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 건강에 답하다]
성숙의 계절엔 날뛰지 말라
관자(管子)’와 가을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관중의 초상화.
가을 문턱인 입추(立秋)를 넘기고 처서(處暑, 8월 23일)에 접어드니 새벽녘이면 살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가을 냉기가 스멀스멀 온몸을 휘감는 듯하다. 처서는 말 그대로 한여름 무더위가 멈춘다는 뜻이다. 자연은 이때부터 습(濕)과 열(熱)에 의한 만물의 양적 성장을 멈춘 뒤 본격적으로 열매를 맺고 후손을 남기라고 재촉한다.
사람 역시 자연 변화에 맞추어야 한다. 순리에 맞춰 살아야 건강에 별 탈이 없기 때문이다. 기자는 1년 24절기 중 ‘입(立)’자가 들어간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이 낀 달에는 어김없이 ‘관자(管子)’라는 고전을 꺼내 자연 변화에 맞춰 사람이 해야 할 바를 되새기곤 한다. ‘관자’는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 정치가인 관중(管仲, ?~BC 645년)이 지은 것으로 돼 있으나, 전국시대에서 전한(前漢)에 걸쳐 관중의 후인들이 편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86편으로 구성됐으나 10편은 분실하고 76편이 현전한다.
‘관자’는 사계절 변화가 모두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현상이라고 설명하면서, 유관(幼官)편에서 입추 이후 가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을에는) 흰옷을 입고, 매운 맛을 맛보며, 상성(商聲)을 들으면서 축축한 기운을 다스린다. 공경하는 마음을 지키고,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린다. 너그러운 기운이 닦이고 통하면 만물이 안정되며 몸이 다스려진다.”
‘관자’는 사계절 기운의 특성을 이야기하며 그에 맞춰 임금과 백성이 해야 할 바를 여러 편에서 언급했다. 대체적으로 가을은 △그 기운을 음(陰)이라 하고 △음은 오행의 금(金)을 생성하며 △그 품성(덕·德)은 근심하고 슬퍼함이며, 고요하면서 바름이고, 장엄하면서 화순함이며 △거처함에 가히 방탕하지 않고 △재간 있는 사람을 상으로 장려하고, 여러 인재를 모으며 △각종 작물을 거두고 △날카로우면서 살기(殺氣)를 띠고 있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관자’의 이러한 계절론은 ‘황제내경’에서 좀 더 섬세하게 드러난다. 중국 제자백가의 여러 사상을 몸이라는 매개체로 표현한 ‘황제내경’에서는 가을을 건강론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가을철 석 달은 용평(容平)이라 한다. 만물이 경쟁적으로 성장하다가 성숙해져 꽉 차고 안정되는 시기다. 하늘의 기운은 매서운 가을바람처럼 급하며, 땅의 기운은 청명해진다. 사람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뜻과 의지를 안정시키고 평안케 하여 가을의 숙살(肅殺)하는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정신을 잘 수습해 가을의 기후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며, 뜻을 밖에 두지 않도록 하고 폐기(肺氣)를 맑게 유지하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가을의 기운을 좇아서 양생하는 방법이다.”
(‘황제내경’ 소문편 사기조신대론(四氣調神大論) 중에서)
가을은 봄여름에 걸쳐 벌였던 일을 수습해 갈무리할 때라는 것이다. 철 모르고 날뛰다간 결실은커녕 가을의 매서운 ‘숙살 기운’에 된서리를 맞기 쉽다.
인생에서도 ‘가을 운’이란 게 있다.
사람에게 이 운이 들어올 때 잘 순응하면 ‘대박’이 나기도 하지만, 마냥 여름인 줄 알고 살다가 ‘쪽박’차는 사람도 많이 볼 수 있다.
아무튼 가을은 금(金)기운으로 인해 공기가 건조해지고 차가워지는 계절이다. 한의학에서는 ‘금’에 해당하는 인체 기관으로 호흡기와 피부, 대장을 꼽는데 가을 금 기운에는 이러한 인체장부가 상하기 쉽다고 본다. 가을에 무엇보다 보온과 보습에 신경 써야 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공자는 까칠한 식품위생주의자
‘논어(論語)’와 공자의 건강 ①
동양고전의 대표작 ‘논어’를 쓴 공자.
