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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소(戊辰六條疏) / 退溪(퇴계) .退溪先生文集卷之六 >疏

경호... 2015. 7. 17. 05:15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退溪(퇴계)

 

崇政大夫(숭정대부)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 신 李滉(이황)은 삼가 재계하고 절하며 주상전하께 말씀드립니다. 신은 초야의 미미한 존재로서 재주도 쓸모없고 나라 섬기기도 바로 하지도 못하고 鄕里(향리)에 돌아와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先祖(선조)께서 잘못 아시고 寵命(총명)을 자주 가해 주셨고 전하께 이르러 더욱 잘못을 되풀이하여 금년 봄에 特採(특채) 除授(제수)해 주신데 애해서는 더욱 놀랄 일이었습니다.

신은 꾸중을 각오하고, 감당 못할 것으로 사퇴하였든 바 諒察(양찰)하여 주심을 입어 책임을 면하였으나, 성품이 고쳐지지 않고 분수에 넘치는 일이 여전하오며, 더욱이 臣(신)은 늙고 병들어 벼슬을 감당할 기력이 조금도 없는데 외람되이 높은 班列(반렬)에 籍(적)을 두어 더욱 부끄럽고 송구스럽나이다. 있지 못할 자리에 오래 있어 聖朝(성조)에 욕되게 할 수 없나이다. 다만 이번 臣(신)이 상경하였을 때, 분에 넘치게 常例(상례)와 다른 자애를 받자오니 臣(신)이 비록 평소에 지혜와, 나라 경영하는 정책에 어둡기는 하오나 붉은 정성을 다하여 한가지의 어리석은 뜻을 바치지 아니할 수 없나이다.

구술로만 아뢰면 정신이 흐리고 말솜씨가 없어서, 한 가지를 듣고 만 가지를 빠뜨릴까 염려 되옵기에 이에 감히 글로서 뜻을 진술 하나이다. 모두 모아 역어 六條(육조)로 갈라서 推論(추론)하온 것을 당돌하게도 前疑(전의)에 올려 드리오니 큰 도움은 감히 바라지 못하오나, 인군의 箴(잠)에 다소라도 보탬이 될까 하나이다.

 

 

첫째. 繼統(계통)을 重(중)이 하여 仁孝(인효)를 온전하게 할 것.

臣(신)은 듣자오니 천하의 일이 君位(군위)의 一統(일통)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옵니다. 대저 더 큰데 없는 계통으로써 아버지가 자식에게 전하고, 자식이 아버지에게 이어 받으니, 그 일의 지중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예로부터 人君(인군)은 누구나 至大(지대) 至重(지중)한 계통을 이어 받지 아니한 사람이 없지만 至重(지중) 至大(지대)한 뜻을 잘 아는 사람이 적어 孝(효)로서 부끄러운 것이 있고, 仁(인)으로서 道(도)를 다 하지 못한 자가 많사옵니다. 正常(정상)의 경우에 處身(처신)함이 그러하거늘, 혹 옆 갈래에서 入繼(입계)한 군주로서 仁孝(인효)의 道(도)를 다하는 자가 더욱 적습니다. 그리하여 인륜의 도리에 得罪(득죄)하는 자가 자주 생기니 어찌 깊이 두려워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호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집에는 두 尊長(존장)이 없고, 喪事(상사)에는 두 맛 상주가 없습니다. 옛 성인께서 本生(본생)의 恩(은)이 중차대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예법을 제정하여 남의 後(후)가 된 자로 하여금 아들로 삼았습니다. 기왕 아들로 되었으면 仁孝(인효)의 道(도)는 마땅히 後(후)가 된 곳에 오로지 해야 하고 本生(본생)의 恩(은)은 도리어 이와 더불어 竝立(병립)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義(의)를 행하여 本生(본생)의 恩(은)을 주리고, 恩(은)을 높여 後(후)된 義(의)를 완수하게 하였습니다.

 

周易(주역)에, 하나로 돌아감을 밝혔고, 孟子(맹자)는 두 근본을 警戒(경계)하였으니, 사물의 경중이 정해진 곳에 인륜의 법칙이 환합니다. 하물며 방계로 入繼(입계)하는 데는, 천명을 받아 寶位(보위)에 오를 때, 宗社(종사)의 부탁이 어떠 하였으며, 백성의 기대와 믿음이 어떠하였습니까.

그것은 감히 私慾(사욕)로서 바꾸어, 그 후에 처음 뜻을 더욱 높이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데 주상전하께서 王室(왕실) 至親(지친)의 중하신 몸으로 선왕의 대쪽 같은 명을 받들어 대통을 이었으니 인심이 천심과 合(합)하였습니다.

상중(喪中)에 예(禮)가 극진하시고, 애경(愛敬)이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으시고, 무릇 뜻을 이어 하시는 일이 지성(至性)에 나오고, 애성(哀誠)에 말미암으시면 그 인효(仁孝)의 도(道)에 있어서, 극진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위로 묘사(廟社)의 신령으로 부터 아래로 신민(臣民)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다 임이 함께 기뻐하고 서로 경하(慶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대야의 물 보다 조용히 가지기 어렵고, 선(善)은 바람 앞에 촛불보다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고어(古語)에 "나무가 썩으면 벌래가 생기고, 효(孝)는 처자 때문에 쇠퇴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殿下)의 마음은 물이 파도가 일지 않는 것 같고 거울이 먼지 앉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애(仁愛)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발(發)하여 막힘이 없고, 효순(孝順)의 행(行)이 순수하여 틈새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때에 이르러, 이목(耳目)을 가리는 것이 혼잡(混雜)하게 펴지고, 애증(愛憎) 의 흔들림이 아울러 세력을 얻어,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지는 동안 일에 등한 하고 정(情)에 끌리게 되면, 그때 전하의 마음이 능(能)히 밖으로부터의 변화(變化)를 받지 않고 심중(心中)에 변함이 없으며, 지금 같이 의연하게 선(善)을 주장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이렇게 하실 수 있다면 만 번 복을 받으시고 백번 근심 할 것이 없습니다. 혹(或) 불행이 주상의 깊으신 마음이 한 번 변화가 생긴다면 종묘(宗廟)를 받들고, 장락(長樂)을 받드는 바가 어긋나고 태만함이 있기 쉽고, 사람이 혹시 편사(偏私)의 틈을 타서 정경대의(正經大義)에 어긋나는 말로서 꾀이고 영합(迎合)하면, 그 마땅히 높일 것을 줄이고, 줄일 것을 높이는 일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찌 보장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예부터 입계(入繼)하는 임금이 천륜의 가르침에 죄를 짓는 많은 까닭이며, 오늘에 있어서 마땅히 지극한 경계로 삼아야 할 바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臣)이 감히 전하의 본생(本生)을 박(薄)하게 하도록 인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 하옵기를, 마땅히 높일 것은 성왕(聖王)의 정법(定法)이 이렇게 되어 있고, 마땅히 주리는 것은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이 쫓을 만한 것이 있다고 해서 그런 것입니다.

높이고 줄이고 하는 것은 즉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극치(極致)이니 한결같이 이에 따라 털끝만한 사사로운 뜻도 그 사이에 섞이지 말아야 인(仁)이 되고 효(孝)가 됨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러나 효(孝)는 백행의 근원이니, 한 가지 행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순효(純孝)가 못 되는 것이며, 인(仁)은 만선(萬善)의 장(長)이니 한 가지 선(善)이라도 불비(不備)함이 있으면 전인(全仁)이 못되는 것입니다. 詩經(시경)에 이르기를 "시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끝을 잘 마치는 것이 적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 유의(留意)하시기를 바라나이다.

 

 

둘째: 참소(讒訴)를 막아 양궁(兩宮)을 친하게 할 것.

신(臣)은 듣자오니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함이 자(慈)가 되고 자식이 그 어버이를 잘 성김이 효(孝)가 된다고 합니다. 효자(孝慈)의 도(道)는 천성에서 나와서 모든 선의 으뜸이 되는 것으로서 그 은덕이 지극히 깊고, 그 倫理(윤리)가 지극히 무겁고 그 정(情)이 가장 절실합니다.

 

지극히 깊은 은(恩)으로서, 지중(至重)한 倫理(윤리)에 따라 가장 적절한 정(情)을 행하는 것이니, 사리로 보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듯 한 대, 혹 효에도 결함이 있고, 자천(慈天)도 흠(欠)이 있는 수가 있으며, 심한 자는 지친(至親)이 승냥이나 이리 같이 되어 거둬 돌보지도 아니하는 경우도 있는데 보통 사람에 있어서는 말 할 것도 없고, 제왕의 가정에 있어서도 이런 폐단이 더욱 많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체로 그것은 정(情)이 막히기 쉽고, 참소가 더욱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정(情)이 막히기 쉽다는 것은 궁전(宮殿)이라는 처소는 법도가 엄(嚴)하고 날마다 서로 만날 때, 사정상 격리되는 일이 많아 정(情)이 서로 통하지 못하고 뭉치는 일이 수가 있기 때문이요, 참소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양궁(兩宮)사이에 좌우에서 모시는 시신(侍臣)들과 총애를 받으며 심부름하는 시종(侍從)들이 모두 환관과 여인들이 온데, 이 무리들의 본성은 대게 모두 음사(陰邪) 교활(狡猾)하여 간사함을 끼고, 사사로운 생각을 품어 란(亂)을 좋아 하고 화(禍)를 즐기며, 효자(孝慈)가 무엇인지, 예의(禮義)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직 섬기는 바를 중하다고 하여, 이쪽저쪽으로 서로 세(勢)를 갈라 많은 것을 다투고 작은 것을 비교하는 통에 은원(恩怨)이 손가락질 할 사이에 생기고, 이해(利害)가 등 뒤에서 결정되며, 없는 것을 있다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하며, 그런 정상이 만 가지로 나타나 정상이 도깨비와 같고, 불여우와도 같이, 혹은 격(激)하여 노하게도 하고, 혹은 속여서 무섭게도 합니다. 그런 것에 혹시라도 귀를 기울여 믿게 되면 절로 불행에 빠져서 어버이를 부자(不慈) 에 빠트리고 말 것은 필연한 일입니다.

