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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선과 간화선 / 印鏡

경호... 2015. 7. 14. 02:56

공안선과 간화선

 

印 鏡*

 

* 명상상담연구원

 

 

【주제분류】동양철학, 사상사

【주 요 어】공안, 화두, 공안선, 간화선, 원오극근, 대혜종고

【요 약 문】공안과 화두는 간화선의 중심개념이다. 그 동안 학계와 수행자들은 이들의 개념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여 왔다. 그로 말미암아 조사선, 공안선과 간화선을 동일한 수행론으로 간주하는 결과가 되어서 간화선의 정체성을 혼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들 개념을 정착시킨 송대의 원오극근과 대혜종고의 어록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양 개념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공안은 스승과 제자의 선문답으로써 당대에 유행하였다. 그렇지만 선문답을 공안이라 부르고, 그것을 후학들의 교육자료 혹은 수행의 방법으로 활용한 것은 송대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것이 원오극근의 공안선이다. 하지만 대혜종고는 당시 지식인들이 과거에 이루어진 공안을, 단지 지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만 머물러 자신의 절박한 실존적 과제로 의심하지 않음을 보고, 도의 안목을 장애하는 잡독이고, 쓰레기이고, 마귀의 권속이라고 비판하면서, 스승의 공안집을 불 태웠다. 간화선에서 강조된 화두는 단순하게 나와 관계없이 저기에 객관적인 잉크자국으로 존재하는 공안과는 구별된다.

화두는 가슴에 살아있는 절박한 나의 과제이고, 의심을 그 본질로 한다. 그것은 깨달음을 획득하는 관문이고, 정혜를 개발하는 도구이고, 온갖 지식의 분별을 잘라내는 칼날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간화선은 공안선의 병폐를 비판하면서 확립된 까닭에, 당대의 조사선과도 확연하게 성립시기가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상이고 수행론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I. 머리말

 

간화선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수행체계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그 참구의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이때 선문답의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수행자들이나 학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공안과 화두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를 구분하는 경우이다.

 

첫째는 공안과 화두를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한 것으로, 일본에서 편찬된 선학대사전에서도 지지하는 견해이다.1) 간화선의 성립시기를 공안의 형태가 출현한 황벽(黃蘗, ?~850) 이후 9세기 중엽 임제 (臨濟, ?~866)와 향엄(香嚴, ?~898)의 시대에 이미 간화선이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2) 이런 경우는 공안의 출현은 그대로 공안선이고 간화선이 된다.3) 이런 관점은 간화선의 성립을 당대까지 올려서 송대의 선사상을 연결시키는 연속성을 강조한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4)고 본다. 하지만 이것은 당대의 공안과 송대의 공안선, 혹은 간화선과의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두 번째 관점은 주로 필자가 제기한 것으로,5) 공안을 역대 고승의 언행으로 보고 화두는 그 공안 가운데 한 글자나 언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구별하자는 것이다. 이는 대만에서 편찬된 불광사전에서도 역시 발견되는 관점이다.6) 말하자면 간화선은 경덕전등록 이후 송대에서 성립되었으며, 묵조선과의 경쟁관계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경우이다. 이것은 사상사의 전체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공안은 당대에 출현했지만 실질적인 간화선은 송대에서 성립되었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옹호하는 것이다.

 

1) 新版禪學大辭典(駒澤大學, 禪學大辭典編纂所編, 2000年), p.1326.

2) 關口眞大, ?公案禪と?照禪?( 인도학불교학연구 16-2, p.117), 여기서는 공안의 형태가 마조(709~788)보다 빠른 708년 혹은 713-716년에 찬술된 楞伽師資記에서 최초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종호, 2000, ?간화선 형성의 사회적 배경?, 보조사상 제13집, p.191. 이 논문은 간화선의 성립을 9세기 초엽 당대에 출현한 공안에 두면서도, 동시에 문자선과 같은 송대 선종 내부의 문제점에서도 찾는다. 하지만 양자간의 관계를 충분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3) 原田弘道, 1973, ?公案禪の成立について?, ( 駒澤大學佛敎學部硏究紀要제30 호, p.57); 혜원, 2000, ?선종사에서 간화선의 위치?, 위의 책, p.164. 일본학계에서는 대부분 공안선과 간화선을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공안선의 성립을 원오극근와 대혜종고에게 둔 반면에, 후자는 공안이 성립된 당대에부터 공안선 곧 간화선의 성립이 된 것으로 본 점에서 차이가 있다.

4) 이런 태도는 역시 불학연구소에서 편찬한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 (대한 불교조계종 교육원, 2005년, p.56)에서도 보인다. 특히 간화선의 원류를 조사선뿐만 아니라, 부처님 당시까지 끌어올려서 三處傳心에서 화두의 기원을 찾는다.

5) 인경, 2000, ?대혜 간화선의 특질?, 보조사상 13집, p.268.

6) 佛光辭典, p.1314. “公案中大多有一個字或一句話供學人參究之用者, 稱爲?話頭?. 如問:?狗子還有佛性也無??答:?無!? 此一對話卽爲一則公案, 而?無?字卽是話頭. 參禪時, 對公案之話頭下工夫, 稱爲參話頭”

 

이런 개념에 대한 논의는 결국 간화선의 성립시기의 문제뿐만 아 니라, 간화선 수행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필자는 2000년에 보조학회에서, ‘공안을 선문답의 사례로 이해하고, 화두를 어떤 특정한 공안 가운데서 절박하게 의심이 일어난 질문이나 언구 로 정의하여, 화두의 출현 시기를 간화선의 성립시기로 보는 견해’7) 를 제시한 바가 있다. 공안과 화두는 간화선에 대한 가장 기본이 되 는 개념이다. 하지만 그때는 발표주제가 대혜종고의 간화선의 특질에 초점이 맞춘 결과, 당대에 처음 성립된 공안과 송대에서 형성된 수행 법으로써 화두와의 사상적 차이점에 대해서 충분한 논의가 이루지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문헌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간화선을 성 립시킨 것으로 알려진 원오극근과 대혜종고의 선사상을 비교함으로 써 ‘공안선’과 ‘간화선’에 대한 정확한 사상사적인 의미를 고찰해 보 고자 한다.

 

7) 인경, 2000, 위의 논문.

 

 

II. 공안의 의미

 

선종사에서 공안의 형태가 당대에 처음 출현한 것은 누구든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당대에 출현한 공안을 그대로 공안선, 혹은 간화선으로 부를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이점은 공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공안을 ‘진리에 들어가는 인연’으로서 넓은 의미의 문답을 가리킨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9세기뿐만 아니라 달마와 혜가의 문답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부처님 당시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현들은 제자를 흔들어 일깨우고, 진리에 들어가는 인연을 위해서 질문과 문답법을 자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화선의 출발을 부처님 에게까지 올려서 그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들의 주장이다.

 

둘째는 공안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이해하는 과정으로서의 문답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직설적인 대화법으로서 좁은 의미로 한정하여 정의한 경우이다. 공안이란 선종의 독특한 문답으로, 논리적이고 분석인 방법이 아니라, 일상에서 간결하고 직관의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정확하게 중국 선종에서 개발된 ‘선문답’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라면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이후 황벽, 임제 등에 의한 조사선(祖師禪)이 유행하면서 본격화되었고, 문답으로써 공안의 형태는 오히려 혜능과 마조 이후 8세기에 출현했다는 시각이 옳다고 본다.