유교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공자(孔子, 이름은 구(丘), BC 551~BC 479)가 살아생전 건강관리에 무척 신경 썼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논어’(論語)에 나온다. 73세에 세상을 뜬 공자는 당시로서는 장수를 누렸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 의하면 공자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바라볼 만큼 키가 컸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한 풍모를 가졌던 듯하다.
공자는 활동 배경인 춘추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받아주고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생의 대부분을 유랑객으로 보냈다.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고생길’이라는 속언도 있듯이 그가 이국 타향에서 의식주에 걸쳐 갖은 고생을 했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공자는 말년까지 건강한 삶을 누렸다. 공자의 건강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군자는 음식을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며, 거처함에 있어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君子食無求飽居無求安)”는 것이다. 이 구절은 ‘논어’ 학이(學而)편에 등장하는데,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담은 일종의 어록집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공자의 후인이 기록한 ‘논어’에는 공자가 먹거리에 관한 한 꼼꼼히 따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여럿 보인다. 공자의 평소 생활하는 모습을 문인들이 살피고 기록한 향당(鄕黨)편을 보면 공자의 식성이 매우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공자는 음식을 매우 가려 먹었던 듯하다. 공자는 잘 찧은(도정한) 쌀밥을 싫어하지 않았고, 잘고 가늘게 저민 회(膾)를 싫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가의 가르침은 지나침을 경계하기에 ‘좋아했다’는 말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반면 쉰밥이나 상한 생선, 오래된 고기는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 후 그 고기를 정부 관리급인 대부(大夫)에게 하사하는 풍
습이 있었다. 공자는 나라 제사에 오른 고기는 그날 밤을 넘기지 않았고, 집에서 제사 지낸 고기 역시 사흘 이상 놔두지 않았다. 장시간 보관한 고기는 부패할 가능성이 크므로 위생관리를 철저히 했다는 뜻이다.
공자는 또 빛깔이 좋지 않거나 냄새가 고약한 음식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잘 익히지 않은 것과 제때가 아닌 음식도 먹지 않았다. 심지어 반듯하게 썰어놓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았고, 그 음식에 간을 치는 장(醬)이 없어도 들지 않았다. 장을 친 음식을 고집했다는 것은 자연산 조미료로 소독되지 않은 음식물을 경계했다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춘추시대에는 사람들의 위생관념이 지금처럼 철저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옛사람의 수명이 짧았던 것도 상당 부분 위생처리 시설과 위생관념이 부족한 것에서 비롯됐다는 의학사가들의 얘기도 있다. 그런 점에서 공자는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먹거리의 위생관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체득했을 터이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이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음식에 대해서는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다. 길에서 파는 술과 시장에서 사온 육포는 손도 대지 않았으며, 친지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챙겨 보낸 약재도 무슨 성분이 들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를 갖추어 정중히 거절하기도 했다.
공자는 음식을 가려먹으면서 또한 적절한 양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찬으로 나온 맛난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주식보다 더 먹는 법이 없었다. 음식은 배부르지 않게, 간결하게 먹어야 한다는 게 공자의 식습관이었다.
술을 마실 때도 일정하게 정해놓은 양은 없었으나 취해서 어지러운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먼저 경건하게 제를 지내는 절차를 밟았다고 한다. 그만큼 공자는 정성껏 만든 음식을 정성껏 먹었던 것이다
공자가 옆으로 구부려 주무신 까닭
‘논어(論語)’와 공자의 건강 ②
제자백가 중 유가(儒家) 시조인 공자는 건강을 잘 지키려면 위생적인 음식(854호 ‘고전이 건강에 답하다’ 참조)과 함께 소박한 생활환경, 잡스럽지 않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먼저 공자는 잠자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논어’ 향당(鄕黨)편은 공자가 잠자는 모습을 흥미롭게 묘사했다. 일반적으로 공자 같은 성인은 팔다리를 쭉 펴고 반듯하게 누워서 잠을 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공자는 모로 누워 구부린 자세로 잠을 잤다. 오히려 ‘침불시(寢不尸)’라는 표현처럼 죽은 듯이 팔다리를 쭉 펴고 반듯하게 누워 자는 자세를 반대했다.
