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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禪詩)에의 접근?

경호... 2015. 7. 7. 05:42

선시(禪詩)에의 접근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선(禪)은 인간과 우주의 근본 실체를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러한 근본 실체를 깨닫게 되면 인간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게 되고, 모든 우주의 원리를 체득하게 되어 자유자재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것이 신
통(神通)의 경지를 얻게 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선을 깨닫는 길은 우주에 있는 것도 아니요 하늘 저 편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내 마음의 실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실체를 파악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 방법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선 수행의 방법이다. 선이란 서구의 사상체계처럼 논리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리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이
기 때문에 그 자체가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묶여 삶의 깊은 심연을 뛰어 넘지 못한다.

 

선은 또한 예술적 직관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선은 인간의 정서나 감수성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세계도 아닌 것이다. 선 수행의 체험에서 오는‘깨침’없이는 뭐라고 그것을 말할 수 없다. 물을 마셔 본 일이 한 번도 없는 사람에게 물맛 그 자체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비유를 사용해서 말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 그것이지, 물맛‘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실제로 물을 먹어 본 사람들만이‘아! 물맛’그것이라고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다. 때문에 선은 첫째도 체험, 둘째도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지닌 어떤 총명함과 지혜로움으로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려시대 백운화상(白雲和尙)은 말하기를“요즘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총명함과 지혜의 지배를 받아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은 것으로 이야기 거리를 삼는 것은, 마치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 스스로 얽고 스스로 결박하는 것과 같으니, 흔히들 지식으로 선을 헤아리려고 하면 이것을 흙덩이를 좇는 개가 되어 마음의 근원을 밝히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원각경(圓覺經)》에도“지식으로 여래의 원만한 각성의 경지를 헤아리는 것은 반딧불로 수미산(須彌山, 불교의 세계설에서 세계 한 가운데 높이 솟아 있다는 산으로 꼭대기에는 제석천이, 중턱에는 사천왕이 산다함)을 밝히려는 것과 같아 끝내 헛수고만 할뿐이다”라고 씌어 있다.

총명은 업을 당하지 못하고, 지식도 생사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옛 선사들은 말하기를“한 털끝만한 정념이나 지식 분별일지라도 버리지 못하면, 인간과 천상의 인과의 결박을 못 면하고 모두 생사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을 분별된 지식으로 섣불리 이렇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처음부터 틀린 것인지 모른다. 조선시대 벽계정심(碧械淨心) 선사도 선지(禪旨), 즉 도(道)를 일러 달라는 지엄(知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가 그것을 말해준다면 자네는 물론 나도 죽고 역대 조사도 죽고 삼세의 모든 부처도 일시에 죽이는 일이니까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선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생각, 그 생각을 일으켰다는 자체부터가 전과는 십만여 리나 이미 어긋나 있는 일이다.《무문관자서(無門關自序)》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부처님은 마음으로 종을 삼고 문이 없는 무문으로 법문을 삼는다. 이미 문이 없거늘 어떻게 무엇을 통해 들어갈 것인가. 문이 없는 문을 통해 들어간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이미 평범한 인연을 좇아 문으로 들어간 삶은 처음과 끝이 모두 허망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금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부터(도의 입장에서 보면) 벌써 바람 없는 바다에 물결을 일으킨 것이고 멀쩡한 살갗에 상처를 낸 것과 같으니, 말로써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자체부터가 마치 방망이를 휘둘러 달을 치려는 것과 같고, 가죽 장화를 신고 가려운 발바닥을 긁는 것과 같으니 무슨 성과가 있겠는가."

 

 

큰 도(道)는 문이 없는 것이요, 문이 없는 것이 곧 큰 도인 것이다. 이 깊은 도리는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벌써 어긋난 것이다. 그러니까 경전을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으로는 도에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러면《벽암록(碧巖錄)》이나《전등록(傳燈錄)》등에 보이는 역대 선사들의 어록에서 우리가 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무엇일까?

 

그들의 어록에서 찾을 수 있는 문답 중에 숨막히는 돌연성, 침묵 가운데 솟아오르는 우레소리, 번뜩이는 언어의 섬광, 예기치 못한 돌발적인 행위와 기행(奇行), 상대를 일깨우는 유머, 격렬한 심장의 고동소리, 캄캄한 절벽으로 몰아세우는 듯한 질문의 갑작스러움, 이런 것들은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여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상적인 언어 방식을 떠난 이런 표현과 몸짓을 사용하고 있는가?