 

세 번째는 공안을 ‘수행의 한 방법’으로 보는 경우이다. 이것은 옛 선사의 많은 기연과 문답 가운데 하나를 결택하여 그것에 집중하여 참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라면 공안선의 출현은 송대에 와서 성립되었다고 본다.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선문답의 공안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이런 선문답의 성립은 당대에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송대에서 성립된 벽암록이나 무문관 등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공안에 대한 의심을 강조한 간화선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논자에 따라서 간화선의 성립 시기를 논할 때, 세 가지 관점을 서로 다르게 평가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만약 공안과 공안선이 동일한 의미이고, 그래서 공안선은 그대로 간화선이라면, 결국은 선종사에서 조사선과 간화선은 서로 다르지 않는 동일한 선법이 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은 대부분 그 실례로서 9세기 초엽에 활동한 황벽의 법문, 선관책진(禪關策進) 에서 첫 번째 법문인 ?황벽선사(黃檗禪師)의 시중(示衆)?을 제시한다.

 

 

"오직 저 공안(公案)을 간하라. 어떤 승려가 “조주(趙州)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무(無)”라고 대답했으니, 다만 일상의 십이시중(十二時中)에 이 무자(無字)를 간(看)하라. 낮이든 밤이든지 행주좌와와 옷 입고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곳곳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돌이켜보아 맹렬하게 채찍질하라. 다만 ‘무’한 글자를 지키다 보면, 날이 가고 해가 깊어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하여 홀연히 마음의 꽃이 피어나 불조(佛祖)의 기틀을 깨닫게 되리라."8)

8) 禪關策進(大正藏48, 1098上中.), “看箇公案 僧問趙州 狗子還有 佛性也無州云無 但二六時中看箇無字 晝參夜參 行住坐臥 著衣吃飯處 ?屎放尿處 心心相顧 猛著精彩 守箇無字 日久歲深 打成一片 忽然心華頓發 悟佛祖之機”

 

 

오직 공안을 간하라. 이것은 조주의 무자(無字)를 간하는 간화선의 핵심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여기서는 공안과 화두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안, 공안선, 그리고 간화선은 모두 동일한 개념이 된다. 이 자료를 근거하여 판단한다면, 분명하게 공안선과 간화선이 출현한 시기는 황벽시대, 곧 9세기 초엽으로 볼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이 법문은 엄밀하게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무문혜개의 무문관(無門關)의 내용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분명하게 후세에 첨가된 내용이다.9)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실제로 현존하는 황벽(黃蘗)의 법어인10) 전심법요(傳心法要) 나완릉록(宛陵錄) 에는 위와 같은 법문의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무자화두의 시원이 된 8세기에서 9세기를 산 조주(趙州, 778~897)는 황벽(黃蘗, ?~850)과 동시대의 인물이지만, 조주가 황벽보다 50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50년 전에 먼저 입적한 황벽이 조주의 무자(無字)를 간하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내용이다.

셋째로 1600년에 출 간된 명대의 선관책진(禪關策進)은 남송 시대에 간행된 무문관(無門關) 보다 400년이 지난 다음에 출간되었고, 황벽(黃蘗)이 입적한 해로부터 750년이 지난 이후의 기록이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볼 때, 선관책진에 보이는 공안참구에 관한 황벽의 법문은 나중에 삽입된 내용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공안에 의한 참구법, 공안선이 출현한 시기를 황벽과 동일한 9세기 초나 중기에 성립되었다는 일부의 견해는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공안의 출현이 그대로 공안선, 혹은 간화선의 출현으로 본다면, 결국 당대의 조사선과 송대의 간화선은 동일한 형태의 수행법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선관책진(禪關策進) 이 범한 사상사적 오류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당대에 출현한 공안과 송대에 성립된 공안선이 가지는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9) 인경, 몽산덕이와 고려후기 선사상연구 , 불일출판사, p.208.

10) 柳田聖山, 語錄の歷史(동방학보 제57, 1985). pp.270-277. 현존하는 황벽의 법문은 당시에 유통된 배휴와 제자들에 의해서 손으로 필사한 법문 내용을 근거로 송대에 편찬한 마조, 백장, 황벽, 임제의 법문인 1085년에 간행된 四家語錄에 기초한다. 또한 황벽의 법문은 범어사에서 출간한 선문찰요 에서도 수록되어 있다.

 

 

III. 원오극근의 공안선

 

1. 공안선의 출현

 

당대와 송대에서 공안의 의미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만약에 서로 동일하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서로 다른 관점이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이것은 주목할 만한 사상사적인 가치가 있다. 이것을 살펴보는 좋은 모델은 송대에서 가장 널리 유통된 원오극근(1063~1125)의 벽암록이다.

당시 지식인들은 벽암록을 통해서 공안공부를 하였다. 물론 현대적 의미에서 원오극근이 공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는 상세한 연구는 없다. 그런데 벽암록 삼교 노인(三敎老人)의 서문에는 공안의 활용방식을 세 가지로 잘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는 ‘공안을 조사의 가르침[祖敎]’이라고 정의하고, 당에서 시작되어 송에서 번성하였음[倡於唐而盛於宋]’을 지적 하면서, 다음과 같이 공안이 가지는 세 가지 활용방식을 제시한다.11)

 

11) 碧巖錄(大正臧 48, 139),

“嘗謂祖敎之書 謂之公案者 倡於唐而盛於宋 其來尙矣 二字乃世間法中吏牘語

其用有三 面壁功成 行脚事了 定槃之星難明 野狐之趣易墮 具眼爲之勘辨 一呵一喝 要見實詣 如老吏據獄?罪 底裏悉見 情款不遺一也.

其次則嶺南初來 西江未吸 亡羊之岐易泣 指海之針必南 悲心爲之接引 一棒一痕要令證悟 如廷尉執法平反 出人於死二也.

又其次則犯稼憂深繫驢事重 學 ?之志須專 染絲之色易悲 大善知識爲之付囑 ?之心死蒲團 一動一參 如官府頒示條令 令人讀律知法 惡念才生 旋卽寢滅三也.”

 

첫째는 좌선 수행을 통해서 공력이 이루어지고 행각으로 일을 다 하였지만, 깨달음을 밝히지 못하고 쉽게 사량분별에 떨어질 때, 바른 눈을 갖추어서 감옥에 갇힌 죄인의 죄를 감변(勘辨)하듯이, 실다운 지혜를 보일 때에 사용된다. 이것은 공안의 활용에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제적한 것인데, 공안이 초보자를 위한 방책이 아니라, 수행의 공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제자를 위해서 지도자가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자의 업장을 꾸짖고, 소리쳐서 교훈을 주는 것으로, 공안은 수행에서 만나는 무거운 장애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강남의 조사선을 처음 접하였지만 여전히 조사의 깊은 취지를 파악하지 못하여 망연해하는 자를 위해서 자비의 마음으로 학인을 접인(接引)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상처를 내리쳐서 증오(證悟)로 이끄는 바로서 마치 관리가 죽어가는 죄인을 구하는 것과 같 다. 여기서의 핵심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더욱 내리쳐서 증오로 이끄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아직 베지 못한 벼로 인하여 나귀를 계박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여전히 노름에 전념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대선지식이 부촉하고 좌복 위로 내몰아서 더욱 수행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감옥을 벗어난 죄인을 현실 속으로 동참하도록 흔들어 내모는 것이다. 마치 관리가 정부의 조령을 사람들에게 잘 알게 하여 잘못된 생 각이 일어나면 곧장 그것을 소멸하게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공안의 세 가지의 활용은 수행에서 나타난 현상에 대한 기준과 판별, 깨달음으로의 안내, 가행정진에로 촉발의 과정을 모두 포섭하고 있음을 본다. 먼저 감옥의 은유에서 보여주듯이, 처음 발심하여 수행을 시작하였지만 숙세의 업장으로 힘들어할 때, 공안은 고인의 언행으로서 용기와 더불어서 자신의 과제를 명료하게 하는 나침판의 역할을 하며, 두 번째는 조사선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고통 의 감옥을 벗어나는 깨달음을 성취함이 바로 고인의 공안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감옥을 벗어나 농사짓는 일상으로 돌 아 와서 계속적으로 수행하여 갈 때, 역시 공안의 역할을 강조되는 데, 이때는 업장을 곧장 소멸하는 수단으로서 공안이 활용된다는 것 을 보여준다.