 

대개 家法(가법)이 엄정하고 양궁(兩宮)이 서로 기뻐하면, 이 무리들은 그 간교(奸巧)를 쓸 여지가 없어 이(利)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서로 모함하고, 서로 시기하며, 주인이 어둡고 인륜 도리가 어긋난 다음에야 그 기량(技倆)을 부려 참소가 행해지면서 큰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인(小人)과 여자의 병폐입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역시 군덕(君德)의 어질고 편협함과, 어(御)거하여 다스림이 엄(嚴)하고 방종(放縱)함에 따라서, 그 반응(反應)이 그림자와 소리 같이 빠른 것인즉, 요는 인군(人君)의 다스림 여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능히 자치(自治)만 한다면 또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신(臣)이 작년에 귀향하는 길가에서 소문을 들으니 즉위(卽位)한 처음에 이 무리가운데서 구은(舊恩)을 믿고 상명(上命)을 기다리지 않고 감(敢)히 나아가 인군을 뵈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준엄하게 물리침을 당하고 말았다고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대성인(大聖人)의 하시는 일이 보통 사람보다 만 배나 뛰어 난다 하며 우러러 칭찬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래로 성덕(聖德)이 날로 들어나고 인효(仁孝)가 틈새 없으니, 이로 미루어 가면 무슨 음사(陰邪)인들 위엄으로 복종 못시킬 것이며, 무슨 악(惡)이 감히 침범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殿下)께서는 이것을 믿고 "상빙(霜氷)"의 계(戒)를 소홀히 생각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대저 전하(殿下)의 효성으로서 일국(一國)의 봉양(奉養)을 극진이 하시면, 그 효(孝)는 크다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 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궁무진하니, 어찌 나의 사친(事親)이 이미 족(足)하다고 만족하며, 다른 것을 걱정할 것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오늘날 전하의 사친(事親)은 이른바 의(義)로서 은(恩)을 높이고, 변(變)으로서 상(常)에 처함이니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실로 소인(小人) 여자(女子)들이 틈타서 흔단을 일으키려 하는 것입니다.

신(臣)은 전대의 일을 살펴보니 위로 자친(慈親)이 있고, 아래로 어진 후계자가 있는데, 환관(宦官) 소실(小室)이 그 사이에 있으면서 서로 싸워, 그 효(孝)를 바로 끝맺지 못하는 자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궁중에는 "숙간(宿姦) 노고(老蠱)가 앞 뒤 조론(朝論)에서 깊이 염려한 대로 아직도 다 제거(除去)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아마도 "여윈 도야지의 뜀뛰기"와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주역(周易)의 "가인(家人)"의 뜻을 거울로 삼고 소학(小學)의 명륜(明倫)의 훈(訓)을 법으로 삼아 자치(自治)를 엄하게 하시고 정가(正家)를 하시어 사친(事親)이 독실하시며, 자식의 도리를 다하시어 좌우의 근시(近侍)들로 하여금 양궁(兩宮)의 지극한 정(情)은 효자(孝慈)에서 더 중한 것이 없다고 주지시키고, 무리의 참소와 이간(離間)이 통(通)할 수 없다는 것을 다 알게 하고, 또 그 효자(孝慈)를 이루게 하는 자는 안전(安全)을 얻되, 이간을 놓는 자는 죄를 얻는다는 것을 알도록 하면 자연히 음사(陰邪)의 중간 작난하는 폐단이 없어지고 효도(孝道)에 부족함이 없어 질 것입니다.

또 이 마음을 깊이 간직하고, 이 성의(誠意)로서 효경(孝敬)을 드려 언제나 정을 다하고 힘을 다하면 도(道)의 융성이 잇따르고, 인(仁)이 지극하며, 의(義)가 다하여 삼궁(三宮)이 기뻐 화합하고 만복이 갖추어 질 것입니다.詩經(시경)에 이르기를 "조그맣게 시작하여 큰 말썽을 이룬다."하고, 또 이루기를 "깊이 효사(孝思)를 말하니, 효사(孝思)가 바로 법으로 된다." 하였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유의(留意)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학(聖學)을 돈독(敦篤)히 하여 정치(政治)의 근본을 삼을 것.

신(臣)은 듣자오니 제왕(帝王)의 학(學)과 요(要)는 대순(大舜)의 우(禹)에게 명한 말에 연원(淵源)하였다 합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오직 精(정)하고 一(일)하여 그 中(중)을 잡으라."하였습니다.

 

대저 天下(천하)를 서로 傳(전)할 때는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편안하게 하려는 것인 만큼 그 부탁하는 말이 정치에서 더 급할 것이 없겠거늘 舜(순)이 禹(우)에게 철저히 타이름이 이 몇 마디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 어찌 學問(학문) 成德(성덕)으로써 政法(정법)의 大本(대본)을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精一(정일) 執中(집중)은 학문을 위한 큰 법입니다. 大法(대법)으로서 大本(대본)으로 한다면 천하의 정치는 다 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옛 성인의 말씀이 이러함으로 臣(신) 같은 어리석은 자로서도 聖學(성학)이 정치의 근본이 됨을 알고 외람되이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하오나 舜(순)의 이 말은 그 위태롭고 은미한 것만 말하고, 그 위태롭고 그 은미한 까닭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精一(정일)만 가르쳐 주고 精一(정일)하는 법은 보여주지 아니하여 뒷사람이 이에 依據(의거) 하여 道(도)를 참으로 알고 참으로 實踐(실천)하려고 해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많은 성인 나타나고, 이어 孔子(공자)에 이르러 그 法(법)이 크게 갖추어지니 大學(대학)의 格致(격치) 誠正(성정)과, 中庸(중용)의 明善(명선) 誠身(성신)이 그것입니다. 그 뒤에 많은 학자가 가 번갈아 일어나, 朱子(주자)에 이르러 그 설이 크게 밝혀지니 大學(대학) 中庸 (중용)의 章句(장구) 或問(혹문)이 그것입니다. 이제 이 두 책을 배워 바른 것을 알고 실천하는 학문으로 하면 中天(중천)에 해가 뜬 것 같아서 눈 뜨면 다 보이고 큰길이 앞에 놓인 것 같아서 발을 들면 밟을 수 있습니다.

 

걱정되는 것은 지금 까지 세상의 人君(인군)으로서 能(능)히 이 學問(학문)에 뜻 두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或(혹) 뜻을 두더라도 能(능)히 시작해서 끝을 맺은 사람은 더욱 적습니다.

 

嗚呼(오호)라!

이것이 도가 전하지 못하고 政治(정치)가 옛적 같지 못하는 까닭이니 아마 성군을 기다려서 그런 것일까요? 삼가 생각 하옵건대 주상전하께서 神聖(신성)한 자질이 하늘에서 태어 나셨고, 밝은 학문이 날로 새로워 지시어 儒臣(유신)의 講官(강관) 들이 감복하여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러면 殿下(전하)께서는 이 학문에 資質(자질)이 있으시고 그 뜻이 있으신 것이며 사물의 도리를 깨닫는 방법과, 힘써 공부를 함에 있어서도 그 始初(시초)가 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臣(신)은 이것으로써 곧 能知(능지) 能行(능행)이리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청컨대 致知(치지)의 일로써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의 性情(성정) 形色(형색)과 日用(일용) 하는 모든 것의 가까운 것 부터 천지만물과, 古今事變(고금사변) 의 잡다한 것에 이르기까지 至實(지실)한 이치와 지당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天然自有 (천연자유)의 中(중)이란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움을 널리 하지 않을 수 없고, 물음을 자세히 하지 않을 수 없고, 생각을 깊이 하지 않을 수 없고, 辨別(변별)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네 가지는 致知(치지)의 節目(절목)입니다.

 

네 가지 중에서도 생각을 삼감이 더욱 중요합니다. 생각이란 무엇인가요? 마음에 구하여 證驗(증험)이 있고, 얻음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능히 마음에 증험하여 그 "理(리) 辱(욕)" "善(선) 惡(악)"의 幾微(기미)와 "義(의) 利(리)" "是(시) 非(비)" 의 판별을 밝게 가려 精微(정미)롭게 연마하고 조금도 틀림이 없으면 이른바 "危(위) 徹(철)"의 까닭과 "精(정) 一(일)"의 방법이란 것이 과연 이것이라 함을 참말로 알아서 의심됨이 없이 될 것입니다.

 

이제 殿下(전하)께서 네 가지의 공부에 대하여 이미 그 시초를 열어 發端(발단)을 하였으니 臣(신)은 청컨대 그 發端(발단)으로 인하여 더욱 그 功夫(공부)를 잘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그 절차와 조목은 或問(혹문)에 자세이 알려져 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敬(경)으로써 중요한 방법을 삼고, 事事(사사) 物物(물물)에 있어서 그 所當然(소당연)과 所以然(소이연)의 까닭을 窮究(궁구)하지 않음이 없으며 깊이 생각하고 反覆(반복)하며, 글의 깊은 뜻을 몸소 깨달아 극치에 이르게 하여 시간이 오래되면 功力(공력)이 깊어지고, 공력이 깊어지면 하루아침에 모든 의문이 녹아 풀리고, 모든 의문이 한하게 貫通(관통)하여 짐을 절로 느끼게 되는 것이 오니, 이때에 비로소 "體(체)와 用(용)이 한 근원이요, 顯(현)과 微(미)가 틈이 없다"는 말이 진실로 그러 하구나 함을 알아서 "危(위) 微(미)에 昏迷(혼미)되지 아니하고 精一(정일)에 眩惑(현혹)되지 아니하여 中(중)을 잡을 수 있게 될 터이오니, 이것을 일러 참말로 아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臣(신)은 청컨대 다시 力行(역행)의 일로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誠意(성의)는 반드시 幾微(기미)에 살펴 털끝만한 不實(불실)도 없이하고,

正心(정심)은 반드시 動靜 (동정)에 살펴서 한 가지라도 不正(부정) 없이하고,

修身(수신)은 一僻(일벽)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齋家(재가)는 一偏(일편)에 버릇되지 않게 하여,

戒懼(계구) 愼獨(신독)하고 强志不息(강지불식)하는 이 몇 가지가 力行(역행)의 節目(절목)이오며,

이 가운데서도 心(심)과 意(의)가 가장 관계가 크옵니다.

