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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철학사상과 불교 / 김형효

경호... 2015. 7. 14. 03:40

데리다의 철학사상과 불교 / 김형효

 

김형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2004년 12월

 

 

1. 책(le livre=book)과 텍스트(le texte=text)의 구분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그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거장이다. 그의 철학을 보통 해체주의(de constructionism)라고 부른다.

왜 해체적인가? 기존의 서양철학사의 진리관과 형이상학을 해체시켜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은 독일의 하이데거의 사유와 유사하나 본인은 하이데거도 해체적 비판의 대열에 올려 놓고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서양의 기존 철학을 해체하려 한 공적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존재론적 사유를 청소하지 못하고 거기에 연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유가 데리다보다 서양 전통철학을 해체하는 사유의 길을 먼저 걸어갔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가 자기의 철학의 특성으로 말하는 차연(差延, la diffe'rance=differance)의 발상법도 하이데거가 이미 말해 놓은 차연(差延, der Unter-Schied=differance)의 길을 답습한 느낌을 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데리다가 해체하려 한 그런 서구 전통철학의 존재론과 다르므로 데리다의 하이데거 존재론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데리다의 철학이 하이데거의 사유와 같은 뉘앙스를 매양 풍기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와 하이데거를 갈라놓는 가장 큰 차이점은 데리다의 철학이 철두철미 존재론(l’ontologie)을 부정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존재론을 부정하는 사유로 가득 차 있기에 그의 철학은 하이데거처럼 존재(存在)와 무(無)를 철학적 화두로 삼고 있지 않다. 데리다가 모든 존재론을 존재신학(l’onto-the?logie)이라고 명명하면서 그것을 지우려고 하는데, 이 반(反)존재-신학적 사유도 이미 하이데거가 시작하였던 작업이었다.

 

데리다는 존재의 개념을 영원한 현존(現存)의 진리와 그 형이상학의 아성으로 보아서 그것을 해체하려고 하는 데 반하여, 하이데거는 존재를 데리다처럼 현존의 초시간적 성역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반존재론적 철학은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오독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의미는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서의 현존(la pre? sence=presence)이 아니라, 생멸을 나타내는 사건(das Ereignis=event)이거나 생기적 사상(事象, die Sache=state of affairs)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데리다 철학의 해체작업은 세상을 존재신학의 의미로 가득 채우려는 형이상학의 해체작업을 뜻한다. 존재신학은 이 세상이 신에 의하여 창조된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사상을 말한다. 즉 이 세상이 의미의 창조자로서의 최초의 원인이자 마지막의 목적인 신의 현존적 존재에로 통일되고 귀결된다는 사상이 바로 존재신학의 기본이다. 즉 존재신학은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의 사상으로서, 이 세상은 신이 적은 책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신이 작성한 의미의 기승전결의 이야기로서의 역사라는 것이다.

 

신이 중심이고 중심은 하나이므로 신을 하나님으로 번역한 개신교의 사고방식은 강력한 일원론적인 존재신학의 대명사와 같다. 데리다의 철학은 일원론적인 신학적 세계관의 부정일 뿐만 아니라, 그 일원론적 신학적 세계관에 짓눌린 세상을 해방시키려는 의도를 풍기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신의 현존을 지우고 레비나스(Levinas) 철학의 영향으로 오히려 신의 부재(不在, l’absence=absence)를 자유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신중심주의의 거부는 인간중심주의의 해체와 연결되고, 이것은 또 자아의식의 지우기와 상관적이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자아철학과 의식철학의 종말을 유도한다. 신중심주의는 자아중심주의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고, 그 자아중심주의는 의식의 각성과 그 의미화에 집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아적인 각성은 하나님의 생각과 등식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그런 유아주의를 불러일으킨다. 존재신학적 철학은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일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아를 논리적 보편의식으로 무장한다. 그러나 겉으로 논리적 보편으로 무장한다 해도, 그 보편은 자아의식을 만인의식으로 도호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와 자아중심주의는 다 열광주의(fanaticism)에 탐닉하는 위험성을 지닌다.

 

세상이 신이 저술한 책이라면, 그 책의 내용은 신의 진리가 백과사전식으로 다 담긴 완벽한 전체적 체계임에 틀림없으리라. 존재신학적 철학의 정상에 속하는 헤겔(Hegel)이 《철학의 백과사전(Enzyklop 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이라는 저서를 썼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은 일원적 진리의 중심이면서 최초의 근원이고 전체적 의미의 완벽한 체계이고 만물 속에 현존하는 영원한 선(善)의 모형인 셈이다.

 

그러면 악(惡)은 왜 생겼는가? 악은 가장 골치 아픈 난제(難題, aporia)다. 그래서 존재신학에서 악은 인간의 잘못(아담의 불복종)으로 추후에 우연적으로 이 세상에 도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악은 기독교적 존재신학에 의하면 하나의 스캔들의 치부로 간주된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런 신학적 해석을 비판하고 있다. 창세기 에덴의 낙원에 이미 이 세상에 악을 유혹한 뱀이 아담과 이브와 함께 있었고, 또 선악과가 이미 에덴의 낙원에 공존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신에 의하여 비로소 시작된 성선의 책이 아니라, 이미 일점 근원이 아닌 처음부터 이 세상은 선악이 함께 천을 짜 나간 그런 텍스트라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책과 구별하기 위하여 등장된 용어로서 책의 일관된 줄거리에 대하여 텍스트는 그런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직물(le textile) 짜기의 교직성(交織性, la textrualite?textuality)과 같은 의미의 계열에 속한다. 직물은 가로 세로의 실이 서로 교차하면서 직물을 짜나간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완벽한 체계가 없고 언제나 다른 천이 또 접목되어 상호텍스트(l’inter-texte)의 조립이 가능하고 또 연합텍스트(le con-texte)의 형성도 가능한 열린 구조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신이란 저자에 의하여 씌어진 책이 아니라, 저자가 없는 다양한 만남의 상호 연계성이 짜 나가는 천으로서의 텍스트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래서 세상은 불교적 표현처럼 상호 만남의 연기(緣起)가 짜나가는 열린 텍스트로 해석된다. 세상이 텍스트이므로 데리다는 그의 저서인 《문자학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와 《산종(散種, La Dissemination)》에서 각각 ‘텍스트 바깥은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There is nothing outside text.)’라는 유명한 명제를 발표하였다.

 

텍스트의 세상에서 신과 같은 최초의 시원도 최종의 목적으로서의 궁극적 소기(所記, le signifie?the signified)도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적인 사유는 하나님과 같은 강력한 일원론적 세상의 거부를 함의하고 있다.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 거기에 시원과 목적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이 세상에 하나의 근원적 출발점도 없고, 되돌아가야 할 종국적 귀착점도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어서 자기 것과 타자의 것을 정확히 경계짓기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만물의 자기 동일성(self-identity)의 주장이 무의미하고 또 불가능하다. 시원이 없기에 어딘가 이미 있는 시공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잠정적으로 얹어서 논의해야 한다. 이 세상이 바로 텍스트라는 것의 의미는 이 세상이 어떤 소기적 주제(所記的 主題, le the`me signifie?the signified thema)로 정리되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그물의 얽힘처럼 얽히고 설켜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현상은 자기의 독특한 자가성의 의미를 소유하고 있지 않고 다른 계기들을 만나서 접목되는 관계의 매듭에 의하여 특성이 결정된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늘 다른 현상을 만나서 짜여지는 무대의 연대(連帶)가 중요해지므로 고립적인 현상이 성립하지 않고 모든 현상은 늘 타자를 끊임없이 찾는 그런 욕망(desire)과 같다. 이 욕망은 노자가 《도덕경》 1장에서 말하는 만물의 유욕(有欲)과 유사한 의미이다. 만물은 자기와 다른 타자와의 해후에서 직물을 짜나가므로 텍스트의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 구조는 이중성으로서 데리다가 말한 두 가지 얼굴을 한(bifa-ce=bifacial) 야누스와 같고, 두 갈래로 나누어진(bifide=bifid) 잎맥과 흡사하다 하겠다.

 

 

2. 현상학과 구조주의의 해체로부터 시작

 

데리다의 철학은 20세기의 철학적 이대 조류였던 후설의 현상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먼저 해체하기 시작한다. 현상학의 이념은 의식의 의미부여가 배제된 대상적 객관성을 진리로 간주하는 과학주의와 오로지 의식의 주관적 심리현상을 진리로 여기는 심리주의의 양극단을 넘어서 의식의 진리를 추구하되 심리주의에 빠지지 않고, 객관성을 진리의 기준으로 알되 몰의식적 대상주의에 젖지 않는 그런 중도의 위상을 탐구하려 하였다.

 

그래서 의식의 현상이 진리의 명증한 조건이 되는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 현상학의 이념이다. 현상학은 객관적 대상을 의식의 노에마(Noema)로 여기고, 의식의 주관적 활동성을 노에시스(Noesis)로 명명하여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현존적 일치에서 진리의 명증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런 일치에 의하여서만 의식의 생생한 지향과 의식의 대상이 살아 있는 교감을 이루어, 의식이 스스로 진리임을 의식하는 공명현상 속에서 노에시스의 의식과 노에마의 존재가 의식현상 안에서 완전한 현존적 진리의 근원적 순수성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후설의 현상학이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형상학적 진리는 의식의 주관성과 존재의 객관성이 관념적 의미의 동일성을 이루는 일치의 현재적 순간에 다름 아니다.

 

의미의 동일성은 객관적 존재가 의식의 지향성 앞으로 다가와서 의식의 의미작용인 노에시스의 말하고자 함(le vouloir-dire)이 노에마적 존재의 불변적 의미(le vouloir-dire)를 채울 수 있을 때에 발생한다. 불어에서 ‘le vouloir-dire’은 ‘말하고자 함’의 뜻과 ‘의미하다’의 뜻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 ‘le vouloir-dire’은 노에시스적인 ‘말하고자 함’이 노에마적인 ‘의미함’과 일치하는 그런 채움의 본질이 현존의 순간이고, 그 현존의 순간은 또한 의식에서 영원의 시간으로 나타나는 현재라고 현상학은 주장한다. 진리는 불변적 절대성을 지니고 있고, 그 불변적 절대성은 영원의 다른 이름이고, 그 영원은 의식상에서 오직 현재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것으로 다 비존재(非存在)인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하므로 따라서 그 현재는 영원한 절대적 존재의 의식상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은 본질적으로 의식학이고 자아학(egology)이다. 자아를 보편적 선험의 논리로 읽더라도, 그것이 자아학인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후설은 현상학의 진리가 의식 내부의 자기 명증성의 확실성으로 간주하면서, 그 명증성이 의식에 의하여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표현이 안 된 진리는 자의식으로 명증화가 안 된 잠자는 상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표현(Ausdruck=expression!!)은 의식이 존재현상과 일치시킨 존재론적 명증성을 스스로 의식화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 표현을 데리다는 ‘말하고자 함=의미함’의 뜻인 불어의 ‘le vouloir-dire’로 나타내고 있다. ‘말하고자 함’은 의미(le vouloir-dire)를 의식이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자 함(le vouloir-se-dire)’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의 자기표현은 삼위일체의 현상을 띠고 있다.