 

이것은 벽암록 에서 사용되는 공안의 사용법을 세 측면에서 잘 요약 정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원오극근은 공안을 활용하여 학인들이 공부하도록 안내하였다는 것이고, 이것은 위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듯이,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었는데, 먼저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 꾸짖고, 다음엔 무엇이 본래의 낙처인가를 물어서, 결국은 좌복으로 내몰아 더욱 공부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공안을 활용 한 수행방법으로, 이것을 ‘공안선’이라고 부르자. 그러면 공안과 공 안선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점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벽암록 에 서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하나의 예를 보면, 벽암록 제3칙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마조스님이 매우 아팠다. 그때 원주가 “스님, 몸은 좀 차도가 있습니까?”그러자 대사가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라고 대답하였다. 만약 조사께서 본분사로서 상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도가 빛날 수 있었겠는가? 이 공안에서 만약 낙처를 안다면, 붉은 하늘을 홀로 걷을 것이다. 만약 낙처를 모른다면 마른 나무와 바위 앞에서 잘못된 길을 헤맬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참으로 옛 사람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왼쪽 눈은 일면이고 오른쪽 눈은 월면이라고 한다. 이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면 마조스님이 말씀하신, 본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12)

12) 위의 책, 142하, “【三】擧馬大師不安 院主問 和尙近日 尊候如何 大師云 日面佛月面佛 馬大師不安 院主問 和尙近日尊候如何 大師云日面佛月面佛 祖師若不以本分事相見 如何得此道光輝 此箇公案 若知落處便獨步丹? 若不知落處 往往枯木巖前差路去在 若是本分人到這裏 須是有驅耕夫之牛 奪飢人之食底手脚 方見馬大師爲人處 如今多有人道 馬大師接院主 且喜沒交涉 如今衆中多錯會?眼云 在這裏 左眼是日面 右眼是月面 有什?交涉 驢年未夢見在 只管蹉過古人事 只如馬大師如此道 意在什?處”

 

 

위의 문답은 공안과 공안선의 의미를 구별 짓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일단 공안의 의미는 옛 조사의 가르침, 선문답이다. 구체적으론 마조와 원주와의 문답을 가리킨다. 이것은 1차적인 문답이다. 반면에 벽암록에서 사용된 방식은 이런 문답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견해를 비판하고, 본래의 낙처를 묻는다. 이것은 2차적 성격을 가진다. 물론 참구자의 입장에서는 보면, 양자는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용자의 입장에서 볼 때, 마조는 ‘일면불 월면불’그 자체를 드러낼 뿐, 그것을 참구의 대상이나 수행의 방 법으로 활용하라는 흔적은 없다. 가장 잘 알려진 조주의 ‘무자’도 마찬가지이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조주는 어쩔 땐 긍정(有)으로 어쩔 땐 부정(無)으로 다만 대답을 했을 뿐이다. 조주는 결코 오직 무자, 그것을 온종일 앉을 때나 갈 때나 참구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무자를 참구의 대상, 수행의 방법으로 삼는 것은 후세, 바로 송대에서 비롯된 바이다. 당대의 공안은 1 차적인 문답이라면 송대에서 새롭게 발견된 공안은 2차적 활용이다. 이것이 원오극근의 공안선이 가지는 성격이다. 다시 말하면 공안선이란 ‘깨닫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선대의 고칙공안을 활용하여 학인들을 지도하는 공부법’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공부법의 출현은 언제라고 보아야 하는가? 공안이 생겨난 그때 그 자리, 곧 8세기 마조(709~788)나 조주(778~897)의 당시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오히려 정확한 인식은 공안과 공안선을 구별하여, 공안의 형태가 출현한 것은 마조나 조주의 당시이지만, 그것을 공안이라고 부르고 공안을 활용한 공부법으로서, 공안선을 발전시킨 것은 송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사상사를 이해하는 개인적인 사상사관의 문제이겠지만, 당대의 크게 활약한 마조, 황벽, 백장, 임제 등은 선문답을 제자들과 자주 하였지만, 그것을 공안이란 용어로 지칭하지는 않았다. 이런 선문답은 송대에 들어와서 공안집으로 결집되고, 특히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널리 유통되면서, 마침내 수행자의 공부법으로 발전되었다. 당대에는 스승과 제자 간에 극히 개인적인 문답일 수밖에 없는 공안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유포되거나, 그런 문답의 존재 자체가 문화 전반에 알려질 수가 없었다. 송대에 들어오면서 지식인 사회에 당대의 공안 이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인쇄문화의 발전에 크게 힘입었다.

 

특히 공안집의 유행에는 1004년에 간행된 경덕전등록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널리 유통된 대표적인 공안집인 원오극근(?悟克勤, 1063~1125)의 벽암록(碧巖錄)도, 설두중현(雪竇重縣, 980~1052)이 경덕전등록의 1700공안 가운데서 요긴한 100칙을 가려 뽑아서 송을 붙인 것이다. 다시 원오극근이 여기에 각 칙마다 서문에 해당되는 수시(垂示), 간단한 논평인 착어(著語)와 평창(評唱)하였고, 이것을 그 제자들에 의해서 편집하여 간행된 것이다. 또한 유명한 공안집으로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의 종용록(從容錄) 이 있다. 이것은 굉지정각이 송 소흥 연간에 고덕의 고칙 100칙을 모아서 송고하였고, 이것을 만송행수(萬松行秀, 1166~1246)가 가정18년(1223) 에 야율초재(耶律楚材)의 청을 받아서 시중(示衆), 평창(評唱), 착어 (著語)를 붙인 것이다. 벽암록 이 임제종의 가풍을 널리 선양한 공안집이라면, 종용록은 조동종 선풍을 거양하는데 널리 이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공안을 활용한 공안선은 역시 송대에, 특히 벽암록 이나 종용록(從容錄) 등과 같은 공안집이 간행된 이후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이 아닌가 한다.

 

 

2. 현성공안

 

원오극근은 벽암록에서 공안을 공부하는 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원오어록에서는 공안의 또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안의 본질을 ‘현성공안’, 곧 그 자체로 진리의 현현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점은 벽암록 보다는 그의 원오어록 에서 두드러진 특징이다. 벽암록에서는 공안이란 용어가 96회 사용된 가운 데 현성공안이란 용어는 5회(5%) 사용된 반면에, 원오어록 에서는 공안이 34회 사용된 가운데 현성공안이 20회(58%)가 사용되고 있다. 이런 점은 벽암록이 공안을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의 역할이 강조된 반면에, 원오어록은 상당하여 직접적으로 진리의 세계를 드러내는 자리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현성공안은 ‘現成公案’ 혹은 ‘見成公案’으로, 글자 그대로 현성된 공안이란 의미이다. 현성에서 현(現, 見)은 지금 현재에 나타남을 의미하고, 성(成)은 완성되어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바로서, 어떤 노력이전에 이미 완성되어짐을 뜻한다. 진리가 감추어진 바가 없이 그대로 현성되었다는 것인데, 수행이나 어떤 인위적인 노력에 앞서 이미 현실 그대로가 진리임을 강조한 말이다. 원오극근은 현성공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성공안은 말하기 이전에 이미 드러나 있고, 근원에 철저하여야 비로소 계합하게 된다. 그래서 덕산(德山)은 문득 방을 들었고, 임제 (臨濟)는 문득 할을 했으며, 목주(睦州)는 문득 현성공안이니, 그대에게 30방을 쳐야겠다고 했다."13)

