절정에 도달했던 그는 어느 날 하늘이 내려준 베개와 인연을 맺었다.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하필 백년 묵은 대추나무가 꺾여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얼른 이 대추나무를 잘라 목침을 만들고 ‘조목침명(棗木枕銘)’을 이렇게 새겼다.

“백년 묵은 대추나무에, 홀연 번개가 쳤다. 깎아서 베개를 만드니, 귀신도 두려워 떨리라. 귀신들이 떨지 않으면, 우레로 박살내리. 이 베개는 군자의 곁을 따르리라

(古棗百年 疾雷擊 爲枕 鬼魅 匪鬼魅 雷擊 玆枕隨君子之側)”

하늘의 신령스러움을 빌려 꿈자리에서까지 사악함을 물리치는 꼿꼿한 베개가 청장관의 베개인 셈이다.

침명에는 ‘구성침(九省枕)’처럼 아홉 번을 반성하자는 뜻을 담은 것도 있고, 군자가 베고 잘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선(善)과 인(仁)이 아니겠느냐는 목소리도 들어 있다. 짤막하고 강렬한 다짐들은 마치 저 강렬한 햇살과도 같다. 가을이면 부석사의 사과는 속살까지 빨갛게 익을 것이다.

 

 

 

 

[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담뱃대에 스민 다산의 지조… 처음은 굽었어도 끝은 반듯하네

 

 

중요무형문화재 제65호 백동연죽장(담뱃대를 만드는 장인) 기능보유 추정렬 선생(1991년 작고)이 굽은 대통을 만드는 모습. 사진작가 고 김대벽 선생 작품(1929∼2006). 현암사 제공

 

 

‘묻노라.

옛사람들의 경전에는 실려 있지 않으나 민생에 이로운 물건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노라.

인자한 천지가 인간을 사랑하여 선물한 것으로도 이만한 것이 없는데,

왜 그대들은 이를 금지하자는 것인가?’

 

 

국왕 정조(正祖)가 신하들에게 낸 문제다. 문제 속의 ‘이것’은 무엇일까?

의아스럽겠지만 남령초(南靈草), 곧 담배다.

위의 글은 홍재전서(弘齋全書) 중 ‘남령초책문(南靈草策問)’의 내용을 필자가 줄이고 다듬어 본 것이다.

책문 속에는 담배에 대한 정조 자신의 예찬도 들어 있다. 젊어서부터 오로지 책을 벗하며 살았고 왕위에 올라서는 정무를 살피느라 가슴이 콱 막힐 때가 많았는데, 이런저런 약을 복용해 보았으나 오직 남령초에서만 도움을 얻었다고 했던 것이다. 하루에 네 시간쯤 자면서도 지칠 줄 몰랐던 군주의 시름을 달래준 친구가 담배였다니….

○ 담배라는 조선의 고민거리

 

광해군 무렵 조선에 전해진 담배는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다. 100년이 지나지 않아 거리에는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담뱃대를 문 인파가 넘쳐났다. 효종의 장인인 장유를 비롯해, 정약용, 김정희 등의 명망가뿐 아니라 이학규, 심노숭, 이옥 같은 유배객의 울울한 심사를 위로했던 물건이 바로 담배였다.

풍속도나 춘화도에서 담뱃대를 찾기란 감나무에서 감 찾기처럼 쉬울 정도다. 오죽하면 조선 후기의 학자 윤기(尹)는 ‘앉아 있을 때나 외출할 때나, 밤이나 낮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누워 있든 말을 타든 변소에 가든 한시도 손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 세상에 이것 말고 더 있느냐’며 한탄했다. 그는 담배가 위아래 사람의 인륜을 깨뜨리는 원흉이라며 담배를 지탄하는 입장에 섰다.

오늘날 이해하기 곤란한 대목도 꽤 있다. 남녀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담배를 배우는 시기가 열 살 무렵이었다. 미성년자 흡연은 물론이고 유소아(幼小兒) 흡연이 만연했음을 엿보게 한다.

필자는 열 살 아들에게 담배 좀 끊으라고 하는 부친의 하소연을 읽은 적도 있다. 믿기는 어려우나 담배 한 근을 말 한 필과 교환하기까지 했다 하니, 고급 담배에 대한 수요가 도를 넘은 시절도 있었던 듯하다. 병자호란 당시에 임경업 장군이 담배를 팔아 군비를 충당한 적이 있었고, 담배를 권하는 체하며 남녀가 수작을 거는 것이 조선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 애연가 이옥의 담배 사랑


 

 

 

백동담뱃대받침과 담뱃대. 서울역사박울관 제공

 

 

입맛이란 무서운 힘을 지닌 것이다. 서양인들의 인도양을 넘은 지리상의 발견 이면에는 후추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한 이면에는 사탕수수가 있었다. 영국 상선이 청나라에 아편을 팔다 빚어진 아편전쟁도 입맛 때문이었고, 지난날의 고추나 오늘날의 커피가 전 세계 대중을 사로잡은 것도 입맛 때문이다. 상인들이 차를 팔기 위해 히말라야를 넘고, 소금을 구하기 위해 사막을 건넌 것 또한 인간의 입맛과 관계된다.

