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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객택인 (召客擇人) [정민의 세설신어]

경호... 2015. 7. 23. 00:11

 

[정민의 세설신어]

소객택인 (召客擇人)

 

 

정민 /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측천무후(則天武后) 원년(692)의 일이다. 흉년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자 온 나라에 도살과 어류 포획을 금지했다. 우습유(右拾遺) 장덕(張德)이 귀한 아들을 얻어 사사로이 양을 잡아 잔치했다.

보궐(補闕) 두숙(杜肅)이 고기 전병 하나를 몰래 품고 나와 글을 올려 장덕을 고발했다.

이튿날 태후가 조회할 때 장덕에게 말했다.

 

"아들 얻은 것을 축하하오."

 

장덕이 절을 올리며 사례했다.

 

"고기는 어디서 났소?"

 

장덕이 고개를 조아려 사죄했다. 태후가 말했다.

 

"내가 도살을 금했지만 길한 일과 흉한 일의 경우는 예외요. 경은 이제부터 손님을 청할 때 사람을 가려서 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면서 두숙이 올린 글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두숙은 크게 무참했다. 온 조정이 그 얼굴에 침을 뱉으려 했다.

소객택인(召客擇人), 즉 손님을 부를 때 사람을 가려서 하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누사덕(屢師德)은 어진 사람이었다. 40년간 지방관으로 있는 동안 관대하고 근면해서 백성들이 편안했다. 당시 적인걸(狄仁杰)이 재상에 올랐다. 누사덕이 그를 추천했다.

적인걸은 그 사실을 모른 채 평소 누사덕을 가볍게 보아, 여러 번 그를 변방으로 보낼 것을 청했다.

듣다 못한 태후가 물었다.

 

"누사덕은 현명한가?"

"장군으로 변방을 지킬 수는 있겠지만 현명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인재를 잘 알아보는가?"

"신이 전부터 그와 동료였지만 그런 말은 못 들었습니다."

 

태후가 말했다.

"짐이 경을 알게 된 것은 누사덕이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可謂知人)."

 

 적인걸이 진땀을 흘리며 물러나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내가 누사덕의 성대한 덕의 그늘에 있었구나. 나는 그를 넘볼 수가 없겠다."

나라에 큰일을 앞두면, 저마다 자기가 그 사람이라며 남을 헐어 제 잇속을 차리기 바쁘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중심을 잡지 않고 이리저리 휘둘리면 사람도 잃고 큰일을 그르친다. 난무하는 말의 잔치 속에서 본질을 꿰뚫어 핵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소객택인! 사람을 잘 가려야 욕을 당하지 않는다.

가위지인! 큰일을 하려면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말년에 독선에 흐르기 전까지 측천무후의 용인술(用人術)은 이처럼 통 크고 시원스러웠다.

 

 

 

 

만이불일(滿而不溢)

 

이조판서 이문원(李文源·1740~1794)의 세 아들이 가평에서 아버지를 뵈러 상경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말을 타고 온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냈다.

"아직 젊은데 고작 100여리 걷는 것이 싫어 말을 타다니. 힘쓰는 것을 이렇듯 싫어해서야 무슨 일을 하겠느냐?"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즉시 걸어 가평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다시 도보로 올 것을 명령했다.

그 세 아들 중 한 사람이 이존수(李存秀·1772~1829)다. 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李天輔)였다. 영의정의 손자요 현임 이조판서의 아들들이 말 타고 왔다가 불호령을 받고 걸어갔다가 걸어왔다.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이존수 또한 뒤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나고 말하고 침묵함이 법도에 맞았고, 지휘하고 일을 살피는 것이 민첩하고 명민해서 간교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속일 수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석주(洪奭周)가 '학강산필(鶴岡散筆)'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효경'에는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다. 절제하고 아껴 법도를 삼가면 가득차도 넘치지 않는다(在上不驕, 高而不危. 制節謹度, 滿而不溢)"고 했다.