13) 원오극근어록 (大正臧48, 732中, 744下),

“住東京天寧寺宣和六年四月十九日於當寺爲國開堂 師拈疏云

現成公案未言時 文彩已彰 洞徹根源才擧處 故德山入門便棒 臨濟入門便喝 睦州見僧便道現成公案”,

“資福道隔江見刹竿便去 脚?下好與三十棒 豈不是壁立萬?處透得大丈夫漢”

 

 

여기서 원오극근이 말하는 현성공안은 말하기 이전에 이미 드러난 진리로서 그것은 말할 수 없기에 덕산은 방을 했고, 임제는 할을 한 것이다. 당대에 유행한 방[棒]과 할[喝]은 학인을 일깨우는 수단이라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방할은 그 자체로 진리를 드러냄이며 진리의 표현양식이다는 것이 본질에 보다 가까운 해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안은 바로 현성공안이다. 이것이 바른 견해가 된다. 계속해서 원오극근은 현성공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성공안은 천지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대해탈문이며 일월처럼 밝아서 허공과 같고 부처와 조사와 별개가 아니며 고금에 한결같은 정견이다. 설사 미혹과 개달음이 있다곤 하지만 다만 이것은 배우는 사람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래서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어 성품을 보아서 성불하게 한 것이다. 나중에 육조대사도 역시 한결같이 이 도를 말씀하신 것이다."14)

14) 위의 책, p.769. “師云現成公案 不隔一絲毫 普天?地 是一箇大解脫門 與日月同明 與虛空等量 若祖若佛無別元由乃古乃今同一正見 若是利根上智 不用如之若何 直下壁立萬? 向自己根脚下承當 可以籠?古今 坐斷報化佛頭 更無纖毫?漏 威音王已前無師自悟 是大解脫人 威音已後因師打發 不免立師立資 有迷有悟 雖然如是 要且只是方便垂手接人 所以達磨西來不立文字 直指人心見性成佛 後來六祖大鑑禪師 尙自道 只這不立兩字 早是立了也”

 

 

여기서 현성공안은 말하기 이전에 이미 드러난 진리로서 그것은 대해탈문으로서 부처와 조사의 경지와 전혀 다르지 않는 고금의 정견(正見)이라고 말한다. 이런 현성공안의 선사상은 그의 제자인 대혜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그는 상당하여 “내게 현성공안이 있다. 그대들에게 던지노니 풀이를 해보라. 이것을 ‘죽비’라고 말하면 번뇌가 일어남이요,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어긋난다.”고 말하고 있다.15) 이때 현성공안은 죽비 그 자체이다. 그렇지만 죽비라고 부르면 안 되고, 부르지 않아도 여전히 어긋난다. 이런 의미는 결코 원오극근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조주는 ‘무엇이 부처인가?’ 라는 질 문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한 것이다. 뜰 앞의 잣나무는 그 자체로 현성공안이다.

15) 大慧語錄, (大正臧48, 827下), “徑山將現成公案 爲爾諸人下箇註脚 喚作竹?則觸 不喚作竹?則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공안을 노력하기도 이전에, 진리가 이미 완성되어 눈앞에 현성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왜 다시 고인의 공안을 문제 삼고, 그것을 수행의 도구로서 활용하는 공안선이 필요했던가 하는 질문이 생겨난다. 이미 깨달았다면 공안 자체도 이미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답의 상황에서 깨달은 조사들은 본분사의 입장에서 대답할 수밖에 없고, 그 응답이란 필연적으로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경절처로서, 현성공안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당대에 성립된 1차적인 문답으로서의 공안이다. 그래서 이미 나에게 진리가 현성되었다면 우리는 공안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그곳에서 뚫리지 않고 막힌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문제로 삼아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성공안에 대한 2차적(메타) 방법론적 의미이고16), 송대에서 공안집을 경쟁적으로 편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당대에 성립된 공안이 가지는 수행 방법론적인 의미를 자각한 이는 원오극근 이전에도 있었다. 이점을 잘 보여주는 실례가 여기에 있다.

 

16) 송대의 공안선을 현성공안과 구별하여, 깨닫지 못한 이들을 위한 2차적인 활용으로 이해하였을 때, 서구철학에서 Metaphysics과 유사한 방식으로 비교된다. 철학이란 Physics에 대한 Meta적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듯이, 공안선도 ‘죽비’, ‘뜰 앞의 잣나무’, ‘일면불 월면불’과 같은 일차적인 현성 공안(Physics)에 대한 이차적인 논의, 활용으로써 Meta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옛 스님들은 도를 위하여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면서 살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수행에 한번의 전환을 이루는 옛 조사의 기연 (機緣)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그것을 일로 삼아 반드시 결택(決擇)하여 분명하게 하는 것을 귀중히 여겼다. 그래서 참과 거짓의 기준이 되고 인천의 안목을 이루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종지를 높이 제창하고 진실한 가풍을 널리 떨쳤다. 선대(先代)의 논의(論議)를 인용하여 따져 묻고 깨닫지 못한 공안(公案)으로 채찍질했다. 만일 수행을 거치지 않고 고금(古今)을 억측으로 단정한다면, 그것은 마치 검술을 배우지 않고 억지로 태아의 보검으로 춤을 추는 것과 같다."17)

17) 宗門十規論, 선림고경총서 12, p.239.

 

 

이것은 송대 이전인 당말(唐末)에서 오대(五代)의 혼란한 시기를 살았던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이 쓴, 당시 수행승들의 병폐를 10가지로 나누어서 경책하는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 에 나오는 여섯 번째의 글이다. 당시의 납자들이 선대의 공안(公案)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 의하면, 법안은 당시의 수행자들이 옛 조사의 기연인 공안(公案)을 공부의 길잡이로 삼지 않음을 한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옛 조사가 도에 들어 가는 ‘기연(機緣)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그것을 ‘일로 삼아 반드시 결택(決擇)하여 분명하라’것이고, ‘공안(公案)으로써 공부의 길을 채찍질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안을 이차적인 활용법, 곧 수행의 방법으로 이해하는 좋은 전거이다. 모든 공안은 그 자체로 진리를 드러내는 1차적인 현성공안이다. 그렇지만 그것에 막히고 의심이 생길 때, 그것은 2차적으로 수행과제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되는 수행의 방법으로 두 가지의 요소가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고인의 공안에 대해서 일로 삼아 의심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량분별에 의한 억측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다.18) 이런 요소는 바로 송대에 들면서 벽암록 에 의해서 비로소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확립되었다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안은 현성공안으로 진리 자체를 보인 것이지만, 그것을 그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고 의심이 있다면, 그것을 결택하여 수행의 길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런 공안공부를 화두수행법으로 체계화시킨 이는 원오극근의 제자인 대혜종고였다.

18) 인경, 앞의 책, p.201.

 

 

IV. 대혜종고의 간화선

 

1. 공안과 화두의 구별

 

공안과 화두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본고의 중심과제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원오극근과 대혜종고의 어록에서, 특히 공안과 화두란 용어가 함께 사용되는 문맥을 찾아내어서 그 낱말들이 가지는 의미를 대조하여 보면, 이점은 분명해질 것이다. 먼저 원오극근의 경우를 살펴보면, 벽암록 에서는 공안이란 용어 가 96회, 화두가 19회 사용되고, 그의 원오어록 에서는 공안이 34 회, 화두가 9회 사용되고 있다. 이것으로 보면 원오극근은 공안이란 용어를 화두보다 압도적으로(130/28)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벽암록 에서 공안과 화두가 같은 문맥에서 함께 사용된 예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제76칙에서 발견된다.

 

 

A. 단하스님이 어떤 승려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습니까?” 그 승려가 “산 아래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단하스님이 다시 “밥은 먹었습니까?” 물었다. 그러자 그 승려는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단하스님은 “밥을 가져다 그대에게 밥을 준 그 사람은 눈을 갖추 었습니까?” 묻자, 그 승려는 말문이 막혔다.

