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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 스님에게 듣는다.성철 스님 백일법문 ①②③④⑤

경호... 2015. 7. 14. 03:19

 

 

고우 스님에게 듣는다 성철 스님 백일법문 ①

 

손바닥은 색, 손등은 공 … 둘 다 봐야 한 개가 보여

 

 

고우 스님이 11일 조계사에서 백일법문 강의를 하고 있다. 당초 150명 규모로 마련됐으나 300여 명이 몰렸다. 새누리당 주호영 의원, 전 서울시장 이상배·우명규씨(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등이 참석했다. [사진 현대불교]

 

성철(1912∼93) 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련문화재단(이사장 원택 스님)과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원(이사장 엄상호)이 ‘백일법문 강좌’를 마련했다. 그 첫 번째 강좌가 11일 열렸다.

고우(75) 스님이 강사로 나서 매월 둘째·넷째 월요일, 모두 10차례 법문을 들려준다. ‘백일법문’은 성철 스님이 1967년 해인사에서 행한 법문이다. 불교의 정수를 담아냈다는 평가다. 이번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나도 중도(中道)를 스님이 되고 나서 5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젊어서 난 폐결핵을 앓았다. 그 원인을 자꾸 바깥에서 찾았고, 특히 애꿎은 어머니를 원망했다. 하지만 중도를 이해하게 되면서 잘못 산 과거를 후회했다. 가장 존경하고 사랑해야 할 어머니를 원망했던 게 얼마나 후회스럽던지, 1주일 내내 울었다. 그 해 겨울 나는 정말 불교공부를 잘 했다. 그러자 스스로를 학대하고 구박하던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됐다. 지금 나는 나 스스로를 굉장히 사랑한다.”

눈썹까지 새하얀 고우 스님이 조곤조곤 고통스러웠던 옛 얘기를 털어놓자 청중에서 박수가 터졌다. 스님 같은 고승도 한때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대목에 공감한 것일까.

11일 저녁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고우 스님의 ‘백일법문’ 강좌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었다. 자신이 체득한 불교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더 알리겠다는 듯 표정과 눈빛에선 자상함이 넘쳤다. 스님은 특히 비유를 자주 썼다. 미끈미끈 난해한 불교 교리가 손에 만져지는 듯 했다.

스님은 “중도는 부처님이 발견한 우리의 존재 원리”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성철 스님 말씀도 결국 중도로 요약된다고 했다. 사람은 ‘나’라는 행위의 주체로 존재하지 않고, 중도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도는 무슨 뜻일까.

스님은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한 개, 반 개’ 비유를 들었다. 사람은 흔히 손바닥만 보고 손등을 보지 못하는데 손등과 손바닥이 결국 하나의 손을 이룬다는 뜻이다. 여기서 손바닥은 듣고 보는 작용이 몸뚱이에 미치는 세계, 즉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色)’의 세계다. 사람들은 이게 전부인 줄 알지만 손등에는 ‘공(空)’의 세계가 있다는 거다. 해서 둘을 모두 바라봐야 ‘한 개’가 온전하게 보이지 그렇지 못하면 반쪽, 즉 ‘반 개’만 보고 말뿐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손가락 둘’의 비유도 인용했다. 세상의 모든 게 인연에 따라 연결돼 있다는 연기(緣起)의 의미를 설명했다. 손가락 둘을 기울여 삼각형 모양을 만들면 얼핏 삼각형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사람도 무수히 작은 원자의 집합체일 뿐이라는 것, 그러니 실체가 없이 공하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나를 지나치게 내세우지 말고 남을 생각하는 중도에 눈을 떠야 한다는 얘기였다.

생활 속 에피소드도 감칠맛 넘쳤다. 손님을 돈으로만 세던 음식점 주인이 손님을 ‘나에게 돈을 벌어주는 분’으로 여기게 되자 정성을 다하게 되고, 장사도 잘됐다는 얘기였다. 중도는 타인에 대한 배려, 혹은 존중이었다. 그렇게 법문 2시간 반이 금세 지나갔다.

