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사선(無事禪)-1
본래무사를 모토로 일상의 평상무사 실현
일상 자체가 수행이고 깨달은 자의 삶 추구
무사(無事)의 어의(語義)는 ‘아무런 일이나 문제가 없는 것’ ‘평온함’을 뜻한다.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고 정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무사는 당대(唐代) 조사선이 추구했던 수행의 도달점(목표)이었고, 동시에 깨달은 자의 삶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본래 애시 당초 아무 일이 없는 경지 즉 본래무사(本來無事)를 모토로 하여, 일상생활에서 평상무사(平常無事)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무사선은 조사선 시대의 무사선과 간화선 시대에 이르러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가 비판하는 무사선이 있다. 이 둘은 동명이질(同名異質)로 좀 다르다. 조사선 시대 무사선의 지향점은 ‘본래무사(本來無事)’, ‘평상무사(平常無事)’로, 깨닫기 위한 인위적인 수행은 오히려 향외치구심(向外馳求心)이 되며, 그것은 도(道)를 장애하는 번뇌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심(無心), 무위(無爲)한 입장과 관점에서 깨달아야 한다는 의식이나 인위적인 마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평상무사, 즉 일상 그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하고, 깨달은 자(부처)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사’ ‘본래무사’ ‘평상무사’의 사상적, 철학적 바탕은 육조 혜능이 말한 무념위종(無念爲宗) 즉 무념무심(無念無心)으로 수행의 근본을 삼음과, 그리고 임제 의현이 말하고 있는 무수무증(無修無證)이다.
즉 ‘본질적으로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없다’고 하는 관점에 있는 무사로, 이것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본 무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번뇌 망념과 집착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 결과 닦아야 할 일(事)까지도 없는 것을 뜻한다.
그런 존재를 ‘임제록’에서는 무사인(無事人, 일없는 사람), 또는 요사인(了事人, 일 마친 사람)이라고 한다.
반면 대혜종고 즉 송대 간화선에서 비판하는 무사선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묵조), 즉 무사안일과 무위도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데 그 1차적인 대상은 임제종 황룡파의 동림 상총(東林常總, 1025∼1091)이었다.
대혜는 임제종 양기파로 같은 계통이었는데, 그는 ‘종문무고(宗門武庫)’에서 “조각(照覺, 동림상총의 시호)은 평상무사함과 지견해회(知見解會, 알음알이)가 없는 것으로써 도(道)를 삼고 있으며, 더욱더 묘오(妙悟, 깨달음)가 있음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평상무사, 안일무사에 빠져서 묘오(妙悟)가 있는데도 구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편 이것은 굉지 정각의 묵조선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는데, 차이점은 대혜 종고 쪽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면 묘오가 있다는 것이고, 묵조, 무사선에서는 일체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묵묵히 앉아서 번뇌 망상을 잊는 것, 그때그때 일어나는 허망한 생각을 잊는 것, 그것이 곧 불도수행이라는 것이다.
대혜 종고는 그것을 무사갑리(無事甲裏, 안일 무사한 것), 무사계리(無事界裡, 무사에 빠져서 진정한 불도수행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라는 말로 비판했다.
사실 무사선은 그 본래 의도와는 달리 말류(末流)로 가면서 폐단도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본래무사, 평상무사의 미명 아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동림 상총과 대혜 종고는 같은 임제종이었지만 수행법은 달랐다는 것이다. 동림 상총의 황룡파는 조사선 즉 무사선(혹은 묵조)이었고 대혜의 양기파는 간화선이었던 점을 본다면 임제종이라고 해서 모두 간화선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간화선만이 바른 선(禪)이고, 그 밖의 선(禪)은 모두 사선(邪禪)이라는 규정은 대혜 종고(간화선)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2. 무사선(無事禪)-2
대혜가 무위도식이라 비판한 선과 달라
당대 무사선은 구속 벗어난 절대적 존재
당대(唐代) 조사선은 곧 무사선이었다. 이 시대 선승들은 모두 무사를 수행의 목표로 삼았다. 그것을 영가 현각(665∼713)은 ‘증도가’에서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이라고 표현한다.