 

B. 장경스님이 보복스님에게 물었다. “밥을 가져다 먹인 것은 보은이 있는데, 어찌하여 눈이 없다고 했을까?” 보복스님이 “주는 사람이 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애꾸눈이다”고 대답하였다. 장경스님이 “그 기틀을 다했어도 애꾸눈이었을까?”라고 반문하였다. 보복스님이 “나를 애꾸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대답했다.19)

 

C. 장경스님과 보복스님은 설봉스님의 문하에서 공인의 공안을 들어서 자주 논의하였다. 장경스님이 보복스님에게 물었던, ‘밥을 가져 다 그 사람에게 주어서 보은이 있는데, 어찌하여 눈이 없다고 했을까’ 하는 것은, 필히 공안의 일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을 빌려서 화두를 만들어 보복이 체득한 당처를 시험하고자 했다. 보복스님이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 애꾸눈이다.’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통쾌한 대답이다. 다만 기틀에 당면한 일만을 논의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가문에 있는 출신의 길이다.20)

 

19) 벽암록 , 앞의 책, 203중하, “

【七六】擧 丹霞問僧 甚處來(正是不可總沒來處也 要知來處也不難)

僧云 山下來(著草鞋入爾?裏過也 只是不會 言中有響?含來 知他是黃是綠

霞云 喫飯了也未(第一杓惡水?。何必定盤星。要知端的)

僧云 喫飯了(果然撞著箇露柱 ?被旁人穿?鼻孔 元來是箇無孔鐵鎚)

霞云將飯來與汝喫底人 還具眼?(雖然是倚勢欺人也 是據款結案當時好?倒禪床 無端作什?)

僧無語(果然走不得 這僧若是作家 向他道 與和尙眼一般)

長慶問保福 將飯與人喫 報恩有分 爲什?不具眼(也只道得一半 通身是遍身是 一刀兩段 一手?一手?)

福云 施者受者二俱?漢(據令而行 一句道盡 罕遇其人)

長慶云 盡其機來 還成?否(識甚好惡 猶自未肯 討什?碗)

福云 道我?得?(兩箇俱是草裏漢 龍頭蛇尾 當時待他道盡其機來 還成?否 只向他道? 也只道得一半 一等是作家 爲什?前不?村 後不迭店)”

20) 위의 책. p.204상,

“保福長慶 同在雪峰會下 常擧古人公案商量 長慶問保福將飯與人喫 報恩有分 爲什?不具眼 不必盡問公案中事 大綱借此語作話頭 要驗他諦當處 保福云 施者受者二俱?漢 快哉到這裏 只論當機事 家裏有出身之路

長慶云 盡其機來 還成?否 保福云 道我?得? 保福意謂 我恁?具眼 與爾道了也 還道我?得? 雖然如是 半合半開 當時若是山僧 等他道盡其機來還成?否”

 

 

이것은 단하끽반(丹霞喫飯)의 공안이다. 위에서 A문단은 단하스님과 어떤 승려와의 문답이고, B문단은 공안 A에 대한 장경스님과 과 보복스님의 논의이며, C문단은 원오극극의 논평글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론 당대, 당말, 송대의 순서로 이루어진 문답이다. 단하스님(738~ 823)과 설봉스님(822~908)은 당대의 뛰어난 선승들이고, 장경스님 (854~932)과 보복(?~928)스님은 당말에 활동한 선승들이다. 원오극근 (1063~1125)은 송대에 활동한 거목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안과 화두란 용어를 동시에 사용된 논평글 문단 C이다. 이것을 보면, 원오극근은 공안과 화두을 명백하게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공안은 ‘단하끽반’이고, 화두는 장경 스님이 보복스님에게 했던 ‘어찌하여 눈이 없다고 했을까’하는 질문이다. 이것을 원오극근은 <필히 공안의 일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빌려서 화두를 만들어 보복이 체득한 당처를 시험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공안은 단하스님과 어떤 승려와의 일차적인 문답이라면, 화두는 장경이 일차적인 단하끽반의 공안을 근거로 하여, 상대방 보복이 체득한 당처를 묻고, 점검하는 질문이나 언구로서 2차적인 사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안은 고인의 문답인 점에서 과거의 사건사례이지만, 화두는 공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나에게 적용되는 실질적인 질문인 점에서 차이가 난다. 공안집에 수록된 공안들은 과거의 사건으로써, 나의 삶과는 무관하게 저기에 놓여 진 것이지만, 화두는 내게 직접적으로 대답을 요청하는 절박한 실존적 과제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원오극근은 공안과 화두는 명백하게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이점은 양자를 별도로 사용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단독으로 화두란 용어를 사용할 때의 실례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제2칙] 조주가 대중에게 법문을 하였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揀擇)하지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 간택이요, 혹은 명백함이다. 노승은 명백 속에도 있지 않다. 그런데 그대들은 보호하고 아끼려 하지 않는가?’ 이때 승려가 질문하였다. ‘명백 속에도 존재하지 않다면, 보호하고 아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주가 나는 ‘모른다’ 고 대답하자, 다시 ‘화상께서 이미 모른다면 어찌하여 명백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까?’ 그러자 조주는 ‘묻는 것을 끝냈으면 물러가라’고 하였다.

 

[평창] 조주는 평소에 이 화두를 자주 제시하였다. ‘다만 간택을 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은 3조의 신심명(信心銘) 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을 하지 않을 뿐, 미움과 사랑을 떠나면 통연 명백하다’고 했다. 시비를 하는 순간 이것은 간택이고, 명백이다.21)

21) 위의 책, 141下,

“擧趙州示衆云 至道無難 唯嫌揀擇 ?有語言 是揀擇是明白老僧不在明白裏 是汝還護惜也無

時有僧問 旣不在明白裏護惜箇什

?州云我亦不知

僧云和尙旣不知 爲什??道不在明白裏

州云問事卽得 禮拜了退

趙州和尙。尋常擧此話頭。

只是唯嫌揀擇 此是三祖信心銘云 至道無難 唯嫌揀擇但莫憎愛 洞然明白 ?有是非 是揀擇 是明白 ?恁?會 蹉過了也”

 

 

이것은 벽암록 제2칙으로, 조주와 어떤 승려와의 문답을 제시한 것이다. 이때 핵심된 주제는 3조 승찬의 신심명(信心銘) 에서 사용 된 간택(揀擇)과 명백(明白)이다. 이때에도 역시 원오극근은 공안과 화두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공안이 간택과 명백에 관한 어떤 승려와 조주의 문답이라면, 화두는 3조승찬의 신심명 에 나오 는 언구를 가리킨다. 정리하면, 선대의 선문답을 가리킬 때는 공안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공안을 관통하는 핵심된 언구를 가리킬 때는 화두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런 구별은 대혜종고의 경우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하지만 대혜는 화두의 개념에 새로운 선사상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어록에는 공안이 34회, 화두가 37회 사용되고 있다. 이점은 원오극근이 상대적으로 공안이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였고, 대혜종고는 화두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혜는 공안을 비판하고, 화두 참구를 역설한 점에서 원오극근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대혜에게 있어서 공안은 재판의 판례처럼 과거의 선문답의 단순한 기록일 뿐이다. 공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박한 자기문제로서 화두가 요청된다.

 

대혜종고는 공안을 비판적으로 말할 때, ‘這一則公案’,22) ‘舊公案’,23) ‘古人公案’24)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과거 선대의 선문답의 사례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어법들이다. 공안은 저기(這)에 놓여 있고, 그것은 과거(舊)의 사태이고, 옛 사람들(古人)이 사용한 것 들이다. 하지만 화두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고, 과거의 사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일이며, 옛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절박한 과제이다. 그래서 대혜는 화두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지, 공안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삿된 마귀라고 극언한다. 바로 이점이 원오극근과 다른 점이다. 다음 인용문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우이다.