백해무익하지 않으냐는 공격에도 애연가의 담배 예찬은 줄을 이었다. 담배 경전이라는 뜻의 ‘연경(烟經)’을 저술했던 문인 이옥(李鈺)은 대표적인 애연가였다.

그는 어른 앞, 스승 앞, 이불 위, 매화 꽃 아래에서의 흡연은 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담배를 긍정하는 논조를 폈다. 대궐에서 조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담배를 한 대 피우면 오장육부가 향기롭다 했고, 수염을 꼬아가며 시상(詩想)에 잠길 때, 시름이 많거나 심심할 때, 차를 달이고 있을 때나 달빛이 고울 때 담배 피우기가 좋다고 했다. 송광사(松廣寺)의 향로료(香爐寮)라는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려다 저지되자, “향도 연기가 되고 담배도 연기가 되어 무(無)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니, 인간세상 자체가 커다란 향로가 아니냐”고 했던 인물이다.


○ 힘 있는 소인배에게 굴하지 않는 태도

담뱃대를 소재로 해 기물명을 남긴 옛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그중에 ‘연대명(烟袋銘)’, 즉 담뱃대에 관한 명(銘)을 지은 정약용이 끼어 있다. 정약용도 필시 애연가였을 듯하다.

 

“들어오는 데는 굽었으나, 흘러가는 데는 반듯하다. 사람에게 늘 머금어지나, 사람에게 먹히지는 않는다(其受之也雖曲 其施之也以直 常爲人所含 不爲人所食)”라고 썼다.

굽은 대통(담뱃대의 담배 담는 부분)을 지나 반듯한 대롱을 거쳐 흡입되는 모양, 입 안에 머금어졌다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연기를 묘사한 것이다.

얼핏 보면 무미한 듯하지만, 다산의 20년 유배 인생을 떠올리면 뭔가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산은 강진 유배 말년에 아들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자세를 낮춰 당국자(當局者)에게 편지 한 통을 쓰면 해배(解配·귀양살이를 풀어 줌)가 쉬워질 듯도 하다는 전언이었다. 그는 단박에 이를 거절했다.

소인배에게 굽실거려 이로움을 취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굽지 않고 곧게 살려 했던 태도와 힘 있는 소인배들에게 제압당하지 않으려 했던 자세가 다산의 담뱃대와 담배연기에 얽힌 사연으로 읽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무(無)였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인생훈이 되기도 하니 담배 연기의 묘기가 묘하다 하겠다.

어린 딸의 공격에 밀려 베란다로 퇴출된 나 같은 아비는 담배 한 대 피우는 것에 대해 뭐라 적어야 할까!

 

 

 

 

 

[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권위-영광의 상징 지팡이는 老선비의 벗

 

공자와 모세의 지팡이는 동서양 성현의 지혜를 대표한다. 도연명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노래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짚은 지팡이나 퇴계 선생이 도산에서 사용한 청려장(靑藜杖)은 은퇴한 존장(尊丈)의 품위를 상징한다. 사제와 여왕, 오광대놀이의 양반도 지팡이가 없으면 허전하고, 채플린과 루팡, 삼장법사와 손오공도 지팡이가 없으면 멋스럽지 않다. 김시습과 김삿갓에게도, 히말라야의 등산가나 만화 속 마술을 부리는 소녀의 손아귀에도 지팡이가 들려 있다.

지팡이는 곧 소녀에서 노인, 동화에서 신화, 동양에서 서양을 넘나들며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권위와 영광의 상징이자, 노년과 병든 몸의 벗이었다. 또한 방랑의 그림자이자 중력에 대항하는 힘이었다.

○ 문학의 대지에 꽂힌 지팡이

 

‘정시자전(丁侍者傳·고려 말 승려 식영암이 지은 작품)’의 주인공은 지팡이다. 이 가전(假傳·사물을 의인화한 산문) 속에서 지팡이는 “남을 도와주는 것이 저의 직분입지요”라고 말한다.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는 지팡이의 도시다. 태양신이 자신의 자녀를 티티카카 호수에 내려 보내며 “황금 지팡이가 꽂히는 곳에 정착하라”고 말했는데 그곳이 바로 쿠스코였다고 한다.