 

이 삼위일체가 살아 있는 생명의 의식이라고 후설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저 생명의 살아 있는 의식의 현상으로서의 현존은 눈 깜짝할 사이의 현재적 직관과 같다는 것이다. 즉 현재적 직관에서 의식의 노에시스와 존재의 노에마가 의미상에서 일치의 포개짐(Deckung=covering)이 성립한다고 후설은 주장하였다.

 

여기서 후설의 현상학은 존재론적 현존(presence)의 구조적 진리와 시간적 현재(present)의 발생적 진리가 서로 일치하는 그런 합일을 모색한다. 왜냐하면 현존의 구조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고 그는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현재의 시간은 직관된 존재가 의식에 이성적으로 의미화되는 것과 만나는 시점이므로, 현상학적 진리는 ‘지금’이라는 현재가 현존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시점이 아닐 수 없다고 여긴다.

 

현상학은 무수한 현재 중심의 무한한 연속을 예상하는 철학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역사적 지평을 떠날 수 없는 의식학이고 자아학이다. 현상학의 진리는 무수한 현행적 지금의 시각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현존적 현행태의 형이상학이라고 데리다는 진단한다. 그래서 이 현재적 지금의 현존적 현행의 시각을 의식의 근원적 본(Urform des Bewußtseins=archiform of consciousness)이라고 후설은 주장하였다. 그래서 현재적 시간의 근원성이 과거와 미래를 구성한다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중심의 언저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후설의 현재적 현존의 진리개념에 대하여 해체를 시작한다. 과거나 미래가 현재 중심의 파생체가 아니라, 현재는 과거의 다시 당김이고 미래의 미리 당김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소론이다. 즉 현재의 지금은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서 성립하는 차이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의 흔적이 현재적인 지금보다 더 나이가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차이가 현재의 현존보다 더 앞서고, 어긋남이 자기 동일성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해체적 견해다.

 

그러나 후설은 목소리의 말이 곧 의미의 표현이고, 이것은 또 자기 목소리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자기가 듣는 그런 자가일치의 현존적 질서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목소리의 말은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le-s’entendre-parler=hearing-oneself-speak)’ 현존적 진리의 표준으로 여겨서, 후설은 목소리의 말이 순수의식의 내면적 자가성의 현존적 진리로 인식한다.

 

목소리의 말은 보편적 의미의 이성과 의식이 내면성에서 공명을 일으키는 현존의 순간이다.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le-s’entendre-parler)’ 것은 내가 나를 보는 것과 내가 나를 만지는 것과 다르다고 후설은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보거나 만지는 것은 외면적인 것을 느끼는 감각과 관계하나,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내면적인 의식 안의 공명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소리(Stim-me=voice)는 ‘함께 앎으로서의 의식(con-science)’이라고 후설은 보았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목소리의 말하기를 듣는 것이 자기 현존의 일치공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소리로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 현상은 조금 전에 말하여진 것을 내가 다시 잡아당기는, 근접 과거에 대한 흔적의 기억을 통하여 가능하지 현행적인 단순성으로서 구성된 것이 아니다

 

데리다는 말하기와 듣기의 내면적 일치공명으로서의 현재적 현존이 비현재적인 흔적을 가능케 한 것이 아니라, 비현재적인 흔적(la trace)이 현존을 가능케 한다고 역설한다. 흔적이란 비현재적인 것이 이미 현재적인 것에 삼투되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고 듣는 것도 동일성의 현존이 현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듣는 것이 즉각 뒤따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말의 흔적에 대하여 동의하든지, 아니면 후회하거나 수정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가장 근접적 행위로서의 말하고 듣는 것도 아주 미세한 차이를 띠고 있는데, 나라는 자아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현존의 존재론적 자기 동일성을 하나의 허구적 환상이라고 비판한 데리다는 일체의 동일성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 의식의 내면성과 자기 동일성을 표현하는 것은 현존이 아니라 단지 의식의 내면에서도 같음과 다름이 나누어지고, 의식도 바깥의 비의식과의 차이에 의하여 표시되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순수 내면성의 자기 동일적인 표현(l’expression!!)이 아니고, 다른 것과 어떤 차이를 나타내는 기호적인 표지(l’indice)에 불과하다. 데리다가 볼 때 후설의 현상학은 순수 자기 동일성의 논리, 일점 근원의 형이상학적 현존의 신앙, 현재 중심의 절대성 신화, 내면성의 정신주의의 승리를 겨냥한 그런 존재론적 자가성의 철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상학이 의식학이고 자아학의 철학이라면, 구조주의는 반(反)의식학, 반(反)자아학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현상학과 실존주의가 지나치게 의식현상을 금과옥조로 삼고 철학적 사유를 펼쳐 나가는 것에 반하여, 의식의 바깥에 있는 사회적·문화적 무의식과 자연의 탈의식을 철학의 영역으로 개척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언어학적 구조주의는 소쉬르(de Saussure)의 언어학에서 출발을 하였다. 소쉬르는 언어학에서 역시 문자학적 요인을 본질적 언어활동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 그것을 방계적인 것으로 치지도외하였다. 그는 소리를 언어학의 기본으로 여겨 소리의 음운론적 가치를 구조화하는 작업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그 소리의 음운도 다른 것과의 차이를 흔적으로 여기면서 기호적 변별성에 의존하므로 소리의 자기 동일적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의미의 최종적 자기 동일성의 확립도 하나의 허구적 꿈에 지나지 않음을 데리다는 지적하였다.

 

비록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이 음운과 의미의 자기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인지하고 이항적 대립에 의한 구조적 대대법을 생각하였다 하여도, 데리다가 볼 때에 구주주의는 그 이항적 대립을 너무 정태적으로 보고 그 이항 사이에 오가는 힘의 상호적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 정태적 사유체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구조주의를 현상학보다 더 우호적으로 생각하였으나, 구조주의가 너무 정태적 이가논리(二價論理, le binarisme stati-que=static binarism)에 젖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의 인류학의 철학도 데리다가 해체하는 대상이다. 왜냐하면 레비-스트로스도 문자를 문명의 타락현상으로 진단하고 문자가 없는 순수 말의 사회를 자연적 유토피아에 가까운 현존적 정신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문자는 정신이 아닌 바깥의 물질적인 표지를 이용해야 하고, 문자는 유식한 자가 후천적으로 배우는 소유적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지나, 소리의 말은 그런 차별이 없는 인간 마음의 동감적 질서를 창출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루소(Rousseau)의 현존적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은 자연적 인간의 공동체적인 현존질서와 그 교감의 표현인데, 문자는 인공적인 표지로서 말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먼 거리의 거대 사회에서 지배하기 위하여 필요한 비현존적 문명의 도구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는 현존적 표현의 친근감이 죽은 부재적 표지의 상징과 같다.

 

그러나 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가 루소의 영향으로 그런 현존적 유토피아니즘의 환상에 역시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현존과 일점 근원의 기원은 다 허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자기 것으로 충족되고 자기 일치의 동질적 현존으로 모두가 평화스럽게 산 문화는 있어 본 적이 없고, 순수 자연의 소리로서 모두가 공동의 삶을 영위한 그런 공동체가 성립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데리다의 소론이다. 순수 자연의 생활은 반(反)자연적 문명과의 차이와 그 흔적으로 살게 되어 있고, 인간 사이의 말도 이미 폭력과 상처내기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고, 타인의 등장이 나의 성숙을 위한 자각이고 동시에 나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적의이기도 하여서, 모든 것이 시작이 없는 시작부터 이미 현존적 질서가 하나의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그는 언명한다.

 

동일성의 유지가 평화이고 차이의 관계가 폭력이라면, 그 경우에 이 세상에는 이미 평화는 없고 오로지 폭력의 상관관계만이 전부인 셈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그런 유토피아니즘의 환상적 신화 대신에 인식론적으로 지나친 이항대립의 구조적 경직성에 의존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시각이다. 말하자면 구조주의는 모든 것이 홀로 성립하지 않고 이분법적인 양식으로 나누어져서 성립하는 자연과 사회의 기본법칙을 이항적 대립(l’opposition binaire=binary opposition)의 이름으로 구조화하는 것에 급급한 나머지, 그 구조가 자체에서 스스로 분비하고 있는, 상호간 오가는 힘의 반송을 망각하였다는 것이 데리다의 진단이다.

 

말하자면 레비-스트로스는 전체 구조의 형식적 틀을 인식하기 위하여 ‘산업사회의 기술(la technique)/신석기시대의 하찮은 일하기(le brico-lage)’, ‘역사적 진보의 논리/야생적 구조의 논리’, ‘실존적 말(la parole)의 통시성(ls diachronie)/구조족 언어(la langue)의 공시성(la synchro-nie)’, ‘아버지-아들의 구조/외삼촌-조카의 구조’ 등으로 이분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저런 이분법의 대대적 구조를 통하여 전체적 구조의 인식이 보다 형식적으로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에 의하면 구조주의가 형식적 이항대립의 구조인식에 전념해서, 그 이항대립 사이에 오가는 힘의 반송과 왕래를 이해하지 못한 그런 한계를 정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조주의는 기계론적 차이를 말하면서도 그 차이가 단순한 이항적 대립의 관계가 아니고 차연(差延, la diffe?ance)의 이중성을 한 단위로 엮고 있다는 것이 데리다의 견해다. 그래서 구조주의와 해체주의의 큰 차이점은, 전자는 이항적 차이가 구조인식의 형식적 틀이라고 여기는 것이고, 후자는 차연의 상관적 이중성이 세상의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있다.

 

 

3. 로고스와 다른 파르마콘과 코라로서 세상보기

 

로고스(logos)를 말이라고 흔히 옮긴다. 데리다는 서양의 철학과 형이상학이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평가한다. 데리다가 비판하여 마지않는 현존의 형이상학, 자기 동일성의 진리, 현재 중심의 시간관, 진리의 소리와 말을 의식이 내면적으로 듣는 자가애정의 정신주의는 서양철학이 애지중지하여 온 로고스 중심주의의 다양한 면모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로고스 중심주의는 말소리 중심주의(le phonocentrisme)로 번안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말소리는 정신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순수정신의 계시와 관계하지만, 말소리와 다른 문자는 바깥의 물질적인 표지에 의거해서 말소리의 생생한 생명의 현존적 현재의 순간을 살리지 못하는 죽은 기호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말소리의 듣기는 신이 나의 의식을 통하여 생생하게 전하는 영혼의 소리와 유사하다고 보아서 전통적 철학이 중요시해 왔다.

 

이것이 ‘양심의 소리(la voix de la con-science morale=the voice of conscience)’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전통적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말=소리=의식=양심=영혼’의 등식이 성립하여 왔었다고 천명한다. 이 로고스 중심주의는 다른 말로 표현하여 진리가 정신적 내면성의 일치와 공명과 그리고 현존의 차원과 동일하다는 신앙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 동일성의 최종적 소기(所記)가 신(神)이다.