 

22) 대혜어록 , 앞의 책, p.814중, “南泉遂指庭前華謂大夫曰 時人見此一株華 如夢相似 師云 這一則公案流布叢林近三百載 中間有無數善知識出世 只是未嘗有一人與伊分明判斷”

23) 위의 책, p.822상, “上堂 今朝正月半 有則舊公案 點起數碗燈 打鼓普請看 看卽不無 忽爾油盡燈滅時 暗地裏切忌撞著露柱”

24) 위의 책, p.931상., “妙喜不可只恁?休去 亦放些惡氣息 ?去熏他則箇 渠敎不要引經敎及古人公案 只據目前直截分明”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모두 하나의 의심이다. 화두에서 의심을 타파하면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무너진다. 만약 화두를 타파하지 못했다면, 화두와 함께 벼랑 끝을 가라. 만약 화두를 버려두고, 따로 문자에서 의심을 하거나, 경전에서 의심을 하거나, 고인의 공안에서 의심을 하거나, 일상의 번뇌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삿된 마귀의 권속이다."25)

25) 위의 책, p.930상.

千疑萬疑只是一疑 話頭上疑破 則千疑萬疑一時破 話頭不破 則且就話頭上與之?崖 若棄了話頭 ?去別文字上起疑 經敎上起疑 古人公案上起疑 日用塵勞中起疑 皆是邪魔眷屬

又不得向擧起處承當 又不得思量卜度 但只著意就不可思量處思量 心無所之 老鼠入牛角便見倒斷也 寫得如此分曉了”

 

 

이것의 초점은 공안을 부정하고, 화두에서 의심을 일으키라는 것이 다. 이것은 선사상사에서 중요한 사상적 전환점이다. 그는 화두의 본 질을 ‘의심’이라고 규정하고, 그 의심을 ‘화두’에서 일으키라고 말한 다. 만약에 ‘문자’, ‘경전’, ‘고인공안’, ‘일상사’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삿된 마귀의 권속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배척해야할 대상 가 운데, 문자, 경전, 일상사 가운데 공안(公案)을 분명하게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을 보면 대혜에게 있어서는 화두와 공안은 동일한 개념이 결 코 아닐 뿐만 아니라, 공안은 오히려 배척의 대상이 된다. 공안은 단 지 저기에 놓여있는 과거의 사례에 불과하지, 정확하게는 나와는 무 관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공안의 갯수를 따지자면 천만 가지일 것이 다. 그러나 이 모든 의심은 하나의 화두로 귀착된다. 이 하나의 화두 란 바로 내가 실제로 의심을 일으키는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킨다. 그 러므로 개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화두는 오직 한 개일 수밖에 없다. 옛 조사의 공안들을 조사해 보고 이해하고자 하나, 그 속에서 주체적 으로 자기 실존의 문제로서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지 식을 첨가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안을 배격하는 이런 대혜의 태도는 당시 사대부와 납자들이 조 사의 공안을 시험과목처럼 암송하거나 단순하게 공안의 문답을 흉내 내는 사례를 목격하고서 비롯되었다. 아래 대혜종고의 법문은 당시 지식인 계층인 사대부에게 보인 글이다.

 

 

"사대부들은 구경의 일을 참구할 때, 처음에 그 본질을 알지 못한 채로, 다만 고인의 공안에 천착하여 지식과 이해만을 구한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설사 일대장교를 모두 알고 다 이해한들 납월 삼십일에 생사가 도래해서는 전혀 붙잡을 곳도 없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선지식이 설한 이런 구경의 일을 듣고서 心意識으로 사량하여, ‘만약 그렇다면 공에 떨어지지 않을까’(두려움을) 낸다. 사대부 가운데 열 가운데 오쌍이 이런 견해를 낸다."26)

26) 위의 책, 899중, “士大夫要究竟此事 初不本其實 只管要於古人公案上 求知求解 直饒爾知盡解盡一大藏敎 臘月三十日生死到來時 一點也使不著 又有一種?聞知識說如是事 又將心意識 ?量卜度云 若如此則莫落空否 士大夫十箇有五雙 作這般見解”

 

"제방의 기특하고 묘한 언구에 애착을 내지 말라. 종사들께서 각자 주장하여 밀실에서 전수한 고인공안의 유형들은 모두 잡다한 독[雜毒]이다. 이런 것들은 아뢰야식 가운데 겁겁생생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로 그것으로 힘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장애를 입어서 끝내는 도의 안목을 어둡게 한다. 고인들께서 불가피하게 배우는 자를 위해서 차별의 허다한 지해를 보인 것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도에 위배되는 쓰레기 같은 말이다. 대중의 근기에 따른 차별된 약이란 차별된 병을 치료하고, 그대의 심지가 안락하여 차별이 없는 경계에 이르게 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오늘날 오히려 이런 차별 의 언어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다시 그 약에 집착하여 병이 되니, 참 가엽다."27)

27) 위의 책, 892하, “莫愛諸方奇言妙句 宗師各自主張 密室傳授底 古人公案之類 此等雜毒 收拾在藏識中 劫劫生生取不出生死岸頭 非獨不得力 日用亦被此障? 道眼不得明徹 古人不得已 見汝學者差別知解多而背道泥語言 故以差別之藥 治汝差別之病 令汝心地安樂 到無差別境界 今返以差別語言爲奇特 執藥爲病 可不悲夫”

 

 

대혜종고는 공안집의 병폐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것은 궁극의 일구를 참구하는 수행자에게 쓰레기 같은 말이고 도의 안목을 멀게 하는 독이다. 진실한 자기 내적인 의심 없는 단순한 공안집(公案集)의 병폐를 목격한 그는 마침내 스승의 저술인 벽암록을 불태워버렸다.28) 이는 공안보다는 화두를 강조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물론 대혜가 현성공안으로서 공안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공안도 또 하나의 지식이고, 사량분별에 의한 또 하나의 집착의 대상이라면, 그것은 잡독으로써 생사의 언덕을 건널 수가 없으니,29) 쓰레기이고, 불태워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때야 비로소 간화수행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오극근의 공안 선과 구별되는 대혜종고의 간화선이다.

 

28) 위의 책, p.139상, “碧巖集者 ?悟大師之所述也 其大弟子大慧禪師 乃焚棄其書 世間種種法皆忌執著 釋子所歸敬莫如佛 猶有時而罵之 蓋有我而無彼 由我而不由彼也 舍己徇物 必至於失己 夫心與道一 道與萬物一 充滿太虛 何適而非道 第常人觀之 能見其所見 而不見其所不見 求之於人 而人語之 如東坡日喩之說 往復推測 愈遠愈失 自吾夫子體道”

29) 위의 책, 892하, “莫愛諸方奇言妙句 宗師各自主張 密室傳授底 古人公案之類 此等雜毒 收拾在藏識中 劫劫生生取不出生死岸頭 非獨不得力 日用亦被此障? 道眼不得明徹 古人不得已 見汝學者差別知解多而背道泥語言 故以差別之藥 治汝差別之病 令汝心地安樂 到無差別境界 今返以差別語言爲奇特 執藥爲病 可不悲夫”

 

 