 

心(심)은 天君(천군)이요, 意(의)는 그 發(발)한 것입니다. 먼저 그 말을 眞實(진실)되게 하면 하나의 眞實(진실)됨이 족히 만 가지 거짓을 씻어 없앨 수 있고, 그리하여 그 天君(천군)을 바르게 하면 명령에 따라 행하는 모든 것이 眞實(진실)이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이 몇 가지 功夫(공부)에 대하여 그 시초를 열어 그 端緖(단서)를 잡으셨으니 臣(신)은 請(청)컨데 그 端緖(단서)로 인하여 더욱 그 친절한 功夫(공부)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 規模(규모)와 宗旨(종지)는 두 책에 제시된 교훈에 따르면, 敬(경)을 主(주)로 하여 항상, 어느 곳에서나, 생각마다 이를 잊지 말고, 일마다 조심하여 수행하면, 욕심이나 마음이 깨끗이 씻어지고, 五倫(오륜) 百行(백행)이 지극히 잘 연마되어, 평소 생활 하는 데나 신하들과 대화하는 대도 의리에 잠겨 벗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懲忿(징분)과 遷善(천선) 改過(개과)에 있어 "誠(성) 一(일)"에 힘쓰며, 廣大(광대) 高明(고명)하되 禮法(예법)에 떠나지 않고 "參贊(참찬) 經綸(경륜)"하되 다 屋漏(옥루)에 근원하도록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공부를 쌓아 시일이 오래되면 자연히 義(의)가 精(정)해 지고 仁(인)이 익숙하여 그만 두려 해도 그만 둘 수 없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聖賢(성현)의 中和(중화 )의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實踐(실천)의 효과가 이에 이르면 道(도)가 이룩되고 德(덕)이 서게 되나니 爲治(위치)의 근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取(취)하는 법칙은 과연 자기 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오니 自身(자신)만 바르면 절로 群賢 (군현)이 함께 나아오고 功績(공적)이 크게 빛나 융성한 세상을 이루어 백성을 仁(인) 壽(수)의 경지에 까지 인도함도 어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은 말하기를 帝王(제왕)의 학은 "經生(경생) 學子(학자)"와 같지 않다고 하오나 이것은 글 뜻이나 캐고 책 읽기를 잘하는 類(류)의 일을 말하는 것이고, 敬(경)으로 근본을 삼고, 理致(이치)를 窮究(궁구) 하는, 知(지)를 다하고 몸에 돌이켜 실천을 이행하는 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그야 말로 묘한 心法 (심법)이며 道學(도학)을 전하는 要諦(요체)인데, 帝王(제왕)과 常人(상인)이 무슨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眞知(진지)와 實踐(실천)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가 빠져도 안 되며, 사람의 두 다리와 같아서 서로 기다려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程子(정자)는 이르기를 "致知(치지)하면서 敬(경)에 있지 않은 자가 없다."하였고, 朱子(주자)도 이르기를 "躬行(궁행)함에 공부가 없으면 理(이)를 窮究(궁구)할 곳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공부는 합해서 말하면 서로 始終(시종)이 되고, 나누어 말하면 또 각각 始終(시종)이 없습니다.

 

嗚呼(오호)라!

始(시)가 없으면 終(종)이 없는 것은 물론이나, 終(종)이 없으면 始(시)가 무슨 쓸데가 있겠습니까?

人主(인주)의 學(학)이 대개 始(시)가 있고 終(종)이 없거나, 始(시)에 부지런하고 終(종)에 개으르며, 始(시)에 조심하고 終(종)에 放逸(방일)하여 들락날락하는 마음으로 하다 말다 하다가 마침내 德(덕)을 멸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결과로 되고 마는 자가 많으니 이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위태로운 것은 人心(인심)이라 欲(욕)에 빠지기 쉽고 理(리)에 돌아가기 어려우며, 隱徹(은철)한 것은 道心(도심)이라, 잠깐 理(이)에 눈을 뜨다가도 곧 欲(욕)에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빠지기 쉬운 것으로 하여금 물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잠깐 눈 뜨는 것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中斷(중단)이 없게 하여, 帝王(제왕)이 서로 전하는 執中(집중)의 實(실)을 成就(성취)시키려면, 精(정) 하게 하고 一(일)하게 하는 功夫(공부)가 아니고 무엇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傳說(전설)은 말하기를 "學(학)은 뜻을 겸손하게 하고 始終(시종) 끈임 없이 배움을 생각하면 그 德(덕)이 모르는 사이에 닦아진다."고 하였으며, 孔子(공자)는 말하기를 "이를 때를 알아 이르면 可(가)히 더불어 道(도)에 가까이 할 수 있으며, 그칠 때를 알아 그치면 더불어 義(의)를 保存(보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聖明(성명)께서 留意(유의)하시기 바라나이다.

 

 

넷째 道術(도술)을 밝혀 人心(인심)을 바로 잡을 것.

臣(신)은 듣자오니 唐虞(당우) 三代(삼대)의 盛世(성세)에는 道術(도술)이 크게 밝아 다른 岐路(기로)에 미혹됨이 없으므로 人心(인심)이 바르고 정치가 행하기 쉬웠는데, 衰周(쇠주) 이후로는 도술이 밝지 못하여 사특한 학설들이 함께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人心(인심)이 바르지 못하여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고, 敎化(교화)시키려 해도 교화되기 어려웠습니다.

 

무엇을 道術(도술)이라하는가? 도술이란 天命(천명)에서 나와서 倫理(윤리)로서 행하여 天下(천하) 古今(고금)이 같이 말미암은 길입니다.

堯舜(요순) 三王(삼왕)은 이것을 알고 그 왕위를 얻었으므로 惠澤(혜택)이 천하에 미쳤고, 孔(공) 曾(증) 思(사) 孟(맹)은 이것을 알지만 왕위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가르침이 萬世(만세)에 傳(전)하였습니다. 후세의 人主(인주)들이 그 敎(교)로 因(인)하여 道(도)를 얻어서 세상에 밝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眞理 (진리)를 混亂(혼란)시키는 異端(이단)의 說(설)과, 正道(정도)를 더럽히는 功利(공리)의 무리들이 煽動 (선동) 誘惑(유혹)하며 돌아다녀 人心(인심)을 흩트리니 그 화근이 하늘에 닿아 救(구) 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중간의 宋代(송대) 諸賢(제현)들이 이 道(도)를 크게 闡明(천명)하였으나 모두 當世(당세)에 등용되지 못하여 그 敎(교)를 밝히고, 人心(인심)을 바로잡는 것도 당시에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萬世(만세)에 전할 뿐이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동방은 海隅(해우)에 치우쳐 있어서 箕子(기자)의 洪範(홍범)이 傳(전) 함을 읽고, 지나온 世代(세대)가 茫茫(망망)하여 알 수가 없다가,麗末(려말)에 程朱(정주)의 글이 처음 들어와서 道學(도학)을 알 수 있게 되었고, 本朝(본조)에 들어와서 聖王(성왕)들이 서로 이어 業(업)을 創建(창건)하고 전통을 드리웠사온데 그 規模(규모) 典章(전장)은 대개 모두 이 道(도)의 천명 이였습니다. 그러나 開國(개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00년이 되어 가는데 治效(치효)를 어루만져, 보고 先王(선왕)의 道(도)로서 헤아려 보면, 列聖(열성)의 마음에 모호한 생각이 있음을 면치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역시 道術(도술)이 밝아지지 못하고, 다른 岐道(기도)의 說(설)들이 人心(인심)을 害(해) 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主上殿下(주상전하)께서 堯舜(요순)의 자질로서 帝王(제왕)의 學(학)을 몸소 공부하시어 옛 道(도)에 뜻을 두시고 政治(정치)를 하시기를 목마르듯 하시어, 장차 유교의 학문을 일으켜 一世(일세)를 唐虞三代 (당우삼대)의 隆盛(융성)에 올려놓으실 생각이시니, 진실로 우리 동방에서는 千載(천재)一時(일시)의 機會(기회)로서 朝野(조야)가 기뻐하여 눈을 씻으며 서로 慶賀(경하)하지 않은 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先王(선왕)의 道術(도술)을 밝히어 一代(일대)의 나갈 바를 정하여 引率(인솔) 指導(지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쌓인 疑惑(의혹)을 풀고 빗나간 길을 버리고 一變(일변)하여 나의 大中至正(대중지정)한 가르침을 따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臣(신)은 道術(도술)을 밝히고 人心(인심)을 바로잡음으로써 新政(신정)의 獻策(헌책)으로 삼는 바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오나 그 밝히는 일에 있어서 또 本末(본말), 先後(선후), 緩急(완급)의 施策 (시책)이 있고 그 本末(본말)에 또 虛實(허실)의 다름이 있으니, 人君(인군)이 몸소 실천함과, 心得(심득) 한 것에 근본 하여 民生(민생)의 人倫(인륜)日用(일용)의 교화에 行(행)하는 것이 근본이요, 남의 法制 (법제)를 따르고 문물의 겉치레나 하고 現行(현행)의 것을 예 것으로 고치어 모방하고 비교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님니다.

 

本(본)은 먼저 할 바이니 급한 것이요, 末(말)은 뒤에 바이니 천천히 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道(도)를 얻어 君德(군덕)이 이루어지면 本末(본말)이 다 實(실)하여 唐虞(당우)의 治(치)가 되고, 그 道(도)를 잃어 君德(군덕)이 글러지면 本末(본말)이 다 虛(허)하여 말세의 화가 되는 것이니 虛名(허명)을 믿고 聖治(성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없음은 물론이요, 要法(요법)에 어두워 가지고 心得(심득)의 妙(묘)를 구한다는 것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제 殿下(전하)께서 진실로 虛名(허명)의 믿지 못할 것을 아시고 要法(요법)을 구하여 道學(도학)을 밝히려고 하시거든 臣(신)이 앞서서 論(론)한 眞知(진지), 實踐(실천)의 說(설)을 깊이 명심하시어 敬(경)으로써 시작하고, 敬(경)으로써 끝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시작하실 때 아는바가 애매하여 明徹(명철)하지 못하거나 行(행)하는 바가 혹 矛盾(모순)되어 잘 들어 맞지 않더라도 이것 때문에 함부로 기피하거나 주저하는 마음을 가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聖人(성인)은 나를 속이지 않는다. 다만 나의 功力(공력)이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고만 생각하시고 힘쓰고 힘써 중도에 그만 둠이 없이 오래 功力(공력)을 쌓아 익숙해지면 절로 "精義入神" (정의입신)의 경지에 이르러 환하게 내다보이고 얼굴과 몸에 수양의 공덕 효과가 넘쳐흐르고, 신변의 사물이 어느 것이나 나의 수양의 資源(자원)이 되지 않는 것이 없이 되나니, 이것을 일러 躬行(궁행) 心得(심득)하여 道(도)가 자기에게 밝아졌다고 하는 것이며, 堯舜(요순), 文王(문왕)의 克明德(극명덕) 이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로부터 미루어 가면 어디를 가나 道(도)가 아닌 것이 없으니, 九族(구족)을 親(친)하게 하고, 百姓 (백성)을 공정하게 정치하게, 되며 關휴(관휴) 麟趾(인지)의 化(화)로 부터 鵲巢(작소) 騶虞(추우)의 덕에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지금이라고 어찌 堯舜(요순) 文王(문왕)의 때와 다르겠습니까?

德化(덕화)가 향기롭게 풍기어 안과 밖이 融化(융화)하고 조정에는 敬(경)과 讓(양)이 지켜지고 가정에는 孝悌(효제)가 행해지며, 선비는 學(학)을 알고, 백성은 義(의)를 알게 되니 人心(인심)이 어디 바르지 못할 것이 있으며 道術(도술)이 어찌 밝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荀子(순자)는 이르기를 "임금이란 사발이다. 사발이 모나면 물이 모 난다. 임금이란 표말이다. 말뚝이 바르면 그림자가 곧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러하오나 시의 사사로운 근심이요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오나 臣(신)은 人心岐惑(인심기혹)의 說(설)에 대하여 특히 더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臣(신)은 생각하기를 異端(이단)의 害(해)는 佛氏(불씨)가 가장 甚(심)하여 高麗(고려)는 이로 인하여 망국에 이르렀고, 我朝(아조)의 盛治(성치)로서도 그 根底(근저)를 아직도 끊어버리지 못하여, 이따금 때를 타서 일어납니다.