 

이 신은 존재신학의 형이상학을 빚게 하는 원천이고, 존재신학적으로 신은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절대적 존재에 해당한다. 이런 존재신학의 영역은 인간의 의식 이외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은 신의 존재를 모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의식은 자아의식의 다른 이름이므로 신의 존재신학은 절대적인 자아의식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자의식 중심주의와 상통하고, 자의식의 진리가 주체성을 성역으로 여기게 한다. 그리고 이 주체적 자의식은 곧 자가애정(l’auto-affection=self-affection)의 심리를 옹호한다.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자인 마아크 테일러는 자의식의 존재신학이 결국 나르시시즘의 병을 필연적으로 안게 된다고 진단한다. 나르시시즘의 병은 철학적으로 자아의 신격화를 은연중에 도모한다. 이런 로고스 중심주의의 자의식이 결국 서양 중심주의라는 백색신화(la mythologie blanche=white mythology)를 낳아서 종족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게 되었다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말하는 자의식 중심주의’와 이웃하여서 자가애정의 심리를 보편적 논리로 장식하고, 백색신화에 담긴 자가애정의 심리와 그 논리를 형이상학적 존재의 고유성(proprie?e?property)으로 삼았다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이 고유성은 역사의 현실에서 소유의 재산권(proprie?e?propriety)을 신성시하는 발상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재산권을 신성시하는 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 사회주의도 재산소유의 개인적 의미를 말살시키면서 관료제도적 소유주의를 지향하는 점에서 비개인적인 것을 결국 역설적으로 관료지배층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은폐된 소유주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진리의 최종적인 소기가 있다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 그 최종적 소기는 곧 이 세상에 으뜸가는 순수한 일점의 근원적인 진리가 정신으로서 영원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현존하고 있다는 그런 사상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소크라테스가 서양 철학사에서 최초로 강력하게 부상시켰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쓴 《파이드로스(Phe?re)》의 대화편에서 그런 진리의 원본은 늘 영혼의 말(logos)로서 내면적으로 표현되지, 결코 외면적인 흔적을 빌려서 표시하는 문자(gram-me-)의 기록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문자로 기록하는 사람들은 영혼의 교감에 의한 진리의 접근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혼이 없는 지식들을 알려서 지식을 하나의 생존 방편으로 삼으려는 소피스트들의 삶의 태도와 유사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비판하였다.

 

그래서 문자의 기록은 영혼에 진리의 현존이 없는 죽은 지식의 상품화와 유사하다고 간주하여, 그것을 진리 자체인 로고스와 다른 파르마콘(pharmakon)과 유사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비유하였다. 파르마콘은 오직 유일한 진리인 로고스와 달리 이중적인 괴상한 괴물과 유사한 자기동일성이 없는 그런 반개념(le contre-concept=counter-concept)으로서 약(藥)이자 동시에 독(毒)인 그런 자기 정체성의 상실과 같다.

 

파르마콘은 문자가 로고스의 말을 기록하는 점에서 약이지만, 그 기록은 이미 생명이 죽은 시체와 같은 기록이므로 인간에게 생명의 말을 망각케 함으로써 독이기도 하다. 그래서 파르마콘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의학의 탈을 쓰고 있으나 실제로 그렇지 못하므로 사이비 의학인 파르마케이아(pharmakeia)로서의 무당 굿거리와 유사하다고 소크라테스는 여겼다. 또 소피스트처럼 문자를 말의 대용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파르마코스(pharmakos)나, 또는 파르마케우스(pharmakeus)로서의 주술사나 마법사와 같다고 그에 의하여 생각되었다.

 

그래서 파르마콘은 말을 기능을 대신하여 망각에 대비하는 역할을 하는 점에서 선(善)이기도 하나, 그것은 진리와 영혼의 일치공명을 방해하고 단지 죽은 정보만을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악(惡)이기도 한 문자의 이중성과 닮았다. 문자에 사람들이 의존하기에 사람들이 기억을 공고히 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억력의 감퇴를 자초하므로 문자의 역기능이 더 강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정신의 고유한 기억력(mne-me-)과 다른 문자에 의한 간접적인 회상(hypomnesis)을 구분하였다. 기억력은 진리가 정신에 현재적으로 현존하는 것을 상징하지만, 회상은 문자를 통하여 과거의 흔적을 현재에 잡아당기는 것이므로 현존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회상은 과거를 현재로 이끌어 오는 점에서 죽은 것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자와 문자의 기록에 의한 회상은 다 말의 현존성과 생동감의 생명력에서 보면 환영받지 못할 이물질이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기피물질과 유사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파르마콘은 로고스의 진리를 대신하려는 외부의 가택침입자에 비유되었다.

 

그런 점에서 파르마콘과 같은 문자와 표지(e?riture=writing)1)는 현존적 존재론적 진리의 차원에서 세 가지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파르마콘과 표지적 문자는 애매모호한 이중성의 얼굴을 갖고 있어서 진정한 학문의 정신인 ‘참·거짓’ ‘안·밖’ ‘선·악’ ‘본질·가상’ ‘약·독’ 등의 대대법에서 앞의 계열을 택일하는 명증성의 논리에 어긋난다.

둘째로 파르마콘과 표지적 문자는 영혼의 자발적인 지식의 축적으로서 기억을 도와주지 못하고 생기가 빠진 죽은 지식만을 연장시켜 주는 회상만을 강화시켜 주어 오히려 인간의 기억력을 감퇴시킨다.

셋째로 파르마콘과 표지적 문자는 인간 내면의 정신적 생명력과 관계없이 바깥에서 들어 온 불청객이고 불법가택 침입자다.

이상 세 가지의 약점 때문에 파르마콘과 문자는 카드의 조커처럼 자기 정체성이 없이 명증한 정의가 불가능하고 이상야릇한 괴물과 같은 환영(幻影)으로서 이성의 판단을 우습게 여기는 반(反)진리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런 파르마콘이 아테네 법정에서 파르마콘과 동종의 의미인 파르마코스(pharmakos)라고 단죄된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비판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파르마케이아는 사이비 학문이라고 하여 그것을 참 학문과 준별하였고, 또 그런 학문을 하는 소피스트들을 파르마코스나 파라마케우스로 지탄하였는데, 소크라테스가 오히려 스스로 이테네의 정치당국에 의하여 아테네의 시민들과 청년들을 타락시키는 파르마케이아를 전파시키는 무당이나 주술사로서의 파르마코스나 파르마케우스로 재판을 받아 독을 마시는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데리다는 크게 지적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크라테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지적 문자와 파르마콘과 같은 그런 이중적 애매모호성을 지니고 있는 환영과 유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닌지?

 

더구나 로고스를 진리의 대명사로 여겼던 플라톤마저도 표지적 문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력은 유한한데, 유한한 기억력으로서 무한히 반복되어야 하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공식적인 사랑방의 천명과는 달리 비공식적인 안방의 기술에 의하여 진리가 정신의 고유성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영원한 자기 동일성의 현존적 존재양식을 품고 있는 이데아보다는 오히려 어떤 관념적 동일성도 보지하고 있지도 않고, 고유성을 띠지도 못하는 파르마콘이 진리의 속성을 더 진솔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암암리에 생각하게 되었다고 데리다는 술회하였다.

 

파르마콘은 약이자 동시에 독이므로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처럼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와 같은 자기 현존의 빈틈없는 동일성의 자기 명증성과 다르다. 파르마콘은 자기 정체성의 결여로 정의가 불가능한 비이성적 반(反)논리와 같다. 그래서 파르마콘은 진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진지하지 못하기에 믿을 수 없는 허상(虛像)이요, 가상(假像)의 환영(幻影)과 같다. 그 파르마콘이 약이면서 독이고, 선이면서 악인 그런 이중성의 구조를 띠고 있기에 그것은 양면긍정(et-et-=both-and-)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양면긍정의 이중성이 각각 자기 고유성을 지니는 실체가 아니므로 파르마콘은 ‘약-독’의 ‘사이(l’entre=the between)’와 다른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애국자요, 아테네의 정신을 다시 부활시키려한 로고스의 화신이기도 하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그를 사이비 학문의 전파자요, 아테네 청년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자로 재판받기도 하였다. 전자를 보면 그는 선의 화신이지만, 후자로 보면 그는 악의 저주로 간주된다. 물론 이런 견해는 아테네 지배층의 편견이라고 일축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데리다의 철학에서 보면 이 세상에 진선진미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도 역시 파르마콘처럼 이중적인 야누스의 환영을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파르마콘이 약이자 동시에 독의 이중긍정인데, 그것은 동시에 약과 독으로서의 자기 고유성을 지니지 않는 가운데의 ‘사이’와 같고 그 ‘사이’는 이중부정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이중긍정은 약과 독이 서로 상호의존적인 발생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스스로 자생적인 실체가 아니므로 하나의 연생이라고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약과 독은 서로 다르기에 또한 상호의존하는 사이의 왕래와 같다. 파르마콘으로서의 약과 독은 자가성을 각각 지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타자가 있기에 또한 자기가 성립하는 그런 의타기적인 성질이다. 이 가운데의 사이는 약과 독도 아닌 제3의 장르로서의 빈 터전인 셈이다. 이 빈 터전을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인 《티마이오스(Time?)》에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코라(chora)로 명명하였다.

 

파르마콘이 이중긍정의 초점 불일치로 여겨진다면, 코라는 이중부정의 뜻으로 이해되고 그 이중부정은 중간의 사이에 있는 허공이나 동굴과 같은 빈 터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말의 직접적 표현에 대한 문자의 간접적 표지요, 로고스의 자기 의식적 진리에 대하여 정체성이 없는 야누스 같은 파르마콘의 이중성이요, 이데아의 태양과 같은 선의 최종적 의미와 같은 아버지의 법에 대하여 중심이 없이 동굴(l’antre)2)처럼 비어 있는, 어머니의 무중심과 같은 코라의 이중부정은 데리다의 철학이 왜 서양 전통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생아인가를 이해케 한다. 결국 데리다의 철학은 파르마콘(pharmakon)의 이중긍정과 코라(chora)의 이중부정의 세상보기를 말한다.

 

데리다가 언명한 파르마콘의 비논리적 논리와 같은 이중긍정은 불가에서 말하는 상관적 연기법(緣起法)의 사유와 유사하고, 코라의 비논리적 논리와 같은 이중부정은 불가에서 보는 반야공(般若空)의 사유와 가깝다. 연기적인 가유(假有)의 현상은 본성상으로 바로 반야공의 무성(無性)과 같으므로, 파르마콘의 이중긍정의 현상이 바로 본성인 코라의 이중부정의 가시화와 같다고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또 코라처럼 이중부정이 보여 주는 ‘사이’의 비어 있음은 이중긍정의 현상이 존재론적 자기 동일성의 질서가 아니고, 다만 상대방이 설정되어 있기에 생기는 가정적 생멸의 환영에 불과다는 것을 정시한다.이 점은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인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대위법과 대단히 유사하다.