 

 

 

나만 옳다 생각하면 괴롭다 … 나와 너 구분 않는게 중도

 

고우스님에게 듣는다 ‘성철스님 백일 법문’ ②

 

25일 7시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고우(75) 스님의‘백일법문 강좌’두 번째 행사가 열렸다. 성철(1912∼93) 스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다. ‘백일법문’은 성철 스님이 1967년 해인사에서 행한 법문. 불교의 정수를 담아냈다는 평가다. 고우 스님은 ‘백일법문’에 해박한 선승으로 꼽힌다.

“오늘 운전해서 서울 한복판에 들어왔는데, 조금도 힘들지 않고 즐거웠습니다.”

고우 스님은 이날 유쾌한 모습이었다. 스님이 있는 곳은 경북 봉화군 금봉산의 작은 암자인 금봉암. 예전 화전민이 살던 태백산맥 끝자락 깊은 산중이다. 운전을 시작한 지 5년도 안 되는 70대 중반의 노스님이 5시간을 손수 운전해 조계사에 도착했다.

고우 스님의 강좌는 ‘중도(中道)’에 집중됐다. 평소 성철 스님이 강조했던 중도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상태이자, 깨달은 삶을 향한 지름길이다. 고우 스님에게 중도는 스스로 행해서 느끼는 기쁨이다. 그래서 운전을 중도에 비유 할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이 객석에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여기에 뭐 하러 오셨습니까. 여러분 안의 부처를 보면 그만인데요. 그게 중도입니다.”

예전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중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路程記)에 의지하여 실제로 길을 가서 부처가 돼야 합니다. 서울을 가려고 하면서 서울 안내판이나 소개문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 봤자 서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걸음을 걷든지 두 걸음을 걷든지 남대문으로 쑥 들어서야지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누구든지 그 손가락 끝을 따라 허공에 있는 달을 보아야 할 것인데 바보는 달은 쳐다보지 아니하고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고우 스님의 풀이는 이랬다.

“노정기(안내서)가 알려주려는 핵심은 중도입니다. 자꾸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내 욕심을 채우려 하기에 불안하고 괴로워집니다.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중도입니다.”

이어 “안내서를 보고 중도를 이해하는 것은 손가락이 지적하는 달을 보는 것이지만, 아직은 달을 알지 못한다. 중도를 체득했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중도를 체득 못했다면, 아무것도 아닌가. 스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노정기를 이해했다면, 이제 조금씩 노력해 보십시오. 화나고 슬프고 욕심날 때마다 생활에 중도를 적용해 보십시오. 처음이 어렵지 점점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재미를 느끼면 가속도가 붙습니다.”

실생활에서 실천해야 진짜 중도라는 설명이다. 스님의 두 시간 넘는 강연을 마무리했다.

 

“한 번에 ‘꽝’하고 터지면 좋겠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요. 한 번에 터지지 못하더라도, 그때 그 자리에서 노정기를 꺼내면 즐거워집니다. 100% 다 가지 못하더라도, 가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수행법 중에서 참선이 제일 낫다? 오만 빠지지말라

 

고우 스님에게 듣는다 ‘성철 스님 백일법문’ ③

 

 

 

 

9일 저녁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고우(75) 스님의 강좌는 텍스트에 충실했다. 성철(1912∼93) 스님의 1967년 해인사 강연록 『백일법문』을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나갔다. 성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강좌다. 하지만 딱딱한 자구(字句) 해석이 아니었다. 해박한 불교 지식, 생활 속 사례를 곁들였다. 불교와 현대과학의 유사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신의 입자’ 힉스도 거론했다.

고우 스님은 이날 선(禪)의 종지(宗旨·근본 뜻)에 직접 육박해 들어갔다.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염불·참선 같은 수행방법은 실제로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백일법문』 33~55쪽 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

스님은 먼저 읽어 나갔다.