중국의 지팡이는 색깔이 또 다르다.

고대 주(周)나라의 예절을 모은 ‘주례(周禮)’에는 ‘오십 살에는 집에서 지팡이를 짚고, 육십 살에는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칠십 살에는 나라에서 지팡이를 짚고, 팔십 살에는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주나라의 성군인 무왕(武王)은 자신의 지팡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오호라, 성냄과 넘어짐에서 위태롭고 망하게 되며(於乎危亡於忿)
오호라, 기호(嗜好)와 욕심에서 길을 잃게 되며(於乎失道於嗜慾)
오호라, 부하고 귀한 데서 망각이 오는구나.(於乎相忘於富貴)


무왕의 장명(杖銘)은 후세에 많은 울림을 주었다.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는 마지막 구절에 대해 ‘부귀하여 마차를 타면 지팡이를 잊어버린다. 가난할 때는 삼가다가 부귀해져서는 교만해지고, 그러다가 조심스러움을 망각하는 것이다’라고 풀었다. 의금상경(衣錦尙絅), 즉 비단옷을 입어도 엷은 홑옷을 걸쳐 입었던 겸손의 덕을 떠올리게 하는 풀이이다.


 

 

 

 

조선 현종이 1668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1595∼1671)에게 하사한 지팡이들

(보물 제930호). 경기도박물관 제공

 

 

욕심과 혼란이 되풀이되는 세상일수록 사람이 비틀거리는 빈도도 높아진다. 지팡이의 상징에 주목했던 선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병자호란 와중에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을 택했던 김상용(金尙容)은 오죽(烏竹)으로 만든 지팡이에 이렇게 새겼다.

 

“엎어질 땐 붙들어주고, 위태로울 땐 붙잡아준다. 만약 네가 아니라면, 나를 도울 자가 그 누구랴.

아아! 너에게 의지하니, 지팡이여 나를 버리지 말아다오

(顚則扶 危則持 微爾之 相吾誰

依嗟爾 杖莫相違,

烏竹杖銘).”

 

비틀거릴 몸을 붙잡아 달라는 부탁이 간절한데, 그 안에는 자신의 마음이 바로 가기를 염원한 뜻이 깃들어 있다.

원래 김상용이 지팡이를 짚고 가고팠던 길이 비장한 죽음의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푸른 용 모양을 한 다른 지팡이를 읊은 작품을 보니 그는 그 단단한 지팡이를 짚고 구속 없는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싶어했다.

‘이 지팡이를 짚고 하늘이 허락해준 자유로움을 즐기리라(杖乎杖 樂天放, 蒼龍杖銘)’고 했던 그 희망이 김상용의 진짜 꿈이지 않았을까.

조선후기의 명필 이서(李)도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어 했다. 금강산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선물 받은 뒤 그는 꼬불꼬불 용처럼 생긴 그 지팡이와 더불어 비로봉 꼭대기에 오르기를 염원했다(蓬萊杖銘). 그러나 그 또한 파란 많은 정치사의 한복판에서 곤장을 맞고 짧은 생을 마쳐야만 했다. 두 사람은 정치적 계통상 반대편에 속했지만, 지팡이에 새긴 꿈도 같았고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것도 같았다.


○ 푸른 산 맑은 바람의 동반자들

지팡이의 운명도 주인 따라 갈린다. 영조대의 문장가 남유용(南有容)은 스물다섯 살에 금강산 비로봉으로 향했다. 길은 가파르고 고갯마루는 험했다. 수풀에서 잠시 쉬던 그는 어깨 높이로 자란 철쭉을 꺾어 지팡이로 삼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철쭉 지팡이를 기려 “나는 오건(烏巾·검은색 두건)과 하얀 학창의(鶴衣·선비들이 입던 평상복)를 걸치고, 일천 봉우리를 넘고 일만 골짜기를 건넜다. 비로봉으로 날개 달린 듯 올랐을 때, 나를 따랐던 이는 오직 그대였을 뿐!(杖銘)”이라며 고마워했다.
 

비슷한 시기의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은 산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유명했다.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등을 남겨 지리학의 대가가 되었던 그는 “길에는 주인이 없다. 다니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노년에는 그도 명아주 지팡이와 관련한 장명(杖銘)을 지어 이런 사연을 담았다.

‘명산 찾던 젊은 시절 지나 24년 벼슬길에 묶이다 보니, 어느덧 다리에 힘 풀리고 지팡이에 의지한 노년. 그래도 흰 구름 속의 산이 그리워 하염없이 눈길을 던진다. 아! 이제부터는 내 발로 걸어야지. 지팡이 너를 고생시키지 않을 수 있다면!’