절학(絶學)은 무학(無學)과 동의어로, ‘배워야 할 것은 다 배우고, 닦아야 할 것은 다 닦았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운다거나 닦아야 할 것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라는 뜻이다.
무위(無爲)는 곧 무사(無事)로 무사선을 잘 표출하고 있는 말이다. 이어 나오는 문구는 불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인데, (본래무사이므로)망상을 제거하려고도, 진(眞)을 구하려고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조사선 시대의 무사선은 송대(남송) 대혜 종고(1089∼1163)가 ‘무사갑리(無事甲裏, 안일 무사한 것),’ 무사계리(無事界裡, 무사에 빠져서 진정한 불도수행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 또는 ‘무위도식’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고 있는 무사선과는 다르다.
당대 조사선 시대의 무사선은 본래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평상무사(平常無事)로, 무심한 경지에서 인위적인 조작을 떠난 것, 모든 수행을 완료한 사람, 수행해야 할 것은 다 수행해서 마친 사람(了事人), 그리하여 숙제나 과제 등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는 사람(無事人)을 가리키며,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절대적인 존재(無事是貴人)를 가리킨다.
무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임제 의현(?∼867)이 강조하고 있는데, 그의 법어집 ‘임제록’에는 무사가 무려 14회, 그리고 무사인,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 무사인이 가장 존귀한 사람), 수처무사(隨處無事, 가는 곳마다 무사), 평상무사(平常無事, 평상한 무사) 등 무사와 관련된 어휘가 적지 않게 나온다.
‘임제록’ 12-1단을 보도록 하겠다.
“납자들이여, 불법은 특별한 수행과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시에 마음에 조작심을 갖지 말고 무사(平常無事)하게 지내면서 대소변을 보고 싶으면 대소변을 보고 옷을 입고 싶으면 입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누워 잠을 자는 것(日常), 그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의 말을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곧바로 그 뜻을 이해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밖을 향하여 공부를 하는 것은 모두 다 어리석은 녀석들이라고 했다. 어느 곳 어디서든 번뇌 망상에 끌려다니지 않는 주인이 된다면 그 자리가 그대로 진실한 깨달음의 자리이다
(師, 示衆云. 道流. 佛法無用功處. 祇是平常無事. ?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愚人笑我, 智乃知焉. 古人云. 向外作工夫, 總是痴頑漢. 爾且. 隨處作主, 立處皆眞.‘臨濟錄’)”
임제가 말하고 있는 평상무사란 곧 평상무위(平常無爲)로, 앉아서(좌선) 부처(깨달음)가 되겠다고 애쓴다거나(좌선제일주의) 특별히 무엇을 닦아야 한다는 의식(意識)을 갖는다거나 또는 인위적인 행동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불도수행은 인위적인 노력을 가(加)하는 것이 아니며, 행주좌와의 일상 그대로가 불도수행이고, 평상시의 생활 그대로가 진리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 순간 도(道)와는 거리가 먼 사마외도(邪魔外道)라는 것이다.
우두 법융(594∼657)도 ‘심명(心銘)’에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자 한다면 무심하게 수행하라(欲得心淨, 無心用功)”고 말하고 있고, 마조 도일(709∼788)도 “밖을 향해 치구(馳求)하면 진실과 더욱 멀어질 뿐이다(若向外馳求, 轉疎轉遠. ‘마조어록’)”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보리 달마 역시 “밖으로는 모든 반연(인연)되는 것을 쉬고 안으로는 헐떡거림(치구심)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처럼 되어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다(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牆壁 可以入道)”고 한 것처럼, 조사선의 수행의 목표는 한마디로 본래무사, 평상무사를 바탕으로 한 무사선이었다.
3.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주시해서 번뇌 망념 제거하는 선
깨달음은 청정함이 내 마음에 있음 인식
화두 즉 ‘무(無)’, ‘간시궐’, ‘마삼근’, ‘정전백수자’ 등 화두 참구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선 수행법(공부법)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간화선은 중국 남송 때의 유명한 선승 대혜 종고(大慧宗, 1089~1163)에 의해 성립되었다. 그 이전엔 보리 달마 이후 중국의 전통적인 선(禪)인 조사선이 있었고 같은 시대에는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선사가 만든 묵조선이 있었다.