 

그러나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차이점이 미묘하게 존재하는 것 같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는 유무(有無)의 차이와 동거를 동시에 말하는 존재론인데, 데리다는 아예 존재론의 용어를 파괴시키면서 모든 존재를 문자학의 파르콘과 코라의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차원으로 세상보기를 주장한다. 말하자면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철학적 차이는 존재론(ontology)과 문자학(grammatology)의 차이로 읽으면 될 것 같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데리다가 비판한 전통적 로고스 중심주의적 그런 형이상학적 존재론이 아니다. 그런 존재론은 하이데거가 이미 비판한 존재자적인 존재론으로서의 형이상학에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ontologisch=ontological)인 의미와 존재자적(ontisch=ontic)인 의미의 차이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데리다가 비판한 존재론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론과 다르다. 여기서 데리다의 하이데거 읽기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하이데거의 존재(Sein=Being)는 무(無, Nichts=nothingness)의 현상으로서 사실상 데리다 철학의 용어로 옮기면, 파르마콘적인 그런 이중성을 이미 함의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존재를 생기의 사건(Ereignis)으로 보기를 종용한 것은 존재가 이미 단가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존재자가 아니라, 생멸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을 알린다. 그리고 데리다가 말한 코라의 의미도 하이데거가 말한 무(無)의 의미와 유사하나 다른 점이 있다.

 

데리다가 말한 코라는 노자가 《도덕경》 1장에서 지적한 유욕(有欲)으로서의 생/멸(生/滅)과 멸/생(滅/生)의 연기법을, ‘동/이(同/異)’를 차이 속에서 동거하게 해주는 사이의 중간 통로와 같은 공백의 뜻인 ‘요(?)’에 오히려 더 유사하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무(無)는 무욕(無欲)의 무(無)가 함의하고 있는 무한대의 ‘묘(妙)’를 알려 주는 의미에 더 어울린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무는 불교적으로 공성(空性)의 뜻으로 풀이되고, 데리다의 코라는 공상(空相)의 의미로 읽혀지는 것 같다. 따라서 데리다의 철학은 가유(假有)의 연기법의 현상적 측면에서 해석됨직하고, 하이데거의 철학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실상을 더 말하는 것으로 비유도 좋을 것 같다.

 

파르마콘은 하나의 현상이 그 자체 독자적으로 생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과 다른 것들과의 무수한 교감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 현상은 오로지 정신적인 실체도 아니고, 더구나 물질적인 실체도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이미 상호 얽힘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각각의 현상은 다른 모든 것과 얽혀 있는 관계를 띠고 있기에 얽혀 있는 쌍방의 양가성이 오히려 어느 한 쪽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느 일방도 양방의 상호 얽힘을 떠나서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파르마콘의 논리는 또한 코라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코라의 허공과 사이의 빈 공간은 양방의 상호 얽힘의 거래를 가능케 해 주는 터전이기도 하고, 그 양방이 자가성을 지닌 자기 동일적 실체가 아님을 암시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중긍정의 이면이 이중부정이다. 파르마콘의 이면이 코라이다. 따라서 파르마콘은 양자택일의 로고스적인 논리의 파괴며 해체를 부른다.

 

파르마콘의 논리를 양가성(ambivalence)의 논리, 또는 동거(cohabi-tation)의 논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논리는 마치 젓가락 운동이 그리는 왕복의 표지와 유사하고 새 날개의 춤으로 무보(舞譜)가 새겨지므로로, 이것은 로고스의 궁국적 진리를 찾는 일원(一元)의 형이상학을 비웃는 것과 닮았다. 그러므로 파르마콘의 논리는 잡종(雜種)의 논리로서 이 세상에 순종(純種)의 현상이 성립할 수 없음을 반영한다.

 데리다가 보는 이 세상의 사실은 이 세상이 잡종의 만(卍)자와 다르지 않고, 그 만(卍)자는 상호의타적인 이중성의 현상에 다름 아니므로 그 이중긍정은 자가성이 없는 환영(simulacrum)의 사이와 같다.

그래서 그 환영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이중부정의 다른 이름이다. 마치 불가에서 현상론적으로 보면 연기법인 것이, 실상론적으로 보면 반야공이라고 일컫는 것과 유사하다.

 

이처럼 파르마콘과 코라의 법은 이 세상의 사실이 서로 차이의 다름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서로 동거의 접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파르마콘과 코라가 이 세상의 사실이라면, 이 세상에는 택일의 엄숙한 결단과 태도로 진지하게 집착해야 할 어떤 것도 없는 셈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유심론이나 유물론의 형이상학으로 결정화하거나 정의화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텍스트나 텍스트 연합이므로 모든 것이 서로서로 전염되어 있고, 이질적인 것과 접목되어 있을 뿐이다

 

 

4. 표지―문자학적 사유와 그 철학

 

파르마콘과 코라의 사유는 이 세상을 결국 책으로 보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아니라 텍스트로 보는 사유를 뜻한다.

 

텍스트로서의 세상은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을 상대주의적 시각으로 보도록 종용하는 것이 아니고, 상관적인 상호연루(co-implication)의 얽힘으로 읽어야 함을 말한다. 이런 상호연루의 법칙으로 읽는 세상을 데리다는 또한 표지-문자학적 사유(la pense? grammatologique=grammatological thinking)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표지-문자학이나 표지-문자학적 사유를 단순히 글자(la lettre)를 주제적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 학문은 역시 문자 중심주의를 초래하는 것으로 잘못 미끄러진다. 표지-문자학적 사유는 바깥과 안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 사유다. 그리고 의미와 무의미의 대립을 무시해 버리는 그런 사유다. 표지-문자학은 어떤 의미의 구성과 창조를 위하여 무의미를 배제하고 의식의 엄숙한 결단으로 몰입하는 그런 형이상학이 아니다. 표지-문자학은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놀이(le jeu=play)의 심정으로 이 세상을 관조하는 그런 자세와 상통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유는 만상이 어떤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고, 서로 거래관계처럼 오고가는 사이이고, 주고받는 포트랏치(potlatch)처럼 증여(le don=gift)와 반(返)증여(le contre-don=counter-gift)의 놀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지-문자학은 의식학과 자아학을 우습게 여긴다. 표지-문자학은 진리가 존재론적 현존의 자기 동일성이라고 여기는 곳에서는 꽃피지 못한다. 그런 진리는 곧 목소리가 영혼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발상과 유사하다.

 

문자-표지(l’e?riture=writing)는 우리가 앞에서 거론하였듯이 말을 기록하는 좁은 의미의 글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문자-표지는 일부의 사람들이 말하는 글쓰기의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도 앞의 각주에서 밝혔다. 보통 데리다가 말한 문자-표지의 용어를 잘못 터득하여 ‘글쓰기’의 의미로 읽고 있는 것은 큰 착각이다. 문자-표지는 현존이 진리의 본질이 아니라, 흔적(la trace)이 진리의 다른 표현임을 이해하는 곳에서 가능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은 흔적의 관계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는 것이 표지-문자학이다. 이런 문자-표지의 흔적과 흔적의 상호연루의 성질을 데리다는 또한 차연이라는 반개념(le contre-concept=counter-concept)의 용어로 표시한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차연의 반개념을 우리는 뒤에서 곧 설명할 것이다.

 

이 세상의 필연적 사실이 선험적으로 표지-문자학적 관계의 그물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데리다는 또한 원흔적(l’archi-trace)이나 또는 원문자(l’archi-e?riture=archi-writing)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글자도 문자-표지의 한 장르이지만, 그것이 문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을 통하여 알려진 소크라테스는 말이란 영혼의 순수한 표현이요, 문자는 그 말을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죽은 대용품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영혼의 말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영혼에 진리의 말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문자가 말을 가능케 하는 근거라고 데리다는 언명하였다. 말을 통하여 일시에 모든 내용을 동시에 우리가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말은 영혼에 새겨진 것을 비동시적으로 언급해야 하는 차이의 접목에 다름 아니므로 말의 근거는 차이의 접목과 같은 비동시적인 것의 순차적인 표출과 같다. 비동시적인 차이의 표현은 곧 말이 문자의 생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는 표지-문자학이 인간의 어떤 로고스 학문보다 더 나이가 들었고 고어(la pale?nymie=paleonymy)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문자-표지의 세계에서 시작과 새 것은 없고, ‘이미(le de?a`=the al-ready)’와 얼룩진 것만이 있다. 문자로 보는 세상에서 폭력의 흔적이 없는 순진무구함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모든 것은 이미 다른 것에 의하여 감염되어 있고, 또 폭력의 상처를 입고 있다. 표지-문자학의 개념과 흔적의 의미는 같이 간다.

 

표지-문자학은 모든 것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고, 자기현존적 존재의 실체를 띠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문자학의 세계에서 보면 도대체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하여 절대적 집착을 견지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의 소치에 해당한다.

 

이런 문자학의 사유를 데리다는 차연의 의미로 풀이하였다. 차연은 존재의 현존적 자기 동일성의 고집 대신에 모든 것이 서로서로 타자의 흔적으로서 상관관계의 연기법적인 연회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곧 차연의 의미를 숙고하겠지만, 좌우간 차연은 만상이 다 타자와의 만남에서 그 타자와의 인연으로 자신의 위상이 설정되고 설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연은 만상이 각각 타자의 흔적에서 자신의 위상이 결정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그런 차연의 연회가 만상의 개개적 사항보다 더 고어에 해당하고 시간적으로도 앞서는 선험적 바탕이라고 여기므로, 데리다는 이 차연적인 문자의 흔적을 원흔적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문자학적 원흔적이 현상학적 근원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고 본다. 이 말은 차연의 문자적 사유가 존재론적 현존적 사유보다 더 오래된 사유이고, 더 이 세상의 사실에 가깝다고 여기는 발상이다.

 

자기 동일성(self-identity)의 부정이 문자-표지의 의미와 상통한다면, 같음(le me?e=the same)은 무엇이겠는가? 같음에는 자기와의 동일성을 지시하는 논리적 동일률이 적용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같음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identique=identical)는 그런 뜻일 수 없다. 같음은 다름(l’autre=the other)이 있기에 발생하는 연회에 불과하고, 역으로 다름도 같음이 대대법으로 마주하고 있기에 성립하는 연생에 불과하다. 따라서 같음은 다름이라는 짝에 대한 대칭적 명칭에 불과하고, 다름도 같음이라는 상대에 대한 기호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같음을 다름의 다름(Le me?e est l’autre de l’autre.=The same is the other of the other.)’이라고 규명하고, 또 ‘다름도 자기와 다르게 같음(L’autre est le me?e autrement que soi.=The other is the same otherwise than self.)’이라고 명제화하였다.

만상이 이처럼 연회의 계기에서 성립하는 연생에 불과하다면, 만상은 같음과 다름이 서로 서로 차이 속에서 동거해 있는 그런 이중성의 위상에서 읽혀져야 한다. 차이와 동거가 만상을 해석하는 가장 간단한 언명이고 이 언명이 곧 로고스와 같은 말이 아니라, 파르마콘과 같은 문자-표지라는 것이다. 이중성의 파르마콘이 곧 문자-표지의 별칭이라면, 문자-표지의 형성은 반드시 이중성을 한 단위로 하여 이룩된다.

