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4)
상수학 대가, 소강절
아들부터 9대손 앞날까지 손금보듯 신들린 점괘 적중률… 그의 정체는?
결혼 첫날밤, 소강절은 부인을 재워놓고 밤새 점을 치고 있었다. 그가 궁금했던 건 이 첫날밤 행사로 자식이 생겼을까 하는 것. 점을 쳐보니 과연 아들이 들어섰다는 점괘가 나왔다. 내친김에 손자와 그 다음 후손들의 앞날까지 점을 쳤다. 그러던 중, 9대손에 이르러 불길한 점괘가 나왔다. 9대손이 역적 누명을 쓰고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소강절은 임종을 앞두고 유품 하나를 남겼다. “이것을 9대손에게 물려주고 집안에 큰일이 생기면 풀어보게 하라.”는 유언과 함께.
▲ 소강절 초상화
●9대손의 목숨을 구한 점괘
300년 후, 소강절의 9대손은 정말 역적 누명을 쓰고 멸문지화를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는 9대조 할아버지의 유품을 열어 볼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고, 드디어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는 “지체하지 말고 이 함을 형조상서에게 전하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는 그 길로 형조상서를 찾아 갔다. 형조상서는 300년 전 대학자인 소강절의 유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나와 예를 다해 유품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유품을 받기 위해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서까래가 내려앉으며 집이 무너지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져온 함 속에 있었던 소강절의 편지 내용이었다. 거기엔 “당신이 대들보에 깔려 죽었을 목숨을 내가 구해주었으니, 당신은 나의 9대손을 구해 주시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서는 그 길로 재수사를 명했고, 9대손의 무죄를 입증해 주었다.
9대손의 운명까지 예측할 정도로 그의 점복술은 그야말로 최고 경지였다. 소강절의 생애에 관해선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대신 이 같은 신비한 얘기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 기막힌 예지력 때문에 그는 신비한 점쟁이의 대명사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강절은 수리(數理)를 성리학적으로 완성한 상수학(象數學)의 대가이다. 그의 예지력은 영감이나 직감이 아닌 바로 ‘수(數)의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숫자로 천지(天地)의 이치를 헤아리다
소강절(邵康節·1011~1077)은 북송 시대의 유학자이자 시인으로, 북송5자(주렴계, 소강절, 장재, 정호, 정이)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의 꿈을 키웠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과거를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옛 사람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더 옛날의 사람과도 소통하였는데, 나는 지금 내 주위 사방(四方)에도 못 미치는구나.”하며, 집을 떠나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도(道)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 후, 다시 나가지 않았고 더 이상 과거공부도 하지 않았다.
진정한 소통은 입신양명 같은 외적 확대가 아니라 우주와 직접 연결되는 내면의 확장이라고 깨달은 것일까.
이 무렵 이지재가 소강절이 학문을 즐긴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방문했다. 이지재는 주렴계의 스승인 목수의 제자로 고문에 정통한 학자이자 관리였다. 이지재는 소강절에게 물리(物理)와 성명(性命) 공부를 권했다. 뜻이 깊으면 그 방면에 반드시 스승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그런데 소강절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스승이 제 발로 찾아와 스승 되기를 청했다. 이때부터 소강절은 춘추를 배우고 역학(易學)을 전수받았다. 이지재는 그의 잠재력과 학문적 그릇을 꿰뚫어 보았다. 훗날 소강절의 사상이 주자학(신유학)의 사상적 기틀이 된 것을 보면 이지재의 안목도 대단하다고 하겠다.
소강절은 이지재로부터 도교의 연단술에 운용되던 선천도(先天圖)를 전해 받았고, 그것을 재해석하여 ‘선천역학’이라는 역학의 새로운 해석체계를 세웠다. 이 이론의 핵심은 ‘가일배법’(加一倍法)이라는 단순한 원리에서 시작된다.
가일배법은 하나가 둘로 나뉘는 법칙으로 2 0, 2 1, 2 2, 2 3… 2 n식의 배수로 진행된다. 이렇게 두 배로 분화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만물생성의 이치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 소강절은 숫자 ‘4’에 주목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역사는 ‘4’라는 수의 변천과 순환일 따름이다. ‘춘·하·추·동’과 ‘역·서·시·춘추’로부터 시작된 하늘과 인간의 네 국면은 그 순서대로 생(生; 낳고), 장(長; 자라고), 수(收; 수렴하고), 장(藏; 저장한다)하는 사이클을 가지고 2배수씩 분할된다. 그렇게 분할되어 낳은 것 중에는 ‘인·의·예·지’ 같은 윤리적인 이치도 있고, ‘문왕·무왕·주공·소공’ 같은 역사적 인물도 포함된다.