 

비록 先王(선왕)이 그 그름을 곳 깨닫고 소재해 버렸사오나 여파와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고 老莊 (노장)의 허망한 설은 가끔 즐겨 숭상하여 聖人(성인)을 회책 하고 禮義(예의)를 경시하는 風(풍)이 간간이 일어나며, 管仲(관중) 商앙(상앙)의 述(술)은 요행이 전술되지는 않았으나 計功(계공) 謀利(모리) 하는 폐단은 아직도 고질로 되어 있고, 향리의 덕을 어지럽히는 습관은 末流(말류)들의 世上(세상) 아첨에서 시작되었고, 속된 학문의 방향과 혼미의 폐단은 과거보는 사람들의 명리추구에서 더욱 甚(심)해졌습니다. 하물며 名利(명리)를 찾고 仕官(사관)을 구하는 길에 있어서, 기회를 엿보고 틈새를 타서 요리 붙고 조리 붙는 무리들이 또 어찌 다 없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보면 오늘날의 人心(인심)의 不正(부정)은 심합니다. 만약 불행이 主上(주상)께서 道(도)를 지향하는 마음이 당초만 못하게 되어 혹 好惡(호악)의 편파에 나서나고, 혹 자신의 틈새로 새어 나간다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반드시 혼잡하게 함께 나와, 도깨비처럼 妖術(요술)을 피우며 백방으로 뚫고 들어오려고 할 터이오니, 한번 그것에 넘어가면 곧 그들과 더불어 化(화)하여 버리게 됩니다. 그쪽에 좋아하면 이쪽에 싫어하고, 그 쪽에 편들면 이쪽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自古(자고)로 人君(인군)이 처음에는 淸明(청명)하여 그 정치가 볼만 하다가도 얼마 뒤는 奸邪(간사)에 넘어가고, 異端(이단)에 感(감)하여 功(공)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亡(망)치는 자! 마치 宋(송)의 哲宗(철종), 徽宗(휘종), 寧宗(영종), 理宗(이종) 같이 되는 자 얼마든지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殿下(전하)께서는 옛 사람들의 失道(실도)한 것을 오늘의 明鑑(명감)으로 삼아 뜻을 굳게 잡으시고 시종일관 변함없으시고 道(도)를 日月(일월)같이 밝히시어 妖氣(요기)를 물리쳐, 간여 못하게 하시고, 講道(강도)나 求治(구치)나 다 항구함을 요하여 마지않으시면, 다만 일어나려고 하는 선비와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하는 백성이 다 大道(대도)에 오를 뿐 아니라 전날의 간사한 무리들도, 장차 감화에 따라 변하게 될 것이 오니, 어찌 감히 나아와 나의 걱정이 되겠습니까!

易(역)에 이르기를 "聖人(성인)은 그 道(도)에 오래있으면 天下(천하)가 化(화)한다." 하였고, 맹자는 이르기를 "군자는 常道(상도)에 돌아 갈 뿐이다. 常道(상도)가 바르면 서민이 道義(도의)에 일어나고, 서민이 일어나면 邪思(사사)가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聖明(성명)께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腹心(복심)을 미루어 耳目(이목)을 통할 것.

臣(신)은 듣자오니 一國(일국)의 體(체)는 한 사람의 몸과 같다 하옵니다. 사람의 한 몸에 머리가 위에 있어서 아래를 통솔하고, 腹心(복심)이 가운데서 이어받아 일을 맡고, 耳目(이목)이 곁으로 퍼져 호위하고 일깨워 주어야 몸이 편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人主(인주)란 一國(일국)의 元首(원수)입니다. 大臣(대신)은 그 腹心(복심)이요, 臺諫(대간)은 그 이목입니다.

 

三者(삼자)는 서로 기다리어 서로 이루는 것이니, 이는 나라를 가지는 常勢(상세)요 천하고금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옛 人君(인군)으로서 大臣(대신)을 신임하지 않고 대간의 말을 듣지 않는 者(자)가 있었는데 이는 비유하면 사람이 그 腹心(복심)을 스스로 끊으며, 그 이목을 스스로 막는 것과 같으니, 머리만으로 홀로 사람이 될 이가 없는 것입니다.

或(혹) 大臣(대신)을 신임하는 자가 있어도, 신임이 그 道(도)에 따르지 않고, 그 求(구)함이 능히 발못을 바르게 고치고, 왕을 輔弼(보필)할 수 있는 賢者(현자)를 구하지 않고 오직 阿諂(아첨)하고 잘 따르는 자를 구하여 써 그 私(사)를 이루려고 하니, 그 얻는 것이 奸邪(간사)하여 정치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凶惡(흉악)하여 權力(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사나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임금이 이런 사람으로서 자기욕심을 채우는 腹心(복심)으로 삼으면, 신하는 이런 임금으로써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元首(원수)로 삼아, 상하가 서로 가리우고 서로 結託(결탁)하여 남이 그것을 干與(간여) 할 수 없이 됩니다. 혹 剛直(강직)한 선비가 있어서 그 銳鋒(예봉)을 건드리면 반드시 誅殺(주살)을 가하여 양념가루로 만들어 비버리고야 맙니다. 이 때문에 忠臣(충신)과 賢人(현인)이 다 쫓겨나서 국내가 空虛(공허)하게 되고 耳目(이목)의 司職(사직) 은 모두 권력을 잡은 자의 私人(사인)으로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소위 耳目(이목)이란 것이 元首(원수)의 이목이 아니라 당로자의 이목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서 이목을 빙자하여 勢(세)를 올리고, 氣焰(기염)을 부채질하여 權臣(권신)의 惡(악)을 편들어주면 腹心(복심)으로 말미암아 禍(화)가 쌓여 마침내 서로 싸우고, 邪惡(사악)을 이루어 놓고는 오만하게 각자 자기의 원대로 자만하지만, 실은 元首(원수)의 毒氣(독기)가 腹心(복심)에서 발했고 腹心(복심)의 毒蟲 (독충)이 耳目(이목)에서 起因(기인)한 것인 줄을 모릅니다.

 

이것은 예나 이제나 같은 그 범주인데 前轍(전철)이 넘어져도 뒤에 오는 者(자), 그것을 경계 삼을 줄 모르고 잇따라 그 길을 밟아 마지아니하니 實(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오늘날 朝廷(조정)의 일은 이와 달라서 聖智(성지)의 德(덕)은 출중하여 정통의 體(체)로서 일국의 元首(원수)로 되셨고, 腹心(복심)의 바탕과 耳目(이목)의 관원도 다 뭇 사람 중에서 골라 뽑아 그 책임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易(역)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이 서로 求(구)하며, 물은 습한 대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으로 붙으며,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고하였습니다. 위에는 聖主(성주)가 있으니 賢臣(현신)이 없을 것을 염려 되지 않습니다.

臣(신)은 바라옵건대 聖上(성상)께서는 오직 하늘의 明命(명명)을 돌보시고 몸을 공경 되게 하여 南面 (남면)의 자리를 지키시고 腹心(복심)에게 정성을 미루시고 밝은 눈, 밝은 귀로 民(민)에게 中(중)을 세우고 위에서 極(극)을 세우시어 一毫(일호)의 私意(사의)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흔들지 못하게 하시면 제상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착한 마음으로, 좋은 계책을 세우고 도리에 맞게 경전의 정신으로써 자기의 책임을 삼을 것이요, 諫諍(간쟁)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대면해서 꾸짖고, 쟁송을 연기하고, 기관을 보필 하고, 허물을 보충함으로써 그 직책을 삼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세 가지 형세가 서로 연이어 상통하여 精(정)을 모두고 神(신)을 모아 通(통)해서 일체가 되면, 이렇게 되고서 朝廷(조정)에 善政(선정)이 없고, 나라에 善治(선치)가 없고, 세상이 평화롭고 융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臣(신)은 들은바 없습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益(익)이 舜(순)을 훈계하여 이르기를 "근심 없을 때 경계하고 법도를 잃지 말고 安逸 (안일) 淫樂(음락)에 빠지지 말고, 어진 이에 반기면 의심하지 말고 私慝(사특)함을 버리면, 果斷(과단) 있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人主(인주)의 마음이 한번 警戒(경계)를 태만히 하여 쾌락에 빠지게 되면 곧 뒤따라 법도가 무너질 뿐 아니라 어진이도 마침내 맡겨 쓰지 못하고 姦邪(간사)도 능히 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의 필연입니다.

그러므로 잘 다스리는 朝廷(조정)일지라도 或(혹) 불행하게 이러한 징조가 있게 되면 大臣(대신)들 가운데는 반드시 임금의 惡(악)에 迎合(영합)하여 國權(국권)을 도적질 할 것을 꾀하려는 者(자) 있고, 小臣(소신)들은 반드시 勢力(세력)있는 자에 아첨하여 자기의 사리를 탐하려는 자가 있어서 드디어 前日(전일)의 腹心(복심)이 변하여 오늘의 도적이 되고 전일의 耳目(이목)이 변하여 오늘의 눈가림이 되고, 전일의 一體(일체)가 변하여 오늘의 胡越(호월)이 되어 쇠퇴의 형세와, 위험한 멸망의 사태가 다른 때를 기다리지 않고 곧 목전에 당도하게 됩니다. 阜陶(부도)의 노래에 이르기를 "元首(원수)가 죄를 지으면 팔다리가 개으르고 만사가 문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만사가 문어지는 것은 그 책임이 元首(원수)에 있다는 말입니다.

 

宋(송)나라 신하 王介之(왕개지)는 말하기를 "宰相(재상)으로서 宮禁(궁금)의 意向(의향)을 만들며, 給舍(급사)로서 宰相(재상)의 風旨(풍지)를 받들게 되면 朝廷(조정)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라고 하였습니다. 邪徑(사경)의 해로움이 腹心(복심), 耳目(이목)의 處地(처지)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말 헌 것입니다. 呂公弼(여공필)의 仁宗(인종)에게 諫(간)한 말에는 "諫官(간관)은 耳目(이목)이 되고, 執政(집정)은 股肱(괴굉)이 된다. 股肱(괴굉)과 耳目(이목)은 반드시 서로 用(용)이 되어야 온 몸이 현안하고 웃머리인 元首(원수)가 높아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邪徑(사경)을 밟지 않고, 서로 用(용)이 되는 것이 至善(지선)의 道(도)라고 하옵니다. 부디 聖明(성명)께서 留意(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여섯째. 修省(수성)을 정성스러이 해야 하늘의 사랑(天愛)을 이어 받음.

