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입적 / 김인육

경호... 2015. 7. 9. 03:01

 

 

 

 

 

입적 / 김인육


돌아보지 마라

울지는 더욱 마라

단풍잎 같은,

여린 손 흔드는 이별의 행적은

나의 이력이 아니다

나는 떠난다

오탁의

모든 궁리가 끝났을 때,

사바의 모든 연들이

입동立冬의 홍시처럼 다하여 절로 붉어질 때,

구불텅한 생애

기막힌 생의 꽃자리를 털고

세상의 가장 낮은 법문을 열어

덩이덩이 금빛 해탈로 빛나며

적멸로

나는 간다.

 

 

―김인육 시집『잘가라, 여우』- (문학세계사, 2012)

 

 

*오탁 (五濁)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

① 중생탁(衆生濁)-중생이 악업을 많이 지어 인과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음.

② 견탁(見濁)-중생이 사견邪見으로 선도善道를 닦지 않음.

③ 번뇌탁(煩惱濁)-중생이 애욕愛慾이 많아 심신을 어지럽게 함.

④ 명탁(命濁)-중생의 악업이 증가하여 수명이 단축함.

⑤ 겁탁(劫濁)-때가 감겁減劫을 당하여 사람의 수명이 날로 줄어들고 질병 같은 것이 계속 일어남.

<법화경法華經>

*오탁악세(五濁惡世) : 5탁으로 가득찬 이 세상.

 

 

 

 

사랑의 물리학 /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개 같은 날에 대한 보고서 / 김인육

  

솜털 보송보송한 아홉 살 적,

하굣길에 흘레붙은 개들을 보았다

땡볕 대낮에 똥개 연놈이

서로의 튼실한 엉덩이를 맞대고 목하 열애 중이었다

서로의 몸과 몸을 관통한

붉고 뜨거운 기둥을 공유한 채

한통속이 되어 헐떡이며 불타고 있었다

그 거리낌 없는 사랑의 합체가

어린 내 심장을 사정없이 쿵쾅쿵쾅 쑤셔 박았다

민망함이었을까, 시샘과 질투였을까

나는 돌멩이를 집어 연놈에게 던졌다

따악, 놈의 마빡에 돌멩이가 정통으로 꽂혔다

한심하다는 듯

년놈은 잠깐 나를 쳐다보았을 뿐

붉고 뜨거운 기둥 더욱 단단히 서로를 꿴 채

암수한몸의 비경 끝내 풀지 않았다

 

오오, 놀라워라

붉고 황홀한 저 깊은 결속의 뿌리여!

오오, 위대하여라

내 것과 네 것이 하나 되는 저 뜨거운 합체여!


어느덧, 세상 눈치 살피는 중년의 세월

문득 ‘개 같은 영혼’이 그립다

개 같은,

이 세상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어울림에 대하여

너와 나 섞이어 더욱 견고해지는 하나 됨에 대하여

애꿎은 돌멩이에 철철 피 흘릴지라도

철부지 돌팔매쯤이야 애당초 두렵지 않는

그 열혈의 자세, 그립다


사랑은

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당당해야 한다는

그날의 가르침 한 수!

 


-격월간『유심』- (2010년 9-10월호)

 

 

 

 

중광아, 걸레야 / 김인육

 

걸레 스님

중광아, 네가 틀렸다

 

인생,

'괜히 왔다 간다'고,

결국 가야 할 길, 온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넌 생의 마지막 인사를 그렇게 했다만

미안하지만,

중광아, 네가 틀렸다

 

올 때는 수건이었다가

갈 때는 걸레인 인생에 대해

너는 못마땅했겠지만

그 걸레에 대해, 걸레가 된 생에 대해, 나는 경의를 표하나니

 

저기, 시장 한 구석 서릿발 그득 엉겨 붙은 저 할머니

늦가을

금세, 툭,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목숨을 매달고

푸성귀 몇 무더기로 소신공양하는 생(生)을 보아라

어미아비 다 버리고 간 어린것 지키기 위해

온종일,

시장 바닥에 껌처럼 붙어 있는

저 위대한 걸레를 보아라,

반가부처를 보아라,

 

 

  *시집 『잘 가라, 여우』에서/ 2012. 11.20 <문학세계사> 펴냄

  *김인육/ 울산 산하 출생, 2000년『시와생명』으로 등단

 

 

...

 

 

 

 

 

오탁(五濁)을 두루 섭렵하고 '개 같은 세상' 개 같이 살다가  걸레가 되어서

'괜히 왔다 간다' 는 말도 역시 허언(虛言)일 뿐이니.