이런 식으로 확장해 가면 우주만물과 그 시공간을 모두 헤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장수장의 운명적 리듬을 통해 만물의 운명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소강절의 대표 이론인 원회운세론의 ‘원(元)·회(會)·운(運)·세(世)’는 우주의 시간단위로서 이것은 ‘연·월·일·시’의 주기성과 통한다. 즉, 원(元=12회)은 우주의 1년이고 지구의 시간으로는 12만 9600년에 해당하고, 회(會=30운)는 우주의 한 달이며 지구시간으로는 1만 800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운(運=12세)은 우주의 하루로서 지구시간으로 360년이고, 세(世)는 우주의 한 시간, 지구시간으로는 30년이다. 이로써 인류를 포함한 만물의 역사는 ‘원회운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준칙을 갖게 되었고, 천지(天地)와 인간은 같은 패턴의 시간성 안에서 물리와 생리를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회운세와 더불어 관물내편과 관물외편 그리고 성음율려를 더해 대작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가 완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예지력은 ‘초월적 능력’이라기보다, ‘숫자’와 숫자에 연결된 이치를 통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관찰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사물의 관찰, 즉 관물(觀物)이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편견의 주체인 ‘나’의 판단을 소거해야 한다. 그래서 소강절은 ‘나로써 사물을 보(以我觀物)’지 않고, ‘사물로써 사물을 보기(以物觀物)’를 강조한다.
결국, 소강절에게 관물은 주체를 만물 속에 깃들게 하는 동시에 만물이 스스로의 이치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우주만물이 되고, 내 마음의 움직임은 곧 천지자연의 변화와 다르지 않다. 이를 일컬어 ‘심법’(心法)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수의 이치를 꿰고 마음의 변화를 읽으면 만사를 알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예지력의 원천인 셈이다.
“몸은 천지 뒤에 태어났지만 마음은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네. 천지도 나로부터 나오는데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리!”
▲ 소강절이 집필한 ‘매화역수’.
●천명(天命)을 깨달은 자의 자유
그래서 “학문을 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일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올바름이 바로 도가가 유가의 수양과 만나는 길을 열었으며, 신유학의 기틀로 작용하였다. 이것이 성리학의 토대인 북송5자 중에 소강절이 들어가게 된 연유다.
그는 인생의 후반기를 뤄양(陽)에서 살면서 당대를 주름잡던 사상가인 사마광, 장재, 정명도, 정이천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의 몸과 사유는 그만큼 자유로웠다. 스스로 ‘유가’임을 선언했지만 다른 북송의 현인들과 달리 불교나 도교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도교의 이론을 잘 활용했고, 또한 그의 시 중에는 ‘불가의 가르침을 배우며’라는 시가 있을 정도로 유·불·도 사이를 자유롭게 노닐었다.
무엇보다 “학문이 즐거움에 이르지 않으면 학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이나, 정명도가 쓴 그의 묘비명, 즉 ‘그는 편안했을뿐더러 이루기도 했다.’는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천명을 안다는 것은 인생역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앎 그 자체가 삶이자 자유였다. 때문에 그의 길은 늘 사방으로 열려 있었다.
“눈앞의 길은 모름지기 널따랗게 만들어야 하느니, 길이 좁으면 자연 몸을 둘 곳이 없네. 하물며 사람들을 다니게 하는데 있어서는 어떻겠는가!”
안도균 감이당 연구원
[김상회 풍경소리]
中 소강절 선생의 족집게 측자점
김상회 역학연구원장
여자 사주에서 태어난 날에 일주에 정화(丁火)가 지지(地支:사주에서 뿌리 부분을 나타냄)에 관성(官星:남자를 나타내는 오행)이 암장(暗臟:숨어 있음)되어있는 것이 천간(天干)에 계수(癸水)로 투간(透干:투출되어 올라감)되면 정임합(丁壬合)으로 100발100중 바람을 피게 되어있다.
정입합으로 바람을 피는 여자의 이야기는 중국 소강절 선생의 일화가 있는데, 소강절(邵康節) 선생은 송(宋)나라 때의 유명한 학자로서 역(易)의 상수(象數) 원리를 밝히고 점복(占卜)의 도(道)로써 역의 진리를 확인하여 역학의 새로운 장(章)을 연 학자다. 선생은 역점(易占) 뿐만 아니라 측자점(測字占·글자를 보고 판단하는 점)도 유명하였다.