臣(신)은 듣자오니 董仲舒(동중서)가 武帝(무제)에게 고하는 말에 이르기를 "國家(국가)에 失道(실도)하는 큰 잘못이 있으려 할 때는 하늘이 먼저 災害(재해)를 내려 견책하는 뜻을 알리고, 그래도 自省(자성)할 줄 모르면 또 괴異(괴이)를 내려 놀라게 하고, 그래도 變(변)할 줄 모르면 傷敗(상패)가 이르나니, 이것으로서 天心(천심)이 人君(인군)을 사랑하여 그 亂(란)을 그치게 하려고 함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뜻 깊은 말입니다.

 

萬世(만세)의 人主(인주)는 마땅히 龜鑑(귀감)으로 삼아 가볍게 여기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하오나 人主(인주)는 이에 있어서 또 마땅히 天心(천심)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를 알아야 하고, 또 마땅히 내가 천심을 받드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익숙히 강구하여 참되게 體行(체행)해야 거의 天心(천심)을 받들고 君道(군도)를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請(청)컨데 그 까닭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臣(신)은 이르기를 天地(천지)의 大德(대덕)은 生(생)이라고 합니다.

무릇 天地(천지) 사이에 生(생)을 먹음은 類(류)가 부지기수이니 움직이는 것, 땅에 박힌 것, 큰 것, 작은 것이 모두 하늘이 덮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인데, 特(특)히 우리 사람에 있어서는 形象(형상)이 닮았고 가장 신령하여 천지의 心(심)이 되어 있는 것이니, 그 仁愛(인애)는 더욱 말 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 마음은 있어도 스스로 베풀지 못하고, 반드시 가장 신령한 것 가운데서도 그 聖哲(성철) 한 으뜸 되는 자로서 德(덕)의 神(신), 人(인)의 和協(화협)한 者(자)를 돌보아 임금으로 삼고 백성을 길러 양육하는 일을 부탁하여서 그 仁愛(인애)의 政治(정치)를 行(행)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이 命(명)하고 도와주고 四方(사방)을 편안하게 해주었으나, 그래도 或(혹) 개을러서, 難(난)이 소홀한데서 생길까 염려하여 이에 또 이른바 災殃(재앙)과 警鐘(경종)의 가책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임금에 대하여 다시금 친절하게 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이미 仁愛(인애)의 책임을 여기에 맡겼으니 마땅히 仁愛(인애)의 보답을 이쪽에서 개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人君(인군)된 者(자)로써 하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공연히 그런 것이 아님을 안다면 반드시 그 임금 노릇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요, 반드시 天命(천명)이 쉽게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반드시 높이 위에서 날마다 말마다 여기를 내려다보고 감시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 조금도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능히 이렇게 되면 평소에도 반드시 마음먹고 몸을 愼(신)하여 敬(경)과 誠(성)으로써 上帝(상제)를 받들어 빛나게 함이 극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災殃(재앙)을 만났을 때는 반드시 허물을 反省(반성)하고 政事(정사)를 고쳐 닦아 愼(신)과 實(실)로써 하늘의 뜻을 感激(감격)시킴에 더욱 마음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게 되면 政治(정치)가 交欄(교란)에 이르지 않도록 바로잡히고, 나라가 危機(위기)에 이르지 않도록 安保(안보)될 것입니다. 失敗(실패)없이 안전함을 여기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天心(천심)을 모르고 그 德(덕)을 삼가지 않는 者(자) 만이 모든 것을 이와 反對(반대)로 합니다. 그래서 上帝(상제)가 震怒(진노)하여 禍敗(화패)를 내리는 것이니, 이는 하늘이 不得已(부득이)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또한 심히 두렵지 않습니까?

지금 主上(주상)께서는 登極(등극)하신지 1년이 되옵는데 항상 하늘을 공경하고, 아래를 근심하시고 修德(수덕) 行政(행정)하시는 사이에 人心(인심)에 거슬리거나 上帝(상제)께 罪(죄)지은 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天變(천변)이 자주 일고 재앙이 함께 생겨 和氣(화기)가 應(응)하지 않아 보리농사가 全滅(전멸) 되고, 水災(수재)의 慘酷(참혹)함은 만고에 없던 바요, 우박과 황충 같은 갖가지 怪異(괴이)가 다 나타나니, 上天(상천)이 殿下(전하)께 무엇을 노하여 이렇게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天道(천도)는 멀지만 實(실)은 가까운 것이며, 하늘의 위엄은 至嚴(지엄)하여 장난으로 볼 수 없습니다. 小臣(소신)은 우매하와 敢(감)히 함부로 헤아려 말할 수 없사오나 가만히 董仲舒(동중서)의 말로 미루어 보면, 이것은 天心(천심)이 殿下(전하)를 사랑함이 깊고 경계함이 지극한 때문인가 합니다. 또 지금 殿下(전하)께서 이미 天命(천명)을 받아 人牧(인목)이 되었으니, 자리에 올라 정치를 圖謀(도모) 하시는 마당에 있어서, 喪中(상중)에 있으시며 道(도)를 생각하시는 날이 곧 根本(근본)을 바로잡고 始初(시초)를 바르게 할 때 이며, "哲命(철명)을 스스로 끼쳐 줄" 때입니다.

만약 晏然(안연)한 寵愛(총애)가 있는 줄만 알고, 놀라만한 威嚴(위엄)이 있는 줄을 모르면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날로 해이해 지고 邪慝(사특)한 情(정)이 도리어 放逸(방일)해서, 강물의 둑을 터놓은 것 같아야 아니하는 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災害(재해)를 내려 警告(경고)해 놓고 또 怪異(괴이)를 내려 敬懼(경구)하게 하는 것이니, 天心(천심)의 殿下(전하)를 仁愛(인애)함이 깊고 절실하며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모르오나 殿下(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自修(자수)하여 天意(천의)에 當(당)하고 화근을 없애려 하십니까? 옛적에 孔光(공광)은 天道(천도)를 걱정 할 것 없다하였고, 安石(안석)은 天變(천변)을 두려워 할 것 없다고 하였으나, 다 속이고 아첨하는 간사한 말로서 하늘에 罪(죄)를 짓는바 크거니와, 董仲舒(동중서) 劉向(유향)의 무리는 또 아무 災(재)는 아무 잘못의 反應(반응)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 너무 拘拘 (구구)하고 滯(체)하여, 或(혹) 相應(상응)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도리어 人君(인군)으로 하여금 天意 (천의)를 두려워 아니하고 염려하지 않는 버릇을 길러 주기에 알맞으니 亦是(역시)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臣(신)은 생각하기를 임금은 하늘에 대하여 마치 자식이 어버이에 대한 것과 같아서, 어버이의 마음이 자식에게 怒(노)함이 있으면 자식은 두려워하고 반성하여 怒(노)한 일이나 怒(노)하지 않은 일이 나를 불문하고 일마다 정신을 다하고 효도를 다하면, 어버이는 그 誠(성)과 孝(효)에 기뻐하여 노하던 일 까지도 함께 감싸주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꼭 어느 한 가지 일을 지정하여 이에 대해서만 恐懼(공구) 修省(수성)하고 다른 일은 여전이 放恣(방자)하게 되면 효도를 다함에 誠實(성실)히 못하여 거짓으로 함께 될 것이니 어찌 어버이의 노여움을 풀고 어버이의 기뻐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殿下(전하)께옵서는

어버이 섬기는 마음을 미루어 하늘 섬기는 道(도)를 다하시어 어느 일에나 修省(수성)하지 아니함이 없고, 어느 때나 恐懼(공구)아니함이 없으시고,

임금자신에는 비록 過失(과실)이 없더라도 心術(심술)의 隱微(은미)한 사이에 쌓여 있는 흠과 병통을 깨끗이 씻어버려야 하며,

宮禁內(궁금내)에서는 비록 家法(가법)이 본시 있겠지만 戚屬(척속)의 음흉한 무리들이 올려 바치고 찾아뵙고 안개처럼 모여드는 따위 들을 막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諫言(간언)을 들음에는 비록 "圓(원)을 돌리듯"하는 美德(미덕)을 가지시지만, 때로 私意(사의)로써 굳게 거부하시는 일이 있으시면 마땅히 그쳐야 할 것이요,

善(선)을 즐김에는 비록 色(색)을 좋아 하듯 하는 誠意(성의)는 가지시지만 或(혹) 虛(허)로써 억지로 求(구)하는데 까지 이르는 일이 있으시면 마땅히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벼슬과 賞(상)은 함부로 하여 功(공)없는 者(자)가 요행으로 얻고 功(공) 있는 자가 不平 (불평)으로 돌아서게 해서는 안 되며,

赦免(사면)과 罪罰(죄벌)은 악한자로 하여금 罪(죄)를 면하고, 善(선)한 자로 하여금 害(해)를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節義(절의)를 崇尙(숭상)하고 廉恥(염치)를 장勵(장려)하여 名敎(명교)의 防衛(방위)를 굳건하게 하는 일을 疎忽(소홀)히 해서 안 되며, 儉約(검약)을 숭상하고 奢侈(사치)를 금하여 公私(공사)의 財力(재력)을 通裕(통유)있게 하는 일도 누그러지게 해서 안 됩니다.

祖宗(조종)의 成法(성법) 舊章(구장)도 오래면 弊(폐)가 생기는 것이니 약간 變通(변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良法(양법) 美意(미의)까지 모두 뜯어 고치면 반드시 큰 憂患(우환)을 일으키며, 벼슬아치로서 正(정)을 미워하고, 異(이)를 싫어하여 틈을 타서 事端(사단)을 일으키는 者(자)들은 미리 鎭靜(진정)시켜야 하는 것이나, 그러나 혹 어질고 착한 사람들 類(류)에서 혼자 떨어져 나감으로 인해서 서로 排擊(배격)하게 되면 반드시 도리어 傷處(상처)를 입게 됩니다.

오로지 옛것만 지키고, 하던 일만 하는 신하에게만 依賴(의뢰)하면 至治(지치)를 奮發(분발) 振興(진흥) 시킴에 방해되고, 새로운 일을 꾀하고 일 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맡기면 禍亂(화란)의 端緖(단서)를 挑發(도발)하게 됩니다.

京外(경외)의 관리들과 그 奴僕(노복)들은 貢納品(공납품)을 이리같이 뜯어먹고 오히려 부족하여 國庫 (국고)를 도적질하여 비우고, 浦口(포구) 將帥(장수)들은 軍卒(군졸)을 호랑이 같이 삼키고도 오히려 차지 못해 주변 백성에게 까지 害毒(해독)을 퍼트립니다. 饑荒(기황)은 이미 극심했어도 救濟(구제)는 대책이 없으니 뭇 도적이 일어날 것 같고, 邊方(변방)은 空虛(공허)한데 남북으로 틈이 벌어지니 小賊(소적)들의 뜻밖의 습격이 염려됩니다. 이런 등등의 일은 臣(신)이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습니다.