만약 기존의 일부 견해대로 공안과 화두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그래서 공안선과 간화선을 동등한 의미로 사용된다면, 대혜 간화 선의 정체성은 상당하게 혼란을 겪게 된다. 만약 공안이 잡독이고, 쓰레기이고, 삿된 마귀의 말이라면, 화두와 구별하지 않는 채로 공안 참구를 강조하는 이들은, 대혜의 간화선의 입장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잡독이고, 쓰레기이고, 삿된 마귀의 말을 귀중하게 여기는 결과가 된다.30) 대혜 간화선의 특질은 공안과 화두를 엄격하게 구별하면서,북송대 공안선의 병폐에 대한 대안으로써 출현했다. 그런데 학계에서 공안에 대한 대혜의 비판부분은 그렇게 주목되지 못한 부분이다. 대부분 묵조선에 대한 대혜의 비판에 초점이 모아지면서 논문들이 발표되었지만,31) 묵조선만큼 강력하게 비판하는 고인공안에 대한 대혜의 시각은 별로 논의되지 못했다. 이것은 공안과 화두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기존의 선입관 때문에 주목되지 못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제로 대혜의 공안선에 대한 비판은 묵조선 비판과도 연결되어 있다. 공안은 결국 현성공안이고, 그것이 현성공안일진댄, 진리는 이미 드러나 있다. 조동종은 진리는 이미 드러났기에 묵묵히 비추어볼 [?照] 뿐, 다시 애써 수행과 깨달음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無修無證] 고 말한다. 하지만 임제종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게으름이고 일종의 사량분별의 일종에 불과하다. 진리는 드러났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경험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것은 지식이고 사량분별의 일종이기에 공안보다는 화두에서 의심을 짓고, 그것을 참구하라는 태도가 보다 솔직한 태도라고 본 것이다.

 

30) 최근 일본학계에서도 대체로 학자들은 간화선과 공안선을 동일한 의미로 자주 사용하곤 한다. 이를테면, 국내에 최연식 박사에 의해서 소개된 伊吹敦, 2001, 禪の歷史, 최연식 옮김, 2005, 중국선의 역사 (서울: 대솔바 람), p.191에서 ‘공안비평의 유행과 깨달음의 체험의 중시,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남송시기에 생겨난 것이 공안선이다. 이것은 오조법연과 원오극근에게서 맹아로 싹트고 대혜종고에 의해서 계승되어 비로소 명확한 방법론으로 인식된 것으로, 공안을 가지고 수행자에게 거의 강제적으로 의단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깨달음을 획득하도록 하는 수행법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 대혜종고가 공안을 냉정하게 비판하면서 화두에 의한 간화선이 성립된 사실을 간과한 역사적인 평가이다. 또한 역시 한국의 선학자들이나 수행자들도 마찬가지로. 공안과 화두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대표적인 실례를 들어보면, 성철, 1981, 禪門正路(서울: 장 경각)의 경우이다. 禪門正路 머리말[緖言]에서 ‘견성방법은 佛祖公案을 참구함이 가장 첩경이다.’라고 말하고, 같은 책 16장에서도 ‘오직 실참실구에 있을 뿐이니, 불조의 公案을 盡心力究하여 이에 透徹無餘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하게 공안참구를 강조한 것으로 대혜의 간화선의 입장이기보다는 원오극근의 공안선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런 공안선의 성격을 다시 박성배 교수는 ‘돈오돈수적 공안선’이라고 규정한다(박성배, 1990, ?성철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 보조사상 제4집(서울: 보 조사상연구원). 그렇다면 돈오돈수적 공안선은 당대, 북송대, 남송대의 선사 상사적인 특징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한 결과로서 역사적인 시기구별과 더불어서 간화선의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시킬 수가 있다. 한편, 중국학계에서는 북송대의 공안에 대한 개념적인 접근방식을 ‘문자선’이라고 표현한다. 국내에서도 김진무박사에 의해서 불교와 유교 (운주사) 등이 소개된 賴永海교수는 ?宋代看話禪及其思想特質?, 간화선과 현대사회 (보조사상연구원 제4차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2005)에서 대혜종고가 비판한 북송대의 선을 문자선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필자는 ‘문자선’이란 용어가 송대 선종사의 현실을 표현하기는 너무 포괄적인 용어라고 본다. 문자선은 송대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존재할 수가 있는 잘못된 선의 표현양식이 아닌가 생각 한다. 공안이란 용어가 송대에 본격 출현하였고, 공안에 대한 공부방식을 비판하면서 간화선이 성립된, 송대 당시 선종계의 분위기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공안선’이란 용어가 더 적절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대혜종고는 공안을 해설한 스승의 저술인 『벽암록』을 불태워버렸고, 공안에서 공부하는 방식을 궁극의 도에 장애하는 쓰레기이고, 불태워야 하는 잡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의심은 공안이 아니라, 화두에서 불러일으켜야 됨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 에서 볼 때, 간화선이 비판한 대상은 문자선보다는 공안선이었다는 기술이 더 구체적이고,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31) 廣田宗玄, 2000, ?大慧宗?の弁邪正說について?, 禪學硏究 第78號. 김호귀, 2000, 대혜의 묵조선 비판에 대해서, 보조사상 제13집.

 

 

2. 화두의 수행론적 성격

 

사상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혜의 간화선은 밖으로는 묵조선과 안으론 공안선의 병폐를 비판하고, 화두에 대한 의심을 강조함으로써 성립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이 간화선의 중요한 정체성이다. 간화선이란 선문답의 공안을 관통하는 핵심된 일구, 곧 화두에 대한 의심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한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다면, 그것은 수행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화두는 수행하는 실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가? 실제로 좌복에 앉으면 화두는 어떻게 작동한다는 것이 제시되어야 한다. 바로 이점이 원오극근의 공안선과는 구별되는 대혜 간화선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대혜는 상당법문에서는 일구(一句)에 대한 문제를 자주 거론하지만, ‘보설’, ‘법어’, ‘서장’ 등의 법문에서는 주로 화두참구를 강조하고 있다. 대혜가 화두를 권하는 방식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먼저 정혜의 개발로서, 화두는 산란심으로서의 혼침(昏沈) 과 도거(掉擧)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초기불교 이래로 한결 같이 언급한 장애는 바로 혼침과 도거이다. 혼침은 수마(睡魔)로 발전하고 도거는 망상(妄想)으로 자라난다. 이런 장애를 극복하여 정혜를 개발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법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정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정혜를 개발하는 방식이 없다면 그것은 불교의 수행법이라고 부를 수 없다. 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요하게 앉아 있을 때, 혼침에 빠지거나 도거에 휩쓸리지 말라. 혼침과 도거는 성현이 경계한 바이다. 조용하게 앉아서 이들이 현전하 면 곧 깨닫고, 오로지 개에 불성이 없다는 화두(話頭)를 들라. 그러면 두 가지의 병폐가 애써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금방 가라앉을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하다보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니, 이때가 바로 힘을 얻는 곳이다. 또한 이것이 고요한 곳에 공부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공부이다."32)

32) 위의 책, 922中,

“坐時不得令昏沈 亦不得掉擧 昏沈掉擧先聖所訶 靜坐時?覺此兩種病現前 但只擧狗子無佛性話 兩種病不著用力排遣 當下??地矣 日久月深?覺省力便是得力處也 亦不著做靜中工夫

只這便是工夫也靜坐時?覺此兩種病現前 但只擧狗子無佛性話 兩種病不著用力排遺”

 

 

혼침은 지혜의 상실을 표시하고, 도거는 선정의 부재임을 말한다. 이것들을 극복하는 것은 곧바로 정혜의 개발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간화선은 화두로서 혼침과 도거를 일시에 치유하고, 정혜를 개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임을 제시한 것이다.

 

둘째는 깨달음의 강조이다. 닦음이 아니라, 무명으로부터 깨어남 [悟]을 중요시한다. 이것은 묵조선 비판으로 나타났으며 묵조선의 비판을 통해서 화두의 의미는 더욱 구체화되었다. 묵조(?照)란 말은 그대로 ‘침묵한 가운데 비추어 본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수행법은 정좌만 있고 묘한 깨달음(妙悟)은 없다고 대혜는 비판한다.

