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오십줄. 적막한 귀가 / 박 찬 [박 찬 시집 - 외로운 식량]

경호... 2015. 7. 9. 04:46

한국화가 이호신의 ‘함양삼림’

 

 

오십줄 / 박찬


이러다 합죽이가 되겠다.
지난 세월 너무 옹다물고 살다보니
어금니에서부터 하나씩 뽑아낸 것이
이제는 오물거린다.


왜 말 한마디 하지도 않고
왜 큰소리 한번 치지도 않고
왜 소리내 한번 울지도 않고
왜 벌컥 화 한번 내지도 않고
속으로 이만 앙다물고 살았을까.


별것도 아닌 세상,
별것도 아닌 일들인 것을,
죄 없는 이만 아프게 했구나.
그 핑계로 모두 뽑아버렸구나.
내 나이 오십줄에 벌써……

 

 

 

적막한 귀가 / 박찬

 

젊은 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돌아다닐 때 버스에서 만난 한 여자가 물었다.

 

“혼자 다니면 외롭지 않아요?”

“잘 모르겠는데요.”

 

혼자 다니면 왜 외로울 거라고 생각할까?……

혼자는 외로운 것일까?……

나는 늘 혼자였는데…….

그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 오늘 문득 한 생각 떠오른다.……

 

이제는 가도 되겠다.……

조용히 돌아가도 되겠다.……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가기 참 좋은 때인 것 같다……는…….

 

 

 

마음의 폐허 5 -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 박찬

 

비가 내린다 미친 바람이 불고 온통 캄캄해지더니

홍수처럼 비가 퍼붓는다 그러나 연간 강수량 10mm

이 광막한 모랫벌에 지금 내리는 비가 30mm면 어떻고

50mm면 또 어떠리 흔적이나 남을까보냐 날이 개면

이글거리는 태양빛에 이미 다시 타 들어갈 것을...

이 땅은 오랜 세월 아무것도 기른 적 없으니 꽃이여

필 곳에 가서 피어라 바람이 불면 너에게 날아가

흔적을 남길 것이니 꽃이여 피기 좋은 곳에 가 피어라

이 가슴은 말라 버린 지 너무 오래 되었으니...

 

 

 

 

[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오십줄’

 

10년 만이다. 국민가수 조용필 씨가 이달 말 새 앨범을 내놓는다. 통산 19번째 앨범 ‘헬로(Hello)’에서 그가 작곡한 노래는 하나다. ‘어느 날 귀로에서’란 곡으로 사회학자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가사를 썼다 해서 화제다. 둘의 인연은 2006년 동아일보에 송 교수가 ‘내 마음속의 별-스타가 본 스타’로 조용필 편을 기고하면서 시작됐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의 추억을 아파하지 마라/

나는 왜 귀로를 맴돌고 있나 아직 꿈이 가득해 그 자리에.’

 

이런 노랫말과 최근 그가 펴낸 책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는 맥이 닿는다. 올해 나이 쉰일곱의 송 교수는 자신을 포함해 1955∼1963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의 삶을 찬찬히 복기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 시대에 태어나 2만 달러에 이르는 현기증 나는 거리를 숨 가쁘게 달려온 세대’는 ‘최빈국이던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리고 이제 현장에서 물러나는 중’이다.

 

세대에 대한 관심도 유행을 타는 것일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20대의 현실이 주목받더니 지난 대선에서 투표장에 총출동한 50대에 화들짝 놀랐던 사회의 시선은 그들이 걸어온 궤적에 쏠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호들갑에 앞서 박찬 시인은 ‘오십 줄’이 공유하는 경험과 기억을 호명했다.

인생의 책무에 짓눌려 부질없이 흘려보낸 시간들, 하릴없이 죄 없는 치아만 남아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서글픔과 다른 한편으로 공감과 위로를 전한다.