왜 그랬을까. 허준이 남긴 ‘동의보감’은 이렇게 설명한다.
“몸을 옆으로 하고 무릎을 구부려 누워 자면 심기(心氣)를 보호해주며, 잠이 깨어 다리를 바로 뻗으면 정신이 흩어지지 않는다. 다리를 쭉 뻗고 반듯이 누워 자면 마귀와 도깨비가 범접하게 된다.”
공자는 옆으로 누워 자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는 것을 이미 알아챘던 듯하다. 사실 건강한 사람은 하룻밤 사이 20~30회 몸을 뒤척거리며 잔다고 한다. 건강한 아이의 경우 온 방 안을 헤집듯이 몸을 움직이며 자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 시체처럼 반듯하게 누워 자는 사람은 기력(氣力)이 쇠한 몸 상태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또 늘 잠옷을 입었다. 숙면을 위해 자기 몸길이보다 반쯤 더 긴 옷을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철에 맞는 잠자리를 골라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더울 때는 시원한 곳에서, 추울 때는 따뜻한 곳에서 자는 것이 생체 리듬을 거스르지 않아 질환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
한편 공자는 세상 사람에게 나이가 들면서 경계해야 할 세 가지를 조언했다. 젊었을 때는 혈기(血氣)가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색(色)을 경계해야 하고, 장년에 이르러서는 혈기가 한창 강건하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에는 혈기가 이미 쇠약해졌으므로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무병장수의 첩경이라는 것이다. 어려서 색에 탐닉하는 것은 건강을 해치는 지름길이고, 나이가 들어서는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에서 후덕하게 처신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으며, 늙어서 탐욕을 부리면 자신을 망치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수칙과 함께 공자가 장수(長壽) 요체로 무엇보다 우선시한 것은 도덕 수양 덕목인 인(仁)이었다. 공자는 “인자(仁者)야말로 장수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仁者壽)”고 하면서 여러 비유를 들어 인자를 강조했다. 인자는 동(動)과 정(靜)을 구분하며, 지나침과 모자람을 모두 경계하는 중용(中庸)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또한 깊이 생각하며 근신할 줄 알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닥쳐도 근심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즉 늘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인자는 음식을 지나치게 먹지도 않거니와, 몸을 너무 피곤하게 하거나 너무 편안하게 놔두지도 않는다. 감정을 다스리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공자는 ‘시경’(詩經·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으로 시 3000여 편을 공자가 300여 편으로 간추림)에 있는 관저(關雎)편의 시를 두고 “즐거우나 음란하지 않고(樂而不淫), 애처로우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哀而不傷)”고 하면서 “조화를 이뤘다”고 칭찬했다. 한마디로 감정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시가(詩歌)라는 것이다.
그러한 공자도 70세 나이에 사랑해 마지않던 수제자 안회(顔回)를 잃자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고 통곡했고, 그 얼마 뒤 또 다른 애제자 자로(子路)마저 위나라에서 불행하게 죽자 급기야 병을 얻어 그 이듬해인 73세에 세상을 떴다. 이미 연로한 나이에 사랑하는 두 제자가 죽으니 어찌 마음이 상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감정의 중용 여부를 떠나 바로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에서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더 깊어지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 주간조선
공자의 식성은 상당히 까칠한 편이다.
칼질을 바로하여 자르지 않아도 안먹고 술도 시장에서 파는 것은 안먹었다. 마늘은 안먹고 생강은 좋아했다.^^
鄕黨6章
必有寢衣 長一身有半
논어 향당 6장에 윗글이 나온다
여기서 "寢衣" 침의를 잠옷이라고 해석하여 잠옷이 몸의 한길 반이나 된다고 한다.
이 부분은 여러 설이 있으나 공영달(孔注)은 孔曰, "今之被也" , 정현(鄭注)은 "今小臥被." 라 하니 지금의 "이불"이다.
다산은 " 補曰寢衣。寢寐所服之衣也" 이라했다. 잠자는 곳에서 입는 옷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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