하루는 가까운 동네에 사는 사람이 장(牆: 담 장) 자 한 글자를 써 가지고 소강절 선생을 찾아와서 중요한 물건을 잃었으니 찾을 수 있을지 점(占)으로 판단(判斷)하여 달라고 간청했다. 선생은 글자를 받아 보시고 점단(占斷:점을 보고 판단)하시기를 “빨리 집으로 가서 침상(寢牀) 아래를 살펴보라. 비록 잃은 물건을 즉시 찾을 수는 없을지라도 반드시 도둑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잘 추궁하면 찾게 될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그 사람은 선생의 말씀을 듣고 크게 웃으면서 “내가 잃은 물건은 내가 타고 다니는 말(馬)인데, 살아있는 말이 어찌 침상 아래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선생은 장(牆) 자에는 침상을 뜻하는 상(牀) 자의 한쪽 변에 올 내(來) 자와 낯 면(面) 자가 들어 있는데, 올 내(來) 자의 다리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는 침상 아래에 숨어있는 상이다. 그러므로 잃은 물건이 침상 아래에 있다고 단정(斷定)한 것이니, 침상 아래에서 즉시 말을 찾지는 못할 것이나 말을 훔친 도둑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빠른 걸음으로 침실에 들어가니, 그의 처(妻)가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소강절 선생의 말씀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득 침상 아래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므로 급히 침상을 들치고 보니 거기에 한 사람의 괴한(怪漢)이 엎드려 있는지라. 그는 그 괴한을 끌어내어 말 도둑으로 지목하고 우선 주먹으로 한 대 내려쳤다.
그 도둑은 애원하면서 말하기를 “어제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어른의 말을 훔쳐갔으나 오늘 잘못을 뉘우치고 어른의 말을 이미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믿지 못하시면 후원에 가셔서 직접 보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므로, 그는 급히 후원으로 달려가서 보니 과연 말이 마구간에서 여물을 먹고 있었다. 그는 다시 침실로 달려갔으나 말 도둑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원래 말 도둑은 그 처(妻)의 정부(情夫)였으니, 그 전날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밀회(密會)를 즐기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남편의 말을 태워 보내면서 내일 아침 일찍 말을 가져오라고 약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이 오기 전에 남편이 먼저 말이 없어졌음을 발견하고 소강절 선생에게 실물점(失物占)을 간청하려고 달려간 사이에 그 정부(情夫)는 말을 제자리에 갖다놓은 다음 마침 남편이 없으므로 침실에서 정담(情談)을 나누려고 할 때에 남편이 갑자기 돌아오므로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침상 밑에 숨었던 것이다.
(사)한국역술인협회 중앙부회장
[여의도 에세이-맹난자]
빛과 그림자
삶이 고달픈 어느 제자가 소강절(중국의 성리학자) 선생을 찾아가 인생의 화복(禍福)에 대해 여쭈었다.
“무엇이 복이고 어떤 것이 화입니까?”
선생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자네가 남을 일그러뜨리게(상하게)하는 것이 화요,남이 자네를 일그러뜨려 주는 것은 바로 복일세”
이 깊고 깊은 뜻을 나는 곱씹어야 했다.부당한 듯 내게 쏟아지던 고통과 책임,지내놓고 보니 과연 그것은 복이 되었다.인내심을 기르게 하고 남의 어려움에 대해 알게 하였다.또 역사의 기념비적인 예술품 역시 모두 역경 속에서 피어난 꽃이 아니던가.
추사 선생의 ‘세한도’나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같은 명저는 불우(不遇)함으로써 태어난 것이었다.
사마천의 ‘사기’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같은 저서 역시 형벌의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만약 이중섭과 반 고흐에게 그리고 슈베르트나 베토벤에게 그 혹독한 시련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신의 선물과도 같은 아름다운 선율과 불후의 미술작품들은 태어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시련이란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다.어느 것이나 사물에는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빛과 그림자의 관계.
한 번 어두우면 한 번 밝은 것은 주야(晝夜)의 이치이다.
한 번 추우면 한 번 더운 것은 사시의 순환이다.
어찌 인생의 한파를 누구라 마다할 수 있겠는가?
‘인생은 조금 줄여서 사는 것이 곧 조금 초탈해 사는 것’이라는 이 말을 나는 사랑하며 지낸다.
욕심 많은 호두나무 과수원 주인이 어느 날 신께 빌었다.
1년 동안,한 번만 궂은 날 없이 좋은 날만 내려주십사고.
그의 소원대로 청명한 날만 약속해 주었다.과연 대풍년이 들어 과수원 주인은 감격했다.
그러나 호두 안에는 알맹이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신께 또 항의했다.
그때 신께서 내린 답은 이러했다.
“도전이 없는 것에는 알맹이가 들지 않는 법이라네.