 

예컨대 종이 위에 물결무늬를 그린다고 해도, 그 무늬는 흰 바탕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기에 흰 바탕이 물결무늬의 타자인 셈이다. 흰 바탕을 배제한 물결무늬는 사상누각과 같다. 그런 점에서 물결무늬와 흰 바탕은 서로 상호연루되어 있고 공동 출두하고 있는 형국이다. 물결무늬와 흰 바탕 사이에는 서로 상보적인 가역작용이 성립한다. 흰 바탕이 없이는 물결무늬가 그려질 수 없고 물결무늬가 새겨짐으로써 흰 바탕이 이미 둘로 쪼개져서 두 면을 동시에 지시한다. 두 면을 차이로서 동거시킨다. 말-표현의 세계는 계시적으로 일회성으로 흘러 내려가서 공관적 사유(synoptic thinking)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자-표지의 세계는 이처럼 상호 가역적 순환의 반복이 가능해서 공관적 사유가 가능하다.

 

로마의 신화에서 야누스가 로마의 기원을 이룩한 시조의 신이며 또한 수호신으로서 얼굴이 앞뒤로 이중적이어서 서로 가역적 교차가 가능하고 또 평화 시에는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고 전시에는 그 문을 열어 두는 것도 반복적 이중성의 상징이고, 그의 아들의 이름도 폰스(Fons)라 하여 샘의 근원을 상징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야누스의 신은 로마의 평화와 경제적 풍요와 도덕적 정직을 대변하는 신이어서 로마의 동전에 야누스의 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야누스적인 모습은 자연의 실상으로서 자연이 교역이고 교역이 평화를 보장하고 그것이 또 풍요를 가져 온다고 로마인들은 생각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중적이고 단일하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보고 그런 이중성의 인식이 풍요와 정직과 평화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사상을 담고 있다. 샘의 근원도 야누스의 아들과 관계하기에 결코 단일할 수 없다. 서양어로 정월을 뜻하는 ‘Janu-ary(Janvier/Januar)’는 야누스(Janus)에서 나온 용어다.

 

삶과 죽음도 차이와 동거의 이중성으로서 반복 가능한 가역적 공모의 상호의존적인 의타연성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은 죽음에 연기되어 있고 죽음도 삶에 연기되어 있다. 여름의 무성한 생명력은 부패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고, 겨울의 스산한 죽음은 안으로 감추어진 생명의 안온함에 공모되어 있다. 무덤은 삶이 죽음으로 연장되는 것을 뜻하고, 동시에 죽음이 삶으로 연기되는 가역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무덤은 인간에게 죽음이 최후의 종착역이 아니고 죽음에서 다시 삶에로 연기되어지기를 축원하는 인간의 소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무덤은 하나의 감치기(le surjet=whipstitching)의 경계선에 불과하다. 옷감의 천이 다시 다른 옷감과 천의 이음을 펼치려 하면, 옷감의 끝은 마침의 종료가 아니고 새로운 시작의 출발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없는 연쇄의 이음이 텍스트의 본질이다. 그래서 텍스트는 텍스트의 연합(l’inter-texte)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그런 텍스트의 연합은 어떤 목적을 전제로 한 목적인의 의미로 읽혀져서는 안 된다. 목적인의 사유는 해바라기처럼 태양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텍스트로 비쳐진 세상에는 그런 최종적 태양이 없다. 모든 것은 상호간의 연회요 연생이기에 만물이 만물에 대하여 평등한 연루의 공생을 매듭짓고 있다. 그래서 그런 무목적의 세상활동을 데리다는 놀이(jeu=play)에 비유하였다. 놀이의 본질은 서로 서로 역할을 맡아서 그 역할의 계기를 대응해 주는 무상행위이다.

 

놀이의 세상에서 자아의식이 뚜렷이 부각되지 않는다. 놀이하는 아이는 자의식이 없이 다만 어떤 상관적으로 설정된 역할을 맡아서 임시적으로 대행할 뿐이다. 혼자 놀이를 하여도 마음에는 이미 상대가 정해져 있고 그 상대와 상관적 차이를 엮는다. 놀이를 하는 마음은 역할의 차이와 동거를 동시에 같음과 다름의 이중성으로 엮고 있기에 가능하다. 놀이하는 마음은 이 세상을 어떤 목적의식으로 통합하지 않고 그 마음도 세상의 포트랏치에 연루되어 함께 차연의 고리를 엮어 나간다. 세상의 차연적 오감과 함께 인간도 세상의 만상이 된다. 특별히 인간이 의식의 자가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차연의 주고받는 공놀이가 바로 다른 것들과의 인연을 맺게 한다. 그러므로 만상과의 인연의 그물망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 차연의 주고받음을 가능케 하는 중간의 빈 여백이나 사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차이의 여백(la marge=margin)은 경계를 말하는 표식(la marque=mark)이면서 또한 그 여백이 모순대립의 투쟁을 야기하는 싸움터가 아니고 서로 동거하기 위하여 왕래하는 통로의 행정(la marche=march)1)과 같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의 철학적 사유에서 여백과 표지와 행정은 같음과 다름을 갈라놓으면서 이어주는 다리나 산마루의 주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우주는 보이지 않는 다리와 길과 주름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다리와 주름은 앞에서 설명한 코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파르마콘과 코라는 언제나 같이 성립한다. 왜냐하면 이중긍정의 파르마콘은 사이의 빈 공백과 같은 이중부정적인 코라의 배경 없이는 구조적으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불교적으로 가유의 의타연성과 진공묘유의 원성실성은 같은 사실을 다르게 표명한 것이다. 의타가성이 파르마콘이라면, 원성실성은 코라와 유사하다. 우리의 마음은 현상적으로 보면 의타기성이고 동시에 체성상으로 보면 원성실성과 다르지 않다.

 

데리다가 그의 《문자-표지와 차이(L’Ecriture et la diffe?ence)》에서 “우리는 오직 씀으로써만 씌어진다(Nous ne sommes e?rits qu’en e?ri-vant.=We are written, only writing.).”라고 천명하였다. 문자-표지로서 우리는 능동이고 수동이다. 우리가 타방에 대하여 작용하는 힘인 한에서 우리는 능동적으로 쓰고 있지만, 우리가 타방에 대하여 작용을 받는 저장고인 한에서 우리는 수동적으로 씌어진다. 우리는 화엄학적으로 연기의 순환작용에서 유력(有力)이고 동시에 무력(無力)이다. 유력인 한에서 우리는 타자에로 진입하나, 무력인 한에서 우리는 타자로부터 진입당한다. 이 세상에 온전히 순수한 자가성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5. 낭만적이지 않는 보충대리의 세상사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와 루소의 철학사상을 검토 음미해 보기로 하자.

루소는 유럽의 현존적 존재론의 형이상학에 영향을 받아서 진리의 현존적 존재를 모색하는 데 그의 생애를 바치다시피한 철학자다. 그래서 그는 현존의 형이상학적 진리의 선봉에 서서 후설이 의도한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le-s’entendre-parler)’의 철학을 금과옥조로 신봉하였다.

 

그런데 그런 현존적 영혼의 생생한 진리를 찾으려 한 루소는 점차로 생생한 말의 현존은 죽음의 문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환상이라는 생각에 경도되었다. 말이 살아 있는 목소리에 비유된다면, 문자는 생기가 없는 죽은 표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문자가 단순히 생명의 바깥에 있는 우연으로 보기 어려움을 루소가 직감하였다. 나라는 인간이 죽기 시작했을 때에, 나는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난다는 역설을 루소가 감지하였다는 것과 저 말은 상통한다.

 

그런데 그 전에 말은 자연의 천부적 선물이고 문자는 사회생활의 필요성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조작된 죽은 기호에 불과하다고 루소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진리는 말의 생명 속에 실려 있지, 문자의 시체 속에 표현될 수 없다고 여겼다. 루소에게 자연은 선의 화신이고 문명은 악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자연이 선의 화신이라면, 인간은 자연의 아들, 딸로서 자연적인 것으로 충족되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자연의 손으로서만 성장하지 않고 사회제도가 만든 교육의 도움을 받아야 힘과 지능을 구비하게 된다. 자연의 선이 사회의 악에 의하여 보충대리 되는 셈이다.

 

따라서 자연의 현존과 선이 문명의 인위와 악에 의하여 보충대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루소의 철학을 새롭게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에 의하여 이 사회에 악이 도입되는데, 역설적으로 그 사회의 손에 인간이 키워져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는 현존적 철학의 주장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동시에 낭만적 사랑의 지순한 감정도 성욕과 같은 폭력적 에로티시즘에 의하여 오염되고, 뒤섞여 있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 부드러운 정감적 사랑의 낭만도 성욕의 음심을 배제하기 힘들고, 더구나 음심과 동거해 있어서 사랑과 음욕이 서로 보충대리 되고 있다는 느낌을 보았다. 그리고 사랑과 음욕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서로 동거하고 있는 차연의 관계라고 어렴풋이 추정하였다. 그리하여 낭만적 현존의 아름다운 행복의 달성이 영원히 불가능한 꿈이 아닐까 그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는 《참회록》을 쓰면서 어떤 어긋남의 경험을 갖게 된다. 그는 진실한 자기의 과거 잘못을 만인에게 고백하려고 책을 쓰는데, 그가 현재적인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은 순수하게 현재적인 것이 아니고 조금 전의 근접 과거의 것에 대하여 그가 거리를 두고 한 번 반추해 보는 격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고로 현재진행형은 현재진행하고 있는 것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근접 과거의 것에 대한 반성에 지나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래서 그 근접 과거의 것에 대하여 그가 감추고 숨기고 싶은 것과 진솔하게 털어 내놓아야 하겠다는 것과 또 약간 미화해서 말해야 하겠다는 생각 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복합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저 모든 것이 뒤섞인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그는 목도하게 되었다. 현재는 결코 단순하게 일 점 근원처럼 순수하지 않고, 그런 현재는 존립하지 않다는 것을 루소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하게 낭만적으로 ‘자연=근원=본연=선’ 등이 같은 계열로 묶이고, 또 ‘문명=허위=오류=타락=악’ 등이 또 다른 계열로 동질화되어 서로 오염되지 않는 순수성을 각각 유지하지 않음을 통찰하였다.

 

그는 자연적인 것이 현존적이고 그것이 인간의 모성애과 같은 정감적인 느낌으로 이어진다고 옛날에 여겼다. 가장 자연적 정감은 동정심(la pitie?pity)이라고 여겼다. 그 동정심의 숭고한 감정도 이미 그 안에 남에 대한 정감적 우월감의 쾌감이 뒤섞여 활동한다는 것을 그는 또한 직시하였다. 이것은 마치, 자기사랑(l’amour de soi=self-love)의 순진무구한 감정이 이미 대타의식적인 자존심(l’amour propre=self-conceit)의 악의적인 비교감정과 같이 동거하고 있는 현상과 유사하다 하겠다.