 

오직 殿下(전하)께서 하늘이 이처럼 사랑해 주심이 헛된 일이 아니란 것을 깊이 아시고 안으로 心身(심신)에 反省(반성)하여 敬(경)으로 일관해서 中斷(중단)하심이 없으시고, 밖으로 정치에 行(행)을 닦아 誠(성)으로 일관하여 거짓 꾸밈이 없으시고, 天人(천인)의 하시는 일에, 자신이 해야 될 일은 이미 앞에 말씀 드린바와 같으니 극진히 하시면 비록 旱水(한수)의 災(재)와 꾸지람의 경계가 到來(도래)해 있더라도 오히려 恐懼(공구) 修省(수성)의 힘을 베풀어 하늘이 주시는 仁愛(인애)의 마음을 이어 받을 수 있을 것이며, 臣(신)이 論(론)한 여섯 가지의 일 같은 것도 漸次(점차) 解消(해소)되고 고쳐지어 治平(치평)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여 自身(자신)에 根本(근본)을 세우지 않고 世上(세상)이 다스려 지기를 바라거나, 그 德(덕)을 변함없이 지니지 않고 하늘의 報應(보응)이 있기를 責(책)하거나, 平時(평시)에는 敬天(경천) 恤民(휼민)할 줄 모르고 災變(재변)을 만나면 自省(자성)의 形式(형식)만 갖추어 어리석게 응한다면 臣(신)은 말씀 하건대 "否(부) 泰(태)가 서로 極(극)"이 되고 治亂(치란)이 서로 기회를 타서, 수 백 년 나라가 태평한 끝에 國事(국사)가 염려됨이 장차 오늘의 弊害(폐해)보다 몇 배 더할 것이며, 天心(천심)의 殿下(전하)를 사랑함이 도리어 自暴自棄(자포자기)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書痙(서경)에 이르기를 "皇天(황천)은 친함이 없이 오직 잘 공경하는 者(자)를 친하며, 백성은 못 잊어 하는 사람이 없이 오직 仁德(인덕)가진 자를 못 잊으며, 귀신은 늘 받는 祭享(제향)이 없이 오직 정성어린 祭享(제향)만 받는다."하였고 詩經(시경)에 이르기를 "天(천)의 威(위)를 두려워 언제나 그 뜻을 保全(보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聖明(성명)께서 留意(유의)하시기 바라나이다.

 

 

위 六條(육조)에 기록한 바는 다 무슨 사람의 耳目(이목)을 놀랠만한 굉장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實(실)은 性(성) 道(도)에 뿌리박고 聖賢(성현)에 근거하되 中庸(중용) 大學(대학)에 맞추고 史傳(사전)에 상고하여 時事(시사)에 증험하여 말씀 드린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殿下(전하)께서는 卑近(비근)하다 해서 할 것이 못 된다 마시며 실제와 관련이 없다 해서 할 필요 없다 마시고 반드시 먼저 처음 二條(이조)로서 근본을 삼으시고 더욱 聖學(성학)의 功夫(공부)에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빨리 효과를 보려하지 마시고 스스로 한계를 긋지도 마시고 그 極致(극치)를 다하여 과연 여기에 얻은바 있으시면 나머지 다른 일들도, 날을 따라, 일을 따라 더욱 밝아지고 더욱 충실하게 되어, 理義(이의)가 내 마음을 기쁘게 함이 참말로 소고기 도야지 고기가 입을 기쁘게 하듯이 될 것입니다. 吾人(오인)의 性情(성정)은 참으로 堯舜(요순)이 될 수 있는 것이니 卑近(비근)하고 淺小(천소)한 것을 떠나지 않아도 實(실)은 高深(고심)하고 遠大(원대)하며 무궁한 것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이른바 深淵(심연)을 찾아 治道(치도)를 밝혀내고 本末(본말)을 貫通(관통)하여 大中(대중)을 세운다는 것이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小官(소관)의 말씀이 다 祖述(조술)한 바 있고 架空(가공)으로 지어내어 殿下(전하)를 속이는 것이 아님을 믿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臣(신)은 이 學問(학문)에 대하여 들어 안 것인 이미 늦었고 病(병)이 또 깊어서 이것을 힘써 實踐(실천)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지 못하였사오니 殿下(전하)의 盛意(성의)에 報應(보응)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恐縮(공축) 황공하여 감히 오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할 수 없이 이 걸음을 하였사오니 또 감히 이 말씀을 감추고 다른 말씀으로 대신 할 수도 없습니다. 殿下(전하)께서 다른 사람 때문의 말 때문이 이 말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에 取(취)하는 바 있으시면, 지금의 公卿(공경)大夫(대부)들이 다 이 說(설)을 誦習(송습)하고 이 道(도)에 從事(종사)하는 사람 들이오니 위에서 좋아하는 者(자) 있으면 아래에 반드시 더 甚(심)한 자가 있는 법입니다.

 

殿下(전하)께서 "묻기를 좋아하시고 가까운 말을 잘 살피시며 사람에게 取(취)하여 善(선)을 함을 즐겨하여" 밝은 덕의 功夫(공부)를 날로 더 하시면 누가 감히 全心(전심)을 바쳐 成德(성덕)을 助成(조성) 하려고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면 臣(신)은 비록 田間(전간)에 病(병)들어 누워있어도 날마다 聖德 (성덕)에 接近(접근)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巖穴(암혈)에서 枯死(고사)하여도 萬生靈(만생령)과 더불어 聖澤(성택)의의 흐름에 같이 몸을 적시겠나이다. 懇切(간절)히 비는 마음 맡길 때 없어,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삼가 들려 올리나이다.

 

 

 

퇴계집(退溪集) > 退溪先生文集卷之六 > 疏

 

戊辰辭職疏

 

崇政大夫判中樞府事臣李滉。謹齊戒拜手稽首。上言于主上殿下。臣以草野微?。散材乏用。事國無狀。歸鄕俟死。先朝誤聞。累加寵命。逮及當?。襲誤愈隆。至於今年春超?之除。尤駭聞聽。臣冒犯雷霆。辭不敢當。雖已蒙恩諒察。獲免負乘。然品秩不改。僭越依前。加以臣老疾?頹。無一分精力可堪從仕。而?綴崇班。益慙益懼。難以久?非據。爲聖朝羞?。顧緣臣今玆之來。濫被垂眷。旣異尋常。臣雖素昧籌略。不可不?竭丹?。思效一得之愚。而又恐口陳之際。神茫辭訥。掛一漏萬。玆敢因文達意。?拾推論。分爲六條。冒進于前疑。雖未敢望有補於涓埃。或可以少贊?御之箴否乎。

 

其一曰。重繼統。以全仁孝。臣聞。天下之事莫大於君位之一統。夫以莫大之統。父傳於子。而子承乎父。其事之至重。爲如何哉。自古人君莫不承至大至重之統。而鮮能知至大至重之義。孝有慙德。而仁未盡道者多矣。處常猶然。其或以旁支入繼之君。則能盡仁孝之道者益寡。而得罪?倫之敎者。比比有之。豈不深可畏哉。嗚呼。天無二日。民無二王。家無二尊。喪不二斬。古之聖人。非不知本生之恩重且大。而制爲禮法。使爲人後者爲之子。旣曰爲之子。則仁孝之道。當專於所後。而本生之恩。反不得與之竝立焉。是以。聖人秉義以殺本生之恩。隆恩以完所後之義。蓋易明致一。孟戒二本。權衡所定。倫則灼然。而況旁支之入繼也。受天命而踐寶位。宗社之付託何如。臣民之仰戴何因乎。其敢以私意有所反易。而不爲之致隆於所後哉。恭惟主上殿下以王室至親之重。膺先王豫簡之命。入承大統。天人響合。??克盡於恤宅。愛敬無慊於幹蠱。凡所以繼志述事者。莫非出於至性而由乎中誠。其於仁孝之道。不患其不致隆也。上自廟社之靈。下及臣民之心。固已胥悅而交慶矣。然而心難持於盤水。善難保於風燭。古語云。木腐而蟲生。孝衰於妻子。今也殿下之心。如水未波。如鏡未塵。所以仁愛之發。?然而無閼。孝順之行。純乎其罔間矣。至於異時。耳目之蔽蒙雜陳。愛憎之搖惑竝進。日久月深。事玩情?。不審殿下之心。於是乎能不受變於外。而卓然主善於中。?如今日乎。苟能如是。萬受祉而百無憂矣。如或不幸。而聖慮淵衷。一有遷化於彼。則不惟所以承宗廟奉長樂者。動有違慢。人或有乘偏私之?隙。而以詭經破義之說。慫慂而迎合之。馴致於殺其所當隆。隆其所當殺者。安保其必無乎。此古來入繼之君。所以多得罪於?敎。而今日之所宜爲至戒者也。抑臣非敢導殿下以薄於本生也。徒以爲當隆。則有聖王之定法如此。當殺。則有先儒之定論可師。一隆一殺。卽是天理人倫之極致。一遵乎此。而莫以分毫私意參錯於其間。然後爲仁爲孝。可得以議矣。雖然。孝爲百行之原。一行有虧。則孝不得爲純孝矣。仁爲萬善之長。一善不備。則仁不得爲全仁矣。詩曰。靡不有初。鮮克有終。惟聖明之留意焉。則幸甚。

 