그런데 간화선과 묵조선은 그 수행법이 상반되어 서로 대단히 비판했다. 그 문제는 ‘간화선과 묵조선’ 항목에서 쓰기로 하고 여기서는 간화선의 핵심과 그 참구법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간화선을 이해하자면 먼저 ‘간화(看話)’ 두 글자에 대한 이해가 급선무이다. 명칭은 내용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에 명칭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없이는 내용에 대한 이해도 대충일 수밖에 없다.
먼저 ‘화(話)’는 화두를 말한다. 그리고 ‘간(看)’은 ‘주시하다’, ‘직시하다’, ‘바라봄’, ‘지켜봄’ 등을 뜻하는데, 대충 관찰하거나 주시하는 것이 아니고 예의주시하는 것, 주의(注意)하여 각찰(覺察)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간화선(看話禪)’이란 화두를 주시, 직시하는 방법으로 번뇌 망념을 제거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인데, 흔히 ‘화두를 들다(擧話)’, ‘화두를 참구(究)하다’라고 한다.
‘간(看)’은 최근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사띠(念, sati)와 같다. 사띠를 마음챙김, 알아차림, 주의집중, 깨어있음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원래 의미는 ‘잊지 않음(不忘)’ ‘억념(憶念, 기억하고 있음)’을 뜻한다.
어떤 것에 집중함으로써 번뇌 망상 등 잡념을 제거하는 것을 말하는데, 간화선 역시 화두를 주시, 직시 또는 화두에 집중, 몰입, 올인(all in)함으로써 괴로움, 증오, 분노, 욕망 등 번뇌 망상 등 잡념을 물리치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이다.
간화선을 만든 대혜 선사는 화두의 기능에 대하여 ‘대혜서장’ 답(答)부추밀 장(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납자가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선사가 무(無)라고 답했는데, 이 한 글자(즉 無)야말로 허다한(수많은) 잘못된 지견, 지해(惡知, 즉 분별심, 알음알이), 망념(惡覺)을 꺾어버리는 기물(器物)이고 무기이다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此一字者 乃是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
또 답(答)진소경 장에서도 역시 “조주 선사가 무(無)라고 했으니, 이 한 글자는 곧 번뇌 망상의 생사심과 잡념을 잘라 버리는 칼이다(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遮一字者, 便是箇破生死疑心底刀子也)”라고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대혜 선사는 근심 걱정과 괴로움, 욕망, 분노 등 모든 번뇌 망상과 이것저것 따지는 분별심과 차별심 등 잡념이 일어나면 그 즉시 ‘무(無)’ 한 글자를 떠올려 직시, 주시,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갖가지 분별심 등 잘못된 견해(惡知惡覺)와 번뇌망상(生死疑心) 등은 모두 쫓겨 달아나거나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머릿속에 항상 무자를 생각, 기억(記憶)하고, 오래도록 반복 되풀이하다보면 머리(생각)속에 ‘무’가 각인되어, 모든 번뇌 망상이 침범하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번뇌 망념이 제거된 청정한 마음, 즉 불성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본래 청정한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었음을 확연히 인식하여 다시는 번뇌에 물들지 않음을 뜻한다. 다만 주의할 점은 ‘무’, ‘간시궐’, ‘마삼근’ 등 화두를 상념만 할 뿐, 절대 ‘왜 무라고 했을까’하고 분석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화두를 예의주시, 주의 주시할 뿐 논리적, 학문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거나 분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무자화두’를 들고 있지만 기타 다른 화두의 참구법도 같다.
4. 묵조선(默照禪)
묵묵히 앉아 본래 청정한 마음 관조
남송 때 굉지정각 선사가 제창한 선
묵조선과 간화선은 그 수행법에 있어서 정반대라고 할 정도로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을 든다면 간화선은 화두참구를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고, 묵조선은 화두를 들지 않고 오로지 묵묵히 앉아서(默坐) 본래 청정한 마음(本來淸淨心, 불성), 즉 자성(自性)과 본성을 관조(觀照)하는 수행법이다.