 

“종교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란 어떤 특징과 무엇을 근본으로 삼느냐. (…) 각 종교의 입장과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구경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간적으로 행복을 느낄 뿐 불타는 집(火宅),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는 게 종교의 목적이라는 얘기다. 불교에서 그 해결책은 당연히 중도(中道)다.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 나를 주관으로 놓고 상대방을 객관으로 보는 사고 틀에서 벗어나 주관과 객관 사이의 갈등·대립·투쟁을 없앰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강연의 백미는 수행 중 만나는 구체적인 어려움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 점이었다. 스님은 “참선수행, 교학, 염불, 봉사 등 존재의 본질을 찾는 수행법은 여러 가지”라고 강조했다. 화두를 들고 행하는 참선수행이 가장 빠르고 편리한 방법이지만 각자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으면 된다는 것. 참선이 가장 나은 수행법이라는 오만에 빠져 괜히 목에 힘만 주는 ‘반쪽짜리’ 수행승을 경계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각 수행방법의 본질은 결국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없어지는 일념, 삼매(三昧 )로 요약된다. 가령 염불의 경우 관세음보살을 반복해서 외우다 보면 염불과 내가 하나가 되는 중도의 상태에 눈을 뜨게 된다는 거다. 봉사도 마찬가지다. 내게 뭐가 돌아올까 하는 망상에 빠지지 말고 무념의 상태에서 봉사하라고 권했다.

화두 참선이 어려운 이유는 화두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님은 “그런 현상은 공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공부를 해서 존재의 본질이 중도라는 믿음을 조금씩 키워 나가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보수 갈등만 일삼는 정치인, 중도 모르는 ‘저능아’

 

고우 스님에게 듣는다 ‘성철 스님 백일법문’ ④

 

편 가르는 대신 흐르듯 교류해야

수단에 매달리지 말고 목표 보라

 

성철(1912~93) 스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백련문화재단·불교인재원이 함께 마련한 ‘백일법문 강좌’. 전체 10번의 강연 중 네 번째 시간이 23일 오후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렸다. 강사 고우(75) 스님은 지난 강연에서 “다음에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중도(中道)’의 의미를 남김 없이 설명하겠다”고 예고했었다.

스님이 이날 꺼내든 ‘카드’는 과거 이름난 선사(禪師)들의 어록. 사례를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실감나게 보여주려는 듯했다. 예로 중국 당나라의 임제 선사는 임종 직전, 제자인 삼성 스님에게 자신의 정법안장(正法眼藏·고유의 깨달음)을 잘 이어가라고 당부한 뒤 미심쩍었는지 자신의 깨달음의 내용이 뭔지 말해보라고 했다고 한다. 삼성 스님은 평소 스승이 하던 대로 고함을 치며 화를 냈다. 미욱한 제자들의 깨달음을 재촉하기 위해 임제가 즐겨 썼던 일종의 충격 요법인 ‘할(喝)’이다. 그러자 임제 스님은 “빌어먹을 망아지 새끼가 내 정법안장을 진짜 멸해버렸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칭찬일까 한탄일까. 칭찬이었다면 두 선사가 주고 받은 내용은 어떤 것일까.

고우 스님은 자신이 중도를 깨달은 사연을 소개했다. 평소 스님은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30m가 넘는 높이의 장대 위에서 한 발짝 더 내디디라는 화두의 의미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무심코 펼친 중국의 선서(禪書) 『육조단경』의 한 대목에서 화두를 풀 실마리를 얻는다.

“정(定·정신 수행)과 혜(慧·지혜 연마)가 하나가 되더라도 그것은 도가 아니다. 통유(通流)해야 한다”는 구절이었다. 세 가지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뭘까. 먼저 『육조단경』. 통유는 불교의 깨달음은 한 곳에 고정돼 있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야 한다는 뜻이다. ‘백척간두’ 화두의 의미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수행의 최고 경지에 올랐더라도(백척간두), 그 성과에 얽매이지 말고 뛰어 내리라는 것. 이성적인 논리가 끊어진 곳, 그 너머로 자유자재 도약하라는 것이다. 임제 스님의 에피소드는 불성(佛性)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다는 불가의 자명한 진실을 굳이 입에 담아 표현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경계한 것이다.