其二曰。杜讒間。以親兩宮。臣聞。父母之愛其子爲慈。子之善事親爲孝。孝慈之道。出於天性。而首於衆善。其恩至深。其倫至重。其情最切。以至深之恩。因至重之倫。而行最切之情。宜無有不盡者。而或至於孝道有缺。慈天亦虧。其有甚者。則至親化爲豺狼而莫之恤。?人固有不免。而帝王之家。此患尤多。其故何哉。凡以情勢易阻。而讒間益衆也。所以云情勢易阻者。以宮殿之所御。逐日之進見。地近嚴而勢或阻。事多端而情或鬱也。所以云讒間益衆者。以兩宮之間。?侍左右。便嬖給事者。無非宦寺與婦人也。此輩之性。例多陰邪狡獪。挾姦而懷私。喜亂而樂禍。不知孝慈之爲何物。禮義之爲何事。惟以所事爲之重。一彼一此。分勢角立。爭多較少。恩怨生於指顧。利害卜於向背。以無爲有。以是爲非。情狀萬端。如鬼如?。或激而致怒。或?而令懼。一或傾耳而聽信。則自陷於不孝。而陷親於不慈必矣。蓋家法嚴正。兩宮交驩。則此輩無所容其奸。而不獲利。必也交構互嫌。主昏倫悖而後。得以騁其術?其讒。而得大利。此小人女子之通患也。雖然。亦視其君德之仁鄙。御治之嚴縱如何。而應之捷如影響。然則人君顧自治如何耳。苟能自治。亦何患之有哉。臣去年在都下。流聞道路。卽位伊始。此類之中。有以潛邸舊恩。不待上命而敢進者。遽蒙峻?而退。一國之人。咸仰大聖人之所作爲出於尋常萬萬如此。自是以來。聖德日聞。仁孝罔間。推此以往。何陰而不伏。何惡而敢肆乎。雖然。殿下切不可恃此而忽於霜氷之戒也。且夫以殿下之孝誠。極一國之奉養。孝亦大矣。然人子職分之所當爲者。無窮無盡。豈可謂吾之事親已足而無他虞哉。又今日殿下之事親。所謂以義而隆恩。以變而處常。斯二者之際。實小人女子之所伺隙而造?者也。臣伏覩前代之事。上有慈親。下有賢嗣。而爲賊宦讒妾。交?兩間。而不終厥孝者。何可勝道哉。況今宮?之間。宿姦老蠱如前後朝論所深憂者。猶未盡去。此恐不但如羸豕之??而已。伏願殿下監大易家人之義。法小學明倫之訓。嚴於自治。而謹於正家。篤於事親。而盡於子職。使左右近習之人。洞然皆知兩宮至情莫重於孝慈。而吾輩讒間無以得行於其間。亦見其成孝慈者獲安。生兩隙者得罪。則自然無陰邪間亂之患。而孝道無闕。又推此心用此誠。以致孝敬於恭懿殿。罔不盡情竭力。則道隆繼繼。仁至義盡。而三宮驩洽。萬福畢臻矣。詩曰。?兮侈兮。成是南箕。又曰。永言孝思。孝思維則。惟聖明之留意焉。則幸甚。

 

其三曰。敦聖學。以立治本。臣聞。帝王之學。心法之要。淵源於大舜之命禹。其言曰。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夫以天下相傳。欲使之安天下也。其爲付囑之言。宜莫急於政治。而舜之於禹。丁寧告戒。不過如此者。豈不以學問成德。爲治之大本也。精一執中。爲學之大法也。以大法而立大本。則天下之政治。皆自此而出乎。惟古之聖謨若此。故雖以如臣之愚。亦知聖學爲至治之本。而僭有獻焉。雖然。舜之此言。但道其危微。而不及其危微之故。但敎以精一。而不示以精一之法。後之人。雖欲據此而眞知實踐乎道。殆亦難矣。其後列聖相承。至孔氏而其法大備。大學之格致誠正。中庸之明善誠身是也。諸儒迭興。逮朱氏而其說大明。大學,中庸之章句或問是也。今從事於此二書。而爲眞知實踐之學。比如大明中天。開眼可覩。如周道當前。擧足可履。所患世之人君。能有志此學者鮮矣。其或有志。而能有始有終者。爲尤鮮焉。嗚呼。此道之所以不傳。治之所以不古也。而其亦有待而然乎。恭惟主上殿下神聖之資。出於天?。睿哲之學。進於日新。儒臣講官。無不聳服而讚歎也。則殿下之於此學。有其資有其志矣。其於致知之方。力行之功。亦可謂有其始矣。然而愚臣妄意。恐不可執此而遽以爲能知能行也。臣請先以致知一事言之。自吾之性情形色日用?倫之近。以至於天地萬物古今事變之多。莫不有至實之理。至當之則存焉。卽所謂天然自有之中也。故學之不可以不博。問之不可以不審。思之不可以不愼。辨之不可以不明。四者。致知之目也。而四者之中。愼思爲尤重。思者何也。求諸心而有驗有得之謂也。能驗於心而明辨其理欲善惡之幾。義利是非之判。無不硏精。無少差謬。則所謂危微之故。精一之法。可以眞知其如此而無疑矣。今殿下於四者之功。旣以啓其始而發其端矣。臣請因其發端。而益致其積累之功。其次第節目。依或問所示之詳。敬以爲主。而事事物物。莫不窮其所當然與其所以然之故。沈潛反覆。玩索體認而極其至。至於歲月之久。功力之深。而一朝不覺其有灑然融釋。豁然貫通處。則始知所謂體用一源。顯微無間者。眞是其然。而不迷於危微。不眩於精一而中可執。此之謂眞知也。臣請復以力行之事言之。誠意必審於幾微。而無一毫之不實。正心必察於動靜。而無一事之不正。修身則勿陷於一?。齊家則毋?於一偏。戒懼而謹獨。强志而不息。數者。力行之目也。而數者之中。心意爲最關。心爲天君。而意其發也。先誠其所發。則一誠足以消萬僞。以正其天君。則百體從令。而所踐無非實矣。今殿下於數者之功。亦已啓其始而擧其緖矣。臣請因其擧緖。而益致其親切之功。其規模宗旨。遵二書所垂之敎。敬以爲主。而隨時隨處。念念提?。件件兢業。萬累衆欲。?滌於靈臺。五常百行。磨?乎至善。食息酬酢。而涵泳乎義理。懲窒遷改。而懋勉乎誠一。廣大高明。不離於禮法。參贊經綸。皆原於屋漏。如是積眞之多。歷時之久。自然義精仁熟。欲罷不能。而忽不自知其入於聖賢中和之域矣。其實踐之效至此。則道成德立。而爲治之本。於是乎在。取人之則。果不外身。自見群賢彙征。績用咸?。措世於隆平。納民於仁壽。有不難矣。或曰。帝王之學。不與經生學子同。此謂拘文義工綴緝之類云耳。至如敬以爲本。而窮理以致知。反躬以踐實。此乃妙心法。而傳道學之要。帝王之與?人。豈有異哉。抑眞知與實踐。如車兩輪。闕一不可。如人兩脚。相待互進。故程子曰。未有致知而不在敬者。朱子曰。若躬行上未有工夫。亦無窮理處。是以。二者之功。合而言之。相爲始終。分而言之。則又各自有始終焉。嗚呼。不始固無終也。無終則安用始。而人主之學。率多有始而無終。始勤而終怠。始敬而終肆。以一出一入之心。爲或作或輟之事。卒同歸於蔑德而迷國者。何哉。莫危者人心。易陷於欲。而難復乎理。莫微者道心。?開於理。而旋閉于欲故也。今欲使易陷者。退聽而不得作。?開者。接續而無間斷。以成就於帝王相傳執中之學。非精之一之之功。何以哉。傅說曰。惟學遜志。念終始典于學。厥德修罔覺。孔子曰。知至至之。可與幾也。知終終之。可與存義也。惟聖明之留意焉。則幸甚。

 

其四曰。明道術。以正人心。臣聞。唐虞三代之盛。道術大明。而無他岐之惑。故人心得正。而治化易洽也。衰周以後。道術不明。而邪慝竝興。故人心不正。治之而不治。化之而難化也。何謂道術。出於天命。而行於?倫。天下古今所共由之路也。堯舜三王。明乎此而得其位。故澤及於天下。孔,曾,思,孟。明乎此而不得位。故敎傳於萬世。後世人主。惟不能因其敎而得其道。以倡明於一世。是以。異端亂眞之說。功利醜正之徒。得以鼓惑馳驟。陷溺人心。其禍滔天而莫之救也。中間。有宋諸賢。大闡斯道。而俱不得見用於世。其所以明?敎正人心者。亦不能收功於一時。而止傳於萬世矣。?我東方僻在海隅。箕範失傳。歷世茫茫。至于麗氏之末。程朱之書始至。而道學可明。入于本朝。聖聖相承。創業垂統。其規模典章。大抵皆斯道之發用也。然而自肇國至于今日。將二百年于玆。撫覽治效。而揆以先王之道。猶未免有所?然於列聖之心者。無他焉。亦曰道術不明。而他岐之害人心者多也。方今主上殿下以堯舜之資。躬帝王之學。志遵古昔。求治如渴。蓋將以興起斯文。措一世於唐虞三代之隆。誠爲我東方千載一時。朝野欣欣然莫不拭目而相慶。然於是乎若不明先王之道術。定一代之趨尙。以表率而導迪之。亦何能使一國之人。回積惑而舍多岐。一變而從我於大中至正之敎乎。故臣愚必以明道術。以正人心者。爲新政之獻焉。雖則然矣。而其明之之事。亦有本末先後緩急之施。其本末。又有虛實之異歸焉。本乎人君躬行心得之餘。而行乎民生日用?倫之敎者。本也。追?乎法制。襲美乎文物。革今師古。依倣比較者。末也。本在所先而急。末在所後而緩也。然得其道而君德成。則本末皆實。而爲唐虞之治。失其道而君德非。則本末皆虛。而有叔季之禍。固不可恃虛名而?聖治之成。亦不可昧要法而求心得之妙也。今殿下誠能知虛名之不可恃。求要法以明道學。請必深納於臣前所論眞知實踐之說。敬以始之。敬以終之。方其始也。所知者或有?晦而未瑩。所行者或有矛盾而不合。請愼勿因此而生厭沮之心。當知聖賢必不我欺。但我功力未至。勉勉循循。而不廢於中道。如此積習之久。純熟之餘。自至於精義入神。而目牛無全。?面?背。而左右逢原。此之謂躬行心得。而道明於己。帝堯文王之克明德。是也。自此而推之。無適而非道。親九族而平百姓。由?,麟以及鵲,騶。今豈異於堯,文之時哉。德化薰蒸。內外融徹。朝敬讓而家孝悌。士知學而民知義。人心其有不正。道術其有不明者乎。荀子曰。君者。盂也。盂方則水方。君者。表也。表正則影直。豈不信哉。雖然。微臣之私憂過計。更於人心岐惑之說。特有感焉。臣伏見東方異端之害。佛氏爲甚。而高麗氏以至於亡國。雖以我朝之盛治。猶未能絶其根?。往往投時而熾漫。雖賴先王旋覺其非。而?掃去之。餘波遺燼。尙有存者。老,莊之虛誕。或有耽尙。而侮聖蔑禮之風間作。管商之術業。幸無傳述。而計功謀利之弊猶錮。鄕原亂德之習。濫觴於末流之媚世。俗學迷方之患。燎原於擧子之逐名。而況名途宦路。乘機抵?。反側欺負之徒。亦安可謂盡無也。以此觀之。今之人心。不正甚矣。設若不幸。而主上嚮道之心。少不如初。或見於好惡之偏。或漏於己私之隙。則凡此數等之人。必有雜然竝進。?魅??。舞術眩怪。百端攻鑽。一爲所中。則便與之俱化於彼矣。化於彼則變於此。好在彼則惡在此。黨乎彼則仇乎此。自古人君。始初淸明。其政可觀。旣而。爲姦邪所中。異端所惑。以敗功殄國。如宋之哲,徽,寧,理之爲者。何可勝數。伏願殿下以古之失道。爲今之明鑑。執志如金石。貫始終而毋?。明道如日月。廓?陰而罔干。勿論講道與求治。皆要常久而不已。則不但待興之士。自新之民。皆升于大猷。向之群邪雜慝。亦將受變於神化之不暇。安敢或進而爲吾患哉。易曰。聖人久於其道。而天下化成。孟子曰。君子反經而已矣。經正則庶民興。庶民興則斯無邪慝矣。惟聖明之留意焉。則幸甚。