 

자기사랑도 순진무구하나 또한 이기심을 늘 뒤로 감추고 있고, 자존심도 악의적인 대타의식의 허세를 띠고 있으나 또한 비굴의 악덕을 방지하는 긍정적인 요인도 깃들어 있다. 모든 것이 파르마콘처럼 이중적인 것을 한단위로 하고 있는 양면적 얼굴의 야누스와 같다. 또 남성적인 이성(la raison=reason)과 여성적인 수치심(la pudeur=shame)은 ‘보충대리의 보충대리(le supple?ent au supple?ent=the supplement to supplement)’로서 이중적인 보충대리의 작용을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것이 자연이 준 약이라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남성이 범하기 쉬운 폭력적인 것과 방만한 것에 대한 치료적 보충대리의 역할을 한다. 그것이 사회가 제공한 약이라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남성이 지으려는 열정의 과격함을 중화시키는 치료적 보충대리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수치심이 자연적인 약이라면, 역시 그것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짓는 교활한 유혹을 막는 치료적 보충대리일 수 있고, 그것이 사회적인 약이라면 그것은 자연이 여성에게 준 감정적 환상에 대한 치료적 보충대리일 수 있다. 이처럼 이성과 수치심은 자연적이든 사회적이든 각각 사회적인 악과 자연적인 악에 대한 치료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보충대리의 보충대리라는 이중적 보충대리의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루소는 자연적인 것은 오로지 선이고 사회적인 것은 오로지 악이라는 그런 택일적 일원론의 사유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점차 생각하게 되었다. 또 그는 점점 모든 것이 파르마콘과 야누스처럼 일원적 진리의 개념으로 정돈되지 않는 세상의 사실을 보게 된다. 일점 근원의 진리를 찾으려 하는 마음은 낭만주의적 꿈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세상은 낭만적 현존의 형이상학의 질서로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모든 낭만주의는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루소는 굳혀 간다.

 

언어의 기원도 루소는 처음에 일점 근원의 한 점 시작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루소는 언어의 기원을 탐구하는 도중, 말과 목소리의 현존처럼 자가성의 일치를 구가하며, 낭만적 선율의 열정적 언어활동에 의하여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감탄과 언어활동이 있다고 상상하였다.

 

그런 사랑의 고백이 노래로 변하고 그 노래가 선율의 멜로디를 탄다고 그는 상상했다. 그러나 루소는 언어활동이 사랑의 낭만적이고 열정적 고백과는 무관하게 생물학적 생존의 현실적 필요에 의하여 요청되는 이성의 냉엄하고 정확한 분절의식과 상통하는 면이 있음을 지각했다. 그래서 전자의 언어활동은 남방적인 낭만적 사랑의 언어활동이고, 후자적인 언어활동은 비낭만적인 생존과 필요의 언어활동으로서 노래가 아니고 사실의 기술이 중요한 언어의 요체라고 보았다. 이것은 북방적인 사실적 언어활동에 해당한다.

 

그래서 언어활동도 남방적인 낭만적 언어활동과 북방적인 필요상의 언어활동으로 보충대리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남방은 모음이 많은 언어활동이고, 북방은 자음이 많은 언어활동이라는 것이다. 음악이 낭만적 어조의 선율과 북방적 분절의 화음으로 보충대리 하듯이, 회화도 스케치인 선의 소묘와 살을 입히는 채색의 이중주라고 그는 언급하였다. 모든 것이 젓가락 운동처럼 그런 상호성으로 이 세상의 사실이 보충대리 되고 있다고 그는 역설하였다.

 

그래서 루소는 일점 근원의 낭만적 진리는 현실적으로 한 번도 구현되어 본 적이 없는, 시제가 없는 비현실적 문법에 유사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루소는 점차로 그런 낭만적 향수를 의심해 갔다. 보충대리의 법은 자기의 안과 타자의 바깥의 이분법적인 분류가 무의미하고, 보탬과 모자람의 개념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사유의 논리다.

 

모든 세상의 사실은 다 이질성끼리의 접목과 다르지 않으므로 이 세상에서 일점 근원처럼 어떤 외부의 영향이 없는 순수한 내면성의 왕국도 성립하지 못하고, 어떤 타자의 이질성을 배제한 동질성의 순종을 찾는다는 것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잡종이다. 이 세상의 사실은 다 잡종이다. 만약에 데리다의 철학에서 신을 언급할 수 있다면, 그 신은 단지 놀이꾼(le joueur=player)에 불과하다.

 

보충대리(le supple?ent=supplement)는 앞에서 우리가 거론한 차이와 동거의 이중성을 한 뜻으로 응집시킨 일종의 반개념적 성격이다. 그 반개념적 성격은 불일의 차이와 불이의 동거를 동시에 알려 주는 ‘이중적 이음줄’과 비슷하다. 하이데거가 로고스를 투쟁적인 것(Strittigkeit=st-rife)과 친화적인 것(Innigkeit=intimacy)의 이중성으로 해석한 것은 데리다가 말한 파르마콘과 유사한 성격을 지칭한다. 고로 데리다가 비판한 로고스의 자기일치의 공명적 진리는 데리다가 해석한 서양 전통적 로고스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는 그 로고스가 다르게 읽힌다. 존재의 의미도 하이데거에게는 생멸의 사건(Ereignis=event)으로 해독되기 때문에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영향으로 읽은 현존의 자기동일성(l’identite?de soi pre?sentielle=presential self-identity)으로서의 존재의 개념과 동일한 차원이 아니다.

따라서 데리다와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를 현존의 철학자로 비판한 것은 기본적으로 하이데거의 오독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현존의 질서를 말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무의 본질현시(Anwesen=presence)로서 무가 자신을 증여하는 보시처럼 읽어야 한다. 또 무는 존재의 본질퇴거(Abwesen=absence)로서 존재가 자신의 뿌리에로 귀환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법성의 연회서의 유(존재)와 그 연회의 본성이 성공이라는 영가현각 대사의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의 유/무의 이중주와 닮았다.

 

 

6. 차연과 진리의 결정 불가능성

 

앞장에서 우리는 차연의 의미를 몇 차례 암시하였다. 이제 여기서 본격적인 설명을 시도할 차례에 이르렀다. 데리다의 철학은 차연의 철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차연의 개념은 차이(diffe?ence)와 연기(연장, de?ai=delay)의 두 뜻이 하나로 합쳐진 조어다. 그런데 불어에서 특이하게 차이(diffe?ence)의 명사를 동사화하면 ‘diffe?er’가 된다. 이 동사 ‘diffe?er’는 ‘차이나다(differ)/연기하다(defer)’의 두 뜻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동사는 두 뜻이 함께 내포되어 있으나 명사에는 그런 단어가 사전에 없으므로 데리다는 그런 명사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여 차연으로 번역되는 ‘diffe?ance’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차연이란 단어의 발음은 차이를 가리키는 ‘diffe?ence’와 똑같다. 마치 하이데거가 차이를 뜻하는 단어 ‘der Unterschied’와 발음이 똑같은 단어 ‘der UnterSchi-ed’를 조어화하였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데리다가 말한 차연의 의미와 유사하다 하겠다.

 

보통 저 용어를 그냥 ‘차이(Unterschied)’와 같은 뜻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하이데거가 이유 없이 말장난하기 위하여 저런 용어를 만든 것이 아니다. ‘unter=inter’에다가 ‘schied’는 동사 ‘나누다(scheiden)’의 과거형인데, ‘Unter-Schied’의 용어에 가운데 줄(-)을 그은 것을 예사롭게 봐서는 안 된다. ‘Uner-Schied’는 사이에 나누어져 있는데 그 분절된 것이 다시 줄(-)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독일어에서 ‘Schiedsgericht’는 중재재판소의 의미를 갖고 있어서, 차연의 성격을 하이데거가 이미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고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현존의 철학자로 비판하였으나, 기실 안으로 보면 두 철학자는 매우 흡사한 것 같다.

 

차연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반개념이다. 반개념이란 것은 일의적으로 의미가 통일되지 않고 적어도 이중적인 것이 하나의 단어에 필연적으로 게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차연은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이 일의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과 같은 ‘차이 속의 동거’ 관계임을 지시한다. 그래서 세상사는 단순하지 않고 아무리 단순하게 읽어도 모든 것이 적어도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중적인 ‘사이’가 가장 선험적인 요소를 띠고 있으므로 원흔적(l’archi-trace)과 원표지-문자(l’archi-e?riture)로서의 차연이 가장 오래 된 고어라고 데리다는 설파한다.

 

차연의 관계는 두 가지의 이항적 대립보다 더 나이가 먹었고 오래 되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즉, 산은 계곡과의 차연관계인데, 산과 계곡이 생기기 전에 인간은 이미 표지-문자학적인 사유의 선험성에 의거해서 산과 계곡을 하나의 이항적 관계로 묶을 수 있는 그런 원흔적의 선험성을 사유의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연의 사유방식은 시간과 공간을 칸트의 철학에서처럼 전자를 내적 감성의 직관형식으로, 후자를 외적 감성의 직관형식으로 나누어 두 가지로 쪼개는 이분법을 수용하지 않는다. 차연은 이분법이되 이원적인 이분법이 아니고 이중적인 이분법으로 세상사를 인식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여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그런 애매모호성으로서 세상을 읽는다. 공간과 시간도 그런 불일이불이의 관계로서 이해한다. 연기(le de?ai=delay)의 개념이 시간적 대기(temporisation=tempori-zing)의 의미로서 사용되기도 하고, 또 공간적 간격(espacement=spacing)의 뜻으로 인식되어도 무방하다.

 

그래서 데리다는 ‘시간의 공간되기(le devenir-espace du temps=becoming-space of time)’와 ‘공간의 시간되기(le devenir-temps de l’espace=becoming-time of space)’로서 시간과 공간을 차연의 관계로 다발처럼 묶는다.

 

전후의 관계는 시간적 대기의 차원으로 읽어도 되고, 공간적 간격의 차원으로 봐도 무방하다. 또 역으로 전후를 시간의 간격이라고 봐도 좋고, 그것을 공간적 대기의 관계로 봐도 무리가 없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차이만 나는 이물질일 뿐만 아니라, 서로 얽혀서 묶여지는 동거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시공은 하나의 차연의 관계로서 상호 연루되어 있고, 연좌의 법으로 묶여 있다.

 

시간은 공간의 성질로 찍혀 있고, 공간도 시간의 성질로 오염되고 있어서 모든 것은 자가성을 지우면서 타자를 가리킨다. 이런 차연의 모습을 데리다는 또한 능동과 수동의 두 양식을 다 함의하고 있기에, 그는 차연을 ‘중간태(la voix moyenne=middle voice)’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런 중간태는 불법의 상징인 만자(卍字)와 같고 수사학적 교차배어법(chias-me=chiasmus)에 비유되기도 한다.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으므로 의미상의 산종(la diss e?ination=disse-mination)에 비유되기도 한다. 산종은 자기의 의미를 개념적 씨(la semence=seed)로서 여기지 않고 의미의 씨를 뿌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것에 분봉하여 흩어 버리기 때문에 주된 것과 종속된 것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의미로 생긴 용어다. 자가애정의 소유의식이 없으므로 산종은 자아의 자가성과 실체의식의 소멸과 상응한다. 무아의 철학이 결국 산종의 철학이고 차연의 철학이다. 본디 어원적으로 ‘씨’와 ‘의미’가 희랍어에서 상응하기 때문에 영어로 의미론을 씨앗론과 유사한 ‘semantics’라 부르고, 불어에서 씨를 ‘semence’라 하는데, 이 낱말은 희랍어로 인식의 표식을 뜻하는 기호(se-ma)에서 발단되었다고 한다.