잔잔한 시어로 삶의 이치를 들려주던 시인은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가기 참 좋은 때인 것 같다…’(‘적막한 귀가’)며 오십 줄 끄트머리에 세상을 떴다.

 

‘50세, 빛나는 삶을 살다’란 책을 보면 지천명을 지나 도전과 열정을 불태운 인물이 수두룩하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나이가 55세,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완성한 것이 54세, 평범한 세일즈맨 레이 크록이 ‘맥도널드’의 1호점을 열었을 때가 53세였다.

 

국내 화단엔 장년의 패기를 자랑하는 화가가 늘고 있다. 서울 아라아트센터에서 지리산을 그림으로 순례하는 전시를 연 56세 화가 이호신 씨는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한다. 4개층 전시장에 2m 넘는 한국화가 즐비하다. 신령스러운 봉우리, 너른 들녘과 굽이치는 강, 정겨운 마을을 품은 화폭은 자연과 우직하게 대면하며 길어 올린 기운을 응축한 그의 분신이다.

 

이제 그 막둥이까지 오십 줄에 올라선 베이비부머 세대는 약 715만 명. 부모 봉양과 자식 부양을 의무로 여기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기 노후는 직접 챙겨야 하는 첫 세대란다.

쉰 살로 살아가기 참 힘든 세월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엄살 부리며 신세 한탄하기엔 이르다. 돌아보면 인생의 어느 시절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 동아

 

 

 

 

 

 

 

 

박 찬 시집 - 외로운 식량, 문학동네

 

2007년 1월 19일, 우리는 한 시인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지병인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故 박찬 시인은 가족과 지인들의 안타까움과 아쉬움, 눈물을 뒤로한 채, 그의 시처럼 담담히 이승을 떠났다.

시간은 가도 기억은, 사랑은, 그리고 시는 남는 법. 어느덧 시인이 세상을 뜬 지 일 년, 다시금 고인을 추억하며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시인의 마지막 목소리가 아로새겨진 여든여섯 편의 시를 선보인다. 『외로운 식량』은 시인 생전에 여러 문예지를 통해 발표했던 시들과 미발표작들을 모은 유고 시집이다.

 

표표히 길 떠나는 자의 뒷모습

 

시인은 걷는다. 개화산, 달마산을 지나 백담사에 들러 잠시 숨을 돌리기도 하고, 진도로 산집 나들이를 가기도 하고, 낮이며 밤이며 계속 걷다 아나우 언덕과 타클라마칸 사막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여정은 계속 된다. 그 길에 동행하는 이는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가, 풀벌레였다가, 하늘이었다가, 바다였다가, 바람이었다.

“한겨울 눈 속에 빨갛게 꽃잎 연”

(「애기동백」)

애기동백에게 따뜻한 눈길 한번 주고,

“그 맑고 투명한”(「얼음매미」) 얼음매미 소리에 귀 기울이고, “물결 출렁일 때마다 따라 출렁거리다가” “돛대에 갈매기 날아와 앉으면" “그 모습 물끄러미 바라보고”(「물끄러미」)

“날이 개면 이글거리는 태양빛에 다시 타들어갈 것 같은”(「마음의 폐허5―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사막에 이르면 바람과 내리는 비에 온몸을 맡긴다.

그 여정의 끝에 결국 깨닫게 되는 건

 

“봄꽃,/

저 홀로 피었다 지듯/

오직 나 혼자뿐!”

(「절름발이」)이라는 사실.

 

절대고독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끊임없이 걸어가야 할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 거기엔 삶도 죽음도 따로 없다.

생성과 소멸은 대자연의 섭리이고, 대자연이 보듬고 있는 모든 존재는 다만 그 섭리에 따를 뿐이라는 시인의 시선에서 삶을 달관한 이의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느껴진다.