고우 스님은 중도의 핵심은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강조했다. 너와 나, 우열의 구분이라는 양 극단을 없애고(雙遮) 중도에 들어가면 양자가 새롭게 보인다는 것(雙照)이다. 나를 주관, 상대를 객관으로 생각하는 대립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지였다. 스님은 그러면서 정치권을 강하게 질타했다. “진보·보수로 나뉘어 갈등·대립만 일삼는 정치인들은 저능아들”이라고 일갈했다. “진보나 보수도 국민을 행복하기 위한 방편인데 그 방편에만 매달려 정작 목표는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정치권부터 중도를 받아들이라는 주문이었다.

 

 

 

 

‘나’를 뽑아버리고 중도를 갖다놓으면 스스로 위대해진다

 

고우 스님에게 듣는다 ‘성철 스님 백일법문’ ⑤

 

성철(1912∼93) 스님의 대표적 저서인 『백일법문』을 시대의 선지식(善知識·덕망 높은 수행자) 고우(75) 스님의 목소리로 듣는 ‘백일법문 강좌’. 그 다섯 번째 시간이 13일 오후 서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렸다. 전체 10회 강좌의 반환점에 도달했으나 그동안의 ‘진도’가 시원찮다고 판단했는지 스님은 이날 부쩍 속도를 냈다. 책 40여 쪽을 10쪽으로 줄인 자료를 수강자들에게 나눠줬다. 강의 중간, “오늘 참석한 분들의 표정을 보니 다른 때보다 내 말을 잘 알아듣는 것 같다”며 공부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사실 강좌는 좀 지루해질 때도 됐다. 매 시간 ‘나’라는 ‘행위의 주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편견이고, 오히려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중도(中道)로서 존재한다는, 중도 철학을 반복해 설명한다. 그런 점을 의식한 듯 스님은 매번 색다른 카드를 준비한다. 이날의 카드는 ‘중도를 이해할 때 나는 위대해진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초전법륜(初轉法輪)’ 이야기부터 꺼냈다. 초전법륜은 석가모니 부처가 고행 끝에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는 최초로 행한 설법. 이 자리에서 부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출가자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한다.”

이변은 말 그대로 고와 낙이라는 양극단, 이 양극단에서 벗어나되 그렇게 세상을 양극단으로 구분해 보는 생각의 틀까지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부처의 첫 가르침이 중도이니, 8만이 넘는 방대한 불교 경전을 ‘중도’라는 키워드 하나로 풀어낸 성철 스님의 공부가 괜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고우 스님은 “이런 중도의 철학을 체득하면 누구나 스스로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를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중도를 갖다 놓으면 내가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도 존재하는구나, 내가 위대한 만큼 다른 사람도 위대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는 것이다.

모순 투성이의 평범한 인간이 이런 중도 철학을 얼마나 굳세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일까. 가령 누군가 부당하게 나를 공격한다면 그 가해자도 중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걸까.

스님의 대답은 “힘들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 마음 속에 가해자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고 했다. 이때 연민은 절대 상대방을 깔보는 게 아니다. 내가 잘났다는 교만도 아니다. 중도의 철학이 철저하게 학습되고 뿌리 내려야 가능한 경지인데, 스님은 “그럴 때 내 마음이 굉장히 위대하다. 정말로 쓸모가 있어,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특히 “남이 나를 괴롭힐 때 자기까지 덩달아 스스로를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법문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로 이어졌다. “누구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 긍정, 위안의 메시지였다.

 

◆고우 스님=한국의 대표적인 선지식(善知識). 봉암사 주지, 각화사 태백선원 선원장, 전국선원수조회 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불교의 핵심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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