 

‘자비’란 이름으로,‘깨달음’이란 이름으로 제자의 뺨을 치고 몸둥이질을 서슴지 않는 이들의 의도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가. 또한 그들의 막힘 없는 행위, 거추장스런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자재스런 천진하기조차 한 그 행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자유스럽게 하는가. 죽음조차도 마음대로 하는 (실은 그들에게 있어선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지만), 그래서 이 육체를 하나의 헌옷 벗어버리는 듯이 앉거나 서 있는 채로, 혹은 물구나무서거나 밭일을 하는 자세로 그냥 놓아두고 훌훌 떠날 수 있는 그들의 정신세계는 어떠한 것일까?

 

 

어느 스님이 趙州에게 물었다.
“達摩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일까요?”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
그러자 이 젊은 스님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다.
“스님! 스님께서는 그 뜻을 어떤 비유나 경계로 말씀하시지 마시고 그
뜻을 사실 그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 다시 묻겠습니다. 달마가 중국
으로 왔어야 했던 그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즉 달마가 전하려는 불법(佛法)의 절실한 뜻을 물었을 때, 조주 스님은“뜰 앞의 잣나무”라 했다. 전연 논리가 닿지 않는 이 두 문장에서, 한동안 우리는 초현실주의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시적인 스피드나 경이로움 같은 것을 감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문학적인 정서나 감수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앞뒤가 전연 맞지 않는, 당돌한 느낌을 주는 문장의 연결을 우리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발굴의 한 방법인 의식의 자맥질,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또 T. S. 엘리엇의〈푸르프록의 연가(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에서의“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 노을이 하늘에 퍼지거든”과 같은 구절에서처럼, 독특한 어떤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한 이미지 연결에 있어 기상천외한 방법을 쓰는 것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뜰앞의 잣나무’의 선문답을 파악하는 데 있어 문학적인 감수성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선문답이 그 어느 선문답보다 예술인들의 자신의 적성에 맞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쌓아온 정서의 훈련이나 문학적인 감수성이 이 선문답을 깨치는 데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두를 타파하는 데 있어 문학적 감수성이나 정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군더더기와 같은 그런 것이라고 선을 가르치고 있다.

 

시의 존재가치를 굳이 말한다면 마치 눈송이가 끓는 용광로에 접근하기도 전에 녹아 없어져 버리는 것과 같은 그런 아름다움 정도의 차원인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신비주의자인 엑하르트(M. Eckhart)가 말하는 그런 영작인 신비와도 다른 것이다. 그 표현 양식이 비슷하다고해서 많은 비평가들이 초현실주의와 선을 유사한 것이라고 논하고 있으나, 그 논리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서구의 의식은 그 어떤 의식이든 인식되는 대상을 향하고 있다. 싸르트르도〈상상력(L’Imagnation)〉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는 어떠한 환상을 설정하더라도 그것의 소재는 이 지상에 있는 여러 형태를 머릿속에서 변형시켜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환상의 뿌리는 현실의 실체, 즉 어떤 대상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인들의 의식이란 무엇이든지 대상을 근거로 하고 있는‘무엇인가의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의식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선에 있어서는 꼭 무엇인가 대상을 의식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대상을 의식하고 있는 의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상을 떠난 순수한 의식, 즉 의식(마음)의 그 자체를 찾으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 그림자 뜰을 비질하고 있다.
먼지 하나 일지 않는다.

달빛이 물 밑에 닿고 있다.
수면엔 흔적하나 남지 않는다.

가다가 문득 돌아보니
태산의 뼈가 구름 위에 떠 있다.

이것이 오직 하나뿐인 사실
둘이 되면 참이 아니다.