 

 

"한 부류의 삿된 스승(邪師)이 있으니, 그들은 묵조선을 설한다. 그 들은 온종일 일에 관여하지 말고 쉬어가라고만 가르친다. 소리도 내지 말라 금시에 떨어질까 두렵다고 말한다. 총명하고 영리한 사대부들이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여 삿된 스승이 가르친 고요함에 이끌려서 힘을 더는 곳을 만나면 곧 이것이구나 하고서, 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묵묵하게 비춤만을 모토로 삼는다. 그 동안 구업을 짓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 병폐를 구하려고 애썼다. 이제 묵조선의 병폐를 아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원컨대 공께서는 다만 의정(疑情)을 타파하지 못하는 곳을 향하여 한결같이 참구하되, 행주좌와에서 조주의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를 놓지 말라. 이 무자는 생사의 의심을 타파하는 한 자루의 칼이다.”33)

33) 위의 책, 923상, “有一種邪師 說?照禪 敎人十二時中是事莫管 休去歇云 不得做聲 恐落今時 往往士大夫 爲聰明利根所使者 多是厭惡鬧處 乍被邪師輩指令靜坐 ?見省力 便以爲是 更不求妙悟 只以?然爲極則 某不惜口業 力救此弊 今稍有知非者 願公只向疑情不破處參 行住坐臥不得放捨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這一字子 便是箇破生死疑心底刀子也”

 

 

수행에서 묵조선자들은 묵조하는 것으로 극칙(極則)으로 삼고 있는 데, 이것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대혜는 본다. 말하자면 정혜 가운데 정은 있으나 혜가 부족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는 깨달음이 존재하지 못한다. 화두를 의심함으로써 깨달음의 지혜를 발견할 수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화두가 없으면 그것은 묵조이고 끝내는 혼침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대혜의 간화선은 ‘깨달음(悟)’이 강조되는 반면에, 묵조선은 ‘고요함(?)’이 강조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화두는 다만 화두일 뿐, 어떤 사량분별도 배제한다. 이것은 잘못된 화두참구를 경계한 것으로 대혜가 자주 강조하는 무자화두와 관련된 심종병(十種病)과 관련된다.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병통에 대한 규정이다. 이것 역시 간화선의 태생적인 특징이다. 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그때에 단지 의심하는 화두를 들라. 조주의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의 화두를 들고서 깨어 있기만 하라. 왼쪽으로 가도 옳지 않고, 오른쪽으로 가도 옳지 않다.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구하지도 말고, 일어나는 곳을 들고서 그곳으로 인정하지도 말고, 현묘하다는 것을 짓지도 말고, 있고 없음으로 헤아리지 말고, 참된 없음의 없음[眞無之無]이라고 따지지 말라. 또한 일없는 것으로 앉아 있지도 말고, 돌이 부딪치어 섬광이 일어나는 곳으로 알지 말고, 다만 마음을 쓰지 말고, 마음을 쓰는 곳이 없을 때에 공(空)에 떨어짐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곳이 바로 좋은 곳이다. 홀연히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 곧 고꾸라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 "34)

34) 위의 책, 941中,

“只以所疑底話頭提管 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只管提?擧覺 左來也不是 右來也不是 又不得將心等悟 又不得向擧起處承當又不得作玄妙領略 又不得作有無商量 又不得作眞無之無卜度 又不得坐在無事甲裏 又不得向擊石火閃電光處會 直得無所用心 心無所之時 莫?落空 這裏?是好處 驀然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간화선은 ‘이야기(話)’나 이야기와 관련된 ‘언구’를 지켜보는 방법 론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언어적인 유추나 분별로써 수행한다고 착각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오류는 원오극근의 공안선에 대한 사대부들의 접근방식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량분별의 부정은 대혜 간화선의 핵심된 부분이다. 현성공안의 진실에 계합하기 위해서 는 사대부들의 잘못된 논리적인 타협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강한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화두 참구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V. 맺는 말

 

본고의 중심 과제는 간화선의 기본 개념인 공안과 화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간화선의 성립시기의 문제와 관련된 과제이다. 만약 공안과 화두를 동일한 의미로 간주한다면, 선종사에서 조사선과 간화선, 혹은 공안선과 간화선의 구별은 무의미해지고, 결과적으로 간화선의 정체성을 세울 수가 없다. 공안과 화두의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 본고는 원오극근과 대혜종고의 어록에서 어떻게 이들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첫째, 이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공안과 화두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공안이 고인의 선문답의 사례라면, 화두는 공안 가운데 핵심이 되는 언구를 가리킨다. 또한 공안과 공안선은 구별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다. 공안은 현성공안으로써 그 자체로 진리를 드러내는 1차적인 문답이지만, 공안선은 공안을 활용한 공부법으로써 2 차적인 활용이다. 현성공안의 선문답은 당대에 성립되었지만, 그것을 공안이라고 지칭한 것은 송대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원오극근의 경우에는 선대의 공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것을 학인들에게 공부하는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당대의 공안이 일차적인 현성공안이라면 원오극근이 사용한 방식은 이차적인 활용으로. 공안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배격하고, 공안이 가지는 낙처를 물어서, 수행과 수행을 점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원오극근의 선을 공안선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셋째, 대혜종고의 경우에는 전체적인 방향은 원오극근의 사용방식을 계승하고 있지만, 공안을 철저하게 부정한 점에서 크게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는 원오극근처럼 공안을 사량분별로 이해하는 방식을 거부하지만, 공안을 삿된 마귀, 불태울 쓰레기, 수행자의 안목을 장애하는 독으로 묘사하면서, 공안이 아닌 화두에서 의심을 일으킴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대혜의 간화선이 공안선과 묵조선의 비판을 통해서 성립되었음을 말한다.

 

넷째, 대혜종고는 실천과정의 방법으로 간화(看話)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화두의 본질을 의심으로 파악하고, 화두를 통한 깨달음을 강조한 것이다. 나아가서 화두를 통해서 혼침과 도거의 병을 극복하고 정혜를 개발시킬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대부의 사량분별을 고칠 수 있는 경절처임을 강조한다.

 

이상으로 공안과 화두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서 사용되어야 함을 논증하였는데, 이것은 선종사의 시기구별과도 직결된다. 공안은 당대에 성립되었지만, 당대의 공안을 수행의 대상이나 방법으로 활용한 것은 송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안의 성립을 그대로 공안선의 출현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혜의 간화선은 북송대에 성립된 공안선을 배격하고 화두에서 공부 길을 마련한 점에서 원오극근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선사상사에서 공안선과 구별되는 진정한 간화선은 대혜종고에 의해서 확립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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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Kongan Seon and Kanhwa Seon

Inkyung

 

Kongan and hwadu are the key words of kanhwa Seon. Scholars and practitioners have both used the word to mean the same thing. This paper is a discussion of how the two words, hwadu and kongan, actually refer to two different meanings.

The original form of kongan first appeared in China during the Tang Dynasty at around the eighth century. It is record of questions and responses between eminent masters and their disciples. However, during the Song Dynasty kongan became endowed with a new practical meaning. It became an educational tool or used as a part in the process of Buddhist cultivation. At the same time, kongan was also popular among the intellectual class but it was mainly discussed and understood at the conceptual level.

In this state of affairs, Ta-hui was harshly critical of the way kongan was used and understood. He argued that kongan was poisonous and rubbish that obstructed the mind from enlightenment. Rather, he emphasized resoling doubts about hwadu and not kongan which became focus of Ta-hui’s kanhwa-Seon. According to Ta-hui, hwadu was a method to break wandering thoughts and drowsiness. The approach of hwadu retains much less of the conceptualization associated with the complex interpretation of kongan. In this sense, hwadu and the kongan have had different meanings in the history of Seon thought.

 

 

Keywords:

 Kongan (公案), Hwadu (話頭), Kongan Seon (公案禪), Kanhwa Seon (看話禪), Ta-hui (大慧), Weonogeukgeun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