 

"네가 다만 뽐내지 않으면 천하가 너와 더불어 공을 다투지 않고,

네가 남을 치지 않으면 천하가 너와 더불어 능함을 다투지 않는다

(爾唯不矜, 天下莫與汝爭功,

爾唯不伐, 天下莫與汝爭能)".

이것은 '서경(書經)'에 보인다.

성대중(成大中)은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 한신(韓信)이 큰 공을 세우고도 끝내 패망의 길을 걷게 된 까닭을 열거한 뒤, "뜻을 얻자 기운이 높아져 도량은 좁아지고 지혜는 어두워졌다(意得氣亢, 量狹知昏)"는 여덟 자로 그의 생애를 요약했다. 득의의 순간에 기세를 낮추고, 도량을 넓혀 겸양으로 처신하는 것, 이것이 부귀의 자리를 오래 지키는 비결이다. 그러지 않고 기운을 뽐내고 재주를 자랑하면 끝내 화를 면치 못한다.

높아지고 가득 채우고 싶어하는 욕심은 누구나 같다. 하지만 그 끝이 자주 위태롭고, 넘쳐흘러 제풀에 무너지고 마는 것은 슬픈 일이다.

걸어서 다시 오라고 아들을 돌려세우던 이조판서 이문원의 매서운 가르침이 자꾸 생각난다.

 

 

 

 

불출악성 (不出惡聲)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윤광석(尹光碩)은 이웃 고을 함양 군수였다.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냈다. 윤광석이 선대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연암의 선조를 잘못된 사실로 모독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뒤늦게 이 일을 안 연암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윤광석은 자기가 직접 한 일이 아니며, 미처 살피지 못해 일어난 일이니 당장 판을 헐어 새로 찍겠다고 연암에게 사과했다. 막상 딴 데 가서는, 내용이 좋다고 연암이 칭찬까지 해놓고 이제 와서 저런다며 힐난했다.

윤광석은 한술 더 떠 지금도 둘 사이가 전처럼 좋고 술자리에서 단란한 정을 나누며 지낸다며 떠들고 다녔다.

연암은 부들부들 치를 떨었다. 붓을 들어 윤광석에게 긴 편지를 썼다. 전후 경과를 적시하고 분노를 꾹꾹 누른 채 이렇게 편지를 맺었다.

 

"이후 다시는 상정(常情)을 벗어난 말로 꾸미려 들지 말고, 분분한 입씨름을 끊읍시다. 나는 그대에게 원한이 이미 깊고, 사귐은 끊어지고 말았소. 그런데도 속마음을 피력하는 것은 '군자는 절교해도 나쁜 소리를 내지 않는다(君子絶交, 不出惡聲)'는 뜻을 따르려 함이오."

끝 구절은 '전국책(戰國策)'에 나온다.

연나라 소왕(昭王)을 도와 제나라의 70여 성을 빼앗은 악의(樂毅)가 제나라의 반간계로 모함을 받아 그 아들 혜왕(惠王)에게 소환당했다.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해 달아났다. 혜왕은 결국 제나라에 크게 패해 빼앗은 땅을 도로 내주었다. 악의가 그 틈을 타 보복할까 두려워 혜왕은 편지를 보내 죄를 따졌다.

악의는 공손하게 자기의 부덕을 사죄하고 "옛날의 군자는 사귐을 끊을 때 나쁜 소리를 내지 않고, 충신이 나라를 떠날 때는 그 이름을 깨끗이 하지 않는다(不潔其名)고 들었다"며 편지를 끝맺었다.

지난 일은 원망하지 않겠다. 허물은 내가 안고 간다. 등에다 칼을 꽂는 일도 하지 않겠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는 대답이었다.

그러고도 잘 되나 보자. 나인가 저 사람인가. 양단간에 선택을 해라. 대체 내 허물은 하나도 없고, 상대를 힐난하고 나무라는 말뿐이다. 벗 사이에, 상하 관계에서 오갈 말이 아니다. 머금어 가만히 누르지 않고 속사포로 제 말만 쏟아낸다. 악의나 연암이나 할 말이 왜 없었겠는가? 참았던 것뿐이지.