홀연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떠오른다. ‘산에 들어가며(入山)’라는 시에 “스님! 청산 좋단 말 마소, 산 좋다며 어이 다시 나오시오. 훗날 내 자취 두고 보구려, 청산에 한 번 들면 영영 오지 않으리니”라고 했다. 훗날 어느 시인은 이렇게 이어받았다.

 

“한 번 청산으로 떠나가니, 오백년 동안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一入靑山去 淸風五百年).”

 

청산과 청풍을 따라 고운의 지팡이가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린다.

 

 

 

 

[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송년 시즌에 살펴본 주계-주기명(酒器銘)

 

세종은 술로 인한 禍(화) 끝이 없다 하고, 이태백은 석잔이면 道 통한다 하고…

 

 

풍성하게 트레머리를 얹어 올린 여인이 부뚜막에서 국자로 술을 떠 올린다. 그녀를 둘러싼 사내들의 낯빛도 발그스름하다. 신윤복의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수록된 ‘주사거배(酒肆擧盃·1805년)’의 일부분이다.

‘주국(酒國)’에 살고 싶었던 신윤복에게 술은 독이었을까, 아니면 덕이었을까.

 

 

조선에 금주령(禁酒令)이 엄했던 1766년 5월 23일. 중국의 베이징(北京) 쯔진청(紫禁城) 근처 건정동(乾淨)의 객점에서 한중학술사의 기념비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조선 선비인 홍대용(洪大容)과 김재행(金在行)이 중국 문인 엄성(嚴誠) 육비(陸飛) 등과 의형제를 맺으면서 이후 한중 문인 사이의 교류는 한층 깊고 넓은 물결을 이루게 됐다.

이날 정담의 물꼬를 튼 것은 술이었다. 금주령 때문에 ‘주(酒)’자를 넣어 시문을 지을 수 없다고 김재행이 엄살을 부리자 엄성은 “논어에도 술을 말한 곳이 여러 군데인데 그렇다면 공자님도 그른 것이냐”고 맞받았다. 그리고 일행은 고픈 술을 못 마시며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는 김재행을 ‘산 채로 죽은 술귀신(酒鬼)’이라 놀렸다.

콩 튀듯 술에 관한 해학이 펼쳐지던 중에 육비가 물었다.

“술이 없으면 조선의 연회에서는 무엇으로 즐기십니까?”

 

본시 술을 잘 못하는 홍대용이었지만 이렇게 답했다.

“연회에서 술을 들지 못하니 분위기가 죽고 낙세(樂世)의 맛이 적답니다.”

 

○ 상정(觴政), 술잔 나라의 정치

이국의 객점에서 나눈 술 이야기는 ‘술의 나라’가 우주의 어떤 좌표에 놓이는지를 시사한다. 이 나라는 국경으로는 잴 수 없는 곳에 있으며 풍류와 낙세를 구하는 무리들이 환(歡·기쁨)과 광(狂·미치거나 사나움)을 즐기는 곳이다. 그렇지만 술의 나라인 주국(酒國)에는 그들대로의 규율이 있었던 듯하다.

술잔 소리만 들어도 기뻐 날뛰었다는 허균(許筠)은 상정(觴政), 곧 술잔 나라의 정치를 흠모했다.

허균의 술잔 나라에 가면, 술꾼들이 뽑은 어떤 어른이 정사를 펼친다. 술 분위기가 약하면 그는 근무 태만의 냉관(冷官)이 되고 지나치면 가혹한 정치를 휘두른 열관(熱官)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녹사(錄事)라는 관리 하나를 거느리는데, 이 사람은 재치가 있거나 음률에 밝거나 그도 아니라면 주량이 남보다 커야 한다.

 

 

 

술이 7분(分) 이상 차오르면 따르는 대로 모두 술잔 밑으로 흘러 내려가는 ‘계영배(戒盈杯)’.

이천시립박물관 제공

 

 

술꾼들도 지킬 것이 있다. 술잔을 따지지 말고, 술맛으로 시비 걸지 말고, 시를 지을 줄 알아야 하고, 취하더라도 술을 엎질러서는 안 된다. 눈빛이 난폭한 기운을 띠는 광화(狂花), 몇 잔에 눈꺼풀이 풀리는 병엽(病葉), 행실과 언사가 저속한 해마(害馬)는 이 나라에서 축출된다.