 

 

다같이 역대 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을 옮겨 놓은 것이지만 그 느낌은 다른 데가 많다. 야부(冶父)의 것은 고요한 세계의 어떤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동양적 이미지스트만의 독특한 한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감정이 차분하고 필법이 섬세하다. 그에 비해 함허(涵虛)의 것은 터치가 굵고 남성적이다. 그 기상이나 스케일이 웅장한 맛이 있다. 잔잔하고 아기자기한 맛이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위의 작품에 대한 이 느낌도 문학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한 감수성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선사들의 삶과 죽음 문제를 깨치고 난 다음 어떤 초월의 경지에 서서 노래한 이 시를, 필자는 그런 정신의 경지 없이 다
만 문학적인 감수성만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가장 중요한 정신적인 수준의 갖춤 없이 예술작인 눈만으로 이 깨달음을 해석하고 있다는 모순이다. 그러니까 이 깨달음으로서의 접근 방법은 처음부터 틀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야부의 것은 어떤 정경을 노래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런 정경의 마감, 그것만을 수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경지는 길주(吉州) 청원선사(靑原禪師)가

 

 

"老僧三十年전 參禪하기 이전에는 山은 靑山이요 물은 綠水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 뒤 어진 스님을 만나 깨침에 들어서고 보니, 山은 山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더니,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이제는 山이 依然코 그 山이요 물도 의연코 그 물이더라.

그대들이여 이 세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서로 다른 것이냐?

만일 이것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老僧과 같은 경지에 있음을 내 許容하리라."

 

 

라고 했을 때 완전히 깨치고 난 다음의“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라는 그런 실체의 정경을 나타내고 있는 정신의 경지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깨치기 이전의 일상인들의 시선“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그런 실체의 경지로 바라보면서 어떤 미감으로 해석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게 된다.

그러니까 선시의 세계는 깨치지 않고는 그 실체를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산 선사(博山禪師)도《참선경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사들의 말 한마디 글 한 구절은 마치 큰 불더미와 같아 가까이 갈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인데 어찌 그 가운데 앉고 누울 수 있으랴, 더욱 그 가운데 주저앉아 크고 작은 것을 가리고 좋고 나쁜 것을 가린다면 목숨을 잃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선사들의 말 한마디는 일상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큰 불더미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선사들의 말을 어떤 문학적 해설이나 신기한 말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의 세계를 두고 크고 작은 것을 가리고 좋고 나쁜 것을 언어로써 가린다면 목숨을 잃는 행위와 같다는 것이다.

이 점은 초현실주의 작품과 효봉 선사의 계송을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초현실주의 작품은 무의식의 세계를 노출시킨 것이라면 선사들의 것은 깨침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다.

 

 

빼앗긴 태양 나의 머리 속은 囚人은
언덕을 올리고 숲을 들어 올린다.
(중략)
태어나서 첫날의 구름
그 구름들은 노여워하지 않는다.
아무 것에도 지배되지 않는다.
그 구름의 알맹이는 불탄다.
나의 시선의 짚불 속에서
(하략)

 

-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호안 미로(Joan Miro)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 집에 고기가 차 끓인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 효봉 선사(曉峰禪師)

 

 

이와 같이“나의 머리 속의 수인(囚人)이 언덕을 들어 올리고 숲을 들어 올린다.”라는 이미지에서“머리 속의 수인(囚人)”과“언덕을 들어 올린다”라는 이미지는 전연 다른 별개의 이미지로서 이것들이 한 자리에 함께 함으로써 새로운 경이감의 오브제 효과로 나타내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바다 밑”과“제비집”이라는 이미지도 전연 별개의 것이며“타는 불 속”과“거미집”역시 서로 같이 할 수 없는 사실들이어서 이런 것들을 결부시킴으로써 정서적으로 보면 확실히 경이적 미감같은 것을 풍기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 구성에 있어 막스 에른스트 경우나 효봉 선사의 경우와 같이 다같이 경이적인 미감은 느낄 수 있다 하더라도 효봉 선사의 경우, 깨달음의 경지 즉도 그 자체를 나타내는 정신의 한 노래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냥 그 정도의 미의식(美意識) 정도로 흘려 버리겠지만 깨달은 사람의 경우 그들만이 이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세계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 선사들의 문답이나 작품은 깨달음 그 자체의 목적이 있는 것이니 초현실주의 시처럼 전연 다른 이미지의 결합에서 오는 미감(美感)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이 결과로서
엉뚱하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지 본래 정신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선의 용어로서 종문이류(宗門異類)라는 것이 있다. 앞의 선사들의 작품이나 또 다음과 같은 게송 등이 그것이다.

 

 

겨자씨 안에 須彌山이 들어가고
한 터럭 끝에 온 세계가 들어 있다.

두꺼비는 梵天에 뛰어 오르고
지네는 물고기와 게를 삼킨다.
낙타 꼬리는 冬瓜를 낚고
나무다리가 채소를 심는다.