 

 

 

성문과정(聲聞過情)

 

소식(蘇軾)의 시에,

"선비가 시골에 있을 때에는 강태공(姜太公)과 이윤(伊尹)에다 저를 비기지.

시험 삼아 써보면 엉망이어서, 추구(芻狗)를 다시 쓰기 어려움 같네

(士方在田里, 自比渭與莘.

出試乃大謬, 芻狗難重陳)"란 구절이 있다.

 

추구는 짚으로 엮어 만든 개다. 예전 중국에서 제사 때마다 만들어 쓰고는 태우곤 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재야에 있을 때는 하도 고결하고 식견이 높은 듯 보여 맡기면 안 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막상 써보니 1회용도 못 되는 알량한 그릇이었다는 말이다.

소식이 '증전도인(贈錢道人)'이란 시에서 또 말했다.

 

"서생들 몹시도 책만 믿고서, 세상 일을 억탁으로 가늠한다네.

견딜 만한 역량도 못 헤아리고, 무거운 약속조차 가볍게 하지.

그때야 뜻에 마냥 통쾌했어도 일 지나면 후회가 남음이 있네.

몇 고을의 무쇠를 모두 모아야, 이 큰 쇠줄 만들는지 모르겠구나

(書生苦信書, 世事仍臆度.

不量力所負, 輕出千勻諾.

當時一快意, 事過有餘?k.

不知幾州鐵, 鑄此一大錯)."

 

입으로 하는 고담준론이야 누구든 다 한다. 세상 일은 책에 나오는 대로 되는 법이 없다. 큰소리 뻥뻥 쳐놓고 뒷감당 못해 민망한 꼴은 지금도 날마다 본다.

한유(韓愈)가 '지명잠(知名箴)'에서 말했다.

 

"내면이 부족한 사람은 남이 알아주는 것을 조급해한다.

넉넉하게 남음이 있으면 그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內不足者, 急於人知,

沛然有餘, 厥聞四馳)."

 

저를 알아달라고 설쳐대는 것은 내실이 없다는 틀림없는 증거다. 내면이 충만한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먼저 알아 소문이 퍼진다.

그래서 공자는 "소문이 실정보다 지나침(聲聞過情)을 군자가 부끄러워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받아 홍석주(洪奭周)는 그의 '학강산필(鶴岡散筆)'에서 이렇게 적었다.

"군자가 본래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지가 없는데도 남이 알아주는 것은 싫어한다.

실제보다 넘치는 이름은 사람을 해침이 창보다 날카롭다.

실지가 없으면서 남들이 알아주느니, 차라리 실지가 있으면서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사람들은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느라 정신이 없다.

알아줌을 얻지 못해 근심하고 미워하며 성내는 자는 반드시 실지가 부족한 사람이다."

 

 

 

 


분도양표(分道揚)


 

남북조 시절 북위(北魏)의 대신 원제(元齊)는 여러 차례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황제가 그를 높여 하간공(河間公)에 봉했다. 그의 아들 원지(元志) 또한 총명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낙양령(洛陽令)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어사중위(御史中尉) 이표(李彪)의 건의로 산서성 평성(平城)에 있던 도읍이 낙양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일개 지방 현령이었던 원지는 하루아침에 경조윤(京兆尹)이 되었다. 경조윤은 오늘로 치면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

원지는 평소 제 재주를 자부하여, 조정의 지위 높은 벼슬아치를 우습게 보았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공교롭게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이표의 수레와 마주쳤다. 조정의 지위로 보아 원지는 이표보다 훨씬 낮은 직급이었다. 길을 양보해 비키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원지는 끝내 이표에게 길을 양보하지 않았다.

격앙한 이표가 원지를 나무랐다.

"나는 어사중위다. 관직으로 봐도 너보다 한참 위인데, 어찌 길을 양보하지 않는가?"

 

원지가 지지 않고 맞섰다.

"나는 이곳 낙양의 수령이오. 내 입장에서 보면 당신은 낙양에 거주하는 주민에 지나지 않소. 고을 수령이 거주민에게 길을 양보하는 이치가 어디에 있소."