 

 

백모란 지던 시절

그 시절 시들듯 시들어 갔네

꽃 같던 모습

뚝뚝 지는 꽃처럼

빗방울 후드득 떨어지고

하늘은 다시 맑았네

뒷산 불던 바람 자연하고

흰 구름 둥둥 여여하였네

 

그 시절 시들듯 그도 시들어 갔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꽃잎만 한 잎

뚝! 떨어졌을 뿐

 

―「그 시절」 전문

 

 

들판으로 소풍 가듯 죽음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여로

 

시인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지난 지금 읽는 유고 시편들의 행간에 언뜻언뜻 운명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그저 기분 탓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운명의 그림자는 결코 시인의 시에 그늘을 드리우지 못한다.

 

혼자는 외로운 것일까…… 나는 늘 혼자였는데…… 그래도 외롭다는 생각은 한 적도 없는데…… 그런데 오늘 문득 한 생각 떠오른다…… 이제는 가도 되겠다…… 조용히 돌아가도 되겠다 싶다……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가기 참 좋은 때인 것 같다……는……

……

오늘은 참 별이 유난히 많이 떠 있다

 

―「적막한 귀가」 중에서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간다

그 끝에서 홀로 붉게 타는 칸나여, 안녕!

다시는 못 볼 푸른 하늘이여, 너도 안녕!

 

―「소리를 찾아서―서래봉 가는 길」 전문

 

 

이 시집을 다 읽고 책장을 덮기 전, 맨 마지막에 실린 「소리를 찾아서―서래봉 가는 길」을 다시 한번 소리내어 읽어보면, 붉은 칸나에게도 푸른 하늘에게도 “안녕!”이라고 작별인사를 고하고 뒤돌아서서 휘적휘적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그는 그렇게 떠나갔지만 그의 시는 언제까지고 우리 마음속에 큰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시 세계는 자연적인 죽음의 경계선에 의해 단절되지 않는다. 그의 시적 추구의 본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통과하면서도 그 이분법적 틀 속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포월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영생하는 대자연의 이법과 ‘도(道)’의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_홍용희(문학평론가)

 

사랑, 그 한마디 말만 꽃처럼 골라 물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무엇일까. 가장 절실하게 말했으므로 가장 기쁘게, 눈물겹게 남을 말은 무엇일까. 삶이 그린 만화경, 그 모든 인연의 최후는 무슨 말이라야 할까. 그 말은 “개화산 미타사 미륵불 아래” “별빛”처럼 필 것이다.

 

시인 박찬, 그는 이 시집 도처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갈 때 “고요가 집 안에 가득 깔렸다”. 그리고 “미묘한 기류에 온몸이 간지럽다”. 그리하여 그는 그날 “홀로 붉게 타는 칸나”에게, “푸른 하늘”에게도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정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친구 박찬, 시인의 임종 순간을 그의 유가족들로부터 전해들은 적 있다. 아내와 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다만 “사랑해”라고 말했다. ‘사랑!’, 그 한마디 말만 꽃처럼 골라 물고 그는 “흰 구름 둥둥 여여하”듯 그렇게 고요히 떠나갔다. _문인수(시인)

 

당혹스럽다. 그는 지금 어디에나 있고 어느 곳에도 없다. 그가 저 건너로 넘어가기 전에 새겨놓은 숨결들은 고즈넉한 채로 낭랑하게 울렁거린다. 나는 문득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넘어갔으나 넘어가지 않은 시심들이 가쁘게 매혹적이다. 나는 그에게 멈칫멈칫 다가간다. 망설임이 아니라 설렘이다.

그늘진 자리에 스며든 감성이 빚어올리는 깊은 사유가 절절하다. 낮은 듯 높고 높은 듯 낮은 다감한 시들이 그와 나의 경계를 적신다. 아프지만 기쁘다.

 

_정우영(시인)

 

박찬(1948~2007)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월간 『시문학』에 「상리마을 내리는 안개는」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수도곶 이야기』 『그리운 잠』 『화염길』 『먼지 속 이슬』, 실크로드 문화 기행집 『우는 낙타의 푸른 눈썹을 보았는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