묵조선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것 즉 좌선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선수행법이다. 고요하게 앉아 좌선하고 있는 그 행위, 좌선 그 자체가 곧 깨달은 부처의 모습이고 부처의 행위이므로(修證不二), 별도로 깨닫기 위하여 화두를 들(참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별도로 깨달음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좌선 그 자체가 그대로 선의 경지를 현현(顯現)하고 있다는 것이다.
묵조선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이 바로 지관타좌(只管打坐)이다. ‘오로지(只管) 일체를 끊고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이다(打坐)’라는 말로, 오직 간화선이 최고라고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이것이 간화선과는 다른 현격한 차이점이다. 이 때문에 대혜 종고로부터 ‘묵조는 삿된 선(默照邪禪)’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인 ‘간화선과 묵조선의 격전’에서 다루고자 한다.
묵조선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남송 때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선사가 제창한 선이다. 그는 중국 5가7종 가운데 하나인 조동선 즉 조동종(曹洞宗) 단하 자순(丹霞子淳, 1064∼1117)의 제자이다. 따라서 묵조선은 곧 조동종의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大慧, 1089∼1163)선사와는 서로가 방향은 달랐지만 친교는 깊은 편이었다. 두 고승은 모두 송대, 특히 남송을 대표했던 선승이었고 두 살 차이로, 같은 시대 같은 지역(항주, 영파)에서 선법을 펼쳤다.
굉지 정각이 묵조선을 제창한 것은 순수선(純粹禪)인 조사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즉 북송 후기 조사선은 공안선과 문자선, 구두선 등 말기적 현상이 나타났다. 너도나도 고칙공안이나 달달 외우고 모범답안을 만들어 선문답을 하고(공안선), 언어문자로 선을 표현하고(문자선), 그리고 입으로는 앵무새처럼 ‘본래부처’라고 하면서 전혀 실천은 따르지 않는 이른바 구두선 등 잘못된 선이 유행했다.
이러한 병폐를 극복하고 순수선(純粹禪)인 안심(安心)의 달마선과 무심무사의 조사선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 묵조선이다. 시대적 태생적인 바탕은 대혜 종고의 간화선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으나 지향하는 수행법은 이와 같이 현격하게 달랐다.
굉지 정각은 묵조선의 핵심을 요약한 묵조명(默照銘) 첫 구절에서 ‘일체의 언구(言句, 즉 사량분별)를 끊고 묵묵히 좌선하는 가운데 소소영영한 마음 즉 본래 청정한 마음(本來淸淨心)인 불성이 발현된다(默默忘言 昭昭現前)’고 정의했다. 또한 ‘묵조의 수행법은 마음을 무심(無心), 무사(無事)하게 하는 것이다’, ‘담담하고 묵묵히 좌선에 전념하는 그 모습이 바로 선이다’라고 하였으며, ‘묵조선만이 지혜 작용을 활발하게 하여 마음의 근본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이는 바로 부처와 조사들이 전해 온 참된 선법’”이라고 강조했다.
즉, 오로지 앉아서(좌선) 말과 언어를 떠나 침묵한 채 자성을 반조(返照)하면 저절로 청정한 마음 곧 소소영영한 불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고(昭昭現前) 그것(좌선)이 바로 깨달은 부처의 모습인 동시에 부처의 행위이며, 깨달음의 경지라는 것이다.
5.간화선과 묵조선의 격전(激戰)
간화, “묵조는 아무런 지혜작용 없는 고목”
묵조, “간화는 깨달음만 기다리는 대오선”
간화선에서는 깨닫기 위하여 ‘무’, ‘간시궐’ 등 화두를 참구한다. 그러나 묵조선에서는 화두를 참구하지 않는다. 지관타좌(只管打坐)라 하여 언어를 끊은 채 오로지(只管) 묵묵히 앉아서(打坐) 본래 청정한 그 마음(本來淸淨心) 즉 불성, 자성, 본성을 반조(返照)한다.