둘은 팽팽하게 맞서 물러서지 않았다. 조정 서열로 보면 이표의 말이 맞고, 원지의 말도 조리가 있었다. 게다가 원지는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원제의 아들이었다. 난감해진 효문제(孝文帝)가 말했다.

 

"낙양은 나의 도읍지다. 앞으로는 길을 나눠 수레를 몰고 가도록 하라."

길을 나눠 말을 몰고 간다는 분도양표(分道揚鑣)

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표(?)는 말에게 물리는 재갈이다. 재갈을 치켜든다는 양표는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후세에는 품은 뜻과 지향하는 목표가 다를 때 각자의 길을 가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다.

길은 하나뿐인데 둘이 마주쳤다. 누가 양보해야 하는가?

자칫 지위와 재능으로 다투다 보면 한쪽이 다친다. 반씩 나눠 제 길을 가면 임금은 아끼는 두 신하를 지켜 좋고, 두 사람은 각자 체면을 세워 좋다. 효문제의 평결은 왠지 원지 쪽에 힘을 실어준 느낌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반대 방향에서 마주친 것이 아니라 한 목표를 향해 나란히 달려갈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단미서제 (斷尾噬臍)


 

주(周)나라 때 빈맹(賓孟)이 교외를 지나다 잘생긴 수탉이 꼬리를 제 부리로 물어뜯는 것을 보았다.

"하는 짓이 해괴하구나."

 

시종이 대답했다.

"다 저 살자고 하는 짓입니다. 고운 깃털을 지니고 있으면 잡아서 종묘 제사에 희생으로 쓸 것입니다. 미리 제 꼬리를 헐어 위험을 벗어나려는 것입지요."

 

빈맹이 탄식했다.

단미웅계(斷尾雄鷄), 이른바 위험을 미연에 차단코자 제 잘난 꼬리를 미리 자른 수탉의 이야기다.

'춘추좌전'에 나온다.

고려가 망해갈 무렵 시승(詩僧) 선탄(禪坦)이 새벽에 개성 동문 밖을 지나다가 닭울음 소리를 듣고 시를 썼다. 그 끝 연이 이랬다.

 

"천촌만락 모두다 어둔 꿈에 잠겼는데,

꼬리 자른 수탉만이 때를 잃지 않는구나

(千村萬落同昏夢, 斷尾雄鷄不失時)."

파망이 바로 코앞에 닥쳤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혼곤한 잠에 빠져있다. 꼬리 자른 수탉만이 홀로 잠을 깨어 어서 일어나 정신을 차리라고, 부디 때를 놓치지 말라고 울고 있다는 이야기다. 앞서의 고사를 활용했다.

이기(李?·1522~1600)의 '간옹우묵(艮翁尤墨)'에 나온다.

'춘추좌전'에는 서제막급(噬臍莫及)의 고사도 보인다.

사향노루는 죽을 때 사향주머니 때문에 죽는다고 여겨 제 배꼽을 물어뜯는다고 한다. 사향은 고급 향료이자 약재여서 사냥꾼은 향주머니가 든 그의 배꼽만 노린다. 하지만 사냥꾼에게 잡히고 나서 배꼽을 물어뜯은들 때는 이미 늦었다. 제 입은 또 제 배꼽에 가 닿지도 못한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1686~ 1761)이 데생 모음집 '사제첩(麝臍帖)'을 남겼다. 그의 그림 실력을 높이 평가한 임금이 1748년 숙종의 어진(御眞)을 마련하면서 감동관(監董官)으로 참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자신은 선비인데 천한 재주로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명을 거부하다 결국 파직당했다. 그림 재주로 인해 욕을 당한 후회의 마음을 화첩 제목에 담았다.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남에게 보이지 말라. 어기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勿示人, 犯者非吾子孫)."

수탉은 꼬리를 끊어 화를 면했고, 사향노루는 배꼽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재주 재(才)자는 삐침이 안쪽으로 향해있다.

밖으로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감추는 것이 화를 멀리하는 길이다.