 

其五曰。推腹心。以通耳目。臣聞。一國之體。猶一人之身也。人之一身。元首居上而統臨。腹心承中而幹任。耳目旁達而衛喩。然後身得安焉。人主者。一國之元首也。而大臣其腹心也。臺諫其耳目也。三者相待而相成。實有國不易之常勢。而天下古今之所共知也。古之人君。有不信任大臣。不聽用臺諫者。譬如人自決其腹心。自塗其耳目。固無元首獨成人之理。其或有信任大臣。而不由其道。其求之也。不求其能匡濟輔弼之賢。而惟求其阿諛順旨者。以謀遂其私。是其所得者。非姦邪亂政之人。則必兇賊擅權之夫。君以此人爲濟欲之腹心。臣以此君爲濟欲之元首。上下相蒙。締結牢固。人莫能間。而一有?直之士。觸犯其鋒。則必加之竄謫誅戮。爲?爲粉而後已焉。由是忠賢盡逐。國內空虛。而耳目之司。皆爲當路之私人矣。則所謂耳目者。非元首之耳目也。乃當路之耳目也。於是。憑耳目而鼓勢煽焰。以黨助權臣之惡。由腹心而積戾稔禍。以蓄成闇主之慝。侈然自以爲各得所欲。而不知元首之?毒發於腹心。腹心之蛇?起於耳目也。此古今一轍。前者旣覆。後不知戒。相尋而未已。誠可痛也。今日朝廷之事則異於是。聖智之德。首出庶物。而正位居體。爲一國之元。而其於腹心之地。耳目之官。亦皆選於衆而重其責矣。易不云乎。同聲相應。同氣相求。水流濕。火就燥。雲從龍。風從虎。上有聖主。不患其無賢臣也。臣愚伏願聖上唯當顧?天之明命。恭己南面。推誠腹心。明目達聰。建中于民。建極于上。不以分毫私意。撓壞於其間。則居輔相之位者。必皆以沃心陳謨。論道經邦自任。處諫諍之列者。無不以面折廷爭。補闕拾遺爲職。三勢洞然。聚精會神。通爲一體。若是而朝無善政。國無善治。世不致隆平者。臣未之聞也。雖然。益之戒舜曰。儆戒無虞。罔失法度。罔遊于佚。罔淫于樂。任賢勿貳。去邪勿疑。人主之心。一怠於儆戒。而流於佚樂。則法度之壞。不俟終日。而賢之不終任。邪之不克去。亦理勢之必然也。故雖以治平之朝。其或不幸而一有此兆。則大臣必有逢君之惡。以圖竊國柄者。小臣必有寧媚於?。以規?己利者。遂使前日之腹心。今變爲寇攘。前日之耳目。今變爲蔽蒙。前日之一體。今變爲胡越。而衰亂之形。危亡之事。不待他時。而立見於前矣。皐陶之歌曰。元首叢?哉。股肱惰哉。萬事墮哉。言萬事之墮。責在元首也。宋臣王介之言曰。宰相而承宮禁意向。給舍而奉宰相風旨。朝廷紀綱掃地矣。言邪徑之爲害。無異於腹心耳目之地也。至呂公弼之諫仁宗則曰。諫官爲耳目。執政爲股肱。股肱耳目。必相爲用。然後身安而元首尊。故臣以爲不由邪徑。而能相爲用。至善之道也。惟聖明之留意焉。則幸甚。

 

其六曰。誠修省。以承天愛。臣聞。董仲舒告武帝之言曰。國家將有失道之敗。天乃先出災害。以譴告之。不知自省。又出怪異。以警懼之。尙不知變。而傷敗乃至。以此見天心之仁愛人君。而欲止其亂也。旨哉言乎。誠萬世人主之龜鑑。而不可忽焉者也。雖然。人主於此。又當知天心之所以仁愛我者。何故而然。又當知我所以奉承天心者。何道而可。無不深思熟講而實體行之。然後庶可以享天心而盡君道矣。臣請爲殿下言其故。竊謂天地之大德曰生。凡天地之間。含生之類。總總林林。若動若植。若洪若纖。皆天所悶覆而仁愛。而況於吾民之肖象而最靈。爲天地之心者乎。然天有是心。而不能以自施。必就夫最靈之中。而尤眷其聖哲元良德?于神人者。爲之君。付之司牧。以行其仁愛之政。旣命之佑之。而寵綏四方矣。猶恐其或怠而難生於所忽也。於是乎又有所謂災異警譴之加焉。天之於君。所以反覆丁寧若是者。無他。旣以仁愛之責。委重於此。自當有仁愛之報??於此也。誠使爲人君者。知天之所以仁愛我者如此。其不徒然也。則其必能知爲君之難矣。其必能知天命之不易矣。其必能知高高在上。而日監于玆。不容有毫髮之可欺矣。能如此則其在平日。必有以秉心飭躬。克敬克誠。以昭受上帝者。無不盡其道矣。其遇災譴。必有以省愆修政。克愼克實。以感格天意者。益能盡其心矣。夫然則制治于未亂。保邦于未危。有平安而無禍敗。可幾也。惟其不知天心。而不愼厥德者。一切反是。故帝乃震怒。而降之禍敗。非天之所得已也。其亦可畏之甚也。當今主上殿下握寶御極。一期于玆。凡所以上敬下恤。修德行政之間。未嘗聞有招拂于人心。獲戾于帝事者。然而乾文屢變。時孼竝作。和氣不應。兩麥全耗。水災之慘。振古所無。風雹蝗螟。衆異畢見。不知上天何所怒於殿下而如此哉。天道雖遠而實邇。天威至嚴而難玩。小臣愚昧。不敢妄度而爲言。竊以仲舒之言推之。此乃天心仁愛殿下之深。而威警殿下之至也。且今殿下旣承天眷而作人牧。則踐?圖治之初。宅憂思道之日。乃端本正始之辰。自貽哲命之時也。若使之徒知有晏然之寵。而不知有赫然之威。則恐懼之心日弛。邪僻之情轉放。如決河堤。亦何所不至哉。故旣出災害。以譴告之。又出怪異。以警懼之。天心之仁愛殿下。可謂深切而著明矣。不審殿下將何修。而可以當天意消禍萌乎。昔者。孔光以爲天道不必憂。安石以爲天變不足畏。皆誣諛姦罔之言。固大得罪於天矣。董仲舒,劉向之徒。又以某災爲某失之應。亦太拘拘滯陋。而其或有不相應者。則適啓人君不畏不憂之端。亦非也。故臣愚以爲君之於天。猶子之於親。親心有怒於子。子之恐懼修省。不問所怒與非怒。事事盡誠而致孝。則親悅於誠孝。而所怒之事。竝與之渾化無痕矣。不然。只指定一事。而恐懼修省於此。餘事依舊恣意。則不誠於致孝而僞爲之。何以解親怒而得親歡乎。伏願殿下推事親之心。以盡事天之道。無事而不修省。無時而不恐懼。聖躬雖未有過失。而心術隱微之間。疵病山積。不可以不淨盡。宮禁雖本有家法。而戚屬幽陰之類。納謁霧集。不可以不過防。聽諫雖如轉?之美。有時乎以私而牢拒。在所當改。樂善雖如好色之誠。或至於以虛而强求。在所當審。爵賞毋濫。使無功者幸得。而有功者解體。赦宥毋數。使爲惡者獲免。而爲善者受害。尙節義。?廉恥。以壯名敎之防衛者。不可疎。崇儉約。禁奢侈。以裕公私之財力者。不可緩。祖宗之成憲舊章。積久而生弊者。雖不可不稍變通。然或竝與其良法美意而一切紛更之。必致大患。搢紳之嫉正忌異。伺?而生事者。固不可不預鎭靜。然或自乖於賢?善類。而互相排擊之。必見反傷。專倚於守舊循常之臣。則有妨於奮興至治。偏任於新進喜事之人。則亦至於挑生亂階。抑京外胥僕。狼?納使而猶不足。盜空府庫。鎭浦帥將。虎呑軍卒而猶不?。毒?隣族。饑荒已劇。而賑救無策。恐群盜之大起。邊?率난001虛。而南北有?。慮小醜之猝入。凡若此類。臣不能枚擧而悉數。惟殿下深知天所以仁愛己者若是。其非徒然也。內以自反於身心者。一於敬而無作輟。外以修行於政治者。一於誠而無假飾。所處於天人之際者。無所不用其極。如前所云云。則雖有水旱之災。譴警之至。猶可施恐懼修省之力。而承天與仁愛之心。如臣所論十六事者。亦將以次而消除更化。以臻於治平矣。如或不然。不本於身而望治於世。不?其德而責報於天。平時則不知敬天而恤民。遇災則但擧文具而泛應。則臣恐否泰相極。治亂相乘。數百年昇平之末。國事之可憂。將日倍於今時之弊。而天心之仁愛殿下者。反爲殿下之自棄也。書曰。皇天無親。克敬惟親。民罔常懷。懷于有仁。鬼神無常享。享于克誠。詩曰。畏天之威。于時保之。惟聖明之留意焉。則幸甚。

 

右六條所陳。皆非有驚天動地震耀人耳目之說。然而實謹於?敎。而本於性道。宗於聖賢。而質於庸學。稽之史傳。而驗之時事以爲言。惟殿下勿以爲卑近而不足爲。勿以爲迂闊而不必爲。必先以首二條爲本。而尤勤勵不息於聖學之功。毋欲速。毋自?。以極其至於此。而果有所得。則其他事固亦隨日隨事。而益明益實。理義之悅心。眞是如芻?。吾人之性情。眞可爲堯舜。不離乎卑近淺小。而實有高深遠大而無窮者存焉。古人所謂探淵源而出治道。貫本末而立大中者。初不外此。至於是而後。方信小臣之言皆有所祖述。非鑿空架虛以厚誣於殿下也。雖然。臣之於此。聞旣晩暮。而病又沈痼。不能力踐以實有諸己。無以應殿下之盛意。故縮?惶惑而不敢來。今旣不免爲此來。則又不敢匿此說而代以他說也。如蒙殿下不以人廢言。而有取於此。則今玆公卿大夫。皆誦習此說而從事此道者也。上有好者。下必有甚焉者。在殿下好問而察邇。樂取以爲善。以日裨緝?之功。誰敢不精白一心。以助成聖德者乎。則臣雖抱病田間。何異日近於耿光。枯死巖穴。亦與萬生同霑聖澤之流浹矣。臣無任懇祈切祝之至。謹昧死以聞。退溪先生文集卷之六

 

 

[난-001]率 : 率。當作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