간화선에서는 좌선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그 목적이다. 별도로 깨달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고, 부처가 되기 위하여 좌선을 한다(見性成佛).
그러나 묵조선에서는 본래불로서 별도로 깨달음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깨닫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고요하게 앉아서 좌선하고 있는 그 자체가 곧 깨달은 부처의 행(行)이라는 관점이다.
간화선은 지혜를 가장 중요시했고 선정(좌선)은 그 다음이라는 입장이었고(先慧後定), 묵조선은 좌선을 가장 중시했고 지혜는 그 다음이라는 입장이었다(先定後慧).
이와 같이 간화선과 묵조선은 그 가치관과 목적, 수행방법 등이 현격하게 달랐기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서로를 비난, 비판했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간화선의 대표자 대혜(大慧, 1089∼1163)선사였다. 그는 화두를 들지 않고 그냥 묵묵히 앉아만 있는 것은 무명(無明)만 조장할 뿐이라고 하여 ‘흑산하 귀굴리(黑山下 鬼窟裏)’라고 비난했다.
또 ‘묵조는 삿된 선, 짝퉁선이다. 가짜선이다(默照邪禪)’, ‘묵조는 안일무사에 빠져 있는 선이다(無事禪, 無事甲裏)’, 또는 ‘고목처럼, 불 꺼진 죽은 재처럼 아무런 지혜 작용이 없는 고목사회선(枯木死灰禪)이다’, ‘어리석은 선(痴禪)이다’, ‘눈알이 없는 선(盲禪)이다’ 등 아주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묵조선의 대표자 굉지 정각(1091∼1157)은 ‘간화선은 부질없이 깨달음을 기다리고 있는 대오선(待悟禪)이다’, ‘공안(화두)과 깨달음에 얽매여 있다’, ‘사다리처럼 하나의 공안(화두)을 통과하면 또 다른 공안을 통과해 올라가는 제자선(梯子禪, 사다리선)이다’, ‘하나하나 배우고 익혀가는 학습선(學習禪)이다’라고 비판했다.
대혜 선사가 더 적극적, 원색적으로 비판했는데, 물론 그 공격의 대상은 오로지 좌선과 무심무사를 내세우고 있는 묵조선(조동종) 전체였지만, 주 공격대상은 굉지 정각보다는 굉지의 사형인 진헐 청료(眞歇淸了, 1089∼1151)였다.
사실 무심무사를 강하게 주장한 선승은 조사선의 임제 선사이다. 그리고 임제종 황룡파의 동림 상총(東林常總, 1025∼1091)도 무심무사를 주장하여 묵조선과 같은 입장이었다. 대혜는 동림 상총을 향하여 ‘조각(照覺, 동림상총)은 평상무사와 지견해회(知見解會, 알음알이)를 두지 않는 것으로써 도를 삼고 있으며, 더욱더 문제는 묘오(妙悟, 깨달음)가 있는데도 구하지 않았다(蓋照覺, 以平常無事, 不立知見解會, 爲道. 更不求妙悟. ‘宗門武庫’)’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에는 간화선만 있고 묵조선은 없으므로 대부분 묵조선을 부정하는 경향인데,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 종고는 항주 경산사, 영파 아육왕사 주지(방장)였고, 묵조선의 제창자 굉지 정각은 영파 천동사 주지(방장)로서 같은 지역에서 법을 펼쳤다. 나이는 2살 차이. 비록 수행법은 크게 달랐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를 인정했다.
대혜가 15년(53세∼68세)만에 귀양에서 돌아와 경산사 방장이 되자 굉지 정각은 흔쾌히 대혜의 청을 받아들여 진산식에서 백퇴사(白鎚師, 진산식 사회)가 되어 사회를 맡았다. 그리고 굉지 정각이 6년 앞서 입적하자 이번에는 대혜가 매우 애석해하며 다비 일체를 주관했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간화선과 묵조선이라는 명칭은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면서 붙인 이름인데, 양자 모두 인정했다.