 

산종은 모든 주체의 철학적 해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산종의 철학은 일체의 모든 내면성의 고유한 성역을 인정하지 않고 해체시킨다. 내면성은 주체의 철학이 의지하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간주된다. 산종과 차연의 철학은 의식의 주체가 신비스런 내면성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 양 여기는 자아의 우상을 파괴하려 한다. 데리다는 저서 《위상(Positions)》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내면성은 자기 바깥에 의하여 이미 가공되어 있고 내면성은 언제나 이미 자기 바깥에로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내면성은 모든 표현의 행위 이전에 자기로부터 차이를 만들거나 지연시키고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항대립을 기본 논리적 철칙으로 삼는 구조주의가 해체적 차연의 철학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차연의 철학이 이항대립의 구조를 가능케 하기에 차연이 이항대립의 가능 근거로서의 ‘이전의 중용(le milieu ante?ieur=mean anterior)’과 같다는 것이다.

 

이전의 중용은 심리학자 융이 말한 무의식적인 이항 대립의 ‘대대적 흐름(Enantiodromie=enantiodromy)’을 성사시키는 빈 간격이나 공간 또는 주름의 경계의 뜻과 유사하다. 이런 사이가 파르마콘의 이중긍정을 가능케 하고 동시에 코라의 이중부정을 성립시킨다. 차연이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을 가능케 하는 근본이므로 데리다는 그 차연과 산종을 ‘이전의 중용’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래서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양면성을 가능케 하는 기본으로서의 차연과 산종은 이원성과 일원성을 다 지양하므로 불일이불이의 구조를 띠고 있기에 논리적으로 결정불가능성(l’inde?idabilite?undecidability)의 의미를 띨 수밖에 없다.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이 이미 양자택일이나 양자용납을 불가능하게 하므로, 결정불가능성의 상징과 마찬가지인데, 거기다가 다시 이중적으로 긍정과 부정을 다 성립시키는 결정불가능의 결정불가능을 나타내므로, 차연의 철학은 확실하게 본질적으로 진리의 결정불가능성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결정불가능성은 이 세상사가 인간의 판단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사에서 인간이 목숨을 걸고 집착해야 할 도리도 없고 죽기를 각오하고 지켜야 할 진리도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타인들에게 어떤 집착과 신념을 강요하기 위하여 타국이나 타인의 침략을 막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런 방어는 택일의 집착적 결정과 독재에 대한 자기 방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런 진리의 결정불가능성은 진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정부적 방임주의를 뜻하지는 않는다. 진리의 불가결정론은 진리의 부재를 가리키는 허무주의를 뜻함이 아니고, 진리의 절대적 시원과 궁극적 목적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진리의 태양 중심주의적(heliocentric)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자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유일하며 궁극적인 진리에의 집착은 전쟁의 존재론(l’ontolo-gie de guerre=ontology of war)을 동반한다고 레비니스가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하이데거는 이미 ‘철학의 종말(das Ende der Philosophie=the end of philosophy)’을 말한 적이 있다. 철학의 종말은 이 세상사를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심판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말과 동의어이다. 노자가 이 세상을 신기(神器)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인간의 정신에 의하여 장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의 종말과 같이 데리다는 ‘철학을 우스갯감으로 만들어 세상에 북을 쳐서 알리기(tympaniser la philosophie)’라고 표명하였다. 철학의 이념을 세상에 북을 쳐서 알려 그것이 얼마나 웃기는 헛소리인가를 공표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철학은 서양사를 통하여 현존적 존재론의 진리에 해당하는 일점 지향의 근원으로서의 태양처럼, 만물이 다 우러러보는 그런 빛으로 숭배되어 왔었다. 이제 데리다는 그런 숭배의식에 가득찬 철학의 이념을 해체하려 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결정불가능성의 세상사는 니체의 반전통과 반형이상학의 정신과 대단히 유사하다. 우리는 니체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 서양의 형이상학사는 한마디로, 소크라테스적 영혼중심의 역사가 기독교의 신학을 만나면서 신 중심의 역사로 치환되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중심의 역사나 신 중심의 역사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서양의 중세기에는 신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기에 신의 인간화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다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17세기의 데카르트에서부터 중세 신학이 근대의 인간학으로 방향전환을 이룩하였다. 그런 인간학의 절정이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이다. 이런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은 곧 인간학의 신학되기에 다름 아니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그런 인간학의 신학화를 실천으로 이행하고자 하는 낭만주의의 극치에 해당하는 것 같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Gott ist tot=God is dead)’라고 외친 것은 인간학의 신학화되기가, 즉 인간의 신되기(apotheosis)가 결국 신을 죽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근대의 인간중심적 낭만주의가 신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통찰력이다. 니체는 철학의 낭만주의적 인간중심주의(신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이 세상사가 허무주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경고한 선각자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이 니체의 철학을 계승한 후계자다.

이 세상사가 다 타자의 흔적을 상감하고 있는 한에서 상처를 입지 않는 지순(至純)의 존재는 낭만적 공상의 세상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각도에서 이 세상사를 보면 ‘문명 자연’ ‘정신 물질’ 등의 택일적 이분법은 덧없는 형이상학에 속한다. 니체는 이런 형이상학의 진리를 망치로 부수려고 하였다. 차연의 입장에서 보는 세상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인간에 의하여 판단되지 않는 여여한 세상의 사실을 말하는 것과 같다.

판단의 유보가 차연의 철학적 주장이리라. 차연의 철학은 이 세상이 너무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의미로 과잉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의미의 과잉은 허무주의를 생산한다.

 

그러면 이 세상을 무의미하게 방치하자는 것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서로 다른 것과 비스듬히 기대 서 있는 형상이기에 하나의 가치판단으로 이 세상을 재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데리다에 있어서 모든 것은 존재(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의 존재자)가 아니고 흔적이므로 흔적의 위상은 최소한도로 모든 것이 이중성의 상감과 접목으로 융섭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그 이중적인 것들을 실체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 이중성은 각각 자기의 자리를 갖고 있지 않고 그 자리를 지우는 그런 이중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사가 일정하게 원인과 결과로 결정되지 않고 목적과 방편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시작도 종말도 없이 얽히고설킨 그런 새끼 꼬기의 연쇄와 같다. 따라서 하나의 의미를 극대화할 수 없고 생사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회전운동의 바퀴와 같을 뿐이다.

 

데리다가 가끔 해체의 세계를 알리기 위하여 ‘ellipse(타원/생략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타원(l’ellipse=ellipse)은 평면 위의 두 점으로부터 생기는 거리의 합이 항상 일정하게끔 움직이는 한 점의 궤적을 말한다. 생락법(l’ellipse=ell-ipsis)은 문장 상에서 생략되어 언외의 뜻이나 여운이나 암시를 독자가 파악하게 하는 수사법을 뜻한다. 즉 차연처럼 이 세상의 세상사는 두 점의 ‘차이’로부터 생긴 거리의 합으로서의 ‘동거’가 언제나 일정하게 형성하는 ‘차이와 동거’의 이중성과 같기에 데리다가 그것을 타원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차연의 타원은 일점 중심을 갖고 형성되는 같은 궤적의 원과 다르다.

 

타원은 평면상의 두 점의 사이에 따라 형성되는 타원의 크기가 다르므로 두 점은 불일이불이의 관계성을 이루고 있다. 타원은 마치 텍스트의 직물짜기의 교직적 얽힘과 유사하다 하겠다. 그리고 그 차연은 수사학적 생략법처럼 생략된 단어나 문장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문장보다 그 사이에 시간적 공간적 단축이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또한 그 사이는 이미 생략을 통하여 두 단어 사이에 차연의 다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타원(l’ellipse)은 이중긍정의 파르마콘을 암시하고, 생략법(l’ellipse)은 이중부정의 코라를 상징한다. 세상사가 축구공처럼 규칙적으로 굴러 가지 않고, 럭비공처럼 불규칙으로 굴러가는 수많은 타원들의 엮음장식이므로 어떤 원인과 목적의 일정한 진로를 예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의 창조설과 예정조화설은 타원의 불규칙 운동에서는 설명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세상사는 무수한 생략법의 수사학과 유사한 것 같다. 고로 세상사는 생략법의 빈 공간과 시간의 여백이 항상 문장의 행간에 깃들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여백이 차연의 사이를 가리키는 ‘이전의 중용’의 표지이고, 그것이 또한 사이의 왕복을 말하는 행진이기도 하다. 차연의 철학은 예정조화설의 부정이고, 오히려 그 신의 예정조화설의 자리에 비어 있음의 허공의 여백을 읽을 것을 종용한다. 그 사이로서 허공의 여백은 표지의 역할을 하고 행정의 왕복의 길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여백은 허무가 아니고, 세상사를 여유와 관계의 신호로서의 표지와, 또 서로 다른 것과 장애 없이 오가는 무애의 행정과 같은 길로 읽기를 종용하는 사유가 아닌가?

세상사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 자가성에 얽매인 고집이라 하겠다. 차연의 철학은 이 고집의 어리석음을 북으로 쳐서, 세상의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형효

 

 

/ 불교평론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형이상학의 폐쇄적 원리 해체

 

ㆍ자크 데리다 (1930 ~ 2004)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가장 유명한 현대 철학자 중 한 명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의 저작이 꽤 난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국내에는 <글쓰기와 차이>로 번역돼 있다) 같은 그의 저작들은 상당히 난해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로고스 중심주의의 해체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존(presence)의 형이상학의 역사였다. 이 점에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거는 서양의 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로 규정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들이 남긴 단편들에서는 존재가 ‘현존’으로, 곧 현존하는 것을 현존하게 해주는 운동 내지 사건으로서 이해되었으나, 플라톤 이후에는 존재가 실체로 이해되어 존재가 지닌 사건의 성격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형이상학은 그리스 초기 사상가들에게서 나타났던 증여의 사건으로서 존재 의미가 점차로 망각되어온 역사이며, 이는 니체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데리다는 현존의 형이상학에 관한 하이데거의 관점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수정한다.

 

첫째, 하이데거와 달리 데리다는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원초적으로 자신을 드러냈다고 보지 않으며, 철학자들의 저작 속에서만 서양 형이상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 및 인문과학에서도 나타난다.