 

 

 

噬씹을 서 1. 씹다, 먹다 2. 깨물다 3. 삼키다, 빼앗다 4. 미치다, 다다르다

臍 배꼽 제. 1. 배꼽(배의 중앙에 있는 탯줄의 자국) 2. 외가 달린 꼭지

噬臍莫及 서제막급.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이 그릇된 뒤에는 후회(後悔)하여도 아무 소용(所用)이 없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한 말

 

 

 

 

 


오교삼흔 (五交三)


 

갑자기 오랜 우정의 절교가 세간의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중국 남조(南朝) 때 유준(劉峻·463~522)의 광절교론(廣絶交論)이 생각난다. 세리(勢利)를 좇아 우정을 사고파는 당시 지식인들의 장사치만도 못한 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먼저 우정에는 소교(素交)와 이교(利交)의 두 종류가 있다.

비바람 눈보라의 역경에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는 것은 현인달사(賢人達士)의 소교, 즉 변함없는 우정이다. 속임수와 탐욕을 바탕에 깔아 험악하기 짝이 없고 변화무쌍한 것은 제 이익만 추구하는 이교다.

소교가 사라지고 이교가 일어나면서 천하는 어지러워지고 천지의 운행이 조화를 잃게 되었다.

이교는 장사치의 우정이다. 여기에도 다른 듯 같은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첫 째가 세교(勢交)다.

권세 있는 사람에게 바싹 붙어서 못 하는 짓이 없고 안 하는 짓이 없는 사귐이다. 사람이 아니라 그의 권세를 노린다.

 

둘째는 회교(賄交)다.

 재물 있는 자에게 찰싹 빌붙어 온갖 감언이설로 그 떡고물을 주워 먹으려는 우정이다.

셋째가 담교(談交)다.

권력자의 주변을 맴돌면서 입으로 한몫 보려는 행태다. 그 혀끝에서 무더위와 한파가 극을 달린다. 입으로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넷째는 궁교(窮交)다.

궁할 때 동병상련으로 서로 위해주는 듯하다가 한순간에 등 돌려 제 잇속을 차리는 배은망덕의 사귐이다.

 

다섯째는 양교(量交)다.

말 그대로 근량(斤量)을 달아서 재는 우정이다. 무게를 달아 괜찮겠다 싶으면 그 앞에서 설설 기고,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본색을 드러낸다. 저마다 달라 보여도 속심은 한가지다.

이 다섯 가지 이교에서 다시 삼흔(三?), 즉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패덕진의(敗德殄義),

금수상약(禽獸相若)'이니 덕과 의리를 무너뜨려 금수(禽獸)와 같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난고이휴(難固易攜),

수송소취(讎訟所聚)'로 우정을 굳게 하기는커녕 쉬 떨어져 마침내 원수가 되어 서로 소송질이나 하는 것이다.

 

셋째는 '명함도철(名陷饕餮),

정개소수(貞介所羞)'다. 탐욕의 수렁에 빠져 뜻 있는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게 됨이다.

 

애초에 이교로 만난 사이였다면 무슨 우정과 절교를 말하며 상대 탓을 하겠는가? 다만 끝까지 제 이익에 충실할 일이다.

 

 

/ 조선

 

 

 

 

 

 

 

 

 

? 피 칠할 흔,틈 흔. 1. 피 칠하다 2. 그릇에 희생(犧牲)의 피 발라 제 지내다 3. 움직이다 4. 훈제하다 5. 틈 6. 간격(間隔) 7. 허물 8. 불화 9. 분쟁(紛爭)의 발단(發端) 10. 성(姓)의 하나

?端 흔단. 흔(?)은 틈, 곧 불화(不和)의 뜻으로, 서로 사이가 벌어지는 시초(始初)나 단서(端緖). 불화(不和)의 단서(端緖). 싸움의 시초(始初) .

?隙 흔극 ①틈 ②사람들의 사이가 벌어져서 생기는 불화(不和)

?? 도철 : ①재물(財物)이나 음식(飮食)을 몹시 욕심(慾心)냄, 또는 그러한 사람 ②상상상(想像上)의 모진 짐승의 하나 . ? 탐할 도.? 탐할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