6. 격외선(格外禪)
어떠한 규격이나 정해진 틀 밖에 있는 선
사량분별 용납않는 조사선을 뜻할 때 많아
격외구(格外句), 격외소식(格外消息), 격외선(格外禪) 등 격외는 선승들의 법문 속에서 많이 듣는 말이다. 격외와 격내(格內)는 현격하지만 그 간극 역시 얼마 되지는 않는다.
격외선이란 어떤 규격(規格)이나 격식(格式), 또는 정해진 틀(格) 밖(外)에 있는 선이라는 뜻이다.
세간적 척도를 초월한 선, 혹은 세속적인 척도로부터 초월해 있는 경지를 가리킨다. 즉 말이나 문자로는 표현하고 설명할 수도 없지만, 언어가 닿지 못하는 선의 경지, 상식이나 논리로는 접근 불가능한 경지를 격외선이라고 한다.
격외선이라고 할 때는 주로 털끝만치도 사량분별을 용납하지 않는 조사선이나 임제선을 뜻하는 경우가 많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고, 언어문자나 지식, 지해(知解, 지식적인 잔꾀)의 손끝이 닿지 못하는, 말하자면 사량분별의 저편에 있는 선을 말한다. 선의 경지 가운데서도 최고봉을 가리키는데, 격외선은 중국의 5가7종처럼 문파나 문하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고준한 방외(方外)의 선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의 선승 청허 휴정선사는 ‘선가구감’ 제불설궁 조사설현(諸佛說弓 祖師說絃) 대목의 주(注)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뭡니까?’ 여기에 대하여 조주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고 대답했는데, 이런 것을 이른바 격외선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僧問趙州. 如何是祖師西來意. 州答云. 庭前柏樹子, 此所謂, 格外禪旨也).”
즉 청허 선사는 사량분별심이 접근할 수 없는, 이를테면 정전백수자 같은 ‘틀 밖(格外)의 대답’이 격외선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매우 정확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또 ‘청허집’에서 그는 좀 더 사족(蛇足)을 단다.
“향상일로는 삼천석불도 언설이 미치지 못한다. 이것을 격외선이라고 한다. 만약 마음이 허공과 같은 자는 조금 합일한다(向上路, 三千石佛, 說不及者, 格外禪. 若心如虛空者, 於道, 有少分相應)”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마음이 허공과 같아야 한다’는 것은 유심으로도 무심으로도 뚫을 수 없다는 뜻이다(有心無心 俱透不得).
그렇다면 무슨 마음이라야만 가능할까? 심공급제(心空及第), 즉 마음이 공(空)에 급제(합격)한 마음만이 가능할 것이다.
격외선이란 이치적인 접근이 가능한 의리선(義理禪)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통상적인 논리와 지식, 견해 등을 초월한 선의 경지를 말한다. 일반적인 사고나 이치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지, 그것이 격외선이다.
같은 말로는 격외구(格外句, 정해진 틀 밖의 말, 즉 개안(開眼)하게 하는 말), 격외담(格外談, 같음), 격외현지(格外玄旨, 사려 분별을 초월하는 묘지(妙旨)), 격외현기(格外玄機, 사려분별을 뛰어넘은 기용(機用)) 등이 있다.
격외란 겁외(劫外, 영겁 밖), 겁외소식(劫外消息, 영겁 밖의 소식, 경지, 세계)과도 같은 말이다. 보편적인 사고(思考)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지인데, 그런 경지를 ‘영겁 밖의 봄소식’이라는 뜻에서 ‘겁외춘(劫外春)’이라 하고, 그런 경지를 읊은 선시(禪詩)를 ‘겁외가(歌)’라고 한다.
꽃피는 봄인데 해마다 맞이하는 상례적인 봄이 아니다. 그 봄은 우주 영겁 밖의 봄이다. 불가사의한 봄이다.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불 속에서 연꽃이 피는 소식), 고목생화(枯木生花, 마른 고목에서 꽃이 피다), 몰현금(沒弦琴, 줄이 없는 거문고) 등도 같은 의미이다.
모두 다 보통 사람의 사유를 뛰어넘는 언어도단의 경지, 격외선의 경지를 뜻하는 말이다.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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