○ 德과 毒의 각축, 술 나라에서 벌어진 전투

“공경·대부·신선·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들로부터 머슴·목동·사이(四夷·사방의 오랑캐)·해외인에 이르기까지 국처사(麴處士)의 향기로움을 맛본 자들은 모두 그를 흠모했다. 성대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순(醇·성인 국은 누룩을, 이름인 순은 진국인 술을 뜻함)이 오지 아니하면 모두 다 서글퍼하며 국처사가 없으니 즐겁지 않다고 했다.”(임춘·‘국순전(麴醇傳)’)

“술의 화가 어찌 곡식을 축내고 재물을 소비하는 것뿐이겠는가! 안으로는 마음을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바른 모습을 잃게 하여 혹 부모의 봉양을 폐하게 하기도 하고 혹 남녀의 분별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크게는 나라를 잃고 작게는 본성을 해치게 하니, 강상(綱常·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어지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을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세종대왕·‘주계(酒戒)’)

역사상 온갖 논쟁이 오고갔지만 술에 관한 논쟁만 할까. 세종대왕을 비롯한 제왕들은 대체로 술의 독을 경계했다. 중국의 요임금은 딸인 의적(儀狄)이 술을 만들어 바치자 천하의 지극한 맛이라 칭찬하면서도 후대에 나라를 망칠 것도 이것이라 말했다 한다. 조선의 숙종 임금은 “한 번 술을 권하는데 백번 절을 하는 것은 술의 재앙의 무서움을 알리고자 함이었다(주배명·酒杯銘)”고 했다.

학자들도 대체로 술의 폐해를 공격했다. 19세기의 이남규(李南珪)는 이황(李滉)의 주계(酒戒)를 베껴 아들에게 주면서 “창자를 썩히고 본성을 미혹시키고 몸을 망치고 나라를 뒤엎는다. 내가 그 독을 맛보았는데 너 또한 그럴 것이냐”라고 하였다. 박지원은 후배 유득공에게 “술병유(酉)에 졸(卒·죽음)을 합하면 취할 취(醉) 자가 되고, 생(生·삶)을 붙이면 깰 성(醒)자가 된다”며 술을 조심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애주가들의 항변도 그칠 줄 몰랐다. 이규보는 ‘국선생전(麴先生傳)’에서 “우울하던 임금도 성(聖·청주)이 들어와 뵈면 비로소 크게 웃었다”고 적었다. 이태백은 만고의 시름을 잊으려 술잔을 들었고 “석 잔이면 도에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에 합한다(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며 극찬했다. 또 박지원 유득공과 함께 놀았던 박제가는 차고 있던 칼을 끌러 술을 사준 백동수를 호쾌한 남아라 칭하며 기렸다. 애주가들은 여전히 지상에는 없는 주국(酒國)의 주민이기도 했던 것이다.


○ 술의 나라 하늘에 떠 있는 별

술잔, 주전자, 술동이 등의 주기(酒器)에 다짐을 적어둔 글이 주기명(酒器銘)이다. 독이 되었다가 덕이 되었다가 하며 변화가 무쌍한 것이 술인지라 술 나라에는 유독 주기명이 많다.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주국은 자칫 탕아들이 들끓는 난장판이 될 터이다. 이 때문에 주당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하늘의 별자리 역할을 했던 것이 주기명이기도 하다.

이규보는 술동이에 이렇게 적었다.

 

“네가 품은 것을 옮겨, 사람들 배 속으로 들인다. 넌 가득 차면 덜어서 넘치지 않는데, 사람들은 가득 찬 줄 모르고 쉬 고꾸라진다(移爾所蓄 納人之腹 汝盈而能損故不溢 人滿而不省故易, 준명·樽銘).”

 

비틀비틀 고꾸라지는 술꾼은 술의 길을 이미 잃은 취한(醉漢)이다.

정약용도 술잔에 이렇게 다짐했다.

 

“하루의 절개는 잔에 달려 있고, 백년의 절개는 뜻에 달려 있다. 잔은 넘치면 흐르나, 뜻은 거칠면 취한다

(一日之節在器 百年之節在志 器濫則出 志荒則醉, 고명·銘).”

 

인생이라는 빈 잔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뜻과 의지를 채워 삶이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 정약용이 바람이었다.

“술맛이 왜 단 줄 알아?”

6년 전 학과 수련회에서 4학년 학생이 친구들에게 던졌던 물음이다. 쫑긋 귀를 세운 친구들에게 왈,

“그건 인생이 쓰기 때문이야.”

 

미래가 걱정되어 자다 깨곤 한다는 그 목소리가 아직도 들린다. 송년 모임이 무척 많을 12월, 사람들의 술맛이 이렇게 달지는 않기를 바란다.

 

 

/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 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