 

둘째, 더 나아가 데리다는 하이데거도 역시 현존의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하이데거가 여전히 로고스 중심주의적 편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로고스 중심주의 또는 음성 중심주의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의미나 진리의 생생한 현존으로서 로고스를 추구해왔으며, 이러한 로고스는 음성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현존하는 그대로 드러난다고 간주해왔다. 이는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오래된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루소나 후설, 하이데거 같은 근대 철학자, 그리고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20세기 인문과학자들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음성을, 로고스를 생생하게 구현해주는 본래적인 매체로 특권화하고 대신 문자나 기록 일반은 이러한 음성을 보조하는 데 불과한 부차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이론에서는 어디서든 현존의 형이상학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리다에게 현존의 형이상학은 ‘로고스 중심주의’이자 ‘음성 중심주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존재의 부름’이나 ‘존재의 목소리’ 같이 음성 중심주의가 깃들인 은유들을 자주 사용하고, 또 진정한 존재의 의미는 기호들의 연관망에서 벗어나 있다고 간주하는 한에서 그는 여전히 서양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존의 형이상학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타자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ecriture), 곧 기록이다. 서양 형이상학은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존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의 정치학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존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존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존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과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인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19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론의 원리에 충실하다. 더 나아가 유령은, 살아 있으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 곧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시대의 수많은 약소자들을 나타나기에 적합한 명칭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소자들에서 유령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19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 사상의 영향과 현재성

 

데리다가 현대 인문사회과학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그는 현대 문학이론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람 중 하나로, 해체, 텍스트, 산종(散種), 은유, 장르, 수행성에 관한 그의 이론은 문학연구의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또한 가야트리 스피박이나 호미 바바 같은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의 작업에서도 해체론은 핵심적인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데리다의 사상은 법학, 정치학 등의 분야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정전(正典)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은 고전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기 위해 데리다 사상을 원용한 바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영미권에서 전개된 비판법학운동은 해체론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나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 같은 정치철학자들의 작업에 미친 데리다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발리바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고 현대 민주주의 이론을 재구성하는 데 데리다의 작업에서 여러 가지 이론적 자원을 빌려오고 있으며, 랑시에르와 아감벤은 데리다의 해체론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축하고 있다. 데모스에 대한 랑시에르의 재해석이나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개념 등에서 그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 [Claude L?vi-Strauss]프랑스 인류학자

 

사회학과 관련된 구조주의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vi-Strauss)에 의해 이루어졌다. 수년에 걸쳐 그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인류학 분야를 극적으로 변경시킨 엄청난 양의 복합적인 저작을 출판했다. 수많은 구조주의자들이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이 복잡한 이유는 그 속에 다양한 유형의 구조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첫째 유형인 사회세계의 거시적 구조와 제도는 그가 거부하기 힘든 그런 종류의 구조들이다. 대부분의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에게 이것들은 구조적 현실이었다. 반면에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는 그것들은 사회의 실제 기본구조를 은폐시키는 데 기여할 따름이다. 이로부터 두 번째 유형으로 논의가 전개되는데, 이 두 번째 유형이 레비스트로스에게 있어서는 더 중요하다.

 

그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사회의 기본구조에 도달하기 위해 구성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게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유형의 구조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두뇌구조이다(Leach, Claude Levi-Strauss, 1974). 세계 도처의 인간이 만들어 낸 산물들이 같은 기본적 근원을 가지기 때문에 사회과학자들이 구성하는 사회세계의 모델들 역시 여러 사회에서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에서 궁극적 구조로 부각되는 정신의 구조이다.

 

어떻게 보면 레비스트로스가 단지 언어에 대한 소쉬르의 작업을 인류학적인 문제, 예를 들면 원시사회의 신화에까지 확장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좀더 나아가 구조주의를 모든 의사소통에 폭넓게 적용했다. 폭넓은 사회현상(예를 들면 친족체계)을 의사소통체계로 재개념화함으로써 그것들을 구조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 그의 주된 혁신이 발견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배우자의 교환은 말의 교환과 같은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다. 둘다 사회적 교환으로서 구조인류학을 사용함으로 연구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언어체계와 친족체계의 유사성을 예로 들어서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을 나타낼 수 있다.

첫째, 친족을 기술하는 데 사용된 용어들은 언어에서의 음소(phonemes)처럼 구조주의자의 기본적 분석단위이다.

둘째, 친족용어 뿐만 아니라 음소들은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둘다 오직 더 큰 체계의 한 부분일 때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체계의 전체구조는 그 구성부분 각각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셋째, 레비스트로스는 음소와 친족체계 둘다 환경에 따른 경험적 변이를 겪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변이들도 비록 내재적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법칙의 작용으로 소급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에 대한 이해라는 견지에서 보면 궁극적으로 음소체계와 친족체계 두 가지가 모두 정신이 갖는 구조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의식적 과정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정신의 무의식적이고 논리적인 구조의 산물인 것이다. 그것들이 유래한 정신의 논리적 구조와 마찬가지로 이 체계들은 일반법칙의 기초 위에서 작용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가 언어재료를 분석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류학적 자료에 대해 구조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응답자의 주관적 보고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보고들이 기본구조를 구성하기 위한 기본자료일 뿐이라고 보았다. 원시사회 분석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와 친족체계, 그리고 전체사회의 기본구조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가졌다.

 

비록 레비스트로스가 원시사회에 관심을 모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일련의 의식모델이나 규범체계들은 구조적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모델들의 중요성을 완전히 묵살하지는 않았다. 편견과 왜곡이 포함된 이 규범체계들은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산물이다. 그렇지만 이 체계들은 제1의 중요성을 갖지는 못한다. "문화적 규범 그 자체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L?vi-Struss, Structural Anthropology, 1967 ; 274).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연구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생산물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 산출물들의 객관적 구조에 관심을 가졌을 뿐, 그들의 주관적 의미 또는 주관적 과정에서의 그 기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인간이 산출한 다양한 생산물-신화, 친족체계 그리고 다른 것들-을 관찰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그것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상호관계를 도표화한 것이 구조(the structure) 그 자체, 또는 적어도 하나의 구조(a structure)이다. 하나의 구조는 관찰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관찰자들이 제각기 다른 구조들을 구성할 수 있다. 두 가지 중요한 지적이 여기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첫째, 구조는 관찰자들의 창조물이다. 둘째, 창조된 구조들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것처럼 "'사회구조'라는 용어는 경험적 현실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그를 본따서 구성된 모델과 관련될 따름이다"(Levi-Strauss, 1967 ; 271).

 

레비스트로스는 단순한 원시사회의 구조를 단지 도표로 나타내는 데에는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많은 그런 사회들에 대해 얻을 수 있는 폭넓은 자료들을 비교하는 데 있었다. 그는 그런 비교분석들이 모든 사회에 공통된 하나의 기본구조를 산출하기를 바랬다. 그런 구조를 탐구하기는 했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들이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에 동일하다는 독단적인 관점을 채택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관찰자들의 견해와는 반대로 그의 체계에는 융통성이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자들의 전통적 지향을 거부했다. 예를 들면, 그는 신화들이 그 해설 내용이나 또는 사회에 대한 그 기능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대신에 신화의 의미는 그 무의식적인 구조의 수준에서 찾아져야 한다. 신화분석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방법론은 몇 가지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그는 특정 신화의 여러 가지 변이형들을 고찰할 것이다. 둘째, 그는 그 변이형들 속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분리할 것이다. 셋째, 그는 각각의 변이형 속에서 논제로 부각되는 요소들이 상호연결되는 복잡한 유형을 도표로 나타낼 것이다. 넷째, 그는 "이 용어들 사이에서 하나의 가능한 교환목록"을 구성할 것이다(L?vi-Strauss, Totemism, 1963 ; 16). 마지막으로 그러한 목록이나 구조는 분석자들에게 신화를 일반적으로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특정사회 안에서 특정의 신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 가설을 정립할 수 있게 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는 뒤르껭의 사회적 사실(social facts)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가지는 자신의 생명을 지니며 행위자의 밖에서 행위자를 구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전체사회적 수준, 즉 사회적 사실의 수준에서 작업하지는 않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적 사실에 대한 뒤르껭의 초기저작보다는 원시사회의 분류에 대한 그의 후기저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레비스트로스의 행위자는 구속되는 존재이지만 사회적 사실에 의해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정신의 구조에 의해 구속된다.

 

이론적 지향에 있어서 레비스트로스에 가장 가까웠으며 그의 저작에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아마도 뒤르껭이 아니라 프로이트(Sigmund Freud)였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행위자가 무의식적인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견해를 수용한 것같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무의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해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레비스트로스와 프로이트 사이에는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주로 감추어진 감정의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했다. 즉 행위자는 의식의 수준에서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감정에 의해 강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무의식의 감정적 측면에는 명백히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무의식에 대한 그의 주요관심은 '정신의 지속적이고도 논리적인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레비스트로스의 행위자는 무의식적인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정신의 무의식적ㆍ논리적 구조에 의해 구속된다. 레비스트로스가 무의식에 대한 그의 관심을 표명한 한 방식을 다음 인용문에서 알 수가 있다.

 

"만약 우리가 믿는 것처럼 정신의 무의식적 활동이 내용에 형식을 부과한다면, 그리고 이런 형식들이 고대의 정신이나 현대의 정신, 원시적인 정신이나 문명화된 정신에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면, 각각의 제도와 습관의 기저를 이루는 무의식적 구조를 포착하는 일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행하는 분석이 잘 수행된다는 전제 아래서 우리는 다른 제도나 관습에서도 타당한 해석의 원칙을 얻게 되는 것이다"

(L?vi-Strauss, 1967 ; 21 ~22).

 

물론 레비스트로스의 견해는 정신이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는, 사회과학에 공통된 하나의 문제를 제기했다(Scheffler, Structuralism in Anthropology, 1970). 이것은 레비스트로스로 하여금 위에 논의한 인간의 생산물들 상호간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시키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의 관심은 그런 생산물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논리적 구조에 대해 그것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에 있었다. 그와 같이 원시세계의 구조에 대한 연구일반, 그리고 특히 친족과 신화체계에 관한 연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신의 기본구조를 이해하도록 돕는 수단인 것이다.

 

정신의 기본구조에 대한 그의 탐구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적어도 몇몇 현상학자들의 연구와 비슷한 하나의 연구계획에 착수한 것같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구조주의자들처럼 레비스트로스 역시 현상을 매우 꺼려 했다. 그가 보기에 현상학자들은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을 사회과학의 중심부에 놓으려 한다. 구조주의자들에게 의식은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현상학자들(그리고 민속방법론자와 실존주의자와 같이 이 접근법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은 사회과학을 인간답게 만들려는 노력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거의 의도적으로 이 분야들을 비인간화(dehumanize)하려 한다. 그들은 인간을 사회과학의 중심부로부터 제거하여 정신의 논리적 구조로 대체하기를 원한다.

 

예를 들면 찰스 레머트(Charles Lemert, Sociology and the Twilight of Man, 1979)는 사회과학의 핵심으로서의 인간이 소멸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기뻐하고 있다. 대부분의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이, 특히 그들의 주관적 과정에 몰두하게 되면 사회과학의 발전이 방해받거나 또는 지연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의 과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관심의 초점을 인간으로부터 다른 종류의 객관적 구조로 변경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구조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지향과 관심에서 그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시행된 것과 유사한 하나의 작업에 착수하였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약간의 유사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철학자로서의 칸트는 내성(introspection)이나 철학적 사색, 혹은 양자 모두를 통해 기본적인 정신범주들을 밝히려 하였던 반면, 사회과학자로서의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방법을 거부하는 대신에 정신구조를 밝히기 위해 사회세계의 구조들을 경험적으로 고찰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비록 레비스트로스가 많은 다른 사상가들과 유사한 작업을 한 것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레비스트로스와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사회과학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독특하고 중요한 공헌을 나타내 준다. 커즈웨일은 다소 거칠게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구조주의는 레비스트로스가 사망하기까지 원천적으로 상상된 것이었다. 보편적인 정신구조는 출현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레비스트로스가 후기구조주의뿐 아니라 구조주의의 한 형태를 위한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