 

- 혜심 선사(慧諶禪師)

 

 

이것은 산사들의 명석한 의식에서 나온 도(道)를 가리키는 어휘들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언어로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깨치지 못한 사람들의 이해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세계다.

그러니까 선에서“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동산(東山)이 물 위로 간다.”등의 언어 표현들은 이 말 자체가 도(道), 그것이어서, 아니 이 말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그 의심을 깨쳐서 나오는 것이 도(刀途) 바로 그것이어서, 앞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몽환상태의 기록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대혜종고(大慧宗?) 선사는〈서상(書狀)〉에서 위의 구절들을 “삶과 죽음에 관한 모든 의심을 부숴 버리는 칼”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모든 나쁜 지식과 나쁜 깨달음을 꺾는 무기”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논리가 없고 돌발적이며 우연적인 것을 대답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들의 언어 뒤에는 무서운 도(道)의 판단 기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보조국사(普照國師)는〈절요(節要)〉에서 이 선사들의 비논리적 대화 속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 교섭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답한 것이 잘못되고 정확하게 맞춘 것이 아니라면 다만 그 잘못된 곳을 지적해서 다시 자기 마음을 관찰하게 하지만 끝끝내 그를 위해 내가 그 답을 먼저 말해 주지 않는다. 어느 때고 그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아 체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본체를 그가 證得한 뒤에야 인가하고 남은 의심을 모두 끊었다고 생각될 때 잠자코 마음의 印을 전해 주는 것이다. 이른바 침묵했다는 것은 오직 안다는 것을 침묵했다는 것이고 덮어 놓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니 六代까지 서로 道를 전한 식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 문단에서는 선시에 대한 관심을 지니면서 선시적 맛을 노리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선시가 지닌 외형적 미감과 정신적 멋에 가까이 해 보려는 결과이지 선사들처럼 깨치고
난 다음의 경지를 노래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선의 완전한 체득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겉으로 드러난 선시적 분위기나 시적 묘미 그것을 모방하고 있다. 최근 황동규와 이승훈, 조정권 등 일련의 시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몇 편의 작품들이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선적인 맛을 먼저 보여 주고 있는 시인으로는 70년대 초 승려시인으로서 김정휴, 석지현이 있었다.

 

 

오늘밤 내 몸을 깊은 골짜기로 비우면
들 저쪽 쓰러진 古家의 棺이 되어
쪼개진 그림자들이 부서진 어금니를 간다

 

? 김정휴,〈내 몸을 비우면〉

 

쪼개진 그림자의 이미지와 어금니를 간다라는 말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맥락은 갖고 있지 않다. 그 점에서 앞의 선사들의 시들과 많이 닮아 있다. 그러면서도 이 두 이미지 연결 사이에는 어떤 분위기가 스며있다. 허
무랄까 언의 탄식이랄까 아무튼 그런 감각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바로 이 점이 어떤 분위기의 감각도 거스르지 않는 선시의 비논리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어둠 속에서 백골이 피리를 불고 있다.
가다가는 저곡조 비에 젖어 낮아지는 곳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나를 깨우고 있다.

 

? 석지현,〈어둠 속에서〉

 

 

거울 속 비인 뜰에 흰꽃 조각 날고 있다.
소를 모는 피리 소리 꽃잎 사이를 가고 있다.
소도 사람도 안보이고 바람 소리만 들리고 있다.

 

? 석지현,〈거울 속 비인 뜰에〉

 

 

“백골이 피리를 불고 있다”는 것이나“거울 속 비인 뜰에 흰꽃 조각”이라는 이미지는 앞의 효봉선시의 시“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라는 이미지와 많이 닮아 있다.

비논리적이고 당돌한 이미지의 연결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외형적으로는 선시의 맛을 충분히 주고 있다. 그리고 시로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김정휴, 석지현의 경우 완전히 깨치고 난 정신의 경지에서 쓴 것이라고는 아직 깨치지 못한 필자로서는 단정할 수 없다. 필자로서는 역대 선사들의 어록이나 선시를 지금의 것과 서로 비교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선사들의 시를 ‘선시’ 라 말한다면 이런 류의 시들은 선시를 모방한‘선적인 시’라 이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현대시는 지금‘선적인 시’가 많이 범람하고 있다.