알맹이란 폭풍우 같은 시련과 목이 타는 가뭄과 고통이 있어야만 껍데기 속의 영혼이 깨어나서 여무는 것이라네”
국민일보
[우종근의 史史로운 이야기]
天機와 미신 사이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역술인들이 점술의 조사(祖師)로 떠받드는 인물이 있다. 바로 중국 북송(北宋)의 소옹(邵雍 · 1011~1077년)이다. 사후에 강절(康節)이라는 시호를 받아서 통상 소강절로 불린다.
그는 주역 3000년의 역사를 통틀어 이를 마스터한 몇 안 되는 대가로 공자와 함께 꼽힐 뿐만 아니라 예지력이 매우 영험해서 '귀신 잡는 소강절,세상 일을 다 아는 소강절'로 더 유명하다.
너무 아는 체하는 사람더러 "저 놈은 소강절 똥구멍에다 움막을 짓고 사는가 보다"고 핀잔을 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런 점술의 달인을 유교에서는 성현으로 받든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배척하는 유교 정신에 비춰 보면 이채로운 일이지만 소옹은 도학(道學),즉 주자학의 개조 주돈이와 함께 도통을 잇는 북송오자(北宋五子)의 한 명이다. 주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수리(數理) 철학으로 발전시켰다는 설명인데 주자학의 주체 세력을 이루는 구법당의 사마광,이정자(二程子) 형제와 절친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확실히 소옹은 유가와는 거리가 있는 도가의 풍모가 물씬했다. 젊은 시절 《하도(河圖)》 《낙서(洛書)》 같은 예언서를 전수받고 그 핵심과 숨은 뜻을 터득한 뒤부터는 관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스스로 세상 이치와 하늘의 뜻(天機)을 가지고 놀았다.
"소옹의 학문은 고명(高明)한 경지에 마음을 놀리며 천지와 음양의 변화성쇠를 관찰하여 만물의 변화에 통달했다. 만물의 수리(數理)에 정통해서 앞일을 예견함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 ―《십팔사략》
소옹의 신통한 예견 가운데는 왕안석의 신법 개혁과 관련된 두 가지가 유명하다.
"소옹이 낙양의 천진교 위에 섰다가 두견이 우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탄식했다.
'2년 안에 남쪽 사람이 급부상해서 재상이 될 것인데,이때부터 세상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
연유를 묻자 '태평시에는 땅의 기운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지만,변란시에는 반대다. 지금 남쪽의 기운이 북쪽에 다다른 것을 새가 먼저 알았으니,다리 위에서 두견새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고 했다. 과연 장시(江西) 사람 왕안석이 등장해 신법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
"왕안석이 실각하고 추종자인 여혜경이 집권했다. 구법당 사람들이 보복당할 것을 걱정하자 소옹이 말했다.
'왕과 여는 형세의 이익이 맞아떨어져서 결합한 것뿐이다. 형세가 맞서면 저절로 원수지간이 될 것이니,다른 사람을 해칠 여가가 없을 것이다 .'
얼마 안 있어 여는 과연 왕을 배반했다. " ―《송원학안(宋元學案)》
소옹은 환갑을 넘기자 은사(隱士)의 복장을 하고 반(半) 신선처럼 생활했다. 그가 썼다고 하지만 후세에 가탁한 것으로 보이는 《철판신수(鐵板神數)》나 《매화역수(梅花易數)》 같은 역술서에 전하는 숱한 일화들은 대부분 이런 신비감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22년 연하이지만 친구로 지낸 정이천(程伊川)은 이런 그를 비루하고 조야(粗野)한 잡술을 농한다고 못마땅해하면서 그의 학문을 전수받는 것도 거절했다. 그런 그도 소옹의 신통력만큼은 이렇게 인정했다.
"그 마음이 허허롭고 밝았으므로,앞일을 능히 알 수 있었다(其心虛明,自能知之)."―《송사 도학전(道學傳)》
중국은 해방 이후 점술을 대대적으로 금지했지만,점술에 기대는 인민의 믿음은 여전하다. 최근 광저우의 한 신문이 뇌물을 먹고 들통 난 부패 공무원들의 사례를 보도했는데,그 중 '자수하라'는 점술가의 말을 믿고 자진 신고했다는 사연이 압권이다. 황당하지만,미련하게도 점술의 권위에 복종하는 우직함이 귀엽기도 하다.
공자는 "어떤 일이 발생하려고 하면 반드시 그 조짐이 먼저 나타난다(有物將至,其兆必先)"고 했다.
소옹이 읽은 것도 조짐일 테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조짐이라면 무조건 미신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꼭 닥쳐서야 깨닫고 해 보고서야 아는 것이다. 이런 우둔한 이들을 위해서 역사는 계속 쓰여지고 있는 것인데,이들일수록 역사를 안 읽는다는 것이 문제다.
/ 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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