최근 황동규는 선문답의 형식을 빌려 시로 구성해 보이고 있다.

 

불타가 말했다.
“저 소리를 듣다 보면
세상 온갖 풀과 인연이 마르고
다리 위를 건너기보다는

물 위를 건너고 싶어진다.”
원효가 물었다.
“물이라도 건넌다면 그 또한 다리가 아니겠습니까?”
“면벽(面壁)과 면산천(面山川)의 차이지.”

 

?〈불타와 원효〉

 

 

“마음의 죽음 앞에 서면
놋쇠와 꽹과리 소리내는 마음 앞에 서면
면벽이나 면산천이나 다 상처일세.”
어슬어슬 저무는 빈 들녘을 보며 예수가 말했다.
“상처라면 고쳐야지요.”
원효가 말했다.
“고칠 상처를 내놓아보게.”
“시험에 들지 않겠습니다.”
벼 그루터기들이 마지막으로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흐르다 멈춘 물이 먹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게 바로 마음의 죽음이지.”

 

?〈마음의 죽음〉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조주 선사에게 누가“달마가 중국으로 온 뜻”을 물었을 때“뜰 앞의 잣나무”라 대답한 일이 있다. 이 질문과 대답 사이에는 논리적인 연관이 끊어지고 깊은 단절이 있다. 오히려 이 답변 자체가
질문보다 우리를 더욱 깊은 미궁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이 점은“바다밑 제비집에”어떻게“사슴이 알을 품게 되느냐”는 의문도 마찬가지다.
전연 논리성이 없고 문학적 상징이나 비유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외형적으로 석지현의“백골이 피리를 부는”것도 같은 맥락에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황동규의 것은 이것과는 많이 비켜서 있다. 선문답의 형식을 빌려 시를 이루고 있지만 앞의 시들처럼 철저한 비논리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까닭이나 비교가 스며 있는 것이다. 그만치 논리적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적막한 새소리 들으면 온갖 풀과 인연이 마른다.”고 쓰고 있는데 이 글이 내포하고 있는 적막의 세계는 풀과 인연까지도 사라지게 한다는 유추가 들어 있다. 또“물 위를 건너고 싶어
진다.”라는 표현도 어떤 원통무애의 자유스런 경지를 은연중 나타내고 있다. 또는 물 위를 걷는 예수의 행적도 암시하고 있다. 물 위를 걷는다면 다리가 아니겠습니까(물이 다리의 역할을 하니까)라는 질문에“면벽과 면산천의 차이”라는 답변도 마찬가지다. 선의 세계에선 면벽과 면산천의 분별이 없다. 그냥 내면의 응시만있을 뿐 앞에 무엇이 놓여 있어도 상관할 바 없는 것이다.

 

그 다음 죽음 앞에선“면벽 면산천이나 다 상처”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 역시 선의 세계에선 상처날 마음자리도 없고 아파질 마음자리가 원래 없는 것이다. 마음자리가 없는데“고칠 상처를 내놓아 보게”라고 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니까“시험에 들지 않겠습니다.”라고 답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구차하게 드러내지 않겠다는 그런 뜻도 담겨 있다. 그러니까 황동규의 시는 앞의 선시와 비교해 보면 그만치 문학적 의미나 논리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동규의 경우 내용은 물론 형식까지도 선시의 단계에서 한단계 멀어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시를 쓰는 시인들 모두 나름대로의 독특한 톤으로 선적인 시를 쓰고 있지만 이런 사정은 이승훈 시인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 겨울 저녁 난 시를 쓰네 비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네 문득 비누가 다가와 나를
만지네 나는 비누 속에 사라지네 나도 물거품 비누도
물거품 벗어날 길이 없네 비누의 길이 삶의 길 비누와
함께 비누를 따라 비누 속에 살자! 비누는
매일 사라진다.

 

? 이숭훈,〈비누〉부분

 

위의 시는 나와 비누가 어떤 알레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비누거품이 허상이라는 비유로 연결되어 불교적 세계관을 그리고 있다. 그만치 논리가 스며져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사들의 시에서는 전연 문
학적 알레고리나 논리를 찾을 수 없다. 답변 자체가 오히려 더 캄캄한 미궁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 미궁을 깨닫고 알게 된 노래가 선시의 세계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황동규나 이승훈 시인이 해결해야 할 앞으로의 남은 과제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